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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4

박연서원 2019. 1. 28. 07:30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나그네 인생


15. 석왕사에 얽힌 사연(1)

김삿갓은 마침내 본연의 생활로 돌아왔다.
집을 떠난지 이년, 그는 안락한 생활보다 천대를 받으며 찬밥 한술로 끼니를 때우게 되더라도
술만 한잔 더해진다면 바람따라 흘러다니는 지금의 생활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김삿갓이 안변 관아를 떠나 북쪽으로 길을 잡아 발길을 옮긴지 하루, 안변 설봉산 석왕사(釋王寺) 앞에 이르렀다. 이곳은 이태조(李太祖)의 건국신화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김삿갓이 이곳 석왕사에 온 까닭은 금강산 입석암을 떠날 때 "혹시 안변 석왕사에 가게 되면 반월 행자를 찾으시오. 나의 제자로 선량하고 다정하니 삿갓선생을 정성껏 도울 것이오."라는 노스님의 당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석왕사는 규모가 워낙 크고 웅장해서 금강산의 장안사나 유점사에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없는 큰 절이었다.
특히 절을 둘러싸고 있는 천년 노송들은 향기짙은 송진 냄새를 풍겨주고 있어, 금강산과는 또 다른 정치가 물씬 풍겼다.

김삿갓은 경내 곳곳을 휘둘러보며 입석암 노승이 말한 반월 행자를 찾았다. 김삿갓을 만나자 크게 반가워하며,
"삿갓 선생님이시라고요? 나의 스승이신 큰스님의 기별을 통해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잘 도와 드리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반월 행자가 앞장서 석왕사 경내를 안내하며 하는 말이,
"선생은 이 절이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절 이름을 왜 석왕사로 부르는지 아십니까?"하고 물었다.

"글쎄요, 석왕사는 어떤 유래를 가진 절입니까?"
"그럼 제가 자세한 사연을 설명 드리지요."
그리고 반월 행자는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유래를 들려 주었다.

고려말 이성계가 영흥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청년 이성계는 무예를 닦는다고 각지로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날 밤에 안변 산속에 있는 조그만 암자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무너져가는 집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이었는데 집안에 거울은 깨져 있고 화원의 꽃은 모두 낙화(落花)되어 있었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마음이 착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해서, 암자의 중에게 물었다.
"스님은 혹시 해몽을 할 줄 아시오?"
"저는 꿈을 풀 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부근에 혹시 해몽을 잘 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여기서 저 산속으로 십 리쯤 더 들어가면 토굴 속에서 수행중인 도사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이 파자점(破字占)을 잘 치기로 소문난 분이니 꿈 해몽도 잘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 도사의 이름은 무어라 하오?"
"무학(無學) 도사라 부르옵니다."
이성계는 즉시 토굴로 무학도사를 찾아 갔다.

무학도사는 육십 가량 되었을까, 토굴 속에서 혼자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파자점을 치러 먼저 찾아온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평생 신수를 보려면 당신이 마음 속에 두고 있는 글자를 한 자만 써 보여주시오.
그러면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쳐주겠소."

생긴 것도 준수하고 입은 옷도 말끔해 보이는 앞선 사람이 붓을 들어 문(問)자를 써보인다.
이성계는 글자를 가지고 어떻게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겠나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무학도사는 問자를 손에 받아 들고 눈을 감더니 오랫동안 명상에 잠긴다. 그러다가 홀연 눈을 뜨더니, 問자를 이리도 놓고 저리도 놓고 바라 보면서 "쩝쩝" 소리를 내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문득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음...평생 신수가 아주 고약하군 그래, 당신은 암만해도 거지 신세를 한평생 면하기가 어렵겠소."
그 소리에 놀란 것은 장본인 뿐만 아니었다.
등 뒤에서 무심히 듣고 있던 이성계도 깜짝 놀랐다.

무학도사가 말한 한평생 거지꼴을 면할 수 없다는 사람은 어디로 보나 거지차림이 아니었다.
그는 옷도 깨끗하게 입었고 생김새도 준수하여 거지같지 않았다.
"스님! 제가 어째서 거지 팔자를 타고 났다 하십니까? 저는 거지가 아니옵니다."

거지로 단정받은 사나이가 이렇게 항의하자 무학도사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했다.
"바른대로 말하라구!  問자는 입 구(口)자가 문에 걸렸으니, 그대가 문전 걸식을 하는 거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당사자는 그 말을 듣고 움찔하더니, 한동안 아무 말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나는 거지 신세를 면해볼 까하여 옷까지 깨끗하게 갈아 입고 점을 치러 왔건만,
아무래도 팔자 도망은 못하는 모양이구나!"
혼자 장 탄식을 하며 총총히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무학도사의 파자점은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이성계는 놀라면서도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무학도사의 이론대로라면 문(問)자를 써보인 사람은 모두 거지라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놀라움과 함께 은근한 실망감도 생겨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찾아 왔는고?"
무학도사가 이성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이성계가 말했다.
"저도 파자점을 쳐보고 싶어 왔사옵니다."

"옳지, 그럼 마음 속에 두고 있는 글자를 써 내보이게. 그래야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칠게 아닌가."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말씨였다.
이성계는 도사를 골탕 먹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무 글자나 써내도 상관 없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물론이지! 무슨 글자라도 좋으니 당신이 쓰고 싶은 글자를 써보이게."
이성계는 주저하다가 조금 전 거지라고 단정받았던 사내가 썼던 글자와 똑같은 問자를 써보이며 말을 했다.
"이 글자로 점을 쳐보아 주십시오."

무학도사는 問자를 받아 들더니 또 다시 눈을 감고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런 연후, 눈을 뜨더니 문자를 들고, 조금 전 사내 때와 같이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기만 할 뿐, 좀처럼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더니 앉아있는 이성계에게 합장 배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이성계가 만류하자 도사는 이렇게 말을 했다.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되실 귀인께서 왕림해주셨으니 이런 황공한 일이 없사옵나이다."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당황했다.
"도사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게요. 조금 전에 다녀간 사람이 問자를 내놓았을 때는 거지 신세를 한평생 면하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나도 그 사람과 같은 글자를 내놓았는데 나에게는 어째서 엉뚱한 말씀을 하시오."

그러자 무학도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파자점이란 아무리 똑같은 글자를 내놓더라도 그 사람의 심지(心志)와 품성과 기상에 따라 점괘가 제각기 다르게 나오는 법입니다. 글자가 같다고 점괘도 같다면 그게 무슨 점이겠나이까?"
조금 전까지도 반말 짓거리를 하던 도사였지만, 어느새 말투가 존대어로 변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같은 글자의 해석이 그렇게도 다를 수가 있단 말이오?"
무학도사는 다시 경건한 자세로 합장 배례하며 말을 했다.
"소승은 다만 점괘가 나오는대로 여쭈었을 뿐이옵니다. 거기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사옵니다."

이성계는 기가 막혔다.
이런 그의 모습을 간파한 무학도사가 말을 이었다.
"똑 같은 問자라 하더라도, 조금 전에 거지가 내놓았던 問자와 귀공이 내놓으신 問자는 근본이 아주 다른 問자 이옵니다."
"근본이 다르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오. 問자가 똑같은데..."

"소승이 자세한 설명을 올리겠사옵니다. 아까 그 사람이 써낸 問자는 입(口)이 문(門)에 매달려 있는 問자였습니다. 허나, 귀공께서 내 놓으신 問자는 입이 문에 매달린 문(問)자가 아니옵고,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임금 군(君)자가 되오니 장차 이 나라에 임금이 되실 분의 글자라 아니 하겠습니까?"

이성계는 너무도 기막힌 파자점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장차 이 나라의 임금님이 되실 분이라고까지 하니 가슴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짐짓 마음을 가라 앉히고 웃으며 말을 하였다.

"실상인즉, 내가 도사를 찾아온 것은 파자점을 치려는 것이 아니고,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기에 하도 이상하여 해몽을 해보고 싶어 찾아 온 것이오. 도사는 물론 해몽도 하시겠지요?"
무학 도사는 합장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 했다.
"파자점이나 해몽이나 모두가 같은 원리이옵니다. 어떤 꿈을 꾸셨는지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해몽해 올리겠습니다."


16. 석왕사에 얽힌 사연(2)


이성계는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어떤 낡은 집에  있노라니, 별안간 모든 닭들이 일시에 "꼬끼오!"하고 요란스럽게 울었습니다.
닭의 울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가 있던 집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뛰쳐 나오려는데 이미 지게에는 서까래 세 개를 얹어 놓았더란 말입니다."

"꿈은 그 뿐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밖으로 나오니까, 뜰에 피었던 꽃이 별안간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난데없이 거울이 깨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하여도 예사 꿈은 아닌 듯한데, 혹시 흉몽이 아닌지요?"

무학도사는 꿈 이야기를 모두 듣고,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숙연히 말을 했다.
"네 가지로 나뉘어 꾼 꿈은 더할 나위 없는 길몽입니다."
자신의 느낌과 전혀 다른 무학도사의 해몽에 이성계는 어리둥절하였다.
"일시에 집이 무너지고, 꽃도 떨어지고, 거울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이 어째서 길몽이라 하시오?"

무학도사는 옷깃을 바로 여미며 경건한 어조로 말을 했다.
"닭은 만인에게 새 아침을 알려주는 영물이옵니다. 모든 닭이 일시에 울었다 함은 바야흐로 새 시대, 새 아침이 밝아올 징조를 알려주는 성스러운 조짐입니다. 더구나 닭이 '꼬끼오"하고 울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꼬끼오를 한문자로 바꾸어 쓰면 '고귀위(高貴位)'가 되는 것입니다.
즉, 임금님을 칭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등에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임금 왕 (王)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공께서는 장차 임금님이 되실 것이 틀림 없습니다."

듣고 보니 이론이 정연한 해몽이어서 이성계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다면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은 무슨 뜻이오니까?"
"그 역시 길몽의 마무리입니다. 열매가 맺으려면 꽃이 떨어지는 것이 이치이니, 일시에 낙화한 것은 열매도 일순간 맺을 좋은 조짐 입니다. 그리고 거울이 요란하게 깨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새 나라가 탄생하는데 만 천하가 어찌 크게 떠들썩하지 않겠습니까? 염려마소서."

"하찮은 꿈을 이처럼 대견하게 풀어 주셔서 고맙소이다."
"빈도의 해몽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오니 귀인께서는 소승의 해몽을 굳게 믿으시고
금후에는 만사에 자중자애 하시옵소서."
이성계는 무학 도사의 격려까지 듣고 나자 가슴이 자꾸 두근거렸다.
"고맙소이다. 그러나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과연 그런 기회가 올 수 있겠습니까?"

무학도사는 합장 배례를 세 번씩이나 거푸 하고 나무라듯 말을 했다.
"모든 운수는 하늘에서 정하여 주시는 것이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소승이 지금까지 여쭌 말씀은 모두가 천기에 속하는 기밀이옵니다. 이런 천기를
누설하면 될 일도 틀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저와 있었던 일은 일체 입 밖에 내지 말아 주옵소서."

무학 도사로부터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은 이성계는, 옷깃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제가 아무리 철이 없기로 이러한 일을 어찌 감히 입밖에 꺼내오리까. 도사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가슴에 아로새겨, 금후에는 일거 일동에 더욱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무학도사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앗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인께서는 부디 뜻을 크게 품으셔서
기어이 대업을 성취하도록 하시옵소서."

이성계는 왕후장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자, 갑자기 새로운 용기가 북돋아났다.
"고맙습니다. 저를 격려해 주시고 아껴, 깨우쳐 주신 오늘의 은공은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이성계가 이같이 말을 하자 무학도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 날을 위해 소승이 부탁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들려 주시옵소서."
"매우 외람된 부탁이오나, 후일 대업을 성취하시거든 중생을 구제하는 도량으로 이 토굴 자리에 불전 하나를 지어 주시옵소서."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무학도사의 손을 덥썩 움켜잡았다.
"그 날이 오기만 하면 어찌 불전 뿐이겠습니까, 이곳에 절을 지어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도사님을 대궐로 모셔다가 대정(大政)을 자문하는 국사(國師)로 받들어 모실 것이옵니다."

무학도사는 다시금 합장 배례하며,
"너무도 과분한 말씀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면  이곳에 지을 절 이름은
뭐라 하시겠습니까?"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이성계는 그 말을 듣자 어이가 없었다.
"절 이름은 그때 가서 결정해도 될 일이 아니옵니까?"
그러자 무학도사는 고집스럽게 다시 말을 했다.

"옛 글에 일일지계는 재어신(一日之計 在於晨..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세우고)이요,
일년지계는 재어춘(一年之計 在於春..일년의 계획은 봄에 세운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절은 나중에 세우시더라도 이름만은 지금 지어 주시옵소서."

"도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나의 신념을 굳히기 위해서라도 절 이름을 미리 지어두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만, 절 이름을 당장 짓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옵니까?"

무학도사가 즉석에서 나무라듯 말했다.
"무슨 일이나 쉽게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신명을 다해 애쓰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는 법이옵니다."

이 말도 이성계의 장래를 훈계하는 말에 틀림없었다.
"도사님의 훈계는 명심하겠습니다. 하오나, 절 이름을 제가 짓기보다는 도사께서 직접 지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무학도사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붓을 들어 종이에
釋王寺( 석왕사..왕이라고  풀어낸 곳)라는 세 글자를 써 보였다.
"석왕사...?  좋습니다! 후일, 이 자리에 반드시 절을 짓도록 하고, 그 이름은 도사님이 꿈과 글을 풀었다하여  반드시 석왕사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석왕사라는 절 이름은 태조의 등극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석왕사의 유래를 이야기한 반월 행자는 이어서 말을 하였다.
"이성계는 변방을 지키는 한낱 장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나 무학도사를 이곳에서 만남으로써 하늘의 계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산을 내려갈 때에는 "나는 왕이 될 것이다"라는 결심을 확고히 하게 되었으니 조선왕국의 개국에 무학 도사가 미친 영향은 실로 위대하다고 하겠습니다."

"허허..영향을 줄 수는 있었겠지요. 허나 국가대사의 도모는 불심의 힘만으로는 가능치 않은 일이지요."
김삿갓은 같은 불제자라고 반월 행자가 무학도사만 편드는 것같아 이쯤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삿갓 선생, 이성계가 이곳 설봉산을 내려갈 때 눈앞에 전개되는 천산 만봉을 굽어보며 읊은 시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오호...이성계가 시를 읊었다니?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구려."

"제가 외어 드리겠습니다."
반월 행자는 이성계의 시를 읊어 보였다.

칡넝쿨 움켜잡고 푸른 봉에 오르니    
인수반나 상벽봉  
引手攀蘿 上碧峰

조그만 암자 하나 구름 속에 있구나   
일암고와 백운중 
ㅡ庵高臥 白雲中

눈에 보이는 산천이 모두 내 땅이라면
약장안계 위오토  
若將眼界 爲吾土

초월 강남인들 어찌 수용하지 못하랴.
초월강남 기불용  
楚越江南 豈不容

김삿갓은 그 시를 듣고 이성계의 웅장한 기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하더니, 이성계야말로 선천적으로 대왕의 기질을 타고 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였다.

*석왕사
http://naver.me/xlzTXCvh

고려 말인 1384년 이 절 근처의 토굴에서 지내던 무학대사 자초(自超)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절을 크게 짓게 되었다고 한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절의 액호(額號)를 내려 '석왕사'라고 하였다.

- 휴정의 설봉산석왕사기(雪峯山釋王寺記)에서-


휴정 : 서산대사


17. 땡중과 마나님의 승부


석왕사에서 반월 행자와 작별을 한 김삿갓은 다시 북쪽을 향해 정처없는 발길을 옮겼다.
금강산 입석암 노승을 비롯하여, 반월 행자까지 불가에 귀의하여 수도를 하는 인물들은 자신과 다르게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고생을 스스로 선택한 그들의 삶은 김삿갓으로서는 따라할 수 없는 고행이 아니던가?
새삼 그들의 선택에 마음 속 깊이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계속 산길로 이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김삿갓은 다리도 쉬어갈 겸 노견으로 물러나 반려 행자가 헤어질 때 싸준 주먹밥을 풀어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만치, 몸에는 장옷을 입고 머리에는 남바위를 쓴 행세깨나 하는 양반댁 마나님 차림의 여인이 하인도 없이 산길을 바쁜 걸음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허, 수행하는 종자도 없이 산길을 가다가 도둑이라도 만나면 어쩔려고 저러실까?"
김삿갓은 마음 속으로 공연한 걱정을 하며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길가로 나섰다.

그런데 여인이 지나간 얼마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녀간 시비를 가리는 소리가 아득히 바람결에 들려왔다. 거리 관계로 말소리의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주고 받는 말소리의 억양으로 보아,
시비를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런, 조금 전에 지나간 마나님이 산길에서 도둑이라도 만난 것이 아닐까?"

김삿갓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소리가 난 곳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얼마를 가다가 앞을 살펴보니, 저만큼 잔디밭에서 아까 지나쳐간 마나님이

오십쯤 되어 보이는 스님과 말다툼을 하는 것이 보였다.

도둑을 만난 것이 아니기에 천만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점잖은 댁 마나님이 지나던 스님과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싶어,

김삿갓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 보았다.

그때, 스님이 마나님의 손목을 움켜 잡으려고 팔을 뻗으며 말을 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이 깊은 산중에서 한번쯤 정을 나누기로 뭐가 나쁘단 말이오?"
하고 해괴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피차간 아는 사이인가?" 김삿갓은 이러한 생각도 들었지만 여인의 다음 대답으로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우연히 길을 가다 만나게 된 사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석존(釋尊)의 십계 중에 불사음계(不邪淫戒)라는 대목이 뚜렸하거늘,

어찌 대사는 일시적 사념으로 파계(破戒)하시려 하오. 내, 오늘 일은 못 보고 안 들은 것으로 할 것이니

사념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하도록 하십시오."하며 점잖게 스님을 꾸짖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들이 다투는 이유를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저런 죽일 놈"하고
자신도 모르게 스님에게 욕이 튀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중놈의 부당한 요구에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내놓는 마나님의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다.

그러나 욕정의 화신이 되어버린 중놈은 좀처럼 물러서질 않았다.
오히려 여인에게 금방이라도 덤벼들 자세로 꼬임의 말을 더하는 것이었다.
"만물은 인연의 소생이오. 우리가 깊은 산중에서 이렇게 단 둘이 만난 것도 전생부터의
인연일 것이오. 그대는 어찌 전생의 인연을 무시하고, 나의 간절한 요구를 거절하려 하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두말 말고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오."

그러나 마나님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의연하였다.
"대사는 무슨 당치않은 말씀을 자꾸 하시오.
반야경에 색즉시공(色即是空), 공즉시색(空即是色)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소이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인데, 이런 경전을 읽고 수행하는 대사는

아직도 육근(六根)을 떨치지 못하고 탐욕과 진애(瞋恚), 우치(愚痴)의 번뇌마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니,

한시 바삐 자아의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의 눈을 속히 뜨시오.

그것만이 불제자가 걸어가야 할 정도일 것이오이다."
마나님은 불교에 대한 소양이 풍부한지, 중놈에게 설법하듯 도도하게 꾸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애욕의 열정에 갇혀버린 환장한 중놈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중놈도 우격 다짐으로는 성사가 안될 것을 깨달았는지,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대와 더불어 불경을 토론할 생각이 없소. 나는 이미 그대를 범할 것을 결심했는데,
그대는 나의 소원을 끝까지 들어주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면 우리는 말재주로써 승부를 가리면 어떠하겠소."

설득으로 성공할 자신이 없었음을 깨닫자, 중놈은 또 다른 방법으로 나왔다.
마나님도 계속 입씨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하자는 것은 무슨 말씀이오니까?"하고 따져 물었다.

중놈이 대답하는데,
"내가 지금부터 1에서 10의 순서로 그대에게 요구하는 일을 말로 들려 보일 터인즉,
그대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을 해보시오.
만약, 그대가 대답을 끊기지 않고 잘 하게 되면 내가 순순히 물러날 것이로되,

만약 대답을 못해 막힘이 있게 되면, 그대가 진 것이 되니 나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오."

김삿갓은 혀를 찼다. 도데체가 중놈의 요구는 부당하기 이를 데 없으며,

노상에서 오가다 만난 생면부지의 여인에게 감히 몸을 요구하는가.
그런데도 마나님은 겁을 내는 기색조차 없이 중놈을 꾸짖었다.
"나는 이미 대사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 여러 말 말고 물러나시오."

그러나 타이른다고 순순히 물러날 중놈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말재주로 결정하자고 이미 타협안을 내놓았소이다. 그러니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하던가, 나의 요구에 순순히 따라 주거나,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시오."

그늘 속에 숨어서 이같은 광경을 지켜보던 김삿갓은 "저런 죽일 놈을 보았나"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불현듯 뛰쳐나가 마나님을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으나

상황이 그의 용기를 억누를 정도로 흥미진진한 면도 있었다.
따라서 저 마나님은 이같은 곤경을 어찌 벗어나려나?하는 호기심 또한 발동하여 좀 더 지켜 보기로 하였다.

"좋소이다. 그러면 대사가 내기 말을 걸어 오시오. 내가 답하리다."
마나님은 중놈의 고집을 꺾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중놈의 내기에 응하고 있었다.
그러자 중놈이 이제는 됐다 싶었던지 크게 기뻐하며 즉석에서 내기 말을 시작하였다.

"일, 일룡사(一龍寺) 사는 중이
이, 이룡사(二龍寺) 가는 길에
삼, 삼로(三路) 길에서
사, 사대부인(士大夫人)을 만났는데
오, 오음(五陰)이 불통하여
육, 육효(六爻)로 점을 치니
칠, 칠괘(七卦)도 좋다마는
팔, 팔괘(八卦)는 더욱 좋다
구, 구부려라
십, † 좀 하게."

중놈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도 해괴한 소리였다.
김삿갓은 중놈의 이같은 음담패설에 저 마나님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걱정반 기대반을 가지고 지켜보며 마나님의 대답이 막혀, 땡중 놈에게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해지면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마나님의 태도는 의연해 보였다. 그리고 중놈을 향하여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천하의 잡놈아! 내가 다시 한번 훈계를 내릴테니 그대는 똑똑히 내 말을 듣거라."
그리고 그녀는 말재주 내기에 대한 응답을 시작했다.

"일, 일편단심(一片丹心) 이 내 마음
이, 이심 (二心)이 있을손가
삼, 삼강(三鋼)이 살아 있고
사, 사리(事理)가 분명하거늘
오, 오할(五割)할 이 잡놈아
육, 육환장(六環杖) 둘러 짚고
칠, 칠가사(漆袈裟)를 걸쳐 입고
팔, 팔도(八道)를 편답(遍踏)하며
구, 구하는게 고작
십, † 이더냐 이 잡놈아!"

마나님의 호통은 이렇게 추상같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대사님 대사님"으로 돌중 놈을 깍듯이 예우해 주었으나,
이제 와서는 오활을 할 잡놈이라 불호령을 질렀으니 그 위세가 실로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끼, 천하에 무서운 계집같으니..."
중놈은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줄행랑을 놓았다.

중놈이 도망가 버리자 마나님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산길을 다시 조용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부인이기에 김삿갓은 먼 빛으로나마 사라져가는 마나님을 향해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였다.


18. 방중 개존물이요, 선생 내불알이라


원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김삿갓은 하루에 육십리를 걸어야겠다고 작정을 했는데
막상 길을 나서고 보니 그리 되지가 않았다. 하긴 바쁜 걸음도 아니었다.
길을 가다가 힘들거나 고달프면 아무 곳이나 앉아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어둠이 내릴 즈음 아무 집이나 들러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면 그만이었다.

이렇듯 여러 날을 걸어가던 김삿갓은 오늘은 어쩐지 걷기가 도무지 귀찮아 한 마을로 썩 들어섰다.
때는 오후였다. 봄도 저물어 제법 더워지기 시작하는 오후의 햇살은 먼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몸을 무척이나 나른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쉬어갈 곳을 찾아야 하겠군."
가진 돈이 있다면 주막으로 가 술이나 한잔 하고 그 곳에서 묵으면 될 것이나 우선은 가진 돈이 없다.
이럴 땐 동네 사랑방을 찾으면 밥은 못 얻어  먹더라도 그 곳 동리의 인심을 엿볼 수 있다.
혹간 밤이 깊어 출출한 시장기를 달래는 막걸리나 요기거리가 나오는 경우도 왕왕 있어

김삿갓처럼 무일푼 과객에게 동네 사랑방은 요긴한 하룻밤 쉬어갈 곳이 되곤 하였다.

어느 동네나 잘 사는 사람이 있다. 그중에서는 벼슬을 지냈거나 인심이 제법 후해

오가는 과객을 접대하는데 넉넉한 인정을 베푸는 집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해도 아직 지지않은 이른 오후는

인심 후한 집이나 동네 사랑방을 찾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해서 김삿갓은 서당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서당은 살림집을 겸하는 경우가 없기에 학동들의 공부가 끝나면 빈방이 되기가 일쑤이고

지나는 과객의 하룻밤 휴식처로 안성마춤이었다.
서당에 하룻밤 쉬어갈 것을 청하기 이른 시간이지만 그 곳에 가서 학동들 공부하는 모습도 지켜 보면서

훈장 선생님하고 시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시간 보내기가 제일 좋을 것같았다.
그리고 뉘 알겠는가. 멋들어진 훈장이라도 만나면 술이라도 한 상 내어 놓을지...

"얘, 아가야. 이 마을 서당은 어디 있느냐?"
삿갓은 꼴망태를 메고 오는 초립동이 녀석에게 물었다.
"서당은 왜 찾으셔요."
녀석은 삿갓을 눌러 쓰고 등에는 작은 행랑과 구절 지팡이를 짚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온 김삿갓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던 듯 이렇게 반문하였다.

"훈장 선생님을 만나려고 한다. 어디 있느냐?"
"저쪽 세번 째 기와집이여요."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래, 고맙다."

김삿갓은 녀석이 가르쳐 준대로 서당을 찾아갔다. 서당은 제법 커보였다.
마당도 넓었을 뿐만 아니라 글방도 큼직했는데 학동들은 열 명이 될까 말까하였다.
"얘들아 선생님 어디 계시냐?"
아이들은 선생님 없이 저희들끼리 글을 읽다가 불현듯 나타난 삿갓의 차림새를 보면서 대답은 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수근거렸다.

"얘들아, 선생님 어디 계시냐고 내가 묻지 않았더냐?"
삿갓은 다소 언성을 높였다.
어린 것들이 꽤나 버릇이 없어 보였다.

"누구신데 우리 사부님을 찾으세요."
그중 한 놈이 눈을 말똥말똥 굴리면서 야무지게 물었다.
"이놈아 어른이 물으시면 대답이나 썩 할 일이지 묻기는 왜 묻느냐?"
김삿갓은 울컥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호통을 쳤다.

그리고 학동놈들의 방자한 태도를 보아 선생이라는 작자의 인품도 가히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호통을 당한 녀석이 멀쑥한 표정을 짓더니 어물어물 말을 한다.
"선생님은 지금 안채에 계셔요."
"그래 너희들 글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들어앉아 계신단 말이냐?"
"책이나 읽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허참, 까다롭구나. 길 가는 과객이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을 까하여 찾아 왔다고 말씀드려라."

녀석이 안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찌푸린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선생님은 지금 나오실 수 없으니 그냥 돌아 가시랍니다."
"그래?"

김삿갓은 부화가 치밀었다. 꼴에 훈장이랍시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양이었다.
삿갓은 아이들이나 훈장이나 그렇고 그런 것같아 머물기를 단념했다.
그렇지만 그냥 돌아서기에는 어쩐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휘돌아보니 마침 훈장의 탁자에는 갈아 놓은 먹과 종이가 보였다.
삿갓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갈겨 써놓았다.

서당내조지   생도제미십  
書堂乃早知  生徒諸未十

방중개존물   선생내불알  
房重皆尊物  先生來不謁

서당이란 내 일찍부터 알았거늘 공부하는 학동은 채 열이 안되는데

방안에 있는 녀석들은 제 잘난척 만 하고 선생이란 작자는 내다 보지도 않는구나.

"여봐라 이따 네 선생 오시거든 이 글을 드리거라."
김삿갓은 종이를 휙 내던지듯 놓고 방을 나와 침을 퇙 뱉고는 서당을 빠져나와 바람처럼 떠났다.

이무렵 훈장이란 작자는  거들먹거리며 마누라에게 어깨 주무름을 받고 있었다.
"어 거참 시원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렇듯 재미를 보고 있는데

생면부지의 과객이 왔다해서 어찌 나갈 수가 있겠나.

훈장은 낮잠조차 늘어지게 자고난 연후, 마지못해 글방으로 건너왔다.
"선생님 아까 거지같은 손님이 이 글을 써놓고 가셨어요."
학동은 김삿갓이 써놓은 글을 선생에게 내놓았다.

"뭐냐?"
훈장은 실 눈을 뜨고 종이를 받아 읽는데,

차츰 얼굴색이 변하며 종이를 쥐고 있는 두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죽일 놈이 있나!"

훈장의 입에서 앙칼진 욕이 튀어 나왔다.
내용이야 그렇다치고, 써 놓은 글을 음에 따라 읽다보면

학동과 선생인 자기를 길거리 똥개를 욕하듯이 써놓지 않았는가?

"허, 고약한 놈이로다."
훈장은 이를 갈았다. 이런 모양을 지켜보던 아이 한 놈이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러셔요. 나쁜 말이라도 써있습니까?"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훈장이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네가 무엇을 안다고 나서느냐. 당장 회초리 가져 오너라."
훈장은 엉뚱하게도 죄없는 학동을 잡으려는 심산이다.
그래야만 속이 풀릴 것같았다.

한편 훈장을 욕해준 김삿갓은 서당을 찾아 갈 때와는 달리 훠이훠이 시원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처음에 방랑길을 떠났을 때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만 들어도 분통이 터지고 화가 치밀었는데

이제는 조소와 박대를 당해도 세상 인심이 그러려니하고 대범하게 넘기게 되었다.

"흠, 지금쯤 그 알량한 훈장이 펄펄 뛰고 있겠군.."
김삿갓은 좀 심한 욕설을 하지 않았는가하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거드름 피우던 그가
자기가 써놓은 글을 읽고 핏대를 올리는 광경이 떠오르니 속이 다 시원하였다.

삿갓은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한참을 걸었는데 어느덧 석양의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목까지 컬컬한 것이 잠자리를 찾기보다 술 한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저녁 노을과 함께 김삿갓의 발걸음은 자연히 빨라졌다.
얕트막한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생각지도 않은 주막이 보였다.
김삿갓은 주막을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하지만 그는 돈이 없지 않은가. 허실 삼아 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김삿갓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출렁출렁 뛰어 보았다.

그런데 필낭속에서 분명히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것 참 이상하군? 아까도 뒷짐 속에서 소리가 나는 것같더니.."
김삿갓이 등뒤에 지고 있는 행랑이라야, 겨울 옷 한벌에 주먹만한 연적과 붓 몇자루와 고작하여 종이 몇 장과 벼루 뿐인데, 쇠붙이 소리가 나는 것은 의외였다.

그는 길가에 앉아 행랑을 끌러 보았다.
뜻 밖에도 엽전 꾸러미가 나왔다.
"돈이?"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누구에게도 돈을 받은 일이 없는데, 돈이 있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허허, 이 무게도 보통은 아닌데, 내 어찌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그는 손바닥 위에 엽전 꾸러미를 올려보며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족히 한근은 넘을 무게였다.

"그런데 이 돈을 누가 넣었을까?"
고개를 갸웃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안변을 떠나올 때 사또가 내놓은 엽전은 이미 마다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 돈은 가련이에게 보내겠다고 했으니, 사또가 별도로 넣어 주었을 리는 없을테고,

그렇다면 가련이 밖에는 없었다.

김삿갓이 떠나올 때, 가련이 또한 노잣돈을 내놓았지만 한사코 받지 않는 사이에

슬며시 넣어준 것이 틀림 없으리라... 생각이 이에 이른 김삿갓은

새삼스럽게 가련이의 뜨거운 사랑을 뼈저리게 느꼈다.
"감사하오, 가련이!"

굳세어라 금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