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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7

박연서원 2019. 2. 7. 10:16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나그네 인생


28. 다 잊고 고향 영월로


김삿갓은 모든 것을 다 잊고 고향에 갈 결심을 굳게 하였다.
옛날 걸어온 그 길을 부지런히 걸어 보름만에 강원도 땅을 밟았다.
가을도 깊어 이제는 조석으로 찬서리가 내려 겨울을 재촉하는 무렵이었다.
 
늦은 가을 고향 산천은 이미 낙엽이 지고 오곡을 거두어 들인 전답은 황량하기만 했다.
삿갓은 며칠을 더 걸어 영월땅 고향 마을에 당도했다.
벌써 해는 지고 황혼이 깔린 뒤라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삿갓은 금의환향도 아닌데 차라리 해가 져서 어두운 것에 마음이 편했다.
 
삿갓은 초라한 초가집 사립문을 가만히 밀고 들어섰다.
집은 사년 전 떠날 때보다 더 낡고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마음은 크게 불러야겠다고 했지만 정작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작게 나오고 말았다.
부엌 쪽에서는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는데 아내는 지금쯤 설겆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머니!"
 
이번에는 조금 힘을 주어 불렀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아내가 주발 하나를 든 채
"누구세요?"
하고 다가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음성이었다.
"나요 나...그동안 잘 있었소?"
"에그머니나!"
 
아내는 사년만에 만나는 남편을 보고 이렇게 외마디 소리만 칠 뿐 장승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 어머니는 안녕하시오?"
".....네."
 
아내는 겨우 그렇게 대답하고 그때서야 앞장서 방으로 들어가서 등잔불을 댕겼다.
불빛에 언뜻 보이는 아내의 모습은 그동안 너무도 고생을 한 탓인지 더 초라하고 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에 야위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소?"
"동네 내려 가셨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아내의 음성은 울음이 섞인 목멘 소리였다.
삿갓도 눈시울이 붉어져 더는 말을 못하고 있다가 불현듯 형의 내외가 생각나 물었다.
"형님은 어디 가셨소?"
 
"....돌아가셨어요 그만...."
아내는 북바치는 설움을 참지 못한 채 그렇게 말하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뭐... 형님이?"
삿갓은 너무도 의외였다.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형이었다.
역시 허약한 탓으로 작년 봄에 세상을 떠났다고 아내는 말을 이었다.
 
더욱이 불쌍한 것은 형수였다. 시집온지 삼년 만에 아무 소산없이 남편이 건강해지면 오겠다고 친정에 가서는 결국 청상과부가 된 것이 아닌가.
삿갓은 방에 앉지도 못한 채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에 어쩔줄 몰랐다.
"앉으세요. 제가 동네에 가서 어머니랑 익균이를 데리고 올께요."
 
"익균이가 누구요?"
"참 모르시겠네요. 당신 아들이지 누구예요?"
"아 참 그렇던가?"
삿갓은 아들의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아내가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을 때 집을 떠났으니..
 
"돌아가신 큰 아버지가 지어 주셨어요. 날개 익(翼)자를 써서 익균(翼均)이라고요."
"...이름도 괜찮군."
그때 마침 어머니가 마을에서 돌아와서 방에서의 인기척을 듣고 물었다.
 
"누가 왔냐?"
그러면서 문을 연 노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희미한 불빛에서 보자,
다시 한번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러더니 놀라 눈이 둥그래지며,
"아니? 네가...."
하고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 불효자식이 이제야 왔습니다."
삿갓은 절을 넙죽 하면서 죄스런 마음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래 어디를 다녔기에 그동안 소식이 없었니, 네 형은 그만..."
노인은 말을 더는 못하고 다시 울음이 터졌다. 삿갓도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 뵈올 낯이 없습니다."
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래, 몸성히 돌아 왔으니 다행이다만, 원 사람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
 
삿갓은 달리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서 저녁 차려라!"
아직도 우두커니 서있는 며느리에게 다소 마음을 진정한 노인이 이르면서,
"참, 익균아. 네 아비다, 절해야지."
하고 어깨 너머에 영문 모르고 서있는 손자를 앞으로 끌어 세웠다.
 
삿갓은 그제서야 아이를 보았다.
"그래 네가 익균이구나."
희미한 등잔불 아래 자기 모습을  닮은 사내놈이 토실토실 살이 올라 귀엽게 보였다.
"자..네 애비라니까, 절 좀 하라니까..."
 
하지만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절을 하라니까 꼬마가 달갑게 절을 할 리 없었다.
아이는 금방 울상이 되어 할머니 품을 파고들며 울음을 터트린다.
"오냐..그만둬라. 원..아비도 모르고..."
"애가 네 살 되었나요?"
"그렇지..만 사년이 다 되었구나."
모자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다.
 
삿갓도 금강산으로 해서 안변, 문천, 함흥, 단천을 거쳐 길주, 명천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대강의 경로를 말씀드렸다.
아내는 서둘러 저녁상을 차려들고 왔으나 가난한 집에 반찬인들 별스러운게 있을 리 없다.
"내일은 닭 한 마리 잡자!"
어머니는 쓸쓸한 얼굴로 말하며 그래도 돌아온 아들이 대견했던지 자꾸 넘겨다 보았다.
 
얼마후 밤이 이슥해서야 삿갓은 사년 만에 아내와 나란히 누웠다.
자연히 아내의 입에서는 원망의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원 세상에..그렇게 소식도 없이 나가 돌아다니는 양반이 어디 있어요?"
"그러게나 말이오. 할 말이 없구려."
"저는 영 안돌아오시는 것 아닌가 걱정되어 밤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허.. 산 사람이 안 올리야 있겠소"
"정말..이 어린 것만 없었더라면...." 
"오..?  왜 어린 것만 없었더라면 개가라도 하려고 그랬나?"
"아유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그럼."
"정말, 목이라도 매고 죽어버리려 했지 뭐예요!"
"허허, 그래? 그러니 다 삼신 할머니가 당신을 살리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 아닌가...?"
 
"그래 어딜 그렇게 다니셨어요.."
"참 많이도 다녔지...금강산으로 함경도로...."
"이젠 다시는 안떠나시죠?"
"글쎄 두고 봐야지."
"또 나가시게요?"
"허허.. 다음 번에도 나갈 양이면 또 아들이나 하나 심어주고 나가든지 허지!"
"아유 그럼 이번에는 저도 따라 나설래요."
"허어..아녀자가..그런 소리 그만하고 잡시다."
 
"잠이 와요? 그동안 익균이 놈이 왜 난 아버지가 없느냐고 물을 때는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아요?"
아내는 돌아 누워서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삿갓은 난처했다. 그러면서 아내를 달랠 방법이 묘연했다.
"허어..이젠 그만 좀 하오..낸들 그러구 싶어서 돌아다니다 왔겠소?"
아내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삿갓은 아내를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워낙 오랫만에 남편의 손이 닿자 아내는 처녀처럼 몸을 떨기까지 했다.
그런대로 아내의 몸은 포동포동했다.
 
"당신 객지를 나다니며 외도도 많았겠지요?"
아내는 몸을 허락하면서도 한 마디 했다.
삿갓은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아내의 말에 순순히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허..무전에 걸식을 하는 놈이 외도는 무슨 외도를 했겠소? 괜한 소리를 하는구먼!"

약한게 여자의 마음이라...
 
무전걸식이라는 삿갓의 말에 아내는 이렇다 할 대꾸를 못한 채 방법조차 잊어 버린 것같은
부부간의 이불속 행사가 낯선 듯, 남편의 몸을 꼭 쥐고 부르르 떨기만 하였다.
 
그렇게 사년만에 만난 부부의 분홍빛 밤은 깊어만 갔다.


29. 고향에서 훈장 삼년


이튿날 이른 아침 삿갓, 아니..병연은 아우 병호의 안내로 뒷산에 올라 형의 무덤에 성묘를 하고
모처럼 고향의 마을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병호야, 네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형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니?"
 
아우 병호도 장가를 가고 분가를 한 뒤지만 집에 와 들으니 농삿일은 그 아우가 모두 보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제 생각으로는 형님이 집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형님은 형님대로 생각이 있으시니
제가 어찌 형님 뜻을 좌우하겠습니까?"
"글쎄 말이다. 뜻이라는 것이 별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방랑 생활을 하니까 세상의 번뇌는
잊을 수 있더구나."
"형님, 그래도 아주머니나 어머니가 불쌍해지니 집에 계셔야죠."
"허긴..그래서 우선 온 것 아니냐?"
형제는 산을 내려오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을 먹고 난 병연은 우선 글방에 들려 자기를 가르쳐준 스승을 찾았다.
백발이 눈에 띄게 더 성성해진 스승은 크게 반가워했다.
"아니 이게 병연이 아닌가?"
"네...그간 무고하셨습니까?"
"허..언제 돌아왔나?"
"어젯 밤에 돌아왔습니다."
"그래 돌아다니며 마음 좀 추스렸는가?"
"이곳 저곳을 정처없이 다니며 세상구경을 했습니다."
"어디를 돌아 보았나?"
"네, 금강산으로 해서 함경도 길주 명천까지 다녀 왔습니다."
"암..사람은 그렇게 객지 바람을 쐬야 듣고 배우는 것도 많으니!.."
"뭐..별로 배운거야 있겠습니까?"
"그동안 자네 집도 형이 타계하고 변화가 많았었지?"
"네, 오늘 아침 산소에 다녀 왔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내 글방에 와서 아이들이나 가르치게. 난 도무지 나이가 들어서 이것도 이젠 못하겠네..."
"원..선생님두 이제 환갑이 조금 지나셨는데..."
"아니야 자네같은 제자가 좀 해주었으면 해..."
"같이 수학하던 동학들 소식은 있습니까?"
"이제는 모두 농사나 지으며 잘들 살고 있지."
"제법 어른티가 나겠군요."
"암..모두 가장들 아닌가?"
 
병연은 옛 스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또 찾아 뵙겠다는 인사를 한 뒤

마을로 들어가서 옛 글방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각별하게 지낸 친구와 모처럼의 회포를 나누면서

그 친구의 주선으로 그의 집 사랑에 옛날 글방 동학들이 모여 술 한상이 벌어졌다.
 
"허, 병연이 죽은 줄 알았다."
"그놈의 백일장이 생사람 잡았지."
"그래 금강산 절경이 그렇게나 기막히다며?"
친구들은 반가워하면서 묻는 말도 많았다.
이렇게 마을의 동학들은 함께 술에 취하고 흥에 겨웠다.
 
병연이 여기저기 다니며 걸식하던 얘기, 서당 훈장하고 싸운 이야기 등 구경하며 다닌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자 그 중 한 친구가
"그 훈장 혼내준 글 하나 소개해 보아라"하며 조른다.
병연은 몇 번 사양을 하다가 함경도 어느 서당에서 훈장을 혼내준 다음과 같은 글을 소개하여 좌중을 웃겼다.

두메 구석에 완고한 백성이 고약한 버릇이 남아서
문장 대가를 함부로 욕하며 허풍만 떠벌리는구나
조그만 조개비 잔으로 바닷물을 어찌 측량할 수가 있으며

쇠 귀에 경을 읽는 격이니 어찌 글의 뜻을 알겠냐
서속이나 훔쳐먹는 산골에 간악한 쥐같은 네놈이요
구름을 타고 넘는 붓끝에 용을 날리는 내로다
마땅히 볼기를 쳐서 죽일 죄이로되 잠시 용서하노니
다시는 어른 앞에서 버릇없는 행동을 하지 말지어다.
      
좌중은 모두 허리를 잡고 웃으며 다시 한번 병연의 재주를 아깝게 생각했다.
이렇게 고향에 온 병연은 삼년 동안이나 자기가 배운 서당에서 훈장 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고향에서의 안일한 생활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병연은 다시, 방랑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생리이며 숙명인지 모른다.
방랑할 때 쓰던 삿갓과 죽장을 볼 때마다 바람과 구름과 유유한 산수가 그리워졌다.
(이번에는 한양이나 가볼까? 아니면 경상도나 전라도를 가볼까?)
 
김병연, 아니 김삿갓.
그는, 오늘도...강원도 영월땅에서 전국 팔도 모두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30. 다시 방랑길에


집을 나선 김삿갓은 길을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마누라의 눈에 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집에서 제법 멀찍이 떨어지자 비로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마누라로부터 멀리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김삿갓은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쯤이면 아내가 자신이 집을 떠나오며 남겨둔 서찰을 보았을 것이고

크게 낙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 또한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집을 타고 앉아 지내는 것은 도무지 적성에도 맞지 않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산꼭대기 바위에 걸터앉은 김삿갓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그곳에는 새털 구름이 송판대기처럼 깔려 있었고,
적당히 휘갈겨 쓴 글씨처럼 흐트러진 구름도 있었다.
이렇게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의 대조적인 자연미를 한동안 감상하던 김삿갓, 가족을 버리고

또 다시 방랑길에 오르는 것도 이같은 자연을 맘껏 즐기고 싶은 이유가 아니겠나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늘가에 떠도는 구름을 오랫동안 즐기던 김삿갓, 문득 깨닫고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어

서쪽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가고 싶은 곳이 많은 김삿갓,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나 전라도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경기도를 거쳐 한양과 황해도, 평안도를 가볼 것인가?
어느 곳이든지 다 가보고 싶었으나, 우선 어느 쪽이든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지팡이를 공중에 던져 떨어지는 지팡이 꼬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자!)

이렇게 결정한 김삿갓은 짚고 있던 죽장 지팡이를 허공에 던져보니

둥실 떠올랐던 지팡이가 풀밭에 털썩 떨어지며 가리킨 방향은 서북쪽이었다.

 (서북쪽으로 먼저 가라는 점괘가 나왔으니, 그렇다면 경기도와 한양을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를 가보리라..)

이렇게  결심한 김삿갓은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내려가니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마침 나무꾼이 있어 길을 물었다.

"한양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오?"
"왼편 길은 단양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 쪽은 제천으로 가는 길이니

한양을 가려면 제천, 원주를 거쳐야 할 것이오."
 
"고맙소이다. 헌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질 곳을 찾아야 하겠는데

혹시 이 부근에 그럴만한 집이 없을까요?"
"저 고개를 넘으면 초가 몇 채가 있는데 그 곳에서 구해 보시구려."
"고맙소이다."
 
그렇게 김삿갓은 고개를 넘어 너 댓개 보이는 초가에 찾아들어 밥 한술 구걸하니
고맙게도 한 집에서 밥 한상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저녁상을 들여오는 그 집 주인의 얼굴에는 수심이 잔뜩 껴있었다.
김삿갓은 밥을 다 먹고 상을 물리며 주인에게 물었다.
"고맙게도 저녁을 주셔서 아주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주인장께서 무슨 걱정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약간 당황한 빛을 보이며 말한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원님을 모시고 살아가자니 하루도 걱정이 끊일 날이 없어 그렇습니다."
"원님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니요? 세상에 그런 일도 있습니까? 
자고로 고을 원님은 백성을 보살피고 보호하여야 할 목민관(牧民官)인데,
원님이 호랑이보다 무섭대서야 말이 됩니까?"
 
"누가 아니라오. 그러나 우리 고을의 원님은 전혀 그렇지가 못해요."
주인은 이같이 말을 하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원님이 어째서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말씀인지 그 이유를 좀 들려주시지요."
김삿갓은 필시 어떤 곡절이 있으리란 생각으로 주인에게 캐물었다.
주인은 한숨을 길게 쉬고 말을 했다.
 
"우리 고을 원님은 토색질이 얼마나 심한지, 이년 전에 부임해오자,

이방을 통해 신임사또를 환영하는 뜻에서 가가호호 무명 두 필씩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명절 때마다 세찬비, 생일 때는 수연비, 아들 딸 여윌 때는 혼수비 등..
서너달을 멀다하고 뇌물을 공공연히 요구해왔다오.
그래서 백성들은 지칠대로 지쳐버렸는데 이번에는 다른 고을로 영전을 가면서

전별금 명목으로 각 집마다 현금 스무 냥씩을 내놓으라고 닥달을 하니,

우리 같은 가난뱅이가 무슨 재주로 스무 냥을 내놓을 수가 있겠냐는 말이오."
 
"그야말로 무서운 탐관오리로군요. 백성들 사이에서 원성이 끊이지 않을텐데
그런 자가 영전해간다니요?  도대체 고을 원님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성씨가 이가라는 것만 알뿐 이름은 잘 모르지요. 그런데 그깟 놈의 이름은 알아서 뭐하겠소?"

"내일 날이 밝는대로 동헌에 찾아가 따져 보려고 하지요."
"아서요. 한양에서도 으뜸 세도가로 손꼽는 재동(齊洞) 대감의 뒷줄을 잡고 있는 모양인데

섣불리 따졌다가는 오히려 봉변을 당할 성싶소이다."
 
"그렇다면 주인장께서는 전별금 스무 냥을 마련해 놓으셨소이까?"
"천만에요. 그날 그날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형편인데 현금 스무 냥을 무슨 수로 마련하겠소?
아직 추수도 못했으니 수중에 돈이 있을 수도 없지요."
 
"그렇다면 그 문제는 아무 걱정 마시고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 주십시오."
김삿갓은 생각이 되는 바가 있어 이렇게 말을 하자
주인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사또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노형은 무슨 재주로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말씀이오?"


31. 오대천지 주인거사


"나는 글씨를 좀 쓰는 사람입니다.
전별금 스무 냥을 내는 대신에 영전을 축하하는 현판(懸板)을 한폭 써다주면

돈보다도 더 좋아할 것이니,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주인은 김삿갓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노형이 글씨를 아무리 잘 쓰기로, 돈밖에 모르는 사또가 현판 따위나 받고 만족할 것같지 않소이다.

그건 어림도 없는 말씀이오."
 
그러나 김삿갓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탐관오리들은 돈도 좋아하지만, 명예 또한 돈 만큼이나 좋아합니다.
자기를 치켜 올려주는데 누가 싫다 할 것입니까?
이 문제는 내게 맡기시고 주인장께서는 현판이 될 만한 적당한 널판지 한 장을
내일 아침 일찍 구해주십시오."
 
다음 날 아침, 김삿갓이 조반을 얻어먹고 나니, 주인장이 구해놓은 널판지를 가리키며
"이만 하면 되겠소이까?"하며 물었다.
"좋습니다. 아주 훌륭한 현판감입니다."

그리고 김삿갓은 즉석에서 붓을 들어
"五大天地  主人居士"라는 글자를 휘갈겨 썼다.
"이게 무슨 뜻이오?"
"주인장은 모르셔도 됩니다. 내가 주인장을 대신하여 스무 냥 대신

사또에게 이 현판을 직접 헌납할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김삿갓은 십리가 넘는 읍내까지 현판을 몸소 메고 동헌으로 찾아가 원님 면회를 신청하였다.
"그대가 누군데 사또 어른을 뵙자고 하는가?"
이방이 묻자 김삿갓이 대답했다.
"사또 어른께서 이번에 영전을 가신다기에, 시생이 영전을 축하하는 뜻에서 현판 한 폭을 써왔습니다.
바라건데 사또 어른께 직접 상납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또는 이방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기쁜 얼굴로 동헌 마루로 달려 나왔다.
김삿갓은 허리를 정중히 숙이며 현판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올렸다.
"이 현판은 시생이 사또 어른의 영전을 축하하는 뜻에서 직접 써온 것입니다.
글씨가 치졸하오나, 시생의 성의를 생각하시어 받아 주시옵소서."
 
사또가 글씨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더니 크게 기뻐하였다.
"자네는 왕희지보다 더 명필일세,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물론 나를 가르키는 말이렷다?"
"물론입니다. 사또 어른의 지금까지의 치적으로 보아,

오대천지 주인거사라고 찬양하는 것이 합당하다 여겨서 그렇게 써온 것이옵니다.

다른 고을로 가시더라도 동헌 대청 마루에 이 현판을 꼭 걸어놓도록 하옵소서."
 
"음... 참 좋은 생각이야. 오대천지 주인거사라는 말만 들으면

내가 기상이 웅대한 인물임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게야!"
사또는 자못 만족스러운 듯 흥청거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며 물었다.
"가만.. 五大天地란 무슨 뜻이지?"
 
김삿갓이 사또에게 "五大天地 主人居士"라는 현판을 써가지고 온 뜻은

탐관오리를 골려주기 위한 계획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또는 그런 눈치를 전혀 채지 못한 채,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말이

마치 자신을 영웅호걸에 견주어 지칭하는 것같이 여겼다.
김삿갓은 속으로 웃음을 삭이며 사또에게 물었다.
 
"사또 어른께서는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무엇을 뜻하시는지 아시옵니까?"
사또는 모른다고 대답하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그야 모를 것은 없지 않은가. 고금 경서를 두루 통달한 내가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말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오대천지 주인거사란 나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찬하는 말이렷다."
하고 큰소리조차 쳐보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웃음을 참아가며 물어본다.
"사또께서 오대천지를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글씨는 자네가 써 가지고 와설랑 설명은 나더러 하란 말인가?"
"사또 어른께서 워낙 박학다식하시기에 가르침을 받고자 하옵니다."
"음...자네가 나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그렇다면 내가 설명을 해줌세."
 
사또는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얼굴을 들며 자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하였다.
"오대천지란 커다란 천지(天地)가 다섯 개 있다는 말이렸다. 대천지란 영원불멸의 천장지구
(天長地久)를 뜻하는 것으로 옛날부터 석학들은 천장지구란 말을 즐겨 써왔다네.
노자의 도덕경에도 나오지만 백낙천의 유명한 장한가에도 천장지구란 글이 등장하고

송지문의 시에도 또한 천장지구가 나오니 그런 것들이 바로 大天地라는 것이야. 내 말 알아 듣겠나?"
 
김삿갓은 놀랬다.
사또를 무지막지한 탐관오리로만 알았는데,

대천지를 해석하는 경륜이 고금경서에 능통한 대학자의 면모였다.
(이렇게도 유식한 사람이 어째서 탐관오리로 타락해 버렸을까?)
생각이 이렇게 미치자 김삿갓은 사또가 한층 가증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제가 현판에 써다 드린 "五大天地"란 말은 사또께서 지금 말씀하신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써다 드린 것입니다."하고 눈 딱 감고 말해버렸다.
"이 사람아!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오대천지라 썼단 말인가?"
 
"이 고을 백성들이 말하는 五大天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사또 어른이 뇌물을 잘 받아 자신다고 금천 은지(金天銀地)요,
둘째는 사또 어른이 색과 술을 좋아 하신다 하여 화천 주지(花天酒地)요,
셋째는 백성들이 느끼는 고을원의 인심이 암흑천지와 다름 없으니 혼천 흑지(昏天黑地)요,
넷째는 백성의 원한이 사무친다해서 원천 한지(怨天恨地)요,
다섯째는 탐관 오리가 천만 다행으로 이 고을을 떠나게 되어 백성들이 그야말로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을 하니 사천 사지(謝天謝地)라는 뜻이옵니다.


백성들이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를 "오대천지"라 하기에 시생이 그런 뜻으로 "五大天地 主人居士"라는
현판을 써다 바치게 된 것입니다."
 
사또는 삿갓의 설명을 듣자 이를 "뿌드득" 갈며, 부들부들 치를 떨다가 뜰을 굽어보며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이놈을 당장 끌어내어 능지처참을 시켜라!"
이렇듯 사또는 길길이 뛰며, 김삿갓을 끌어내어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마침, 동헌 뜰에는 사또의 분부를 거행할 군관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사또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이방! 어디 갔느냐. 이놈을 당장 끌어내지 못할까?"
 
그러나 김삿갓은 사또에게 태연히 말을 했다.
"사또 어른, 고정하시지요.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아시면 아무리 사또라도 큰소리는 못 치실 것이오."
사또는 이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황급히 되묻는다.
"아니...그대가 뉘길래,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가?"
 
"사또는 한양에 계신 재동 대감을 잘 아시겠지요?
나는 재동 대감의 생질로써, 지금 민정 시찰을 다니는 중입니다."
김삿갓은 사또의 뒷 배경이 재동 대감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자신을 재동 대감의 생질이라고 대포를 놓았던 것이다.
 
그러자 금방 잡아 죽일 듯이 길길이 뛰던 사또가 재동 대감의 생질이라는 말을 듣고,
몸을 벌벌 떨기까지 하면서, 김삿갓을 향해 연방 머리를 조아려 보였다.
"옛...? 선생께서 재동 대감댁 생질님이시라고요? 그러시다면 존귀하신 몸이 어떻게 이런 벽지까지...

미처 몰라뵈어 죄송스런 말씀 다할 길이 없사옵니다."하고 쩔쩔매며 말했다.
 
"나는 외숙부의 특별 명령을 받고, 민정 시찰을 나온 길이라오.

따라서 나의 신분을 함부로 밝혀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는데,

그러나 사또에 대한 이 고을 백성들의 원성이 하도 크기에

어쩔 수 없이 한마디 충고를 하기 위해 들렀소이다.

그런줄 아시고 행여 백성들 원성을 듣지 않도록 하시오. 아시겠소?..
그럼, 나는 이만 가겠소이다."
 
김삿갓이 동헌을 나오려 하자 사또는 황급히 김삿갓의 소매를 잡는다.
"귀하신 몸이 모처럼 오셨다가 이처럼 섭섭하게 가셔야 되겠습니까? 
하룻밤 편히 쉬시면서 박주라도 한 잔 하셔야지요."
"말씀은 고맙소만, 나는 누구에게서도 향연을 받을 입장이 아니라오.

외숙께서도 그런 것을 걱정하실 터.."
 
김삿갓은 이런 말을 내 던지고 동헌 대문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왔다.
사또는 쩔쩔매며 김삿갓이 행여 무슨 말을 할까? 노심초사하며 졸졸 뒤를 따라 나왔다.
"그만 들어 가시고, 떠나면서까지 고을 백성의 원성을 듣지 않도록 재차 당부하는 바이오..." 
이 한마디를 끝으로 김삿갓은 동헌을 벗어났다.
 
생각하면 통쾌하기 짝없는 연극이었다.
고을 백성들에게 호랑이같이 군림하고 포악한 악정을 일삼던 사또가

재동 대감의 생질이라고 큰소리 친 김삿갓을 만나자,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 못하고 쩔쩔 매다니..
이 얼마나  잘못 된 일인가?
 
김삿갓은 비록 악의없는 거짓말을 했지만,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입장에서

탐관 오리를 혼내주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제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32. 내불왕 내불왕(來不往 來不往)


제천과 원주 사이의 산길을 진종일 걸은 김삿갓,
힘도 들고 허기도 지는데 석양 노을조차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정처없는 나그네의 심사가 가장 고된 시간은  지금처럼 저녁 노을이 짙게 깔리는 시간이다.
유람을 떠난 바가 아니라면 수중에 돈이 넉넉히 있을 리 없고,

그러다 보니 먹고 잘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삿갓이 이런 마음 급한 해걸음에 어떤 마을에 당도하니,

마을 한복판 고래등 같은 기와집 마당에는 큰 잔치를 벌이는지,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며 한편에서는 떡을 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전을 부치는 등, 그야말로 야단법석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삿갓은 전을 부치는 고소한 기름 냄새에 더욱 허기가 느껴져, 아무나 붙잡고 물어 보았다.
"이 댁에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지요?"
"아따, 이 양반이...내일이 이 집 주인이신 오진사님 진갑날이라는 것을 모르시오?
게다가 이번 진갑 잔치에는 본관 사또님까지 오시기로 하여 돼지도 잡고 큰 암소도 잡았다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힐책하듯 한 마디 하는데,
 
"이 사람아! 사또께서 내일 오실지 안오실지 몰라, 진사 어른이 사랑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골머리를 앓고 계시는데, 당신은 무슨 연유로 오신다는 장담이야?"
"허긴..허헛!"
두 사람의 주고 받는 말의 의미가 야릇햇던 김삿갓이 물었다.
 
"사또님을 초청했으면 오신다 안 오신다 대답을 하셨을 것이오.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면 모르겠거니와, 도대체 어떤 까닭에 오신다 안 오신다를 모른다 하시오?"
그러자 나중에 말을 한 사람이
"진사 어른께서 며칠 전에 사또님께 사람을 보내,

'저의 집 진갑 잔치에 꼭 왕림해주십시오'하고 서한을  보냈더니, 

사또께서 즉석에서 답장을 써 주셨는데 그 답장의 내용이 얼마나 어려운지
오시겠다는 것인지, 안 오시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사또께서 어떤 답장을 보내셨기에 설왕 설래하고 있단 말이오?
혹시 암호(暗號)로 당신 의사를 보낸 것 아니오?" 김삿갓이 이렇게 묻자,
"천만에요! 명명백백(明明白白) 알아볼 글자로 쓰셨다는데,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어,

진사님과 사랑에 든 선비님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합니다."
 
"허허, 그것 참 우습구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또의 답장을 나한테 한번 보여주면 어떻겠소?

내가 한번 풀어보아 드릴 터이니."
김삿갓이 이렇게 말을 하자,
 
"여보시오, 유명한 선비들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는 편지를 당신 따위가 무슨 재주로 알아보겠소?"하며,

김삿갓을 싹 무시하는 태도로 말을 한다.
그러자 김삿갓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편지라면 나에게도 한번쯤 보여 주기로 손해가 날 것은 없지 않소?
개똥도 때로는 약이 된다 하였으니, 속는 셈치고 사랑의 진사님께 내 말을 전해 주시오."
김삿갓은 저녁을 얻어 먹을 속셈으로 일단 큰 소리를 치고 나왔다.
그러자 마을 사람은 김삿갓의 허술한 차림새를 위 아래로 훝어보며 말하는데,
"당신은 낫 놓고  ㄱ자도 알아볼 것 같지 않구먼. 과연 무슨 배짱으로 흰 소릴 하는가?"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길고 짧은 것은 맞대 보아야 알 수 있다 안 합디까? 아뭇 소리 말고 사랑에 내 뜻을 전하시오."
이렇듯 김삿갓이 당당하게 나오자 사내들은 얼굴을 마주 보며 저희끼리 말하는데,
 
"여보게 최서방, 이 양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사롭지 않구먼...

자네가 사랑에 올라가 진사 어른께 이 양반 얘기를 전해 올리게."
"그랬다가 진사 어른께서 야단을 치시면 어쩌지.."
"야단은 무슨..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이 양반을 보자 하실 것이 틀림없네!"
"그럴까?... 그렇다면 내 다녀옴세."
 
그리하여 최서방이란 자가 부랴부랴 사랑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잠시후 최서방을 앞세운 오진사가 나타났는데, 얼마나 똥이 탔던지

손님을 불러 올리지도 못한 채, 몸소 달려 나왔던 것이다.
 
"사또의 답장을 읽어 보아 주시겠다는 어른이 어느 분이시오?"하며 김삿갓을 찾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오진사 앞으로 썩 나서며 정중히 머리 숙여 인사를 하는데,
 
"지나가던 과객이올시다. 댁에서 어떤 편지로 인해 심려중에 계시다기로 

시생이 그 내용을 풀어볼 까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사람을 들여 보냈던 것이옵니다."
오진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김삿갓을 사랑으로 정중히 모셔 올리며 말한다.
 
"어서 올라 가십시다. 어려운 것을 도와 주시겠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이렇게 오진사의 안내로 사랑에 들어가니 사랑방의 크기와 규모가 가히, 고대 광실이었다.
그리고 넓은 사랑방 안에는 사또의 편지를 읽어보아 주려고 모여 

10여명의 늙은 선비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는 편지의 해석이 뚜렷하지 못했던 탓인지

계면쩍은 표정이 면면히 보이고 있었다.
주인은 김삿갓에게 그들을 일일히 소개하고 난 후, 손수 술을 한 잔 권하며 말을 하였다.
 
"우선 술을 한 잔 드시고, 나를 꼭 좀 도와 주소서.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이름난 학자님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또의 편지를 알아보는 분이 한 분도 없으니, 나로서는 애가 탈 노릇입니다."
김삿갓은 주인의 말을 면전에서 직접 들으니 과연 어지간히 곤란한 지경이었던 모양이다.
김삿갓은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 빈 술잔을 늙은 선비들에게 골고루 한 번씩 돌려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사서 술을 여러 잔 얻어 먹을 심산이었다.
 
늙은 선비들은 술을 한 잔씩 받으면서도 김삿갓의 행색이 못마땅했던지

또, 자신들이 풀지 못한 사또의 편지를 풀겠다고 나타난 그를 몹시 아니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늙은 선비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출출하던 차였기에

술과 안주를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다.
 
이윽고 주안상을 물리자 오진사는 문갑 속에서 사또의 편지를 꺼내 보이며 김삿갓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사또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친필 서찰올시다.

우리집 진갑 잔치에 꼭 참석해주십사 하는 초청장을 보냈는데,

사또께서 보내온 답장의 문장 내용이 어찌나 괴상한지,

사또께서 오시겠다는 말씀인지, 혹은 못 오시겠다는 말씀인지, 도무지 알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한 번 펼쳐 보시고 사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김삿갓은  방안에  선비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사또의 편지를 펼쳐 보기 시작했다.
사또의 편지는 한지로 두겹이나 싸여있어 겹겹히 벗겨야 했고,

김삿갓은 편지의 내용이 한지의 두께로 보아, 매우 복잡하려니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작 알맹이를 꺼내보니 사또의 편지는 한지 반절 크기의 지면에 커다란 글씨로,
 
          來不往
         來不往
 
단, 여섯 글자만 씌여 있을 뿐이 아닌가?
김삿갓은 그 내용이 너무나 간단한데 놀랐다.
(태산명동 서일필(太山鳴動 鼠一匹)이라더니...

정작 편지의 내용은 장난기가 철철 넘쳐 흐르는구나..그렇다면?...)
 
"음... 편지의 내용이 매우 기묘한 문장이군!"
김삿갓은 우선 생각할 여유를 갖기 위해 중얼거려 보았다.
방안에는 잠시 숨막히는 긴장감과 함께 정적이 맴돌았다.
오진사는 참고 기다리기가 초조했던지,
 
"선생! 어떻습니까? 사또께서 와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못 오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김삿갓은 대답 대신 다시 혼자 중얼거렸다.
"음...사또 어른하고 주인 어른하고는 친분이 매우 두터우신가 보구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장난스런 편지는 보내지 않으셨을 터인데..."
 
김삿갓은 무척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남의 집 경사스런 자리에

이런 장난기 어린 편지를 보낼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오진사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자랑스럽게 말을 했다.
 
"이 편지 속에 우리들 사이의 친분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 있소이까? 

선생께서 그렇게 물어 보시니 하는 말이오만, 본관 사또하고 나하고는 가깝다 뿐이겠소이까.

지금은 비록 관(官)과 민(民)으로 다르지만, 우리 두 사람은 
어려서는 동문수학(同門修學)하면서 별의별 글장난을 주고 받아온 사이랍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또의 편지는

진갑 잔치에 틀림없이 참석하겠다는 의사가 확실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왜냐하면 친구 지간에 초청을 받고 못 올 형편이라면

한 마디 사과를 뜻하는 글이 있어야  할 것이어늘,
사또의 답장에 쓰인 글은 단 여섯 글자로, 그런 빛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간파한 김삿갓은 대뜸 편지의 내용을 선언해버렸다.
"사또 어른께서 반드시 오시겠다고 하셨으니, 영접할 준비를 서두르시죠."
오진사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되물었다.
 
"내불왕 내불왕의 풀이가 어떻게 되기에 그런 해답이 나오게 됩니까?"
그러자 자기들은 머리를 쥐어짜도 얻지 못한 해답을

자신만만하게 답안을 내놓는 김삿갓에게 열등감을 느낀 선비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 하는데,
 
"귀공은 그 문장을 어떻게 해석했기에, 그런 단안을 내리시오?"
"그 문장을 어떻게 사또가 오시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지, 설명을 좀 들려주시오."
"제가 왜 그런 해석을 했는지는 여러분들도 이모저모로 분석을 해보시죠.

그러면 반드시 저와 같은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하며, 김삿갓은 자신을 고깝게 여기는 선비들을 향해,

"당신들은 아직도 모르겠냐?"하는 어투로 한 마디했다.
선비들은 김삿갓의 이같은 말을 듣고 모두 얼굴이 머쓱해지며 제각기 심각한 생각에 잠긴다.
그러자 오진사도 답답한 심정을 견딜 수 없었던지,
 
"여보시오 선생! 나는 편지의 내용을 알 수 없어 속이 타다 못해, 이제는 간이 타오를 지경이오.
그것은 이곳에 오신 선비들도 모두 궁금하기는 매일반일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을 알고 계시다면 애를 태우지 말고 속 시원히 말씀해주시오..."
하며 간청을 하였다.
 
김삿갓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편지는 결코 어려운 내용이 아니옵니다.
"來不往"이 두 개로 겹쳐져 있어서 혼동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러니 읽을 때는 점을 찍는 위치에 따라서,

같은 글자임에도 풀이는 두 가지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오 진사와 선비들은 누구도 삿갓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설명만을 들어서는 알 수 없으니, 쉽게 알아 듣도록 설명을 해주시오." 한다.
 
"하하하, 이렇게까지 설명을 하였는데도 모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우리 말로 표현해 드리지요.

내불왕의 "來不, 往"과 뒷글자의 "來 , 不往"에 점을 찍고 제각기 토를 달아 해석하면...
(오지 말라 하여도 가겠는데, 하물며 오라고 하는데 가지 않겠느냐)하는 뜻이 되옵니다."
 
김삿갓의 설명을 듣고 난 좌중에는 별안간, 감탄의 탄성이 터졌다.
"과연 듣고 보니 선생의 해석이 귀신과 같소이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같은 늙은이들은 머리가 아둔해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구려."
모두 감탄해 마지 않는데, 오진사는 무릎까지 치면서 칭찬을 한다.
 
"선생 덕분에 만사가 시원하게 풀려서 내가 이제야 살아나게 되었소이다."
그리고 아랫 사람들을 급히 불러,
"여봐라! 내일은 사또 어른께서 영광스럽게도 우리 집에 행차하실 것이니

이제부터 음식도 특별히 만들도록 하고, 내일 아침에는 사또를 마중 나갈 채비도 차리도록 하여라."
하며 추가로 분부를 내리는데,
"지금 우리 사랑에는 귀한 선비님이 와 계시니, 술상을 새로 푸짐하게 차려 내오도록 하여라."
 
이리하여 김삿갓은 사또의 편지를 풀어 준 덕분에 술과 음식을 배불리 얻어 먹었고,

그날 밤에는 오진사 댁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편히 지낼 수가 있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 잔치 준비로 다시 집안이 시끌벅적하였다.
게다가 사또의 행차가 가까워 온다는 전갈이 있자, 오진사는 직접 마중을 나간다고 야단 법석이 일었다.
 
김삿갓은 이쯤에서 아침을 한 술 얻어 먹고, 조용히 오진사 집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어젯 저녁 오진사 집 사랑에서의 일을 회상하며 빙그레 웃으면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산팔자 물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