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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5

박연서원 2019. 1. 31. 06:26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나그네 인생


19. 하찮은 오리목숨?(1)

원산을 거쳐 함흥으로 가는 길도 산길로 이어졌다.
날 또한 저물자 까마귀조차 극성스럽게 울부짖으며 자기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신안 마을 입구에서 만난 동리 사람을 붙잡고 물어 보았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황별감 댁이 어디요?"
김삿갓이 이곳에 이르기 전에 들은 바로, 이곳 신안 마을에 황별감 댁은 길가는 나그네를 소홀히
내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황별감 댁은 저기 산 밑에 있는 기와집이라오."
동리사람은 팔을 들어 가르쳐준다.

황별감 집은 산 밑에 있는 제법 큰 기와집이었다.
김삿갓이 문앞에 이르러 주인을 부르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왔다.
​첫 눈에 무척 인자해 보이는 후덕한 노인이었다.
김삿갓은 인사를 정중히 올리고 나서, "지나는 과객이옵니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질 까하고 찾아 왔습니다."하고 말했다.​

황별감은 매우 민망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모처럼 내집을 찾아온 손님을 내쫒는 것같아 매우 미안하오. 우리 집에서는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손주 며느리가 몸을 풀어서 손님을 재워드릴 수가 없구료. 그러나 저녁만은
대접할 수 있으니 바깥 사랑에서 저녁만 자시고 잠자리는 다른 곳에서 구해보도록 하시오."
그제야 깨닫고 보니, 황별감 댁 손주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는지 대문간에 빨간 고추가
매달려 있던 인줄이 가로 걸려 있었다.

"저녁만이라도 주시겠다니 고마운 말씀 입니다. 그러나 댁에 산모가 계시다면 저는 다른 곳으로
가보겠습니다." 김삿갓은 발길을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황별감은 부랴부랴 옷소매를 붙잡으며 만류한다.
"산모가 있기로서니, 바깥 사랑에서 저녁을 자시는 것쯤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소.
잠자리까지 제공하지는 못할 망정, 내집을 찾아온 손님을 저녁대접도 하지 않고 돌아서게 하는 것은 인사가 아니니 들어 갑시다. "

김삿갓은 황별감의 호의가 하도 고마워, 저녁밥을 그 댁에서 얻어 먹기로 하였다.
이윽고 바깥 사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반찬도 여러 가지로 나와, 가족이 먹는 식탁이지,
낮선 과객에게 한 덩이 던져주는 밥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별감조차 밥상머리에 지키고 앉아 많이 먹으라고 연신 권하는 것이 아닌가...

"젊은 양반이 어디를 가는 길인데 이렇게 늦으셨소?"
"네,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멀리 두만강까지 관북천리를 돌아 보고자 합니다."
"허어, 금강산 구경을 하셨다고요?...금강산이 그렇게나 좋다는데 나는 금강산 구경을 한 번도 못했다오."

"여기서 금강산이 그리 멀지도 않은데 한 번 다녀오시죠. 천하의 절경이 그 곳에 모두 있습니다,"
"내 나이 이미 칠십이라오. 이제 무슨 기력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겠소. 어디, 좋은 구경한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김삿갓은 황별감의 말을 듣자,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진해 천하의 명산을 구경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은 아직 젊어 천하를 두루 유람할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밥상을 물린 김삿갓은 다녀온 금강산의 절경을 황 별감에게 들려 주면서

당시 자신이 지었던 절경을 담은 시를 읊어 드렸다.

"朝登立石 雲生足"  (조등입석 운생족)
아침에 바위를 밟고 서면 발아래 구름이 일고

"暮飮黃泉 月掛脣"   (모음황천 월괘순)
저녁에 황천물을 마시면 달이 입술에 걸린다.

"水作銀杵 春色壁"   (수작은저 춘색벽)
물은 은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雲爲玉尺 度靑山"   (운위옥척 도청산)
구름은 옥자가 되어 청산을 가늠터라.

"松松白白 岩岩廻"   (송송백백 암암회)
소나무 잣나무 바위는 돌고돌아.

"水水山山 處處奇"   (수수산산 처처기)
물도 산도 곳곳이 기묘하도다.

"허어, 그렇게나 좋던가요?"
"제가 아직, 죽어 무릉도원은 가본 바 없으나 천상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지상에는 금강산이 있을 것입니다."
김삿갓은 그가  읊은 싯귀 한 소절마다, 감탄을 내지르는 황별감에게 이같이 말을 해주었다.

삿갓은 밤이 으슥해서야 그 집을 나왔다.
황별감이 일러주는대로 동구 밖에 있는 서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황별감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문득 생각이 난 듯, 김삿갓의 손을 잡으며 말을 했다.

"서당에서는 잠만 자고 내일 아침 식사는 우리 집에 와서 드시오. 내집에 오신 손님을
쫓아내는 것같아서 정말 미안하구료."
김삿갓은 남의 신세를 수없이 지며 이 곳에 이르렀지만 황별감처럼 따듯한 인정을
만나보기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장께서 저를 쫒아내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저녁을 융숭하게 대접받은 것
만으로도 고맙기 그지 없사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아무리 산모가 있기로 바깥 사랑에서 아침을 자시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겠소.
조금도 거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침에 꼭 와주시오. 내가 기다리겠소."

"이렇듯 고마운 말씀을 하시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김삿갓은 손을 잡아 흔들며 간청하다시피 하는 황별감의 요청에 그만 감격하여 이렇듯
아침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고마운 노인이시군."

그리고 서당을 찾아 가려니 길이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황별감 집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길을 찾다 보니 연자 방앗간이 보였다.
그 연자 방앗간 옆에는 광인듯 싶은 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올 바에야 구태여 서당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김삿갓은 문득 그같은 생각이 들자 방문을 열어 보았다.
방에는 새로 짠 듯한 빈 가마니만 쌓여 있어서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였다.

김삿갓은 서슴치 않고 광 속으로 들어가  바닥에 깔린 볓짚 돗자리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웠다.
황별감 집에서 밥도 든든히 먹었겠다, 잘 곳도 마련이 되었겠다, 아쉽다면 술 한잔이 없을 뿐인데 오늘도 운이 좋아 하루를 힘들지 않게 보냈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아침이 환히 밝았다.
김삿갓은 연자 방앗간 광 속에서 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부랴부랴 옷을 추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침을 얻어 먹으려고 황별감 집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일러보여, 황별감 마당 부근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그때, 황별감 집 대문이 열리며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손에는 구슬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얘야, 너 이 댁 아이냐?"

어린 아이는 김삿갓의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하고 구슬을 가지고 이리저리 던지며 혼자 장난을 치며
놀다가 별안간 "어마! 내 구슬 어디 갔어?"
하고 울상을 지으며 대문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어린 아이가 잃어버린 구슬을 찾아 주려고 이곳 저곳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구슬은 눈에 띄지 않았다.


20. 하찮은 오리목숨?(2)


김삿갓은 마당을 찾아보다 못해 조금 떨어진 시궁창까지 와보니 어린아이가 잃어버린
구슬은 다행히 시궁창 언저리에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색깔이 좋은 옥관자(玉貫子)인 듯싶은, 매우 값진 보물로 보였다.

김삿갓이 그 구슬을 줍기 위해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때마침 시궁창에서 먹이를 찾던 오리 떼 중에 청둥오리란 놈이 썩 다가가 그 구슬을 냉큼 집어 삼켜버리는 것이 보였다.
"이크, 큰 일이군. 귀중한 보물인 듯싶은데 오리란 놈이 그만 삼켜 버렸으니, 어쩐담?"

김삿갓이 그런 탄식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황별감 댁 대문이 열리며 아이의 아비인 듯한 20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부산스런 모습으로 아까 그 어린 아이를 안고 나오며,
"네가 가지고 놀던 옥관자를 저 아저씨가 가져갔단 말이지?"하고 말을 하며, 김삿갓을 괘씸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안겨 있던 아이조차,
"응! 저 아저씨야!" 한다.
졸지에 김삿갓은 도둑으로 몰렸다.

김삿갓에게 다가온 젊은이는,
"여보시오, 이 아이가 가지고 놀던 옥관자는 우리집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귀물이니
욕을 보지 않으려면 빨리 내놓으시오."하며 거두절미로 김삿갓을 몰아 부쳤다.

김삿갓은 옥관자를 청둥오리가 삼켜 버렸다고 사실대로 말을 할까 생각도 하였지만
성미가 급해 보이는 젊은이가 대뜸 청둥오리 배를 갈라볼 것같아,
애꿎은 생명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반 나절만 지나면 그 구슬이 오리의 배설물에 섞여 나올 것을..그 때까지 잠시 내가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되면 생명도 하나 살릴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한 김삿갓은
젊은이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을 하였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놀던 옥관자는 내가 훔쳤소이다. 그러나 반 나절 후에는 반드시 돌려드릴 터이니 그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러자 젊은이는 화를 벌컥 내며
"뭐 어쩌구 어째? 남의 귀한 물건을 훔쳤으면 당장 내놓을 것이지 무슨 잔소리야!"
하고 호통을 치더니, 즉시 하인들을 불러내어 김삿갓을 결박하라고 일렀다.

젊은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 너 댓이 일시에 달려들어 불문곡직하고
김삿갓을 밧줄로 꽁꽁 옭아 묶었다.
김삿갓은 꼼짝없이 결박을 당한 후 혼자 생각을 하건데...
"황별감은 부처님처럼 인자하신 분인데.. 이 젊은이는 그의 아들인지, 손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하여 조상을 닮지 못하고 성미가 이리도 사나울까?"

젊은이는 결박진 김삿갓을 땅바닥에 꿇어 앉힌 후 또다시 호통을 질렀다.
"네가 훔친 옥관자를 아직도 내놓지 못하겠느냐?"
김삿갓은 얼굴을 들어 젊은이를 올려다 보며 말을 하였다.
"옥관자를 내가 훔친 것이 분명하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 반 나절이 지난 후에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결박까지 짓다니 너무 성급한 것 아니오?"

젊은이는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이놈아! 남의 물건을 훔쳤으면 주인에게 당장 돌려줄 일이지 반 나절을 보낸 후 돌려주겠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이봐라! 아무래도 저 놈이 옥관자를 몸에 감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저 놈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젊은이가 이같이 말을 하자 하인들이 썩 나서서 김삿갓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러나 김삿갓의 몸에서 옥관자가 나올 턱이 없었다.

젊은이는 다시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지며 하인들에게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런 놈을 섣불리 다루다가는 큰일 나겠다. 집에서는 아무리 달래도 내놓지 않으니
관가에 끌고가 치도곤을 청해야겠다. 썩 끌고 관아로 가자!"

그리고 김삿갓을 굽어보며 엄포의 말을 이어갔다.
"이 고을의 사또는 우리 집안의 어른이시다.
네 놈이 관아에 끌려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니 죽기 전에 옥관자를 순순히 내어 놓거라!"

관아로 끌려가면 김삿갓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애매한 청둥오리를 죽게야 할 수 없지 않은가?
몇 시간만 참으면 청둥오리가 옥관자를 도로 내어 놓을걸...그러면 만사가 해결될 것 아닌가?

그러나 청둥오리를 내버려둔 채 자기만 관아로 끌려가면, 옥관자를 찾을 길 또한 묘연해지지 않겠나?
생각이 이에 이른 김삿갓은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에게는 공범자가 있소. 나를 관아로 끌고 가려면 공범자도 함께 가도록 해주시오."
"뭐? 네 놈에게 옥관자를 훔친 공범자가 있다고? 누구냐 그 놈이!"

김삿갓이 얼굴을 들어보니, 옥관자를 삼킨 청둥오리는 아직도 시궁창에서 다른 오리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김삿갓은 문제의 오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의 공범자는 저기 있는 청둥오리요. 그러니 옥관자를 찾고 싶으면 저 오리도 나와 함께 관아로 데리고 가 주시오. 우리 둘이 함께 가지 않으면 옥관자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오."

젊은이는 그 소리를 듣고 어이없어 하면서,
"이놈아!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청둥오리가 너와 공범이란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러나 김삿갓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말을 했다.
"말이 되고 안되는 것은 재판을 받아보면 될 것이오. 아무튼 저 청둥오리가 나와 공범인 것은 확실하오. 따라서 옥관자를 찾으려면 관아에 함께 가야만 할 것이오."

젊은이가 총명한 위인이라면 이쯤에서 뭔가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나, 옥관자 찾는데만 급급하여 사리와 총기를 잃어버린 듯 "네놈의 이야기는 미친 자의 횡설수설같구나. 그나 저나 청둥오리가 너와 공범자라 하니 함께 묶어 가기로 하겠다."하고 하인에게 청둥오리를 당장 잡아 묶으라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김삿갓은 결박을 진 채, 두 다리를 묶인 청둥오리와 함께 사또가 있는 읍내로 끌려가게 되었다.
젊은이 휘하의 하인들도 모두 동행하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인들은 김삿갓을 끌고가며 동정하는 마음으로 은근히 귀띔을 해주는데,
"문천 고을 사또 어른은 황별감의 조카사위 되는 분이라오. 당신이 동헌에 끌려가면 목숨이
남아나기 어려울 것같으니 지금이라도 옥관자를 선선히 내어 놓으시오.
그러면 살아날 길이 있으리다."

그러나 김삿갓은 듣기만 할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옥관자를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안 마을에서 문천 읍내까지는 30리가 넘었다.
일행이 관아에 도착한 때는 이미 한 낮이 지났다.

젊은이는 김삿갓과 청둥오리를 형리에게 인계하여 동헌 마당에 꿇어 앉혀놓고

관아에 들어 가더니 사또와 무슨 공론을 하는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이방의 안내를 받으며 사또가 동헌 대청마루에 좌정하더니

김삿갓을 굽어보며 다짜고짜 서슬이 퍼런 호통을 내지른다.

"오리와 공모하여 황별감 댁 옥관자를 훔쳤다는 자가 바로 네놈이냐?"
문천 군수 이호범은 처가 댁으로부터 부탁을 단단히 받았는지...처음부터 무시무시한 태도로 나왔다.
그러나 김삿갓은 머리를 정중히 수구려 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황별감 댁 자제께서 저를 다짜고짜 도둑으로 몰아, 제가 오리와 공모하여 옥관자를 훔쳤노라 대답한 것입니다."

사또는 그 말을 듣고, 눈알을 부라리며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이놈아!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오리는 말 못하는 짐승이 아니더냐. 헌데, 오리와 공모하여
옥관자를 훔쳤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그러나 김삿갓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태연자약 하였다.

"제가 미치고 안 미친 것은 두어 시간 뒤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놈아! 네놈이 본관을 우롱해도 분수가 있지, 방자스럽게 누구더러 기다려라 말라 하느냐!"
"저 같이 못난 자가 어찌 감히 사또 어른을 우롱하겠사옵니까. 다만 두어 시간 후에 저 청둥오리가 황별감 댁 옥관자를 반드시 돌려 드릴 것이오니,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옵소서."

문천 군수 이호범은 머리가 비상한 사람으로 김삿갓의 말에서 어떤 암시를 받은 듯..
잠시 머리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더니 얼굴을 번쩍 들며 물었다.
"옥관자를 오리가 돌려 준다니? 그렇다면 오리란 놈이 옥관자를 삼켰단 말이냐?
그래서 두어 시간 후에 똥과 함께 배설해 놓을 것이란 말이렸다?"

사또가 이렇게 김삿갓을 문초하고 있던 바로 그때, 김삿갓과 함께 묶여 동헌에 끌려온 오리가 몸을 움츠리는듯 싶더니 똥을 싸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옥관자를 함께 내어 놓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옥관자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질렀다.

"사또 어른! 더 기다리실 것도 없습니다. 지금 막, 오리가 옥관자를 내 놓았습니다! "
사또는 형리를 시켜 똥에 섞여 나온 옥관자를 깨끗하게 씻어 올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손수 검색을 하여 보니 그 것은 황별감댁 옥관자가 분명하지 않은가?

이에 사또는 크게 깨달은 바 있는 듯, 고개를 신중하게 끄덕이며, "잃었던 물건을 찾았으니 저 사람을 풀어주어라." 형리에게 명령을 하고 김삿갓에게 물었다.
"옥관자를 오리가 삼킨 것을 뻔히 알면서 그대는 어떤 까닭으로 스스로 도둑을 자처했는고?"
김삿갓은 결박이 풀리자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또를 올려다 보며 대답했다.

"오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제가 잠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나섰던 것이옵니다."
"하찮은 오리 한 마리를 살리려고 죄를 뒤집어 썼다?"
"예, 저는 저 청둥오리가 옥관자를 삼키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옥관자를 찾으려는 젊은이가 너무도 성급해 보였기에, 사실대로 말을 하면 필시 오리의 배를 갈라 옥관자를 꺼내려 하겠기에 어쩔 수 없이 제가 훔쳤노라고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또는 그 말에 크게 감명을 받은 듯,
"허어! 오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대가 죄를 뒤집어쓰고 나섰다는 것은 이만저만 가상한 일이 아니로다. 그대는 정녕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인가?"
"오리가 비록 미물이오나, 목숨이 소중하기로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여깁니다. 제가 잠시라도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됨으로써 오리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이야 누군들 못하오리까."

"허어! 그대의 말은 들을수록 명언이로구나! 그대는 이름을 무어라고 하는가?"
"이름조차 없이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몸이오니 사또 앞을 이만 물러가게 해주시옵소서."
김삿갓은 사또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돌아서더니 황별감 댁 하인에게 말했다.

"나의 삿갓과 지팡이를 돌려주시오."
김삿갓은 삿갓을 뒤집어 쓰기 무섭게 동헌 대문 밖으로 총총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또는 그때까지 김삿갓의 뒷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별안간 일어서며, 좌우에게 물었다.


21. 김삿갓은 문천군수와 백일장 동기였다


"지금 대문 밖으로 사라진 사람이 혹시 김삿갓이 아니더냐?"
그러나 좌우의 사람들은 김삿갓이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김삿갓이 어떤 사람이옵니까?"
사또는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듯 부랴부랴 신발을 끌고 부리나케 대문 밖으로 나왔다.
자기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사또가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는 김삿갓은 이미 꽤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이보시오! 날 좀 보시오."
사또는 소리를 질러 불렀다.

그러나 김삿갓은 부르는 소리를 들은둥 마는둥 뒤도 돌아다 보지 않고,
마냥 휘적 휘적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렇다 저분은 분명 삿갓 선생이시다.)
사또는 그런 생각이 들어 체면 불구하고 헐레벌떡 김삿갓의 뒤를 쫓아갔다.

"여보세요, 삿갓 선생! 나 좀 보세요."
소리소리 지르며 가까스로 따라 잡으니 김삿갓은 그제야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 본다.
"아니, 사또 어른께서 웬일이시옵니까. 옥관자 사건의 문초는 끝난 줄 알고 있는데 물어 보실 말씀이 아직도 남아 있사옵니까?"

문천 군수 이호범은 불문 곡직하고 김삿갓의 손을 덥썩 잡으며 물었다.
"선생은 혹시 김삿갓 선생이 아니시옵니까?"
김삿갓은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삿갓 선생이라니요? 보시다시피 삿갓을 쓰고 다니기는 하오나 사또 어른께 선생이라고 불릴 사람은 못되옵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것은 아니십니까?"
삿갓의 내숭에 넘어갈 이호범이 아니었다.

"선생이 아무리 정체를 숨기려 하여도 저만은 못 속이시옵니다. 선생이 영월 고을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하셨을 때, 저는 차석으로 급제했던 이호범 입니다."
이호범이 이렇게 나오자 김삿갓은 더 이상 자신을 감출 수 없었다.
"아, 그래요? 이것 참 반갑소이다."

"저는 그 후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에 급제해서 얼마 전에 이 곳, 문천 군수로 제수되어 내려왔습니다. 선생께서는 그 후에 세상을 버리고 유랑길에 오르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뵐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하하...인생하처 불상봉(人生何處 不相逢)이란 말이 있지 않소이까. 영월에서 백일장을 같이 본 분이 문천 군수가 되셨다니 진심으로 기쁘오이다."

"저의 고을에서 선생을 만나게 된 이상, 저로서는 선생과 그냥 작별할 수 없습니다.
노독도 푸실겸, 단 며칠 간이라도 저의 고을에서 쉬어가소서."
사또는 이렇게 말을 하며 김삿갓의 손을 억지로 잡아 끌었다.

김삿갓은 손을 내저었다.
"사또 어른의 호의는 고맙기 한량 없으나, 나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사람이니
그냥 놓아두소서."
"선생께선 무슨 말씀을!..제가 워낙에 풋내기 사또인 관계로 민정을 처리함에 매우 미숙한 편이니

며칠동안 묵으시면서 제게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꼭 들려주십시오."
사또는 이같이 말을 하며 김삿갓을 어거지로 잡아 끄는 것이었다.

"방랑객에 불과한 나같은 놈에게 치도를 물어보신다는 것은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을!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신 시문 속에는 선생의 고매한 치도정신이 여실히 담겨 있었습니다.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살려내기 위해 스스로 도둑의 누명을 쓰셨던 정신에 저는 거듭 탄복을 마지 못하는 바이옵니다. 바라옵건데, 부디 본관의  소망을 꼭 들어주소서."

김삿갓은 인정에 약한 사람이라 이호범의 간청을 떨치고 돌아설 수 없었다.
"사또 어른의 말씀이 이토록 간곡하시니 그러면 며칠동안 술이나 얻어 먹다가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이호범이 김삿갓을 관사로 데려와서 그날부터 칙사 대접을 해가며 문천 고을의 민정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어느 날 술을 나누며 사또는 김삿갓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저희 고을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민소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자 김삿갓이 술을 마셔가며 말을 했다.

"사또께서는 워낙 영명하셔서 백성들의 민소를 가리는데 어려움이 전혀 없으실 터인데,
뭐가 그토록 어렵다는 말씀입니까?"
사또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과분한 칭찬올시다. 실상인즉, 저 자신도 백성들의 시시 비비를 가려주는데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자부를 했습니다. 허나, 실무에 부딛치고 보니, 판단을 해야 할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옵니다. 그러니 삿갓 선생께서 저에게 지혜를 좀 빌려 주시옵소서."

"사또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일이라면 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옛말에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文殊)의 지혜가 나온다고 하였으니

만약 어려운 소송이 있다면 서로 상의해보도록 하십시다."

그러자 사또는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문천 고을에 지금 판단하기 매우 어려운 소송이 하나  있는데, 그 것은 어떤 남자가 불에 타 죽은 것이었다.

그 남자 마누라의 말에 의하면 집에 불이 나서 남편이 타 죽었다는 것인데,

그러나 죽은 사람 친척들의 말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 남자는 불에 타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마누라가 그를 죽인 후에 살인죄를 면하려고

집에 불을 놓아 시체를 태워 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면서
사또에게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고소를 제기해 왔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사또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물었다.
"사또의 심중은 어느 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염탐꾼을 풀어 그 여인의 평소 소행을 소상히 알아본 결과, 그들 부부의 금술이 매우 나빴다고 합니다.

게다가 여인의 성품이 간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보아 여인이 남편을 살해한 후에
계획적으로 집에 불을 내어 불에 타 죽은 것\ 처럼 위장을 하였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으나

불을 낸 것이나 불에 타 죽었다는 증거가 없기로 고민입니다.

"사또께서 여러 방면으로 조사하시고 심증을 굳히셨다면, 이 사건은 본부(本夫) 살해에
방화를 겸한 중죄 사건임이 틀림없을 것같군요."
사또는 김삿갓의 말에서 더욱 힘을 얻은 듯,
"저 역시 선생의 의견과 같습니다만, 심판을 내리려면 당사자가 꼼짝 못할 증거가  있어야 할 터인데,

심증만 있을 뿐, 증거가 아무 것도 없어 최후 심판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또의 말을 들은 김삿갓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앉은 몸을 좌우로 까딱거리더니
잠시 후에 자신 만만하게 대답했다.
"증거가 없다 하시니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이런 사건은 엄격하게 다스려 나가셔야 할 것입니다."​
"증거가 없으면 확실한 증거를 일부러 만들어내야 한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그러나 김삿갓은 사또의 질문에 대답은 아니하고 엉뚱한 질문을 먼저 했다.
"하나 물어 보겠습니다. 불에 타 죽었다는 사람은 혹시, 이미 매장을 해버린 것은 아니옵니까?"
"아닙니다. 죽은 사람의 일가들이 사인을 명확히 밝히기 전에는 매장치 않겠다고 하여

시체는 아직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김삿갓은 무릎을 치며 말을 했다.
"그렇다면 지극히 간단 합니다. 정말로 불에 타 죽은 사람인지,

혹은 마누라 손에 죽고 난뒤 시체로 불에 탄 것인지.. 시체를 조사해 보면 단박에 알아낼 수 있습니다."
사또는 그 말을 듣고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였다.

"선생! 타살인지 소사(燒死)인지 시체를 살펴보면 대번에 알아 낼 수 있다는 말씀이 정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사또 어른께 왜 거짓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그러자 사또는 김삿갓 앞으로 바싹 다가 앉았다.

"선생! 시체를 검사해보면 뭐가 어떻게 다른지 그 비방을 꼭 좀 알려 주십시오. 이 사건은 제가 사또로 부임해 오고난 뒤 처음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공명 정대하게 재판하여 주면 제가 이곳 문천 고을에 명관으로 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그러면 사또 어른을 명관으로 만들어 드리기 위해서라도 이 비방만은 꼭 가르쳐 드려야만 하겠군요, 하하하..."

김삿갓은  술 한잔을 쭈욱 들이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사또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사또는 김삿갓의 말을 듣자 크게 감탄하며 손바닥을 마주 쳤다.

"호..과연 듣고 보니, 그처럼 명확한 증거는 없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형리에게 시체를 검안하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또는 밖으로 나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사또의 옷소매를 잡으며 말을 했다.

"죽은 자의 시체는 마땅히 만인이 보는 앞에서 검시하되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너무 서두르시면 안됩니다."


22.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


"시체를 검증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니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김삿갓이 대답한다.
"남편을 죽여 불에 태울 정도로 지능적인 여자라면 재판도 공개적으로 하고

시체 검증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해야 하되, 그 전에 준비 하여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재판을 섣불리 서둘다 보면 사또께서 백성들에게 엉뚱한 원성을 듣게 됩니다."

"재판을 섣불리 서두르다가 제가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다뇨.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곤경에 빠진 약자를 동정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공개된 자리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납득할 증거를 보여 주지 않고, 여인에게 남편을 살해하여 불에 태워버린 중 죄인으로 낙인을 찍어 버리게 되면 백성들은 오히려 죄인을 동정하기 마련이고 ...
아울러 사또의 횡포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하오니, 시체를 검사하기 이전에 반드시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김삿갓은 사또에게 이러저러한 절차를 밟은 뒤에, 백성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

최후의 심판을 내리도록 하라고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재판은 선생께서 일러주신 대로 모든 절차를 밟은 후에 공개적으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사또는 문제의 여인을 동헌 마당에 끌어다가 꿇어 앉혀 놓았다.
공개 재판을 한다고 방(榜)을 미리 써 붙였기에 동헌 마당에는 구경나온 백성들이 수없이 많았다.
재판 광경을 방청나온 사람들 중에는 김삿갓도 한몫 끼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여죄수 옆에는 난데없는 새끼 돼지 두 마리가 죄수처럼 결박을 진채 꿀꿀거리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난데없는 돼지를 보고 제각기 한마디씩 쑥덕거렸다.
"저 돼지는 어떻게 된 돼지야? 돼지도 서방을 죽이고 재판을 받으려고 끌려온 모양이지?"
"예끼, 이사람아. 설마하니 돼지가 죄수로 끌려 왔을라고."
"그러면 저 돼지는 왜 끌려온거야?"

돼지가 무엇 때문에 결박을 지어 끌려왔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듯 재판을 하는 자리에 돼지가 등장한 것은 사전에 김삿갓이 사또에게 말을 해준 탓이었다.
사또가 동헌 마루 위에서 죄수를 굽어보며 문초를 시작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는 네 남편을 살해하여, 불에 타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분명할진데, 아직도
네 죄를 이실직고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죄수는 사또를 올려다 보며 분노에 찬 어조로 항변을 한다.

"사또께서는 어찌하여 아무 죄도 없는 쇤네를 살인범으로 몰아붙이시옵니까.

아내가 남편을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사또께서는 댁에 돌아가 마나님에게 물어 보시면 잘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죄수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사또의 마누라까지 물고 늘어질 정도로 악랄하였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그 말을 듣더니, 모두들 그 여인을 동정해 마지 않는다.
"저 여자는 살인범으로​ 몰리는 것이 얼마나 억울하면 사또의 마누라까지 물고 늘어질까,
증거도 없는 저 여자를 본부 살해범으로 몰아치는 것은 아무래도 사또가 잘못하는 일같은걸."
"누가 아니래! 내가 보기에도 사또가 너무 심한 것같아. 정말로 남편을 죽인 여자라면 저토록 당당하게 나올 수야 없지 않은가?"

사또는 구경꾼들의 분위기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문초를 계속했다.
"네가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본부를 살해한 죄인임에 틀림이 없다. 네 죄를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는데, 너는 어찌 죄가 없다고 발뺌만 하고 있느냐!"

"사또는 무슨 근거로 쇤네를 살인범으로 몰아치시는 것이옵니까. 죄가 있으면 증거를 보여 주옵소서. 아무리 사또이기로 생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아치는 법이 어디 있사옵니까?"
여인은 길길이 뛰며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거칠게 항변했다.

사또는 이때다 싶어 여인을 굽어보며 다시 말했다.
"네가 말 한번 잘하였다. 네가 남편을 죽인 후 불을 질렀다는 증거를 보여 주기만 하면
네 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야 물론입지요. 쇤네가 남편을 죽여 불에 태웠다는 증거가 있다면 어찌 인정을 아니하겠습니까. 하오나 그런 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증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당당하게 자신이 무죄임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방청해 있던 구경꾼들의 분위기는 점점 여인을 동정하게 되었다.
여인이 남편을 죽였다는 이렇다 할 증거도 없으려니와, 재판에 임하는 당당함 등, 여인은 어디로 보나 범인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방청석에서 여인을 동정하는 수근거리는 소리가 사또의 귀에까지 들렸다.
이때, 사또가 방청석을 향하여 말을 했다.
"방청객 여러분! 살아 있는 사람이 불에 타 죽는 것과, 죽은 사람이 불에 탄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있음을 여러분은 미리 알고 계셔야 합니다."

사또의 이같은 말에 방청객들은 한결같이 궁금해 하였다.
그리하여 늙은 방청객 한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사또에게 묻는다.
"사또 어른! ​ 생사람이 불에 타 죽은 시체와 죽고나서 불에 탄 시체는 모두가 시체이거늘,
무엇이 다르다는 말씀이시옵니까? "

사또가 대답했다.
같은 시체라도 살아있을 때 불에 탄 시체와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는 엄연히 다른 모습을 하는 법이오.

그것을 지금부터 여러 방청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증명해 보일 터이니 여러분들은 검증의 과정을 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방청객들은 사또의 말에 더욱 궁금증이 일어, 사또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새로 부임해오신 사또는 대단히 지혜로운 어른이신가봐,

우리들은 생각지도 못한 비방이 있다고 하시는 것을 보니.." 하며 눈과 귀를 곳추 세우고 사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또는 형리에게 명하였다.
"돼지 한 마리는 죽인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한 마리는 산채로 묶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거라. 그리고 장작에 불을 지피거라." 
그리하여 동헌 마당에서는 방청객이 지켜 보는 앞에서 살아있는 돼지와 죽은 돼지를 불에 태우는 거창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사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죄수에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산 돼지와 이미 죽은 돼지를 불에 태워 보는 것은, 네 죄가 있고 없음을 가리기 위한 실험이로다. 그러니 너는 똑똑히 보아 두어라."
여인은 그만, 기가 죽었는지 입을 굳게 다문채 장작불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또는 방청객을 향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산 돼지는 불에 타 죽는 순간까지 호흡을 하므로 불에 타 죽은 후에, 입안에 재가 쌓일 것이오,
이미 죽은 돼지는 호흡을 할 수 없으니, 불에 태우더라도 입안에 재가 없이 깨끗할 것인즉..
잠시 후면 여러분들은 내 말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두 마리의 돼지가 불에 타고 나자, 사또는 방청객을 다시 둘러보며 말을 하였다.
"지금 우리는 살아있는 돼지와 죽은 돼지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직접 불에 태워 보았소.
이제는 방청객 중에서 몇 사람이 나와, 두 마리 돼지 입안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기 바라오."

그러자 두 세명의 방청객이 달려나와 불에 탄 돼지 입안을 검사했다.
과연 살아서 불에 탄 돼지의 입안에는 사또가 말을 한 대로 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불에 탄 돼지의 입안은 재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과연 사또 어른은 정말로 귀신같은 어른이시오. 이런 일까지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
방청객들은 사또의 지혜로움에 혀를 내두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또는 다시 방청객을 굽어보며 말했다.

"지금 여러분 앞에서 직접 실험을 해봄으로써 살아서 불에 탄 돼지와 죽은 뒤에 불에 탄 돼지의 입안 상태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모두 아셨을 것이오.

그 점에 대해서 아직도 의혹을 품고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러자 방청객들이 입을 모아 외친다.

"사또 어른은 실로 귀신같은 분입니다."
"나는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오."
이호범은 방청객들의 칭송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우리가 이미 돼지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저 여인의 죽은 남편의 시체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저 여인의 주장대로 남편이 불에 타 죽은 것이라면 입안에 재가 쌓여 있을 것이요, 

만일 저 여인이 남편을 죽인 후 불을 질렀다면 입인이 깨끗할 것인즉, 죄가 있고 없음은 조만간 드러나게 될 것이오.."

"여봐라! 죽은 자의 시체를 옮겨오거라."
사또는 자신에 찬 어조로 형리에게 명했다.
동헌 마당으로 옮겨진 죽은 자의 시체는 형리와 방청객 수 명이 번갈아 입안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죽은 자의 입안은 매우 깨끗했다.
"사또, 죽은 자의 입안은 깨끗하옵니다."

검안을 한 형리가 대청에 좌정한 사또에게 아뢰자 함께 시체의 입안을 살펴본 방청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순간, 방청객의 탄성이 튀어 나왔다.
"조용.. 조용."
사또의 곁에 입시하여 있던 이방이 자신도 사또의 다음 말이 궁금하기 이를데 없어, 방청객들의 탄성을 제지했다.

사또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찌렁찌렁한 어조로 말했다.
"죄수는 듣거라. 네가 남편을 죽여 불에 태운 증거가 이렇게 뚜렸한데, 아직도 자백을 못 하겠느냐?"

죄수는 더 이상 무죄를 주장할 수 없었던지, 별안간 땅에 푹 엎어지더니 소리 없이 울기만 하였다.
방청객들은 사또의 현명함에 혀를 내두르고,

남편을 죽인 후 죄를 감추기 위해 불을 지른 간악한 계집의 소행에 혀를 찾다.
방청객 중의 한 명이 "우리 고을 사또님이야 말로, 천고에 없는 명관이시다!"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이구 동성으로 "암, 암"하면서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일제히 쳤다.

이에 사또는 자신 찬 어조로 최후의 판결을 내렸다.
"여봐라! 저런 계집은 꼴도 보기 싫다! 저 년을 당장 끌어내어 처단해 버려라!"
    
이렇듯 문천 군수 이호범이 백성들로 부터 "천고에 없는 명관"으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김삿갓의 덕택이었음은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다.
이호범이 최후의 판결을 내리고 관사로 돌아오니 김삿갓은 어느새 먼저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사또께서 오늘 명 판결을 내리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하며 사또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아닌가.

이호범이 김삿갓에게 절을 올리며 말한다.
"제가 백성들로부터 과분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오로지 선생의 덕이었습니다.
선생이 아니 계셨더라면 제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합니다."

김삿갓이 사또의 몸을 잡아 일으키며,
"사또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옵니까. 천도(天道)가 무심치 않고, 세상만사가 사필 귀정이다 보니

이같은 결과를 얻게된 것이지요. 재판을 공명정대하게 하시느라 노고가 매우 크셨습니다."

사또는 즉석에서 술상을 차려오게 하여 김삿갓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선생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23. 역마살을 어찌할꼬


"무슨 부탁을..."
"선생이 관북 천리를 유람하시기를 단념하시고 우리 고을에 길이 머물러 주시면 저로서는
그 이상 고마운 일이 없겠습니다."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웃었다.

"말씀인즉 고맙습니다. 허나, 역마살에 치인 기러기같은 넋을 타고난 사람보고 한 곳에만 머물러 있으라 하시는 말씀은 무리한 말씀입니다. 얼마간 술이나 더 얻어먹다가 떠나가게 해주소서."
"선생! 문천 고을은 제가 관할하는 고을 올시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아무리 떠나시려 하여도 사또인 제가 못 떠나게 하면, 선생은 문천 땅을 한 걸음도 벗어나질 못하실 것입니다. 하하하."
사또는 속마음이 담긴 농담을 하며, 어떡하든지 김삿갓을 오래 붙잡아두고 싶어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사또는 퇴청하자 김삿갓과 술을 나누었는데, 어쩐지 그 날따라 안색이 좋지 않았다.
"사또께서 오늘은 기색이 좋지 않으시니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김삿갓이 이렇게 묻자 사또는 눈쌀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오늘도 골치 아픈 송사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백성간에 시비가 생겼을 때 사또께서 흑백을 가려줘야 하는 것은 목민관의 본분이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허나 오늘의 사건은 워낙 아리송해서..."
"아리송하다뇨? 어떤 사건이기에 아리송하단 말씀입니까."

김삿갓은 호기심이 일어 물어 보았다. 사또는 술을 권하며 말했다.
"오늘의 소송건은 내용이 지극히 단순한 사건입니다. 두메 산골에 사는 촌부 두 사람이

황소 한 마리를 제각기 자기 소라고 싸우다가, 사또인 저한테 주인을 가려 달라고 소를 끌고온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둘 중에 한 사람은 멀쩡한 도둑놈인 셈이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누가 소 임자이고 누가 도둑놈인지 전혀 가려낼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헛참, 소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사또 어른, 해결책을 스스로 찾으셨습니다!"
"네?"

"지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소에게 물어본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또는 김삿갓의 대꾸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김삿갓을 빠꼼히 쳐다 보았다.

"소는 귀소 본능이 어떤 동물보다도 강한 동물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간섭하지 않고 그냥 놓아주어 버리면 소는 영락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소가 어느 집으로 돌아가는가를 알고 나면 누가 소 임자이고 누가 도둑인지 절로 알수 있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사또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과연 너무도 절묘한 방법이시옵니다!"
그리고 나서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허 참, 그렇게도 쉬운 방법이 있는 것을 나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면 나같은 위인은 애당초 사또가 될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
김삿갓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정을 베풀려고 너무 긴장을 하시다 보니 오히려 냉정심이 흐트러진 탓이라고 생각 됩니다.
앞으로 그런 점을 유념하시면 될 것같습니다."
"좋은 충고의 말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금후에는 그런 점에 각별히 유념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또는 백성들로부터 "명관"이라는 칭송을 듣고난 이후,

김삿갓을 어떤 일이 있어도 놓아 주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날마다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안주로 김삿갓의 환심을 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김삿갓에게는 술과 안주의 질과 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며칠만 쉬어가려던 계획이 달포가 지남에 따라 김삿갓은 마음이 밖에 있어 온 몸이 쑤셨다.
(사또에게 떠난다고 작별 인사를 한다고 그러라고 하진 않겠고..어떡하든 붙잡으려 할텐데,

제일 좋은 방법은 아무 소리도 없이 슬쩍 도망을 가버리는 것 밖에는 없겠구나..)
이렇게 마음을 다진 김삿갓이 슬며시 빠져나갈 기회를 옅보고 있던 어느 날 ..

사또가 불시에 찾아와 이렇게 말을 한다.
"선생이 심심하실테니 이제부터 재판 구경이나 하시죠.
오늘은 매우 흥미로운 재판이 있을 예정입니다."
"흥미로운 재판이라뇨?"
가뜩이나 심심하던 김삿갓에게는 사또의 이야기 자체가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여러 건의 재판이 밀려 있는데, 그 중에서 유뷰녀가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에게 고발당한 사건도 하나 있습니다.

그 사건은 제법 흥미가 있을 듯하오니, 선생은 제 옆에서 구경을 하고 계시다가

제가 판결을 잘못 내릴 경우에는 옆에서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삿갓은 남의 재판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지만

사또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난처하여 사또를 따라 동헌으로 나왔다.
이윽고 사또는 동헌 마루에 덩실 올라앉더니,

바람을 피우다 남편에게 고발을 당하고 끌려온 여인을 굽어보며 준엄한 어조로 문초를 시작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는 어엿한 남편이 있는 몸으로, 그의 눈을 속여가며 외간 남자와 계속 통정을 하였다니

우리 사회에는 삼강 오륜이 뚜렷하거늘 유부녀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
 
사또 앞에 죄인으로 끌려 나오면 누구나 겁에 질려 몸을 떨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문제의 여인은 떨기는 커녕 눈도 하나 까딱않고 도도하기 이를 데없이 보였다.
여인의 옆에는 남편인 듯싶은 사내 하나가 웅크리고 서있었는데,

몸을 떨고 있는 사람은 끌려나온 죄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계집이 어떻게 생겨 먹었으면 저렇게도 당돌할까 싶어,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사내들이 욕심을 부릴만큼 교태롭게 생긴 계집이었다.
(계집이 예쁘고 교태롭게 생기면 얼굴 값을 한다더니, 저 계집이야 말로 사내들을 호려먹게 생겼구나.)

사또는 심문에 응하는 죄인의 태도가 매우 불량해 보이자​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죄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어찌 대답이 없느냐?"
​죄수는 그제서야 얼굴을 똑바로 들더니 사또의 얼굴을 말끔히 올려다 보며 앙큼한 대답을 한다.
"쇤네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해온 것은 사실이옵니다.

허나, 남편을 속여가며​ 정을 통해온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쇤네의 행실은 남편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온데, 새삼스럽게 그것이 어째서 죄가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사또는 어이가 없는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남편 되는 자에게 물었다.
"그대의 아내는 그대의 허락을 받고 바람을 피웠노라 말을 하는데 사실이냐?"
사내는 두 손을 모아 잡고 머리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집사람이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해오고 있는 사실을 소인도 알고 있기는 하옵니다만,
소인이 그러한 행실을 허락해준 일은 결단코 없사옵니다."

사또가 그 말을 듣고 호통을 내지른다.
"예끼 이 못난 놈아!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면 가랑이를 찢어놓을 일이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계집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관가에 고발은 왜 했느냐?"​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도 말을 들어주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사또전에 호소를 하게 된 것이옵니다.

사또 어른께서는 소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와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기가 막힌 소리다.
사또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삿갓은 어쩌면 저리도 못난 사내가 있을까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사또는 계집의 행실이 생각할수록 괘씸타 여겼는지, 계집을 굽어보며 준엄하게 말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도 지금 들은 바와 같이,

네 남편은 네가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하도록 허락해준 일이 한번도  없었노라고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남편의 허락도 없이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너는 네 죄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

그러자 계집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얼굴을 들더니 사또를 말끄러미 올려다 보며 말한다.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사또전에 한 말씀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뭐가 알고 싶으냐. 어서 말해 보거라!"

그러자 요망한 계집이 따지듯이 말을 하는데,
"쇤네 몸에 달려있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또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이 죄가 된다는 말씀이옵니까."
이에 사또는 분노가 폭발하여 벼락같은 소리를 지른다.

"네 이년! 아가리 닥쳐라. 그것이 네 남편의 소유물이지, 그것이 어째서 네 물건이란 말이냐!"
사또와 죄수가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언쟁이 벌어지자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사또가 과연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무척 궁금하였다.

과연, 사또는 말 끝마다 이 핑게 저 핑게로, 말재주를 부리며 빠져나갈 몸부림을 치는 여인을 앞에 두고,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 말이 언뜻 생각나지 않아, 물끄러미 마당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별안간 손을 들어 마당 구석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얼굴을 들어, 저기 기어가는 짐승을 보아라. 저게 무슨 짐승이냐?"
여인이 얼굴을 들어 바라보니 마당 한쪽 구석에서 쥐 한마리가 살금살금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짐승은 쥐가 아니옵니까?"
"그렇다 저 짐승은 네 말대로 쥐가 틀림없으렸다"
사또는 여인의 대답에 일단은 못을 박았다.
그리고 "쉬잇!" 하고 큰 소리를 내어 쥐를 쫓았다.

그러자 쥐가 기겁하여 쪼르르 도망을 치며 자기의 구멍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사또가 죄수에게 다시 물었다.
"쥐가 지금 어디로 들어갔는냐?"
"제 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제 구멍이라니? 제 구멍이란 어떤 구멍을 말하는 것이냐?"
"제 구멍은 쥐구멍 아니옵니까?"
"저 것을 어째서 쥐구멍이라고 하느냐?"
"사또님도 참!, 쥐가 들락날락하니까 쥐구멍이라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여인은 무심코 말을 지껄였다.
그러자 사또가 즉시 추상같이 다그치는데,
"옳지! 이제야 네가 바른 말을 하는구나. 쥐가 드나드는 구멍을 쥐구멍이라 하듯이,
네 남편만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그 것이' 비록 네 몸에 있다 하더라도

'그 것은' 네 것이 아니고 네 남편의 '것이' 아니겠느냐!
이제야 내 말 뜻을 알아 듣겠느냐? "

여인이 자기 말에 걸려서 아무런 대꾸를 못하자, 사또는 지체없이 최후의 판결을 내렸다.
"저 계집은 어엿한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마음대로 피웠으니 파륜지죄(破倫之罪)를
범했음이 분명하다. 저 계집을 당장 끌어내어 다시는 오입질을 못하도록 곤장 삼십대를 쳐서 놓아 보내라."

사또가 서릿발같은 판결을 내리자 김삿갓도 치밀어 오르던 체증이 한꺼번에 뚫리는 듯,

통쾌감을 느끼며 사또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사또 어른! 이번 재판은 진실로 명 판결이셨습니다.

사또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이 갈수록 자자해질 것이옵니다."

"이제부터 처리해야 할 사건이 아직도 여러 건 남았으니 선생은 끝까지 지켜보아 주소서."
그러나 김삿갓은 지금이야 말로, 몰래 도망갈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또에게 다시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제가 속이 좋지 않아 잠깐 뒷간에 다녀오겠습니다."

김삿갓은 거짓 핑게를 대고 밖으로 나와, 부리나케 숙소로 돌아와 길을 다시 떠날 준비를 하며

달포 동안이나 자신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준 문천 군수 이호범 사또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고별 인사를 한 구절 써 놓았다.
       
樂莫樂兮 新相知  (낙막낙혜 신상지)
즐거움은 새 사람을 알게된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고

悲莫悲兮 新別離  (비막비혜 신별리)
슬픔은 친구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다.

김삿갓은 장장 한달여 만에 다시, 바랑을 지고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잡으니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문천 관아 밖으로 홀연히 나서니, 오랫동안 잊고있던 산천 초목이 자기를 새삼스러이 반갑게 맞아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랫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에 들떠, 차츰 읍내를 벗어나는 김삿갓의 발걸음은 총총 사뿐사뿐하였다.

번지없는 주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