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59. 아~ 어머니
김삿갓은 홍성으로 홍성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 뵙고 용서를 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꿈을 꾸기 전까지는 어머니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김삿갓이었다.
영월에서 어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다시 방랑의 길을 오른지가 어언, 20 년이 다 되었다.
그런 어머니가 꿈속 소복차림으로 나타나 <내가 죽기 전에 너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였으니
제 아무리 몰인정한 김삿갓도 이번만은 어머니를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전에는 꿈에 나타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하필, 소복을 입고 나를 만나자고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다.
소복을 입었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 버리시고,
혼령이 꿈에 찾아오셨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어머니였다.
시집온 지 10년도 채 되기 전에 시아버님이 역적 홍경래에게 항복을 하는 바람에,
철없는 자식들을 등에 업고 황해도 곡산, 경기도 양주, 광주, 그리고 강원도 영월에 이르기까지,
줄곧 숨어 다니며 무진 고생을 겪어 온 어머니였다.
가문의 운명이 급전직하로 몰락한데다가 남편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리는 바람에,
여자 혼자의 몸으로 어린 자식을 키우며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보려고 애써왔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무작정 방랑의 길에 올랐던 김삿갓으로서는 꿈속에 나타난 어머니를 뵌 순간,
자식된 마지막 도리로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김삿갓은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라도 풀어 드리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홍성으로의 길을 재촉하였다. 김삿갓은 발이 부르트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행군을 계속하여, 드디어 홍성 읍내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외가에는 어렸을 때에 한 번 가 보았을 뿐이어서,
외가가 있는 <고암리>는 읍내에서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다.
"여기서 고암리라는 마을은 얼마나 됩니까?"
주막에 들려 막걸리로 요기를 하면서, 옆에 있는 노인에게 물어 보았다.
"여기서 고암리는 줄잡아 30리가 되지요. 나는 마침 고암리에 사는 늙은이오.
그런데 고암리에는 누구를 찾아가는 길이오? "
"고암리에 <이길원>이라는 분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노인장께서는 혹시 이길원이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김삿갓은 외삼촌의 이름을 알려주며 물어 보았다.
"이길원이라면 알다뿐이겠소, 나는 그와는 절친한 장기 친구라오...
그런데 이길원하고는 어떤 사이이시오?"
"네, 먼 친척입니다."
김삿갓은 숙질간이라고 말하기가 면구스러워 적당히 얼버무려 버렸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면 그 댁에 문상을 가는 모양이구려. 그런데 문상치고는 좀 늦으셨소이다."
김삿갓은 <문상>이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생각나 눈앞이 아찔해왔다.
"네? 문상이라뇨? 그 댁에서 누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씀입니까? "
노인은 그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노형은 그 댁에 상사(喪事)가 있었던 것을 모르고 오시는 길인가요?"
"저는 아무 것도 모르옵니다. 그 댁에서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김삿갓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노인은 몹시 민망한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실상인즉, 그 댁에는 오래 전부터 강원도 영월에서 누님 한 분이 와 계셨는데,
얼마 전에 그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오. 장사를 치른지가 10여 일밖에 안 됐지요."
하고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김삿갓은 눈앞이 캄캄해왔다.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눈물을 씹어 삼키며 다시 이렇게 물어 보았다.
"그 분이 어느 날 세상을 떠나셨는지 아시옵니까?"
"가만있자..... 그 분이 세상을 떠나신 것은... 4월 초이튼날 새벽이었을 것이오."
김삿갓은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4월 초이튿날 새벽이라면,
자기가 어머니 꿈을 꾼, 그 날, 그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혼령이 되어 아들을 찾아 오셨던 것이 분명하였다.
김삿갓은 절망과 좌절감에 휩싸여 술만 연성 퍼마셨다. 어머니를 만나 뵙고 용서를 구하려고
지난 보름간 부리나케 달려온 노력이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숙명이란 말인가?)
너무도 야속한 운명이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니, 이제는 외갓집을 찾아갈 경황이 없었다.
"고암리에 가려거든 나하고 함께 가십시다. 나도 이제 출발하려 하오."
옆에 있는 노인은 남의 속도 모르고 동행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흔들었다.
"노인장께서는 먼저 출발하십시오.
그 댁에 상사가 있었다니까, 저는 제수(祭需)를 좀 장만해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노인을 따돌리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도 안 계신 외가에 무슨 낮으로 찾아가랴 싶었던 것이다.
노인이 나가 버리자, 김삿갓은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술을 퍼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술을 마셔가며 혼자 생각해 보았다.
나무는 조용하고 싶어도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은 봉양을 하고 싶어도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
樹欲靜而風不止 (수욕정이풍불지)
子欲養而親不待 (자욕양이친불대)
라는 말이 있더니, 오늘 날 어머니 마지막 소원을 풀어드리고자 하였으나,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나 버리셨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운명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60. 백마강에 얽힌 전설
김삿갓은 외가댁에는 찾아가지도 않고, 날마다 객줏집에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외가에 가지도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홍성 땅을 떠나는 편이 좋으련만,
무엇인가 마음을 끌어 당기는 것이 있어, 홍성 땅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을 보낸 김삿갓은 취중에 문득,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홍성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 무덤이라도 한번 찾아보고 떠나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술을 한 병 들고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고암리의 공동묘지를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묘지기에게 물어 보니,
"이길원 노인의 누님 무덤은 바로 이 무덤이라오."
하고 말하며, 산기슭에 있는 조그만 무덤을 가르켜 주었다.
아직 흙도 마르지 않은 초라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 무덤 속에 어머니가 들어 있다고 생각되자, 설움이 복받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무덤 앞에 꿇어앉아 술을 한잔 부어 놓고,
"어머니! 불효막심한 병연이가 찾아왔사옵니다."
하고 목을 놓아 통곡을 하였다.
울어도 울어도 설움은 가시지를 않았다.
그러나 땅을 치고 무덤을 두드리며 울어본들 대답이 있을 턱이 없는 어머니였다.
김삿갓은 한없이 울다가 지쳐서 눈물을 거두며, 무덤을 향해 넋두리를 하였다.
"어머니! 불초자 병연도 언젠가는 황천으로 어머니를 꼭 찾아갈 것이옵니다."
실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넋두리였다.
이때쯤 문득 깨닫고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어 산속에는 노을이 짙어오고 있었다.
산속은 어찌나 적막한지,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뿐이었다.
김삿갓은 소나무 사이로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의 무덤을 그윽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자기도 모르게 즉흥시 한 수를 읊었다.
북망산 기슭에 새로운 무덤 하나
천 만번 불러도 대답 없구나
해는 저물어 마음조차 적막한데
들려 오는 소리라고는 솔바람 소리 밖에 없구나.
북망산하 신분영 (北邙山下 新墳塋)
천호만환 무반향 (千呼萬喚 無反響)
서산낙일 심적막 (西山落日 心寂寞)
산상유문 송백성 (山上唯聞 松柏聲)
옛날부터 한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
<사자불가부생 (死者不可不生)>
김삿갓이 왔다고, 이미 세상을 떠나 무덤 속에 묻혀버린 어머니가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무덤 앞에서 곡을하고 몸부림을 쳐도,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알량하나마 성묘를 마친 김삿갓은, 이제는 산을 내려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홍성 땅을 떠날 생각이었다.
지난 보름여를 오로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천릿길을 달려왔다가,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또 다시 방랑길에 오르자니,
이번에 밀려드는 고독감은 이전의 것과 크게 달랐다.
노을에 짙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동행하며,
(결국 죽는 날까지 나의 유일한 친구는 오직 나의 그림자가 있을 뿐인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며 산골길을 쓸쓸히 걸어가며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 보았다.
김삿갓은 금강 곰나루를 건너, 밤이 깊어서야 부여에 당도하였다.
부여는 그 옛날 백제의 도읍지였던지라, 이곳을 처음으로 찾아 온 김삿갓은 감개가 무량하였다.
객줏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다음날 아침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백제가 멸망할 때에 삼천궁녀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뛰어들었다는 낙화암(落花岩)을 빨리 구경하고 싶어,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부소산(扶蘇山)에 올라가 보았다.
부소산 정상에는 백제의 세력이 왕성할 때, 임금이 아침마다 올라
동해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며 나라의 태평을 빌었다는 영일루(迎日樓)가 있었고,
달이 뜰 때면 임금이 눈 아래 백마강을 굽어보며 나라의 태평을 빌었다는 송월루(送月樓)가 있었다.
영일루에서 북쪽으로 잠시 걸어 내려오면, 백마강의 푸른 물줄기가 굽어보이는
절벽이 있는데, 절벽 끝에 커다란 바위들이 한데 뭉쳐 있는 곳에
백제가 망할 때에 삼천궁녀들이 강으로 뛰어들었다는 낙화암이 있었다.
낙화암에서 비탈길을 북쪽으로 걸어 내려오면, 강물이 눈앞에 굽어 보이는 곳에
절벽을 배경으로 한, 고란사(皐蘭寺)라는 절이 있다.
백쩨 때에 창건된 절로서, 원래는 <高蘭寺>라고 불렀는데, 절 뒤에 절벽 바위 틈에
<고란초(皐蘭草)>가 있다고 해서, 절의 이름이 숫제 <皐蘭寺>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란초는 난초의 일종이나 잎이 적은 기이한 난초이다.
포자(胞子)가 1년에 하나밖에 생겨나지 않아,
번식하기가 매우 어려운 음화(陰花) 식물이라는 것이다.
양지도, 음지도 아닌 바위 틈의 습지에서만 자라는데,
조선에서는 오직 고란사 뒤의 절벽에만 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고란사 주지 스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설명을 듣고,
"그렇다면 고란초는 삼천 궁녀의 원한이 식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요?"
하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고란사에서 백마강을 굽어보면, 강 기슭에 조룡대(釣龍臺)라는 바위 하나가 물 위에 솟아나와 있다. 그 바위에는 백제가 망하던 때의 슬픈 전설이 얽혀 있다.
백제를 치러 당나라에서 온 소정방(蘇定方)이 금강을 건너오는데,
때마침 모진 바람이 불어 강물이 세차게 출렁이는 까닭에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강가에 있는 노인에게 <풍랑이 왜 이다지도 심하냐>고 물었더니,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백제의 선왕이신 무왕(武王)께서 나라를 구하시고자
물 속에서 용으로 변해 조화를 부리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왕은 생전에 어떤 물건을 좋아했느냐?"
"무왕께서는 생전에 당신이 타고 다니시던 백마를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소정방은 백마 한 필을 구해다가 한 칼로 백마의 목을 벤 후, 그 머리를 미끼로 삼아
조룡대 바위에 걸터 앉아 낚시를 하여 커다란 용 한 마리를 낚아 올렸다.
그러자 풍랑이 잦아 들었고, 소정방은 강을 무사히 건너가 백제를 멸망시킬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바위를 <조룡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금강의 무명지류(無名支流)에 지나지 않았던 그 강을
그때부터는 <백마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홍양호의 (洪良浩)의
주중망 고란사(舟中望 皐蘭寺)라는 시가 읊조려졌다.
비는 나룻배에 부슬부슬 내리고
백제의 왕기는 연기 속에 사라졌네
슬프다 천 년 동안 질탕하게 놀던 곳
희미한 등불 아래 중은 졸고 있네.
61. 일사도무사 평생한유신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관촉사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내려오면,
풍계촌(風界村)이라는 마을에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甄萱)의 무덤이 있다.
견훤은 신라의 비장(裨將)이었는데, 진성왕(眞聖王)때,
따르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일으킨 풍운아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자 금강(金剛)과 신검(神劍)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나라를 세운지 41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견훤의 초라한 무덤만이
적막한 산속에 쓸쓸히 남았으니, 인생의 영고성쇠란 본시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와, 익산군(益山郡) 용화산(龍華山)에 있는 미륵사(彌勒寺)와
상원사(上院寺) 등을 구경하고, 옥구(沃溝) 땅에 들어섰을 때에는 가을도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가을에 전라도 일대에는 심한 흉년이 들어,
김삿갓은 어디를 가도 밥을 얻어 먹기가 매우 어려운 지경이었다.
때는 추수철임에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식량이 부족해,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는 집조차 있는 형편이었다.
형편이 이지경이다 보니, 김삿갓은 열 집 스무 집 구걸을 다녀 보아도,
하루에 한 끼를 얻어 먹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돈은 한 푼도 없고 날은 갈수록 추워지는데, 몸에 걸치고 있는 옷조차도 여름옷 그대로였다.
(이거 큰일났구나. 배를 타고 금강을 내려올 때만 하여도 배가 터지도록 잘 얻어 먹었는데,
이제는 하루 한 끼도 얻어먹기 어려운 형편이니, 눈앞에 닥쳐오는 엄동설한을 어떻게 넘길 것인가?)
좀처럼 비관할 줄 모르는 김삿갓도 이 때만은 눈앞이 아득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않던가. 그러나 김삿갓은 날마다 기아(飢餓)에 허덕이다 보니,
이제는 좋은 경치를 찾아다닐 마음의 여유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듯 아침 저녁을 제대로 얻어먹기가 어려울 지경이어서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해 오는데,
몸이 야위어 올수록 추위도 혹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김삿갓은 구걸 생활을 30여 년이나 해왔지만, 이때처럼 혹심한 고초를 겪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느 날, 김삿갓은 추위를 참고 견디다 못해 어느 집으로 찾아가 사정을 해보았다.
"나는 지나가는 나그네올시다. 감기에 걸려 열이 심하니, 하룻밤 잠이나 편히 자고 가게 해주십시오. 밥은 조금 전에 먹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밥을 먹었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추위를 피해 잠을 자고 가기 위해, 주인을 안심시키려는 말이었다.
주인은 김삿갓의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올해는 흉년이 심해, 우리 식구들은 지금 밥을 굶고 있다오."
"그런 사정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밥 걱정은 마시고, 잠만 자고 가게 해주시면 됩니다."
"에이, 여보시오. 내 집에서 자고 일어난 사람에게 어떻게 밥을 굶으라고 하겠소.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주인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서, 김삿갓의 행색이 하도 딱해 보였던지,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굶다시피 하기 때문에 어느 집을 찾아가도 똑같은 사정일게요.
여기서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김진사라는 부자 댁이 있소.
그 집에 가면 돈도 많고 쌀도 많을 테니 그 집을 찾아가 보시오."
하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김진사댁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진사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면, 말도 통할 것같았기에
은근한 기대를 갖고 지친 다리를 이끌고 고개를 넘기 시작하였다.
별로 험한 고개도 아니건만,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몹시 힘에 겨웠다.
이윽고 고개 위에서 바라보니, 과연 산 밑에는 고래등 같은,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저 집이 바로 김진사 댁인가 보구나.
저만한 부자라면 밥도 배불리 먹여주고 잠도 따듯하게 재워 주겠지.)
김삿갓은 가슴 울렁거리는 흥분을 느끼며 김진사 댁을 찾기가 무섭게 제법 힘차게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대문을 두 세번 연거푸 두드려도 안마당에서는 개짖는 소리만 요란할 뿐 사람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밥을 빨리 얻어먹고 싶은 마음에서 대문을 연방 두드려대었다.
그러자 60 가까운 탕건을 쓴 늙은이가 대문을 살며시 열고 내다보며,
매우 냉담한 어조로 물었다. "누구를 찾소? "
물으나마나 그 노인은 김진사가 분명해 보였다.
"저는 지나가는 과객이옵니다. 하룻밤 신세를 좀 지게 해 주십시오."
상대방이 진사인만큼, 이쪽도 선비의 체통을 지키려고 제법 의젓하게 부탁했다.
김진사는 사뭇 아니꼬운듯, 시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문득 주머니에서 엽전 두 닢을 꺼내 손에 쥐어주며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집에서는 사람을 재워줄 형편이 못되오. 이것 가지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드시오."
그리고 대뜸 대문을 잠가 버린다.
김삿갓은 손바닥에 놓여진 엽전 두 닢을 물그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까닭 모를 분노와 함께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라왔다.
(글줄이나 배웠다는, 소위 진사라는 작자가 선비를 이렇게도 멸시할 수가 있을까?)
배우지 못한 사람이 그랬다면 무식한 탓으로나 돌리겠지만,
진사까지 지냈다는 작자가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나오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대문을 걷어차며 행패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이런 괄시를 받으면서도 살아야만 하는가?)
김삿갓은 김진사라는 자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문득 바랑 속에서 붓을 꺼내
대문 한 복판에 주먹같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후려갈겼다.
沃溝 金進士 옥구 김진사
옥구에 사는 김진사가
與我二分錢 여아 이분전
나에게 엽전 두 푼 주노니
一死都無事 일사 도무사
죽으면 이런 멸시는 안 당할텐데
平生恨有身 평생 한유신
몸이 있는 것이 평생 한이로다.
이같이 분풀이로 시 한 수를 후려갈기고 그 자리를 떠나오기는 했으나,
배는 고프고 해는 저물어 오는데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산 밑으로 어정어정 걸어오다 보니, 조그만 움막이 하나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집이 아니라, 상여(喪輿)를 보관해 두는 상두막이었다.
(에라, 잘됐다. 어차피 상여 신세를 져야 할 판이니 상두막에서 자다 죽어 버리면 제격인게다.)
김삿갓은 행상 때 쓰는 포장(布帳)을 몸에 휘휘 둘러 감고 상여판 위에 번듯이 누워 버렸다.
그리고 워낙 기아로 기진맥진한 판이어서 눕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문득 누군가가,
"여보시오, 선비 양반!"
하고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닌가.
62. 훈장으로 겨울나고 전주(全州)로
비몽사몽간에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어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는 아까 만났던 김진사가 서 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광경이어서 김삿갓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 이런 곳에 어떻게 오셨소?"
그러자 김진사는 용서를 비는 어조로,
"조금 전에 선비가 내 집 대문에 써놓은 시를 읽어 보고 찾아왔소이다.
요사이 거지 떼가 하도 많아 나는 귀공도 거지인 줄 알고 쫓아냈던 것이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으니 용서하시오."
김삿갓은 품고있던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한번 쫓아 버렸으면 그만이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오?"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김진사는 가볍게 웃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귀공이 나를 나무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그러나 한 번 실수는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소.
내가 귀공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하니, 노여움을 풀고 어서 내 집으로 가십시다."
김삿갓은 생떼를 쓰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 같아, 두말없이 김진사를 따라 나섰다.
그리하여 김진사 댁에서 오랜만에 저녁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들어 보니, 김 진사의
특별 부탁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김 진사에게는 아홉 살짜리 손자가 하나 있어,
지금까지는 자기 자신이 직접 글을 가르쳐 왔었는데,
할아비가 손자에게 글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으니,
김삿갓에게 가정 교사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대문간에 아무렇게나 써갈긴 한 수의 시가 생각지 못한 효과를 낸 셈이었다.
김삿갓은 호구지책으로 글을 팔아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닥쳐오는 엄동설한만은 무사히 넘겨 놓고 봐야 하겠기에,
"좋소이다. 몇 달 동안 손자아이에게 글을 배워 주도록 하지요.
그러나 봄이 되면 나는 어차피 길을 떠나야 할 사람이니, 그 점은 미리 양해해 주시오."
하고 김 진사의 부탁을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그날부터는 밥 걱정도 없고, 잠도 편히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 구석에서는,
(천하를 주유(周遊)해야 할 내가 밥 한 그릇에 팔려 초학 훈장으로 썩어나고 있으니,
나도 이제는 말로가 가까워 왔는가 보구나! )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먼 산에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봄이 돌아오자,
김삿갓은 몸에 배어있는 방랑벽이 야금야금 머리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한 겨울을 꼬박 서당방에 앉아 보내다가
오랜만에 길을 나서니, 30리도 채 못가 다리가 무거워 오기 시작하였다.
따지고 보면 50 고개를 넘어선 지도 이미 여러 해가 되는지라, 다리가 약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에는 얼마든지 걸을 수 있었지만 갈빗대 사이에 담이 들었는지, 이즈음은 매일 밤이면 옆구리가
결리기 시작하였다.
(생로병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나에게도 죽을 날이 가까이 왔는가 보구나.)
걷는 것조차 힘에 겨웠던 김삿갓이 처량한 감회에 잠긴 채 고갯길을 넘어가노라니,
길 양쪽 산속에는 가지가지 꽃들이 계절을 다투며 활짝 피어 있었다.
다리가 불편했던 김삿갓은 옥구를 떠난지 나흘이 지나서야 전주 고을에 들어섰다.
전주 고을의 진산(鎭山)은 건지산(乾止山)이다. 건지산은 듣던 바와 같이 수목이 울창하였다.
게다가 전주에서는 역사적으로 인물도 많이 났거니와 가옥도 고풍스러운 곳이 즐비하였다.
전주는 백제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요처(要處)인지라, 가는 곳마다 명승고적이
허다하였다.
남문 안에는 경기전을 비롯하여 고덕산(高德山)에 있는 만경대(萬景臺)와
모악산(母嶽山)에 있는 귀신사(歸信寺)와 보광사(普光寺) 등등 고색창연한 사찰만도 여러 군데 있었다.
전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의 명소는 덕진호라는 아름다운 인공 호수다.
전주는 얼른 보기에는 건지산을 비롯하여 고덕산, 모악산, 가련산(可連山) 등등 높고 낮은 몇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엄밀하게 조사해 보면, 건지산과 가련산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전주 서북방에 해당하는 그 곳만은 산이 아닌 평야로만 되어 있다.
지관(地官)들은 그 점을 지적하여, "만약 건지산과 가련산 사이에 평야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전주 고을의 기맥(氣脈)이 밖으로 새어나가, 전주 고을은 언젠가는 쇠멸하게 된다"는
풍수설을 오랜 옛날부터 강력히 고집해 왔었다.
이러한 지관들의 주장으로 후일 건지산과 가련산 사이에 높은 둑을 쌓아 올리는 동시에,
둑 안에 있는 평야에 물을 가둬둠으로서 덕진호가 된 것이다.
이렇게 육지에 커다란 인공 호수가 만들어지고 보니, 주변의 풍치를 아름답게 꾸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호숫가에 정자를 새로 지어 놓았는데, 그 정자가 바로 풍월정(風月亭)이다.
덕진호에 풍월정까지 만들어지자, 어떤 이름 모를 풍월객이 풍월정에 다음과 같은 풍월시를 한 수
써 걸어 놓았다.
깊은 늪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치네
(一望深淵 映翠空 : 일망심연 영취공)
이 연못을 파는데 품이 얼마나 들었을까
(古來開鑿 幾人功 : 고래개착 기인공)
길게 뻗은 연기 속에 가을 달이 잠기고
(杖烟數里 籠秋月 : 장연수리 롱추월)
어부의 피리 소리에 늦바람 불어온다.
(漁笛一聲 橫晩風 : 어적일성 횡만풍)
전주 고을에 덕진호와 풍월정이라는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자,
전국 각지에서 시인 묵객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전주 고을이 더욱 번창하게 되었고
"덕진호에서 용이 하늘에 올랐다"는 풍설도 떠돌게 되었다.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유순(柳洵)은 "덕진호에서 용이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구경을 왔었다.
그리하여 덕진호에 걸려 있는 시의 운자를 따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걸기도 하였다.
맑고 깊은 연못 속에 하늘이 비치고
(一泓澄澈 映虛空 : 일홍징철 영허공)
덕을 쌓아 세상을 고르게 해 주도다
(蓄德仍收 濟物功 : 축덕잉수 제물공)
여기가 바로 용이 오른 곳이 아니라면
(是處眞龍 如不起 : 시처진용 여불기)
사람들은 어디서 번개를 보았으리오.
(世間何地 覓雷風 : 세간하지 멱뇌풍)
덕진호에서 정말로 용이 올랐는지 어쩐지,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전주 고을이 갈수록 번창하는 것은 덕진호라는 인공 호수 덕택인 것은 실하다고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생각해 보았다.
임의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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