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55. 다시 죽장에 삿갓 쓰고
천동마을을 떠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은 지난 일년간의 일로 오만가지 감회가 무량했다.
애당초 방랑에 나서게 된 것은 인간사로 구애를
받지않고
허공을 떠도는 한 조각 구름처럼 자유 자재로 살아 가자는데 있었다.
처자식과의 인연조차 끊어 버리고 표연히 방랑 길로 나선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세상 일은 결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지난 일년 동안은 수안댁과 생각지도 못한 결혼 생활을 해오지
않았던가.
이제와서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수안댁과 결혼을 했던 일도 꿈만 같았고,
그런 생활이 일 년 남짓하게 계속되다가
갑자기 사별(死別)을 하게 된 것도 꿈만 같았다.
인생이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남은 모든 것과의
헤어짐이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 죽음이라면,
어느 정도는 애를 써보고 헤어짐을 받아 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다소나마 위안을 받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 년간의 수안댁과의 짧은 결혼 생활은 두 사람 사이에서 복잡한 사연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멀쩡해 보이던 여인이 미신의 망령에 사로잡혀
공포감에 떨던 일도 흔히 보는 일이 아니려니와,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에서
남편 대신에 목을 매 죽은 것도 몸서리 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처럼 복잡했던 일도 일단 지나고 나니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하기만 하다.
김삿갓은 구월산과 평양을 가볼 생각으로 발길을 서쪽으로
돌렸다.
산길을 걸어 가노라니, 바람은 차도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땀을 식히려고 가던 길을 멈추고 풀 언덕에 주저앉아 삿갓을 벗어
들고
눈 앞에 펼쳐진 초겨울의 유리알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쓸쓸한 자신의 마음을 시 한 수에
담았다.
生從何處來
생종하처래
인생은 어디로 부터
오며
死向何處來
사향하처래
죽어서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흩어짐과
같구나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뜬구름은 본래 실태가 없으니
生死去來亦如是
생사거래역여정
삶과 죽음 역시 그와 같겠지.
산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새소리를
들어가며 산을 넘고 언덕길을 굽이굽이 감돌아 내려가니 산골짜기에 조그만 주막이 하나 있었다.
문 앞에 세워놓은 말뚝에 야몽(夜夢)이라는
두 글짜가 써있는 주막이었다.
김삿갓은 주막 마루에 걸터앉아 주모에게 술을 청하며 물었다.
"이 집을 들어오다 보니,
야몽이라 쓴 말뚝이 있던데, 그 야몽이란 어떻게 나온 말인가?"
주모가 술상을 갖다 주며
"나도 모르지요. 간판도 없이 술장사를
시작하는 첫날, 어떤 점잖은 첫 손님이
마수걸이 외상술을 잡숟고 가시면서 주막 이름을 야몽으로 하라고 일러 주더군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술장사를 시작하는 첫날 첫 손님부터 외상술을 주었다니, 그래 가지고서야 장사가
되겠는가?"
"장사가 되든 말든, 술을 자시고 싶은데 돈이 없다는데 어떡해요.
그러니 인심을 좀 쓰기로 설마하니 밥이야
굶겠어요?"
주모는 얼핏 보기에 수안댁과 인상이 비슷했는데 대답 또한 천하태평이었다.
"마수걸이 외상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 이름은 알고 있는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름을 어떻게 알겠어요."
"하하하하... 이름도 모르면서 외상을 주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외상값은 언제 받으려나?"
"갖다 주면 받고 안 갖다 주면 못 받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술 한 잔 선심썼다고
여기지요."
가뜩이나 수안댁을 닮아서 호감이 갔었는데, 마음을 쓰는 통이 넉넉한 주모를 만나
김삿갓의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해서, 짖궂은 소리를 해보는데,
"혹시 내가 외상술을 먹겠다고 해도 외상을 줄 수 있겠는가?"
"돈이
없다는 말씀만 하세요. 그러면 외상도 드리지요."
주모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허기는 그 양반은 개업하는 첫날
첫 손님이었는데, 마수걸이 외상술을 마시기가 미안했던지,
떠날 때에 저 바람벽에 시 한 수를 써주고 가셨다우. 저기 보이는 저 시가
그
양반이 써 주신 시라오."하며 벽에 씌어 있는 시를 가리켜 보았다.
김삿갓이 주모가 가리킨 바람벽을 보았더니,
첫
눈에 보아도 기막힌 명필이었고, 제목은 야몽(夜夢)이었다.
鄕路千里長
향로천리장
고향길은 천리 밖 멀고 멀은데
秋夜長於路
추야장어로
가을밤은 그 길보다도 더욱
길구나
家山十往來
가산십왕래
꿈속에선 고향에 갔다
왔건만
詹鷄猶未呼
첨계유미호
깨어보니 새벽 닭이 울기도 전이네.
낙관(落款)이
산운(山雲)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본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산운 이양연(李亮淵)은 당대의 유명한 풍류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여보게!
저 어른이 언제 여기를 다녀가셨는가?"
"어머! 손님은 저 분을 알고 계세요?"
"알구말구, 직접 만나 뵌 일은 없어도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이신걸.
저 어른이 언제 여기를 다녀가셨는가?"
"내가 술장사를 시작했을 때 다녀가셨으니까, 벌써 7년 전
일인걸요.
그때도 60이 넘어 보였으니까 지금쯤은 돌아가셨을 거예요."
"만약 돌아가셨다면, 자네는 외상값을 영원히 못 받게
될 것 아니겠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 돈을 못 받는다고 죽을 형편은 아니니까요."
"가만있자. 그 어른 외상값이
얼마인가? 그 돈은 내가 갚아주기로 하겠네."
그리고 김삿갓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모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 어른이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라면 저는 그 외상값을 받지 않겠어요."
"내가 외상값을 대신 갚겠다는데 어째서 받지
않겠다는 말인가?"
"외상값이래야 몇 푼 아닌걸요. 그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처럼 훌륭한 분한테 외상을 지웠다는 사실만 하더라도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어요!
안그래요? 호호호..."
주모는 호탕하게 웃어 젖힌다.
마음이 유쾌할 때면 호탕하게
웃어 젖히던 버릇도 어딘가 모르게 죽은 수안댁과 비슷해 보였다.
(수안댁도 이와 같은 경우였다면 과연 외상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모르면 모르되, 수안댁도 지금 저 주모처럼 꼭 그랬을 것만 같았다.
56. 오쇠합기폐(吾衰闔己閉)
김삿갓이 황주(黃州). 봉산(鳳山). 신천(信川). 안악(安岳) 등을 거쳐, 구월산(九月山)이 있는
은률(殷栗) 땅으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계절이 어느새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이었다.
황해도는 워낙 가는 곳마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이를 두루 살펴보다 보니 걸음이 더뎠던
것이다.
구월산은 황해도의 주봉을 이루는 명산이다.
주변에
신천, 안악, 은률, 문화(文化), 풍천(豊川), 송화(松禾), 장연(長淵), 장련(長連) 등등..
많은 고을이 산재하여 있는 것만 보더라도
구월산이 황해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산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사서(史書)에는, 우리 배달 민족의
시조인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등이
구월산에서 태어나셨다고 전해온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구월산에는 많은
거석(巨石) 문화 유적이 산재해 있다.
김삿갓은 구월 산성에 올라가 보았다.
성의 형태와 구조가 여간 절묘하지
않다.
거석으로 쌓아 올린 성의 모양은 커다란 배와 같은데,
둘레가 1만 5천 척에 높이가 15척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산성이었다.
성안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여러 갈래의 물이 성밖으로 흘러 나갈 때에는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서 거창한 폭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단풍이 무성한 산길을 걸어 성안으로 들어와 보니 구월산 상상봉이 아득한 하늘가에 높이 솟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산 꼭대기에는 단군 시대의 천제단(天祭檀)도 있었다.
김삿갓은 다행하게도 구월산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을철에 찾아왔기
때문에
실감나는 구월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황해도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해주(海州)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어 이번에는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다.
해주 고을에 발을 들여놓자, 무엇보다도 김삿갓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거유(巨儒) 이율곡(李栗谷)과
동기(童妓) 유지(柳枝)와의 연정(戀情) 설화였다.
이율곡이 말년에 황해 감사로 와있을 때, 유지라는 동기를 사랑한 일이
있었다.
유지는 열세 살밖에 안 되는 동기였지만, 그녀 역시 이율곡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그러나 이율곡은 몸이
몹시 쇠약한데다가, 유지의 나이가 너무 어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몸은 범하지 않았다.
사랑하면서도 몸만은 범하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율곡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인가.
율곡이 유지를 두고 읊은 시를 보면 그간의 심정을 족히 가름할 수
있다.
弱質羞低首 약질수저수
어린 몸 수줍은 듯 고개
수그려
秋波不肯回 추파불긍회
추파를 보내도 받아들이지 못하네
空聞波濤曲 공문파도곡
마음은
부질없이 설레건만
未夢雲雨臺 미몽운우대
운우의 정은 풀지 못했네.
爾長名應檀
이장명응단
너는 자라서 이름을 떨칠 것이나
吾衰闔己閉 오쇠합기폐
나는 너무도 늙어 사내가
아니로다
國香無定主 국향무정주
미인에게는 정한 임자가 없는 법
零落可憐哉 영락가련재
장래에
영락할 것이 가련하구나
노쇠한 선비와 앳된 동기와의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은 애간장이 타는 일이었을
것이다.
율곡은 동기 유지를 두고 이렇게 한탄하기도 하였다.
天姿綽約一仙兒 천자작약
일선아
타고난 그 자태 선녀처럼 아름다워
十載相知意能多 십재상지 의능다
사귄지 십 년에 사연도
많았는데
不是吾兒腸木石 불시오아 장목석
너도 나도 목석은 아니건만
只緣衰弱謝芬華 지연쇠약 사분화
다만 몸이 쇠해 사양했을 뿐이로다.
이렇게 율곡이 유지를 지극히 사랑을 하면서도 자신의 몸이 약해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은,
사내로써는 너무나도 지독한 비극이었던 것이었다.
57. 서산대사
김삿갓은 영변 약산을 돌아 보며, 약산이야 말로 천혜의 명산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또 약산동대는 옛날부터 진달래의 명소로 이름난
곳이다. 진달래꽃이 한창 피어날 때면,
산속을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과 옷색깔이 진달래빛으로 붉게 물들어,
마치 신선이 도원경(桃源境)을 거니는
것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아쉽게도 봄철이 아닌 가을철에 왔기 때문에
진달래의 절경을 구경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약산성은 이조 태종 11년에 도절제사(都節制使) 신유정(辛有定)이 왕명을 받들어 축조한 성으로,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둘레가 이십 리가 넘는 거대한 규모이다.
게다가 성안에는 곳간이 서른네 칸이나 있어, 여러 고을에서 모아들인 조세미(組稅米)를 보관하여
군량(軍糧)으로도 쓰고, 빈민을 먹여 살리는 구휼미(求恤米)로도 써왔던 것이다.
약산성 축조가 완성된 태종 16년에, 당시에
도체찰사(都體察使)였던 황희(黃喜)는
임금에게 글을 올려, "약산성은 하늘이 내려 주신 난공불락의 요새이오니,
이 성을 북방 수비의 군진(軍鎭)으로 지정해 주시옵소서"하고 청원하자,
임금은 기꺼이 윤허하였다. 그리하여 약산성은 그때부터 북방 수비의
요충지가 되어온 것이다.
성이 완공되기 이전에는 북방 오랑캐들이 수시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약탈을 해왔었다. 그러나 약산성이 완공된 이후로는
감히 침범을 못 해왔으므로, 백성들은 안심하고 성안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오랑캐의
침범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최윤덕(崔潤德)이 도절제사로 있을 때에 북방 오랑캐의 두목인 이살만(李撒滿)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약산성으로 쳐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들은 모두 참패를 하여, 결국은 성하에서 머리를 조아려 항복을 한 일도 있었다.
약산성은 이처럼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인지라,
백성들은 약산성을 철옹성(鐵壅城)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도 난공불락의 대명사로 쓰이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김삿갓은 약산성을 모두 돌아 보고 나서, 발길을 묘향산으로 돌렸다.
묘향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명산의 하나다.
그래서 서산대사가 일찌기 이 세 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 일이 있었다.
금강산은 빼어나고, 한라산은 장엄하고,
묘향산은 빼어나고 장엄하다.>
영변에서 묘향산으로 가려면 첩첩태산을 백삼십 리를 걸어 넘어야 했다.
길은 가도가도
험준하기만 하였다.
산속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시 태산준령을 걸어 넘으려니 숨이 가빠 걷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곧
묘향산을 구경할 수 있다는 설레임이 앞선 탓인지 가슴은 설레왔다.
그러기에 자기도 모르게 즉흥시 한 수가
읊조려졌다.
平生所願者何求 (평생소원자하구)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었던고
每擬妙香山一遊
(매의묘향산일유)
묘향산을 한번 구경하는 일이었노라
山疊疊千峰萬仞 (산첩첩천봉만인)
산은 첩첩 모든 봉우리
한없이 높고
路層層十步九休 (노층층십보구휴)
길은 층층 열 걸음에 아홉 번은 쉬어야 하네.
묘향산에는
보현사(普賢寺)를 비롯하여, 절이 자그마치 삼백육십 개나 있었다.
고려 말 이색(李穡)은 그의 기문(記文)에서, "묘향산에는 향나무가 유난스럽게 많다"고 하였다.
이렇게 향나무가
많기에 산의 이름도 묘향산이라 불린 것이 아닌가.
묘향산은 산세가 험준하고 가는 곳마다 사찰이 많아, 어느 산골짜기나 비경(秘境)이
아닌 곳이 없었다.
게다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물소리에 간간이 염불 소리와 목탁 소리가 어우러져,
묘향산은 인간 세계가 아니라는 느낌조차
들었다.
김삿갓은 묘향산 속으로 들어서며, 우선 보현사부터 구경하기로 하였다.
보현사는 규모가 웅대하기로는 금강산의
장안사(長安寺)나 유점사(楡岾寺)의 유가 아니었다.
법당 하나만도 육백 칸이 넘는 어머어머한 거찰(巨刹)인데,
절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는 수 많은 산봉우리들은 한결같이 웅장하고 숭고하여,
자연 환경만으로도 부처님의 위혁을 무언중에 보여 주고 있었다.
김삿갓은 묘향산을
구경하며, 서산대사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그는 태백산 기슭인 안주(安州)에서 태어나
묘향산 속에서 자랐고, 수도(修道)와 득도(得道) 또한, 묘향산에서 하였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를 서산대사라는 칭호로 불러 오고 있는
것이다.
선조대왕 때에 임진왜란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산중에서 수도에 전념하고 있던 서산대사는 결연히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사찰에서 모여든 1700여 명의 젊은 승려들로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이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달려가 모란봉
싸움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때, 평양에 몽진(蒙塵) 중이던 선조대왕은 서산대사에게 이렇게 하문하였다.
"지금 나라
형편이 이 지경인데, 승려인 그대가 능히 나라를 구할 수가 있겠는가?"
서산대사가 즉석에서 대답했다.
"나라가 망하면
불도(佛道)를 어찌 유지할 수가 있으오리까.
그러하니 늙고 연약한 승려들은 절에서 부처님을 봉양하게 하는 것이 도리이옵고,
소승은 젊은 승려들과
함께 왜적을 무찌르겠사옵니다."
이때 서산대사의 나이가 이미 62세였으니,
실로 그의 기개가 얼마나 웅건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서산대사가 승군으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지자, 평소에 그를 존경해 오던
젊은 승려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와, 승군의 수효는 오래지 않아 오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에 따라 아군의 사기가 크게 앙양되었음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었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적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아군은 가는 곳마다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게 되었다.
승려의 몸으로
전쟁에 직접 가담하여 커다란 전공을 세운 것은 일찍이 어느 나라 불교사에도 없는 일이므로,
이는 불교사에서 매우 특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일이다.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 중이던 사명대사와 처영(處英) 스님도
서산대사에 호응하여, 적에게 양면 공격을 퍼부음으로써, 마침내 왜적을 궁지에 몰아 넣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서산대사의 나이는 이미
69세였다.
선조대왕을 한양으로 모시고 올라온 서산대사는 대왕에게,
"신은 이미 너무 늙었으므로, 모든 군무를 사명과
처영에게 맡기고 노승은 묘향산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하고 청원을 하니, 선조대왕은 그의 전공을 크게 치하하며, 서산대사에게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 총섭, 부종수교, 보제등, 계존자"라는 특별
칭호를 내리며, 귀산(歸山)을 허락하였다.
서산대사는 전쟁에 있어서도 전략과 전술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서산대사를 다음과 같은 시로 칭송한 일이 있다.
無意圖功利
(무의도공리)
공리를 생각하지 않고
專心學道禪 (전심학도선)
전심으로 선을 배웠네
令聞王事急
(영문왕사급)
이제 나라가 위급함을 알고
摠攝下山嶺 (총섭하산령)
총섭이 산에서 내려오셨네.
58. 덧없이 지내 온 반생
보현사의 늙은 스님은 김삿갓에게 서산대사의 이야기를 들려 주다가,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만약 임진왜란 때에 서산대사와 같이 위대한
인물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는 이미 그때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면 불교가 어디 있으며,
우리 겨레가 목숨인들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소이까.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서산대사야말로 우리 겨레가 영원히 우러러 모셔야 할 거룩한
어른이시지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홍경래에게 어이없이 항복한 할아버지의 과거가
불현듯 떠올라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조상의 죄는 자손만대에 이른다는 불교의 섭리가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김삿갓은 서산대사가 입적하기 직전까지 거처했던 원적암(圓寂菴)에도 들러 보았다.
서산대사는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그
암자에 기거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그리고 서산대사는 운명하기 직전에, 아래와 같은 최후의 임종게(臨終偈)를
읊었다.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구름이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북쪽의 계절은 유난히 빠르다.
김삿갓이 희천(熙川)을 지나 강계 땅으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아직 입동절도 아니건만, 아침 저녁으로는 얼음이 얼기 시작하였다.
옷을 솜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계절에 맞춰 꼬박꼬박 옷을 갈아 입을 형편이 못되었다.
당장 추위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입고 있는 옷구멍이나마 자기 손으로 꿰매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김삿갓은 해진 옷을 기워 입으려고 일찌감치 객줏집에 들었다.
그리하여
바늘에 실을 꿰려고 했으나, 바늘귀가 아물거려 좀처럼 실을 꿸 수가 없었다.
(내 눈이 어느새 이렇게도
어두워졌는가?)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등잔 앞에서 책을 읽으려고 했을 때에는
눈이 아물거려 <노(魯)자와 어(魚)>자를 분간하기 어렵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이랴, 옷에서 이를 잡으려 했으나, 눈이 어두워서 이를 찾아 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생각하면 기가 막힌 노릇이고 처량한 신세였다.
김삿갓은 자신의 허망한 인생이 너무도 처량한 기분이 들어,
즉석에서 안혼(眼昏)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한 수 읊어
갈겼다.
向日貫針絲變索 (향일관침사변색)
별을 보고 실을 꿰도 바늘귀를
모르겠고
挑燈對案魯無魚 (도등대안노무어)
등잔 앞에서 책을 펴도 노와 어를 혼동하네
春前白樹花無數
(춘전백수화무수)
봄도 아닌 마른가지에 꽃이 핀 듯 보이고
霽後靑天雨有餘 (제후청천우유여)
갠 날도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것 같구나.
揖路小年云誰某 (읍로소년운수모)
길에서 인사하는 아이는 누구인지
모르겠고
探衣老蝨動知渠 (탐의노슬동지거)
옷을 뒤져 보아도 움직여야 이를 아네
可憐南浦垂竿處
(가련남포수간처)
가련타 이 늙은이 낚싯대 드리워도
不見風波浪費躇 (불견풍파양비저)
물결이 보이지 않아 미끼만
빼앗기고 만다.
저녁을 먹은 뒤, 상투를 새로 틀려고 거울을 들여다 보다가,
김삿갓은
자기 머리가 너무도 희어진데 적이 놀랐다.
(아니, 어느새 내 머리가 이렇게도 반백이 되었단 말인가?)
머리카락을 헤집고
다시 살펴보니, 검은 머리보다도 흰 머리가 훨씬 많아 보였다.
김삿갓은 또 다시 처량한 느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리하여 덧없이 지내
온 반생을 회고해 보며, 즉석에서 백발한(白髮恨)을 한 수 읊었다.
嗟平天地問男兒
(차평천지문남아)
넓고 넓은 천지간에 대장부 사나이야
知我平生者有誰 (지아평생자유수)
내 평생 지낸 일을
뉘라서 알 것인가
萍水三千里浪跡 (평수삼천리랑적)
삼천리 방방곡곡 부평초로 떠돌아서
琴書四十年處詞
(금서사십년처사)
사십 년 긴긴 세월 글과 노래 허사였네.
靑雲難力致非願 (청운난력치비원)
부귀영화
어려워 바라지도 않았으니
白髮惟公道不悲 (백발유공도불비)
나이에서 오는 백발 슬퍼하지 않노라
驚罷還鄕神起坐
(경파환향신기좌)
고향 꿈을 꾸다가 문득 놀라 깨고 나니
三更越島聲南枝 (삼경월도성남지)
한밤중에 우는
소쩍새는 고향 그리워 하누나.
김삿갓은 고향 꿈이나 꾸어 보려고 불을 끄고 잠을 청해
보았지만, 마음이 산란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추억의 소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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