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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11

박연서원 2019. 2. 21. 08:43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나그네 인생


47. 인연의 시작


해(年)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김삿갓은 이날도 이풍헌 댁으로 바둑을 두려고 모임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조조가 술을 한 병 들고 찾아왔다.
"여보게!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나하고 술이나 한 잔 하세!

이 술은 어떤 여자가 자네한테 보내 온 특별한 술일세!"하고 집을 나서려는 김삿갓의 발길을 잡았다.
 
술이라면 어떤 술도 마다할 김삿갓이 아니다.
"술이라면 먹세그려. 그런데 어떤 여자이길래 나한테 술을 보냈단 말인가?"
"왜 궁금해? 그런 사람이 있어! 하하하."
조조는 술상 앞에 앉으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김삿갓이 물었다.
"이 술이 어떤 술이란 말인가? 또 어떤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고 했는데, 그 여자는 또 누구인가?"
"왜?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니까 궁금하지?"
"아따, 이 사람 더 궁금하게 하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우선 술맛부터 알아 보기로 하세.

자네가 한 잔 마셔 보아서 술맛이 자네 입에 맞으면, 내가 어떤 여인이 보냈는지 말해주지."
 
"술이 입맛에 안 맞으면?"
"아따, 이 사람! 언제 삿갓 입맛에 맞지 않는 술도 있었던가?"
"그랬던가? 하하하!"
김삿갓은 술잔을 손에 들고 조조와 얼굴을 마주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김삿갓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닌걸. 이 사람아! 이런 좋은 술이 어디서 생겼는가?"
김삿갓은 40 평생을 살아오며 술이라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마셔왔다.
그러나 술맛이 좋고 나쁜 것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셔본 술은 국화 향기가 그윽한 데다가, 술이 혀끝을 톡 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술을 다시 한 번 마셔보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 술은 맛으로 평가한다면 우리같은 사람보다는 신선들이나 즐길 수 있을 것같구먼 그래."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 칭찬하자, 조조도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고,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을 한다.
 
"여자가 보내준 술이라고 해서, 자네가 무슨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닌가?
술은 다 마찬가진데 쏘기는 뭐가 쏜단 말인가!"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좋은걸 좋다고 하지, 아무렴 나쁜 것을 좋다고 하겠나? 

정말이지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니야.

대관절 이 술을 빚은 여인은 누구길래 이렇게도 기막힌 술을 빚어 냈을까."
 
김삿갓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술맛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조조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한다.
"이 술을 빚은 여자의 정체를 알고 나면, 술맛이 대번에 뚝 떨어져 버릴지도 모를 일일세."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술을 빚은 여인이 누구인가는 막론하고,

이렇게 기막힌 술을 빚을 수 있는 여인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니겠는걸."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 칭찬하자 조조는 어이없어 하면서,
"자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실대로 말해 줌세.

실상인즉, 이 술은 취향정(醉香亭) 주모가 보내온 술이라네.

자네는 며칠 전에 그 여자를 만나 본 일이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취향정이라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였다.
"뭐? 취향정? 내가 언제 취향정 주모를 만나 본 일이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은... 왜, 지난 번 제제네 집에서 생일 술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에

이 차로 취향정이라는 술집에 갔던 일이 있지 않은가,

이 술은 그날 밤 만났던 수안댁(遂安宅)이 자네에게 특별히 보내 준 술이란 말일세!"
조조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집 주모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좋은 술을 공짜로 보내 주었단 말인가?"
"수안댁이 자네에게 왜 술을 보내주었는지 궁금하겠지, 그렇다면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해줌세."
그러면서 조조는 수안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황해도 수안 태생인 수안댁은 열여섯 살 때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은 신랑에게 시집을 갔었다.
남편은 밥보다도 술을 더 좋아하는 모주망태 였지만,

수안댁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남편을 하늘처럼 정성스럽게 받들어 모셨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수안댁이 시집온지 5년째 되는 여름에

남편은 독주(毒酒)를 잘못 마시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
 
수안댁은 장사를 지낸 그 날로 남편 무덤 옆에 초막을 치고 삼년상을 꼬박이 치렀다.
그런 뒤에는 자기 집에 돌아와 "취향정"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술장사를 시작하였다.
자식이 한 명도 없는 그녀에게는 재혼을 권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지만

수안댁은 모두 거절하고 술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동네 노파들이 "아까운 나이에 재혼은 안하고 하필이면 술장사를 하냐"고 충고를 했지만,

수안댁은 그때마다  "내 남편은 나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느 집이나 그런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하겠기에, 나는 술꾼들에게 좋은 술을

내 손으로 직접 빚어 대접하고 싶어서 술장수로 나서는 것이예요."하고 대답했다.

이와 같은 수안댁의 결심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수안댁은 술을 직접 빚어 팔아 오기를 14, 5년, 계절에 따라 앵두주, 두견주와 국화주 등

꽃잎과 과일로 만든 술도 썩 잘 빚어 왔지만, 대중적인 막걸리와 소주 조차,

빚어 놓은 술의 맛과 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손 맛이 탁월했고,

시간이 더해 갈수록 양조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에게는 남 모르게 탄식할 일이 하나 있었으니, 술을 아무리 정성스럽게 빚어 팔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을 한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술꾼들은 하늘의 별처럼 많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수안댁은 날마다 술을 팔아 오면서도, 술맛조차 모르는 술꾼들을 내심,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조조가 친구들을 4, 5명 데리고 술을 마시러 왔다.
제제네 집에서 생일 잔치를 얻어먹고 돌아가는 길에, 한 잔 더 마시려고 들렀다는 것이다.
일행 중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수안댁은 손님들에게 술을 손수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조차 모르는 초면 손님만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별안간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감탄사를 지르는데,
"아니! 이 집 술맛이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 막히지?"
수안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띄였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을 쳐다 보았다.
그는 오늘 처음 온 김삿갓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어느 친구가 김삿갓을 놀려대는데,
"여보게 삿갓! 술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진데. 이 집 술맛이 뭐가 좋단 말인가."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모르는 소리 말게, 삿갓이 음흉스럽게 수안댁 환심을 사려고 일부러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지!"
 
김삿갓은 친구들이 놀리는 말을 하자, 이렇게 나무라 주었다.
"이 못난 친구들아! 자네들은 술맛을 그렇게나 모른단 말인가? 정말이지 이 집 술맛은 보통 술맛이 아니야!"
수안댁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김삿갓은 수안댁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연방 술만 마시고 있었다.
이윽고 일행이 돌아가 버리자, 수안댁은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삿갓이라는 사람이 술을 마셔가며

"이 집 술맛은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 막히지?"하고 연신 감탄하던 소리가

자꾸만 귓전에 울려 오는 것같았기 때문이었다.
 
(삿갓이라고 하던 그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술맛을 그렇게도 잘 알아줄까.)
조조 일행과 네니 내니하는 것을 보면, 마을 사람들과 가까운 사이임은 분명해 보였으나,

그의 행동 거지를 보아서는 마을 사람들처럼 우매한 농부는 아닌 것같고...)
수안댁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밤은 깊어 오는데 잠은 못자고 계속 뒤척였다.


48. 친구 장가 보내기


수안댁은 몇 해 전에 어떤 고승으로부터 명주(銘酒) 담그는 비법을 배워 가지고

추로백이라는 술을 한 항아리 담가 놓은 것이 있었다.
양조법을 배우다가 시험삼아 한 번 담가본 것으로서, 돈을 받고 팔기 위해 담가 놓은 술은 아니었다.

그러나 삿갓이라는 사람이 술맛을 그렇게나 잘 알고 있기에,

그 사람에게는 추로백의 맛을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수안댁은 며칠을 두고 망설이다가, 어느 날 마침내 용기를 내어 술 한 병을 들고 조조를 일부러 찾아왔다.
"며칠 전에 우리 집에 들렀던 삿갓이라는 분에게 이 술맛을 보게 해주세요.
이 술은 "추로백"이라고 하는데, 그 양반에게 이 술맛을 한 번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하여 조조가 문제의 술병을 들고 지금 김삿갓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조는, "수안댁이 이렇게 좋은 술을 보낸 것을 보니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인데
이번을 기회로 수안댁과 잘 사귀어서 두 사람이 함께 지내면 어떻겠나?"하고 말을 하였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결혼을 못해 환장한 사람인줄 아는가?"
 
사실 김삿갓은 처자식이 엄연히 있는 몸이어서 새 장가를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 턱 없는 조조는 두 사람을 어떡하든지 결합시켜 주고 싶어했다.
"자네가 돈이 없어 결혼을 겁내는 모양인데 그러나 조금도 걱정을 말게,

수안댁이 돈은 먹고 지낼만큼 벌어 놓았으니 자네가 한 푼도 벌지 않아도 될 것이야."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던간에 나는 결혼할 형편이 안되니 그 소리는 이제 그만하게!"
"자네도 우리들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야 우리 마을에서 함께 살게 될 것 아닌가.
수안댁은 그만하면 인물 좋겠다, 마음씨도 곱겠다, 살림살이 걱정도 없겠다,

술장수라고 덮어놓고 싫어할 것은 없지 않은가?"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수안댁이 술장사를 하기 때문에 결혼을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야.
그 점만은 오해하지 말아 주게."
"그러면 자네는 언제까지나 홀아비로 늙어 죽을 생각이란 말인가?"
"나는 자네들에게 말을 안 했다 뿐이지, 홀아비는 아닐세. 영월에는 처자식이 버젓하게 있는걸."
김삿갓은 마침내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해 버렸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조조는 친구들과 그 문제로 상의했는데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 친구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장가를 가려고 하지 않을걸세,
그러니 장가를 보내려면 우리들이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 것같네."
"삿갓도 삿갓이지만, 수안댁의 말도 들어봐야 할게 아닌가?"
"그건 그래! 모르는 과부라면 한밤중에 보쌈을 해올 수도 있지만

수안댁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우선 수안댁의 마음을 넌즈시 떠보기로 하세."
친구들은 암암리에 그 문제를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친구들은 술을 마시자고 하면서 김삿갓을 취향정으로 끌고 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사람을 결합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취향정 문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게 수안댁, 어디 갔는가? 이 친구가 자네 집 술맛이 하도 좋다고 하기에,
오늘은 일부러 이 친구를 모시고 왔네."
 
수안댁은 무심코 나오다가, 일행중에 김삿갓이 끼어 있음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놀란다.
"어머! 삿갓 어른도 오셨네요."
김삿갓은 스스럼없이 마루로 오르며,
"일전에는 술에 취해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해 미안하게 됐네.

참, 자네가 보내 준 술은 조조와 함께 잘 마셨네. 어쩌면 술맛이 그렇게도 좋게 빚었는가? 고맙네.."
 
그러자 수안댁이 크게 기뻐하며,
"제가 술장사 20년에 술맛 좋다는 칭찬을 들어 보기가 처음이어서 무척 기쁘옵니다."
그러자 조조가 너스레를 치고 나오는데,
"이 사람아! 수안댁이 우리한테는 나쁜 술만 먹이고,

자네한테만 좋은 술을 먹이니까 술맛이 좋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자 수안댁이,
"마을 양반들은 아무리 좋은 술을 대접해도 칭찬해줄 줄을 모르니까 화가 동해 그랬지 뭐예요."
"옳..아! 이제야 자네 마음을 알겠네.

좋은 술은 아껴 두었다가 사랑하는 낭군님에게만 대접하고 싶어 그랬단 말이지?"
그 바람에 좌중에는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김삿갓도 덩달아 웃으며,
 
"아닌게 아니라 일전에 자네가 보내준 술맛은 정말로 좋았네. 그런데 술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그 술은 추로백이라는 술이었습니다."
"추로백....?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걸? 그 술은 마셔보니 혀를 콕 쏘는 맛이 있는데다,

향기가 그윽한 점이 더욱 좋던데 그 술은 어떻게 빚은 술인가?"
그러자 옆에 있는 다른 친구가 한 마디 한다.
 
"이 사람아! 우리는 술을 마시러 왔지. 술 빚는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은 아닐쎄.
그런 얘기라면 이따가 단둘이 이불 속에서 하고, 우선 술이나 빨리 가져오게!"
"어마! 아무리 농담이라도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 사람아! 우리들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을 하고 있는거야.

이 사람이 자네하고 하룻밤 같이 지내고 싶다고 하기에, 우리들이 이 사람을 일부러 데리고 온거야.
그런 줄 알고 어서 들레술이나 가져오게!"
 
수안댁은 대답을 못 하고 얼굴을 붉히며 부랴부랴 술상을 차리러 달려나간다.
수안댁이 부엌으로 나가 버리자, 친구들이 김삿갓에게 중구난방으로 한 마디씩 한다.
"여보게 삿갓! 수안댁이 자네가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네.

지금까지는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길길이 뛰던 수안댁이 오늘 자네 앞에서는 새색시처럼 얌전해졌구먼...."
"오랫동안 혼자 살아오다가 맘에 드는 짝을 만났으니 그렇겠지,

그나 저나 수안댁이 자네가 얼마나 좋았으면 추로백이라는 술까지 보내줬단 말인가?"
"수안댁의 심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지. 젊은 나이에 20 년이 되도록 독수공방으로 살아오다가,

이제야 마음에 드는 사내를 만난 셈이거든!
 
친구들이 한마디씩 씨부려대는 바람에 김삿갓은 어이가 없었다.
"허허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이 친구들은 앞서 김칫국을 마시고 있구먼..."
그러자 조조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김삿갓을 나무라는데,
"자네가 수안댁의 마음을 믿지 못하겠다면,

우리가 자네 앞에서 수안댁의 내심을 직접 물어 봐주면 될 게 아닌가."

그때 수안댁이 술상을 들고 들어와 술을 손수 한 잔씩 따라준다.
"안주가 변변치 못해 죄송해요. 어서 한 잔씩 드세요."
그러자 조조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수안댁에게 따지듯이 묻는다.
"이 술을 들기 전에 수안댁에게 한 가지 꼭 물어볼 말이 있네."
"제게 무슨 말씀을 물어 보시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무슨 말을 묻든간에 자네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어야 하네."
"무슨 얘기인지 모르지만 대단스럽게 나오시니까 겁이 나네요."
수안댁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김삿갓을 건너다 보았다.


49. 첫날 밤


"삿갓 어른! 죄송해요. 제가 왜 재혼을 할 수 없는 팔자인지 솔직하게 말씀드릴께요."
그리고 수안댁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술주정을 하듯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공개하였다.
 
수안댁은 결혼한 지 5년 만에 남편이 죽자, 삼년상을 깨끗이 치른 뒤에 재혼을 하려고
망부(亡夫)의 혼백을 달래는 굿을 성대하게 해주었다.
그때, 그 굿을 주관한 무당은 70대의 할머니 무당이었는데,

죽은 남편의 혼백을 불러 놓고 한바탕 칼춤을 추어가며 넋두리를 한참 늘어 놓은 후,

문득 수안댁에게 다음과 같은 몸서리치는 선언을 하는 것이었다.
 
"네 남편은 독주를 마시고 죽은 게 아니라, 바로 네가 청상살을 타고났기 때문에 죽은 것이로다.
그러므로 너는 재혼을 하더라도, 네가 타고난 청상살 때문에 서방을 또 잡아먹게 되리라.
만약 서방이 죽지 않으면 서방대신 네가 죽게 될 것이니, 너는 그리 알고 행여 재혼은 하지 말거라!"
실로 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무당의 넋두리였다.
 
수안댁은 그 말을 듣고난 이후, 재혼은 깨끗이 단념하고 숫제 술장사로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계집이에요. 그러니 내가 아무리 삿갓 어른을 좋아하기로,

이런 팔자를 타고난 년이 어떻게 삿갓 어른과 결혼을 할 수 있겠어요."
 
수안댁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같은 신세 타령을 늘어놓고, 한숨을 쉬면서 술을 마신다.
좌중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수안댁의 말을 듣고 나서는

어느 누구도 수안댁에게 김삿갓과의 재혼을 권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수안댁의 신세가 무척이나 측은하게 여겨졌다.

본인의 신세도 신세지만, 그런 신세를 위로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하기는 커녕,

이러저러하면 서방이나 네가 죽게될 것이라는 악담에 얽힌 말을 쏟아낸 무당이 몹시 괘씸하게 여겨졌다.
(점이나 굿같은 것은 혹세무민을 일삼는 자들의 헛소리가 아니던가?
그런 자들이 무엇을 안다고 허튼 수작으로 남의 일생을 좌지우지한단 말인가!)
 
김삿갓은 그런 생각이 들어,
"여보게 수안댁! 자네는 사람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가?"
하고 수안댁을 정면으로 나무라 주었다.
좌중은 물론 수안댁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김삿갓은 다시 입을 열며  말을 한다.
 
"무당의 넋두리라는 것은 순전히 허튼 수작에 불과한 것이네.

그런 것을 철썩같이 믿고 재혼을 안 한다니, 그런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는가."
그러자 수안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재혼을 했다가 남편이 또 죽으면 어떡해요. 팔자 도망은 누구도 할 수 없다고 하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팔자라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 누가 갖다 주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굳센 신념을 가지고 사람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구."
       
김삿갓이 이같이 말을 마치자, 친구들도 덩달아 박수를 치면서
"허긴 그래! 귀신이라는 것은 위해 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삿갓처럼 애초부터 무시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야.

그러니까 결혼 문제는 본인들끼리 잘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고, 이제부터 우리들은 술이나 먹자구!"
이리하여 모두들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술은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말끔한 결론이 나지 않은 김삿갓과 수안댁의 결혼문제가 마음에 걸렸던지,
친구들의 빈 술잔은 김삿갓과 수안댁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히 술을 하는 김삿갓도 수안댁도 그자리에서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김삿갓은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머리맡에는 자리끼가 있어 한 대접을 몽땅 마셔 버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자기 자신은 이불 속에서 자고 있었는데 수안댁은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옆에서 허리를 꼬부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보게! 친구들은 모두들 어딜 가고 우리 두 사람만 남아 있지?"
김삿갓은 수안댁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 보았다.
그러나 수안댁은 인사불성으로 잠만 자고 있었다.
(으흠...친구들이 계획적으로 우리 두 사람만 남겨두고 도망을 가버렸구나!)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자 별안간 야릇한 흥분이 느껴져왔다.
그러면서 옆에서 자고 있는 수안댁의 풍만한 육체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멀리서만 건너다 보던 여인을 눈 앞에 가까이 두고 보니 황홀할 지경이었다.
"여보게! 자는가?"
김삿갓은 이번에는 수안댁의 젖가슴에 손을 대고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수안댁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던지 완전히 인사불성이었다.
 
"여보게! 추운 모양이니 이불 속에 들어와 자라구."
김삿갓은 그렇게 말하며 여인의 풍만한 몸을 이불 속으로 끌어 들였다.
수안댁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 여인의 향기로운 냄새가 물씬 코를 찔러 못 견딜 지경이었다.
김삿갓은 수안댁을 가슴에 품어 안은 채 잠을 다시 청해 보았다.
 
그러나 너무도 오랫동안 금욕을 한 탓인지 불길처럼 솟구쳐 오르는 욕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안된다. 나는 누구하고도 결혼할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책임을 질 수도 없으면서 남의 애틋한 정조를 유린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눈알이 뒤집히도록 맹렬히 타오르는 욕정은 김삿갓의 절제력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바로 옆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여인의 숨결이 끊임없이 얼굴에 불어와,

애써 누르고 있는 욕정을 자꾸만 북돋아 주었다.
(이 여인과 관계하는 남자는 모두가 죽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젯밤 수안댁이 취중에 들려 주었던 말이 번개같이 머릿속에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지금 이 순간에 와서 그런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김삿갓은 마침내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저고리를 벗기고, 치마도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인의 풍만한 유방을 사정없이 주물러대었다.
여인은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지,
"어마! 누구에요?"
호들갑스럽게 놀라면서 용수철 퉁기듯 벌떡 일어나 앉는다.
"나야, 나! 놀라지 말고 이리와 누워요!"
 
김삿갓도 일어나 앉으며 달래듯 속삭이며 여인을 품속으로 끌어들였다.
수안댁은 상대방이 김삿갓임을 알자 마음이 놓이는지,
"친구분들은 모두 어디 갔어요?"하고 묻는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 모두들 도망을 가버린 모양이야. 그런 줄 알고 함께 누웁시다."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힘차게 끌어당기니, 여인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슬며시 품에 와 안긴다.
그리하여 사지백태를 녹여 버릴 듯한 뜨거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여인의 입술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장장 15년 동안이나 독수공방을 해오다가

처음 만나는 남자이다 보니, 전신이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바탕 뜨거운 포옹과 애무가 계속되다가 이윽고 사나이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여인의 몸을 덮어 누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순순히 애무를 받아 들이던 여인이 별안간 사나이의 몸을 떠밀며 말한다.
"이것 만은 안되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 만은 안되요!"
하며 부르짖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제 와서, 여자편에서 거부한다고 곱게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김삿갓은 체면 불구하고 우격다짐으로 여인의 다리 틈을 파고 들었다.
그러나 사내가 모질게 덤벼들수록, 여인은 끈덕지게 거부하며 부르짖는다.
 
"삿갓 어른을 위해 이것 만은 안되요.

나는 청상살을 타고난 여자라서 나를 가까이 하셨다가는 큰일나세요."
무당의 예언대로 여인은 자신과 가까이 하는 김삿갓이 죽게 될까 보아,
몸을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소리다.
"무당의 넋두리는 미신에 불과한 것이래두, 그러니 조금도 겁낼 것 없으니 내 말 들어요."
 
여인은 온갖 힘을 다하여 저항해 보았지만, 힘 센 사나이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미 그 사내는 욕정이 화신이 되어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힘에 부친 여인은 어쩔 수 없었던지 온 몸에 힘이 풀리며 몸을 허락하면서 탄식하듯 뇌까린다.
 
"아아, 이 일을 어떡하면 좋아요...."
여인은 몸을 허락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 김삿갓에게 흉악한 재앙이 닥쳐올 것만 같아 무척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상 교접이 시작되자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사나이 몸을 뜨겁게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완벽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마시듯, 김삿갓의  모든 것을 온 몸으로 접수했다.

김삿갓도 그녀의 대응에 흠칫 놀라며, 자신의 뼈조차 녹아 버린 것같은 애액을 

그녀의 몸안에 사정없이 쏟아 넣었다.


50. 만사개유정(萬事皆有定)


휘몰아치는 폭풍이 지나고 나자, 수안댁은 새삼스럽게 불안감에 떨며 호소하듯 속삭인다.
"나같은 계집 때문에 삿갓 어른께서 불행해져서는 절대 안 돼요.
오늘 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할테니, 어서 내 집에서 나가 주세요."
 
김삿갓은 공포에 떨고 있는 수안댁이 측은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넌즈시 달래주는데,
"자네와 가까이 하는 사내는 모두 죽게 된다니까 겁이 나서 그러는 모양이구먼.
그러나 그런 무당의 허튼 수작에 휘둘리지 말고 걱정 말아요.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테니."
"아니에요. 할머니 무당의 말씀은 허튼 소리가 아니에요.
그 무당의 예언은 한 번도 빗나간 일이 없는 걸요."
 
한 번 믿기 시작하면 미신처럼 무서운 것이 없어서,
수안댁의 강박관념은 여간해서 떨쳐 버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삿갓은 어떤 방도든지 수안댁을 공포에서 구출해 내고 싶은 의무감조차 느껴졌다.
그래서 불안에 떠는 수안댁을 꼭 껴안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사람의 운명이 귀신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릴세,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이 무슨 죄라고 재앙이 생기겠냐는 말이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김삿갓은 수안댁의 벗은 몸을 천천히 애무했다.
그러자 처음과 달리, 수안댁은 김삿갓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러면서도 불안감이 쉽게 떨쳐지지 않는지, 한 마디 뇌까린다.
"삿갓 어른께서 아무 재앙도 없으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허어!..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구!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몇 달 동안 나하고 같이 살아 보면 될 게 아냐?"
김삿갓은 수안댁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안댁의 몸을 재차 덮어 눌렀다.
 
두 번째 정열도 첫 번째 못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듯, 두 사람의 섞임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편의 장중한 오케스트라처럼 황홀하게 화합했다.
두 번의 정사로 남녀는 녹초가 되었다.
그들은 벗은 몸을 서로 끌어 안고 달콤한 새벽 잠에 빠져 들었다.
 
"꼬끼오~!"
어느새 창 밖이 밝아왔다.
잠자리에서 깬 두 사람은 서로를 가는 실눈으로 마주 보았다.
김삿갓을 보고 있는 수안댁의 눈에는 까닭모를 불안감이 묻어 있었다.
김삿갓은 여인의 벗은 엉덩이를 만지며 속삭였다.
 
"쓸데 없는 걱정은 집어치우고, 그만 일어나서 밥을 지어 와요.

간밤에 신방을 치렀으니 이제는 신랑이 초례상을 받아야 할 것 아니겠나? 후훗..."
김삿갓의 익살에 수안댁도 마음이 놓이는지 일어나 옷을 추려 입으면서 수줍은 듯 미소를 짓는다.
"조반을 지어 올테니 그동안 한잠 푹 주무시고 계세요."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밥을 짓는 것이 그렇게나 행복한 모양이었다.
얼마후, 두 사람이 겸상으로 조반을 다정하게 먹고 있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왔다.
문을 열고 내다 보니 찾아 온 사람은 조조였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방안으로 들어 오다가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대뜸 농담을 퍼붓는다.
"어럽쑈! 어제 저녁만 해도 두 사람 모두 결혼을 안 하겠다고 우겨대더니,

어느새 신방까지 치르고 초례상까지 받았네 그려.

과부와 홀아비가 만나더니만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은 모양이네?"

김삿갓은 무안해서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허, 과부와 홀아비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네,

없던 마누라가 하룻밤 사이에 생겨난 것은 오로지 자네들 덕택일세. 너무도 고맙구만 그래."
"잘했네 잘했어.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또 이래야만 자네가 우리 마을에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살 게 아닌가."
이렇게 말을 한  조조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밥상을 들여다 보더니,
 
"아니, 수안댁은 하룻밤 사이에 정이 얼마나 깊어졌길래,
새서방에게 영계백숙까지 대접하고 있는가?"
하고 수안댁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수안댁은 얼굴을 붉히며,
"반찬이 하도 없길래 병아리 한 마리 잡은걸요."
김삿갓도 잠자코 있기가 면구스러워,
 
"이 사람아! 영계백숙 한 마리 얻어먹으려고, 간밤에 내가 수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러는가?"
조조는 그 소리를 듣고 배를 움켜잡고 웃으며,
"하하하, 간밤에 자네의 수고가 많았으리라 짐작되네. 그나 저나 허리는 괜찮은가?"
"예끼, 이 사람아!"
"하하하하...! "
 
조조는 이같은 걸쭉한 농담을 한바탕 퍼붓고 나서, 곧 정색을 하며 수안댁에게 묻는다.
"오늘부터 술장사는 그만두어야 할게 아닌가?"
"글쎄요. 아직 그 문제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걸요."
"생각을 안 해보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여보게 삿갓!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 그 문제는 본인의 의사에 맡기는 것이 합당할 것같네."
"그래? 이 친구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는걸."
그러면서 부랴부랴 밖으로 달려나가며 김삿갓에게 당부한다.
"나 어디 잠깐 다녀올테니, 두 사람은 꼼짝말고 기다리고 있게!"
 
김삿갓은 조조가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해서,
"저 친구가 별안간 어디를 다녀온다고 야단이지?"
하고 수안댁에게 물었다.
그러자 수안댁도 고개를 갸웃하며,
"글쎄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하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뒤였다.

조조가 대동계장 제제를 앞세우고, 20여명의 상조계원과 함께 나타났다.
김삿갓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로 깜짝 놀랐다.
"아니, 자네들은 무슨 일로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왔는가?"
그러자 제제가 일동을 대표하여 근엄한 어조로 선언하듯 말한다.
 
"우리들은 자네에게 결혼식을 올려주려고 몰려왔네. 자네가 수절하는 수안댁을 함부로 건드려 놓고

훌쩍 도망이라도 가버리는 날이면 그야말로 우리 마을의 불상사가 아닌가?
더구나 자네의 애매한 태도로 보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러 계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네와 수안댁을

정식으로 부부로 맺어 줄 생각이네. 자네는 설마하니 이제와서 혼인을 못하겠다고는 하지 않겠지?"
 
평소에는 스스럼없이 지내던 친구였지만, 이때만은 제제의 태도가 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계장 제제의 말이 끝나자 다른 친구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네는 복도 많으이. 돈 한푼 안 들이고 혼인식도 올리고 말야!"
"그러게나 말이야, 저 친구 좋아하는 얼굴 좀 보라지!"
하고 제각기 놀려대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김삿갓도 이제 와서는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옆에 서 있는 수안댁조차 까닭 모를 불안에 떨면서도 무척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만사개유정(萬事皆有定)이라, 이것도 피치 못할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든 김삿갓은 마음을 고쳐 먹고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의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네. 고맙네. 자네들의 호의를 받아들임세."
그러자 친구들은 쌍수를 들어 환호한다.
 
"우리 마을에 아까운 과부 하나 없어지게 되었구나."
"수안댁은 복도 많으이, 저 친구가 수안댁 남편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누."
하고 제각기 한 마디씩 놀려대었다.

청춘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