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51. 다시 도지는 방랑벽을 어찌할꼬
김삿갓과 수안댁의 결혼식은 뒷산에 있는 산신당 앞에서 냉수를 한 그릇 떠놓고,
대동계장 제제의 집전으로 20여 명의 친구들의 축복속에 거행되었다.
불교에서는 부부 관계를 삼생연분(三生緣分)이라고 한다.
부부란 아무렇게나 맺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세(煎世), 금세(今世), 내세(來世)에 걸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어야만 맺어진다는 소리다.
김삿갓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안댁과 자기는 삼생의 인연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삼생의 인연이 있고 없고는 별개 문제로, 많은 친구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니
수안댁과 부부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김삿갓은 결혼식을 올리는 도중에 영월에 있는
본 마누라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매우 삭막한 기분이 들었다.
(마누라는 언제 돌아 올지도 모르는 나를 지금도 날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텐데,
나는 마누라를 버려두고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그러니 양심의 가책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수안댁이 기막히게 좋았던 것도 아니었고,
취중에 색정을 못이겨 어찌하다 한 번 건드렸을 뿐인데,
이것이
친구들에게 들통이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식을 올리게 된 것이 아닌가...
경과야 어찌 되었든, 여러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수안댁과
결혼식을 올렸으니
두 사람은 어엿한 부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결혼식을 올린 그날로 수안댁은 술장사를 그만두고 두 사람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수안댁은 까닭 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무척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부부가 된 것이 자네는
그렇게도 좋은가?"
"제가 좋아하는 삿갓 어른과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으니 기쁠 수 밖에요."
"허기는 20여 년을 독수공방으로
지내다가 알량하나마 서방이 생겼으니 기쁘기는 하겠지."
"알량하기는 왜 알량해요. 제게는 삿갓 어른처럼 훌륭한 분이
없는걸요."
"내가 훌륭한 사내로 보인다구? 하하하"
"이제부터는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내가 자네 집에 얹혀 지내게 되어
미안하기 그지 없네."
"그런 생각은 잊어 버리세요. 당신은 당당한 우리 집 주인이시고
저는 당신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마누라인걸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더욱 고맙구먼"
수안댁은 결혼한 그날부터 남편 공대가 너무나도 지극했다.
김삿갓
역시도 오랫동안 방랑 생활을 계속 해오다가 새 살림을 시작하고
밤마다 살을 섞어 오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수안댁에게 정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어느 날, 하는 일도 없이 공짜밥을 먹고 있기가 민망하던 김삿갓은,
"내가 언제까지나 놀고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니,
봄이 오거든 농사라도 지어 볼 참이라네."
하고 말했더니 수안댁이 펄쩍 뛴다.
"선비는 농사를 짓는 법이 아니에요. 농사는 나 혼자
지을테니,
당신은 책이나 읽고 바둑이나 두세요."
"선비는 농사를 짓는 법이 아니라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옛날 어른들이 모두 그러시잖아요. 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을 농사꾼으로 만들 수는 없어요."
수안댁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남편에게 농사는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말까지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보니까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선비였기 때문에
농사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마다 사랑방에서 글만 읽고 계시더라고요."
"선비라고 농사를
짓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누, 그런 고루한 생각 때문에,
우리네 백성들이 언제까지나 가난에 허덕이게 되는 거야."
"누가 뭐라든 간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당신이 농사짓는 것은 못 보아요.
그리고 생활 걱정은 마세요.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것도 많이
있으니까요."
수안댁의 고집은 이만저만 센 것이 아니었다.
마누라가 그처럼 고집을 부리니, 김삿갓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따라서 밤이면 모임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잡답을 즐기거나 술을 마셨고,
낮이면 남의 집 사랑방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김삿갓이 나름 요긴하게 쓰이는 일은, 마을에서 사람이 죽거나 제삿집이 있을 때면
제문(祭文)을 지어 주고
만장(輓章)이나 써주는 일 뿐이었다.
이러니 천하에 방랑벽이 있는 김삿갓으로서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차츰
시간이 갈수록 허망한 생각이 들던 김삿갓,
(명산대천을 행운 유수처럼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던 내가, 계집 하나 때문에 이처럼 얽매어 지내야
하는가?)
그러나 이제와서 한 번 맺어진 인연을 과감하게 박차고 뛰쳐 나간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의 생활 속에서 마음이 산란하던 김삿갓,
40평생 유리걸식을 해오다가 늦게 차린 살림으로 팔자는 매우 편해졌지만
아무래도 이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닌 것같았다.
(아니다! 나는 한평생을 거지처럼 떠돌아 다니며 살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난 몸이
아니던가.
나에게 정착된 생활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마침내 김삿갓은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갈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52. 집착
초저녁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밤이 깊어서도 계속되었다.
모임방 친구들과 나눈 술에 거나해진 김삿갓은 조조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흙탕길을 천방지축 걸어가다 일순간 발을 잘못 디뎌 두 길이 넘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앗! 이 사람아!"
조조는 무심중에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벼랑 아래로 떨어진 김삿갓은 "아이쿠!" 소리만 한 번 질렀을 뿐,
인기척이 없었다.
"이 사람아! 어디를 다쳤기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가?"
조조는 기겁하여 김삿갓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으나 워낙 캄캄한 밤이라서
어디를 어떻게 잡아 일으켜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사람아! 내가 업어 갈테니, 어서 등에
업히게!"
김삿갓을 업은채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집으로 데려갔다.
"수안댁! 수안댁! 어서 방문을 열어요!"
삿갓의 집에 도착한 조조는 황급한 어조로 수안댁을 불렀다.
놀란 수안댁이 벼락같이 뛰쳐 나왔는데 비에 쫄딱 젖은 두 사람의 모습도 기가 막혔지만,
남편인 김삿갓이 조조의 등에 업혀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머니..이게 무슨
날벼락이에요!"
수안댁은 울음 섞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무당의 예언대로 남편이 사고가 나,
다 죽게 된 몸으로 친구인 조조에게 업혀온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다치셨어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그러면서 황급히 방문을 열어
젖혔다.
조조의 등에서 방바닥으로 눕혀진 김삿갓의 몰골은 형편 없었다.
그러자 김삿갓의 험한 몰골을 씻길 물과, 비에 젖은
몸을 닦아줄 천을 찾아
황급히 밖으로 나가던 수안댁은 조조에게 부탁을 한다.
"수고스럽지만 약국에 가셔서 의원님을 빨리 좀 모셔와 주세요.
어서요!"
조조는 황급히 의원을 부르러 약국으로 향했고,
수안댁은 대야에 물을 받아와 김삿갓을 씻기고 있었다.
"어디를
다치셨어요?"
"응, 다리가 부러진 것 같네. 꼼짝할 수가 없구먼"
수안댁이 비에 젖은 남편의 저고리는 벗겼지만 바지는 발이
부러진 김삿갓이 아파하므로 벗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곧 가위를 가져와 김삿갓이 아파하는 다리쪽 바지단을 잘라 내고 보니,
발목 위에서
무릎 사이 정강이 뼈가 어그러져 보였다.
수안댁이 그 모습을 보고 공포감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편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도, 마치 자신의 팔자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조조가 의원 영감을 모시고 왔다. 의원이 진찰을 하는
동안에도
수안댁은 공포감을 억제할 수 없었던지 "의원 어른! 이 양반 설마 돌아가시지는 않겠지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부인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사람이 죽기가 그렇게도 쉬운 줄 아시오?
다리뼈가 좀 부러지기는 했지만 서너
달쯤 누워 있으면 회복될테니 아무 걱정 말아요!"
늙은 의원이 태평스럽게 위로해주는 바람에, 김삿갓과 조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모두가 가버리고 나자, 김삿갓은 상처가 새삼스럽게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누라가 걱정할 것이 안쓰러워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한잠 잘테니 당신도 아무 걱정 말고 눈을 붙여요..."
"제 걱정은 마시고 당신이나 어서
주무세요. 상처가 아파서 주무실 수 있겠어요?"
"걱정 말아요. 당신이 잠을 자야 나도 마음놓고 잘 수 있을게
아닌가."
"알았어요. 그럼 저도 잘테니 당신도 주무세요."
하며 김삿갓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자신도 불을 끄고 옆에
눕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김삿갓이 눈을 떠보니 날은 어느새 환히 밝아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수안댁이 보이지 않았다.
"응...? 이 사람이 어딜 갔을까?"
아무래도 예감이 심상치 않아 문틈으로 윗방을 옅보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수안댁이 바람벽에 산신 탱화를 걸어놓고 소반 위에 정안수와 촛불까지 켜놓고
두 손을 허공에 벌렸다가 합장하며 큰 절을 올리며,
입으로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괴상한 광경을 보는 순간 김삿갓은 가슴이
철렁해왔다.
물어 보나 마나 마누라는 지금 "남편을 죽지 않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축원을 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다리가 부러진 정도로 죽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겁을 내는 것은
"재혼을 하면 남편이
죽는다"고 말한 무당의 예언이 강박 관념이 되어,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성싶었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
보니,
"기사생(己巳生) 김삿갓은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사람이오니, 전지전능하신 천제(天帝)께서는
특별히 헤아리시와, 그 사람을 대신하여 죄 많은 이 사람을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 몸은 본디 청상살을 타고난 죄 많은 몸이옵니다."
김삿갓은 그와 같은 주문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왔다.
(혹시 마누라가 정신이 돌아버린 것은 아닌가?)
"남편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는 축원을 올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
김삿갓은 가슴이 메어져 오는 고뇌감을 느꼈다.
(저 여인과는 오다 가다 만난 부부이건만, 이렇게까지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더란 말인가?)
김삿갓은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무당이 함부로 지껄인 허튼수작이
수안댁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도 크게 파급된 것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수안댁은 오랫동안 축원을 올리다가 시치미를 떼고
아랫방으로 내려왔다.
"어떠세요? 간밤에는 상처가 아프셔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죠?"
김삿갓은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간간이 아프기는 했지만 잠을 자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당신은 새벽부터 어딜 다녀오는 길인가?"
"옆집에
잠시 다녀오는 길이에요. 아침을 곧 지어 올테니, 그동안 한잠 더 주무시도록 하세요."
수안댁은 제단을 모아 놓고 축원한 일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은밀한 일이 알려지면 효과가 없어지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김삿갓 역시 그 일에는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며,
"하룻밤 자고 나니까, 아프기가 훨씬 덜 하군.
이대로 가면 의원의 말대로 석달 안에 틀림없이 완쾌할거야"
일부러
수안댁이 듣기 좋아할 소리만 했다.
그러나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수안댁은 김삿갓이 매일 잠든 때마다
비밀리에 정안수를
떠놓고 축원을 올리는 일은 한 번도 빠트리지 않았다.
매일 남편이 잠든 오밤중부터 축원을 올리다가 새벽닭이 울면 부랴부랴 아랫방으로
내려오곤 하였다.
이러기를 두어 달 지나는 동안에 김삿갓의 부러진 다리는 거의 붙어
스스로 변소 출입을 비롯해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다.
53. 우째 이런 일이
그로부터 며칠 지난 비오는 어느날 밤, 김삿갓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변을 보려고 요강을 찾았다.
"여보게! 요강이 어디 있지?"
수안댁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마, 내 정신 좀 봐! 요강을 우물가에 그냥 내버려 두었네요. 지금 곧
가져올께요."
김삿갓은 비가 오는데 심부름을 시키기가 안되보여서,
"자네는 그냥 앉아 있게. 내가 나갔다
옴세."
"아니에요. 남자가 요강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남들이 뭐라 하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남자가 요강을 들고 다니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내가 갔다 올테니까 당신은 그냥 있어요."
김삿갓은 마누라를 억지로 못 나오게 막았다.
마누라의 수고와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심정에서 자기가 요강을 가져오려고 한 것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다, 칠흙같은 어둠으로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어둠 속에 더듬거리며 우물가에 도착한 김삿갓은 우물가를 한 바퀴 돈 후에야 요강을 찾았다.
그리고
어둠속에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돌 층계에서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고꾸라졌다.
"쨍그렁!"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요강이 허공에 떴다가 돌 위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에그머니! 이게 무슨 소리에요!"
방안에 있던 마누라가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달려 나왔다.
"저런! 아무것도 아니야. 돌에 미끄러져 잠시 넘어졌군. 걱정 말고 어서 방으로
들어가요."
김삿갓이 넘어져 비에 젖은 옷을 툴툴 털고 마누라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 보니,
김삿갓은 무릎이 까져서 피가
한 줄기 흘러 내리고 있었다.
수안댁은 피를 보자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어마! 저 피!"
"괜챦아요. 이 정도를
가지고."
"아니예요. 저는 지금 신의 천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것만은 무슨 재주로도 피할 수 없는 천벌이에요."
"이 사람아!
어두운 밤중에 한 번쯤 넘어진 것을 가지고 당신은 무슨 말을 그리 하는가!
하룻 밤 자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을테니 어서 잠이나
자요."
김삿갓은 마누라를 가까스로 달래 자리에 눕혔다.
그러나 마누라는 어둠 속에서도 공포감으로 떨고
있었다.
김삿갓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잠도 자지 못하고 마누라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자기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깐 동안 눈을 붙였다 다시 떠보니, 옆에 누워 있던 마누라가 없지 않은가.
"여보게! 어디 갔는가?"
김삿갓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를 또 한 번 질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까지 부슬부슬 오던 비가 지금은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게다가 천둥이 울고, 번갯불이 번쩍이며 뇌성벽력까지 귀청이 따갑도록 때려대고 있었다.
김삿갓은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천방지축 마누라를 찾아 헤맸다.
"여보게! 나를 두고 어딜 갔는가?"
섬뜩한 예감까지 압도했던 김삿갓의 소리는 차라리 피를
토할 것같은 절규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무리 애간장이 타도록 불러도 마누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물가에 가 보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개천으로 달려가 보았으나 개천가에도 없었다.
"여보게! 자네가 나를 두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김삿갓은 미친 사람처럼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산으로 들로 허겁지겁 찾아 헤매다가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저 멀리 산신당(山神堂)
나뭇가지에 무엇인가 허연 것이 공중에 대롤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엉? 혹시
저게 바로?"
김삿갓은 눈 앞이 아찔해오는 전율감을 느끼며 부리나케 달려와 보니,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은
틀림없는 마누라가 아닌가.
김삿갓은 부리나케 밧줄을 끊고 마누라를 집으로 업고 돌아오며 울부짖었다.
"이 못난 사람아! 이게
무슨 짓인가!"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방바닥에 눕혀놓고 인공 호흡도 해보고 손과 발을 주물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마누라의 사지백태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누라는 무당의 예언대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이 대신 죽어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못난 사람아! 죽기는 왜 죽어! 나를 살린다고 자네가 대신 죽는단 말인가!"
김삿갓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부등켜 안고 무당처럼 푸념을 하며 울부짖었다.
"자네가 청상살을 타고 났다면 내가 죽어야 할 일인데 어째서 자네가 죽는단 말인가!"
김삿갓은 애간장을 녹여내는 넋두리를 한없이 계속했다.
새벽부터 곡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도 너무도 처참한 현실이 놀라워 한동안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숨가쁜 침묵이 잠시 계속된 뒤에 대동계장
제제가 입을 열어 물었다.
"여보게, 그만 울고 진정하게.... 어쩌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김삿갓은 울음을 멈추고
그간의 자초지종을 대강 말해준 뒤에,
"마누라는 나를 대신해 죽었으니 세상에 이런 비통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하며
울부짖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건 아니지.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수안댁이 이런 식으로 죽은 것은 어쩌면 그녀의
팔자인지도 모를 걸세."
"팔자....? 나와 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죽을 일은 없었을 것 아니겠나!"
"그러고 보면 수안댁은
전 남편이 죽었을 때에도 남편 대신에 자기가 죽지 못한 것을
무척 한탄스러워 했거든. 그러니 수안댁은 남편을 기피하는 직성을 타고난
여자였는지도 모를거야."
"그렇다면 수안댁을 죽게 한 죄인은 나였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김삿갓은 그런 생각이 점점 확고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제제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자네 식으로 따지자면 수안댁을 죽인 죄인은 자네가 아니고 우리들이었을걸세.
왜냐하면 두 사람을 강제로 결혼시킨 사람은 우리들이었으니까 말이야...
이러나 저러나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려 버리고, 너무 상심하지 말게."
그러자 동석했던 늙은이 하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참견을 했다.
"옳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었거니와 산 사람은 어디까지나 살아야 하거든.
인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이제는
그만 고정하고 장사 치를 의논들이나 하라구."
살아 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생의 영원한 진리인지도
모른다.
늙은이는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을 하여, 듣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54. 그녀의 감춰진 비밀
"요새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겠지만, 실상인즉 수안댁은 3대째 내려오는 무당의 딸이었다네.
수안댁이 하필이면 산신당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 할머니가 모두 산신령을 추앙하며 모셨던 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야."
수안댁이 3대째
무당의 딸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에 제제도 놀랐고 김삿갓도 놀랐다.
모두가 처음 들어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수안댁이
무당의 딸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조조가 놀라면서 노인에게 물었다.
"이 사람아! 내가 죽은 사람에 대해 왜 거짓말을 하겠나,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려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틀림없이 할머니도 어머니도 무당이었다네."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내심
크게 한탄하였다.
(아, 그래서 그 사람이 무당에 대해 각별한 숭앙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게다가 그 무당의 말이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씀이었으니, 어찌 각별히 받들지 않았으랴!....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이 철썩같이 의존하고 있었던 무당의 예언을
혹세무민으로 몰아 세우지 않았던가....! 아! 진작에 이런 사실을 알았던들....
그녀를 위해 이제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나 저러나 수안댁이 무당의 딸이었든 누구의
딸이었든 간에 마누라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김삿갓으로서는 그녀를 장사 지내줄 의무가 있었다.
수안댁은 죽은지 사흘 만에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이 도와 주어 장사는 어였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장사를 잘 치러 주었다고
마누라를 잃은 슬픔이 가셔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누라 없는 집안은 무덤처럼 쓸쓸했다.
김삿갓은 마누라가 죽은 뒤로는 방안엔
들어가기도 싫어 날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태로 보내고 있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마누라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줄 것만 같아서였다.
사람은 이미 갔건만, 그녀가 가꾸어 놓은 국화꽃은 아직도 싱싱하게
피고 있어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였다. 이렇게 마음이 쓸쓸하다 보니 어느 하나고 쓸쓸해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김삿갓은 뜰에 무성히 자란
잡초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옛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가을 풀을 쓸쓸하게 바라보려니
슬픈 바람이 천 리를
불어온다.
슬프다 가을 바람에 낙엽만 휘날리고
메마른 버들가지엔 부엉새만 살고있네
오늘도 그대 생각으로 눈물만 자꾸
흐르는데
국화꽃은 해마다 피어도 그 누가 알아 줄 것인가.
김삿갓은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그러나 길을 떠나기에 앞서,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수안댁의 재산 정리
문제였다.
사후에 알고 보니, 수안댁은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살던 집을 비롯하여 밭은 3천여 평, 임야는 1만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재물들은 응당 남편에게 귀속될 재산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남편의 권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수안댁이 남기고 간 그 어떤 재물도 자신이 차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은 상조계원을 모아 놓고 제안을 하였다.
"나는
마누라가 죽은 것을 계기로 천동마을을 떠나 갈 생각이라네.
수안댁이 남겨놓은 재산이 적지 않은데, 자네들은 그 재산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
것같은가?"
계원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어리둥절하였다.
"이 사람아! 마누라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 마을을 떠날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힘을 모아서 새 장가를 들여 줄테니 행여 떠날 생각은 하지 말게!"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안 될 말이야."
김삿갓이 계원들과 함께 유산 문제를 상의하고 있을 때,
계장인 제제는 무슨
이유인지 일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어 말을 하였다.
"자네가 우리 마을을 떠나려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네.
그러나
우리들의 우정을 생각해서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가?"
"아니야! 나는 처음부터 한 해 겨울만 지내고 떠나갈 예정이었어.
자네들의 권고에 못 이겨 마누라를 얻는 바람에 이태 동안이나 더 살아왔는걸.
나는 본디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팔자를 타고난 놈이라는 것을 자네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김삿갓의 결심은 확고부동하였다.
그러자 제제가 조용히 말한다.
"그럼 이렇게 하세.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데도 돈은 필요할 게 아닌가.
수안댁이 남긴 유산은 모두 자네의 것이니까 집이랑 밭이랑 산이랑 모두 팔아 가지고
떠나게."
김삿갓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럴 생각은 없네. 수안댁의 유산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재산이지 내 것은
아니거든."
"수안댁은 자네 마누라가 아닌가?"
"나는 사람하고 결혼했을 뿐이지 돈하고 결혼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나는 횡재를
바라는 놈도 아니고,
올 때에도 빈손으로 왔으니까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겠나.
수안댁의 유산은 자네가 적당히 처분해
주었으면 좋겠네."
"이 사람아! 남의 재산을 내가 어떻게 처분한단 말인가?"
김삿갓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힘차게 들며 말했다.
"자네가 독단으로 처분하기 어렵거든 내가 말하는 대로 처분해주기 바라네.
지금 자네들이
쓰고 있는 "모임방"은 너무 협소해,
따라서 수안댁과 내가 살았던 집을 마을의 공청(公廳)으로 쓰도록 하고,
3천 평짜리 밭은 계원들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거기서 나오는 소득은
마을의 공동 재정으로 쓰도록 하고, 1만여 평의 산은 공동으로 조림(造林)을 한다면
좋을걸세."
유산의 처리 방법을 그렇게도 소상하게 말해주는 바람에 계원들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김삿갓은
기어이 전과 다름없는 죽장망해로 천동마을을 떠났다.
마을 친구들은 멀리까지 배웅을 나오며, 약간의 전별금도 모아 주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친구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몇 푼만 받아 넣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주었다.
"이 사람아! 아무리 방랑 생활을 하기로 돈없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는가!"
김삿갓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수안댁의 경우를 보게나. 인생이란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하는 것이야.
나는 이미 돈 한푼 없이 40여 년 동안이나 살아온 놈일쎄."
'문화 역사 시사 > 문화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14 (0) | 2019.03.04 |
---|---|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13 (0) | 2019.02.28 |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11 (0) | 2019.02.21 |
영혼의 화가 'John Singer Sargent' (0) | 2019.02.20 |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10 (0) | 2019.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