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화가
John Singer Sargent
미국이 낳은 3대 거장중 한 명
그의 인생
미국인으로서 가장 성공한 인물화가 사전트는 1856 년 1월에 이태리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필라델피아 출신의 부모는 주로 유럽에 거주하면서 자녀들과 함께 자주 여행을 즐겼고 자녀들을 자유롭게 키웠으며 홈스쿨링로 음악, 문학, 외국어를 가르쳤다.
어쩌면 사전트는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사전트는 4세부터 드로잉을 시작해서 69세 죽는 날까지 쉬지 않고 드로잉을 했다.
그는 뮤지움에서 유명작품을 모사해보기도 하다가 로마와 플로렌스에서 전문화가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17세에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고 아버지의 도움으로 파리 아틀리에에 가입해 당시 성공한 초상화가였던 카룰루스 듀란에게서 사사를 받았다. 그는 디에고 벨라즈퀘즈의 진보적인 화풍을 따라 직접 보고 직접 그려라를 강조하며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페인팅의 가장 큰 열쇠는 명암과 명암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보는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사전트는 평생동안 이같은 기준을 항상 명심했던 것 같다.
그는 그 아틀리에서 유일하게 에콜데보자르 (École des Beaux-Arts) 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수상경력을 쌓으면서 인정을 받았지만 발, 손, 얼굴에 관한 섬세함과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모습은 카룰루스 듀란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1879 년 카롤루스 듀란을 그린 초상화가 일반인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사전트는 자신의 화풍을 결정짓고 1880 년 대에 들어서면서 여성의 전신을 그리는 인물화 정기전을 열었다.
1884 년 화가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인 [Portrait of Madame X]가 엄청난 혹평을 받으면서, 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런던으로 이주해 이국적인 모습을 한 여성들을 화폭에 담았다. 1887년 로얄 아카데미에 출품한 ‘Carnation, Lily, Lily, Rose’에 대한 일반인들의 열광에 힘입어 1894 년에는 로얄 아카데미의 준회원으로 가입 , 3 년 후에는 정회원으로 승격됐다. 그는 평생 900 점 가량의 오일페인팅과 2000 점 이상의 수채화를 그렸고 수도 없는 스케치와 목탄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그는 1910년이후에 들어서면서 초상화를 접고 풍경화에 몰두했으며 조각에도 손을 댔다.
그의 후기작품에는 자신에 대한 순수함이 묻어나 있다. 그는 인상파 화가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인상파 화풍을 쓰면서 전혀 다른 훌륭한 효과를 얻어냈다.
유럽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미국 국적을 버렸지만 미국을 자주 방문했으며 작품중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 미국내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사전트는 미국인 화가 ‘빅3’ 중 한명으로 소개되고 있다. 작품의 유명성에 비해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남성 육체의 관능성에 대한 민감한 터치를 살려낸 남성누드 작품으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그가 동성애자다 또는 성생활이 문란했다라는 분석을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과 우정을 쌓았으며 학자들은 ‘Lady with the Rose’의 모델인 루이스 버카드와는 불륜관계였다고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는 벨라즈퀘즈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로 분류되고 있다.
그의 동료인 까미으 피사로는 열광자라기 보다는 솜씨좋은 수행가라고는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을 보면 그림에 얼마나 열정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세계
The Daughters of Edward Darley Boit
Oil on Canvas, 1882 , (221.0cm x 221.0cm)
MFA(museum of Fine arts, Boston)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곳에는 나의 유년시절이 숨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빨려들며 나의 과거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의 생생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거대한 크기의 이 작품속 인물은 정말 곁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
사전트는 명암이 주는 신비한 마력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내 눈을 눈부시게 자극한 것은 왼쪽에 서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구석 뒤로 빠져나갈 듯이 서 있는 두 자매와 혼자 놀아도 외롭지 않는 철없는 꼬마소녀 사이 왼쪽에 자주빛 원피스에 하얀 앞치마를 한 소녀가 나의 과거를 여지없이 흔들어놓는다,
혼자가 외롭다는 것을 막 알게 된 나이가 됐지만 소녀에게는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
어른인척 둘이서 소곤소곤거리는 언니들과 말 잘듣는 인형 하나로 만족하고 놀고 있는 꼬마동생과 함께 있으면서 소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서 있는 느낌이다.
사전트는 어떻게 이런 빈틈없는 구성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소녀의 굽슬거리는 머리결을 명암대조를 통해 살려놓았다.
앞치마는 풀을 막 먹인 것퍼럼 빳빳한 질감을 살려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대형 도자기는.MFA에 이 작품 옆에 나란히 놓여져 있어 작품의 생생함을 더해주고 있다.
Madame X (Madame Pierre Gautreau)
Oil on Canvas, 1884 (108.0cm x 206.4cm)
파리여성인 마담 피에르 카트로 초상화는 거의 7피트 (약 2.1m)에 달하는 거대 작품으로 다른 작품과는 달리 기초스케치 작업에만도 수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다.
사전트는 그녀의 아름답고도 완벽한 몸매에 시선을 두게 하기 위해 검은 드레스를 입히고 지역유명인사의 도도함을 보여주기 위해 턱을 약간 치켜든 옆모습을 잡아냈다. 머리끝에서 뒷통수를 지나 목덜미와 어깨, 팔로 내려와 엄지손가락 뒤로 넘어가는 관능의 선이 매우 매혹적이다.
뒷배경도 같은 색깔로 입히기 보다는 음영을 확실하게 넣어 넉넉한 공간이 정말 존재하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잘록한 허리와 투명하다 못해 백짓장같은 하얀 피부 등 세속적인 표현이라는 치명적인 혹평을 받으면서 아무도 사전트에게 초상화를 부탁하지 않게됐다.
사전트는 모델을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작품명을 [Madame X]로 고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 사전트는 이 그림을 가장 아끼는 그림으로 손꼽고 있고 그의 대표작으로 따라다니고 있다.
Carnation, Lily, Lily, Rose
Oil on Canvas, 1886, 153.7cm x 174.0cm)
친구 프레드릭 버나드의 딸을 그린 그림으로 완성하는데 두달이 걸렸다.
작품명은 당시 유명했던 곡명이며 다. 이 그림이 런던의 로얄 아카데미에서 전시되고 호평과 함께 테이트 갤러리( The Tate Gallery—the national gallery of British art)가 이 작품을 구매하면서 다시 소비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환상의 세계로 이끌리는 착각이 든다.
비현실적으로 떠 있는 백합들이 동양식 랜턴과 함께 몽상적인 분위기를 창출해 내는 것은 모델이 하얀 드레스를 입은 서양소녀들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랜턴 안의 붉은 빛이 새벽 미명이라기 보다는 붉은 석양이 막 물들기 시작한 때라고 말해주는 것같다.
두 소녀가 해가 지면서 활동한다는 요정을 연상케 해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꽃이 만발한. 6월인데도 잔디는 새순이 나기 전의 겨울색깔에 물들어있어 어울리지 않는 쓸쓸함을 배경으로 던져놓고 있다.
사전트의 작품 속 인물은 대담하게 살아있으며 코멘트를 달만큼 괴짜인 면이 있어 어떤 작품도 유명세를 타게 됐던 것 같다.
Lady Agnew
Oil on Canvas, 1893 (100.3cm x 125.7cm)
사전트의 인물화를 보면 유독 살아있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든다.
19세기 유명한 배우였던 에드윈 부스는 “사전트에게 초상화를 부탁하기 전에 먼저 당신의 영혼을 사포로 박박 닦아내라.
그는 영혼까지 화폭 위에 그려넣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화가와는 달리 모델의 영혼까지 읽어내는 예민한 눈과 영혼까지 옮겨 그려내는 섬세한 손을 갖고 있다. 연보라의 허리리본을 멘 이 부인은 입술을 꼭 다물고 정면을 응시하는 정숙한 표정으로 소파를 살짝 엇겨 앉아 요염하면서도 관능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얼굴과 포즈의 불균형이 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투명한 이마와 앞가슴이 옷감과 일체가 되어있는 것 같으면서 꼬고 앉은 다리가 엷은 반투평 옷감 너머로 훤히 보이는 것같은 착각마저 일으킨다.
사전트처럼 초기 드로잉 작업을 적게 하는 화가는 드물지만 그는 몸짓 , 비율, 내부구조, 공간적 개념에 대한 느낌이 정확했다.
뿐만 아니라 색감과 붓질에 대해 마법과 같은 능력을 타고 났다.
엘릭 덴커 (National Gallery of Art)는 드로잉이 모든 것의 기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드로잉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그것은 어디를 가든지 한상 드로잉을 하고 메모를 적는 습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모델의 머리를 어느 쪽으로 향하게 할까만 결정되면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드로잉 기술이 매우 뛰어나 기초작업에 그리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됐으며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섬세한 드로잉을 그릴 수 있었다.
그에게는 붓으로 드로잉하는 게 제 2의 본성이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사전트는 스스로 “펜으로 그리는 것처럼 거의 무의식적으로 붓으로 즉각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Gassed
oil on canvas, 1919, 91 x 240½.
1916년 사이에는 보스턴 시립도서관 3층 벽화 ’The Triumph of Religion‘을 작업하면서 오일 페인팅과 목탄화 작업을 병행해 나갔다.
벽화작업을 하며 그는 구성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보였으며 이 후에는 남성누드에 관심을 보이고 수백장의 누드화를 그려냈다.
1918년에는 영국전쟁기념위원회로부터 영국군과 미국군이 함께 싸운 것을 주제로 한 작품을 의뢰받아 가스공격으로 의료텐트에서 치료받고 있는 100여명의 남자들을 모집해 군중을 그리는 연습도 했다.
이듬해에 ‘Gassed’를 완성, 로얄아카데미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Lady Elizabeth Bowes-Lyon,
1923
그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목탄 드로잉에 관심을 보였다. 한 번 앉으면 1-3시간내에 작품을 끝내버리곤 한 그는 더 이상 초상화 사업을 하고 싶지 않았고 자매들에게 지쳤으며 그들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초상화 고객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는 결국 초상화 의회를 목탄화로 해주었다.
15년 동안 800 작품을 만들어냈다. 작품들은 대부분이 명암을 극명하게 살려냈으며 고도의 노동을 투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생생함을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영혼과 심미감을 포착해내고 얼굴과 하이라이트와 강조 부분을 재빨리 파악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Lady with the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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