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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작품세계 - [여인초상]

박연서원 2019. 1. 23. 07:48

모딜리아니의 작품세계 - [여인초상]

               - Amedeo Modigliani (伊, 1884-1920)

자화상 1919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7.12~1920.1.24]

피카소, Andre Salmon과 함께 한 모딜리아니

Modigliani, Picasso and André Salmon in front the Café de la Rotonde, Paris. Image taken by Jean Cocteau in Montparnasse, Paris in 1916.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는 1884년 이탈리아 북부의 리보르노에서 유대계 가문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98년 이탈리아 풍경화가 굴리엘모 미켈리(Guglielmo Micheli)의 문하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으나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진행되어 공부를 중단했다.

이후 1902년 피렌체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조반니 파토리(Giovanni Fattori)에게 회화를 배웠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징주의 미학이 유행했고, 모딜리아니는 이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베네치아로 가서 1905년까지 학업을 계속했다.

1906년 파리로 이주한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에 정착했다. 그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인체소묘와 유화를 공부하는 한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앙리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폴 세잔(Paul Cezanne) 등에 영향을 받았다.

 

1909년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로 이사하여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와 교류하며 조각에 매료되어 1914년까지 30여 점에 이르는 특유의 길쭉한 석조 두상을 제작했다. 그러나 작업 중에 발생하는 먼지로 인해 이미 결핵으로 약화된 폐가 더 손상되자 조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1915년 시인 겸 화상인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Leopold Zborowski)의 권유를 받아들여 회화로 복귀했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조망하는 순수한 형상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특히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여성상은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했다. 모딜리아니는 본래부터 아방가르드 운동에 초연한 입장을 보인 고립을 자초한 화단의 거물로 그의 작품은 향후 어떤 화파의 발생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직관적인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1917년 모딜리아니는 잔 에뷔테른(Jeanne Hebuterne)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들었다. 잔은 로마 가톨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 미술학도였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모딜리아니와 불안한 자의식을 공유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동료 미술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늘 변두리에 있었다. 같은 해 12월 모딜리아니는 베르트 베이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통행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내 건 두 장의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바로 철거되고 전시회도 일찍 문을 닫고 말았다. 모딜리아니와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잔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했다.

1918년 모딜리아니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열정과 헌신만은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잔의 초상이 주를 이루는데 단순미가 더욱 강조되는 가운데 전에 없던 서정미를 엿볼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잠시 남프랑스 니스에서 요양하면서 병세가 호전되었으며, 이곳에서 딸 잔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가 태어났다. 모딜리아니는 1919년 5월 파리로 돌아와 다시 예술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했다. 그는 1920년 1월 24일 결핵성 뇌막염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의 연인이며 아내였던 잔은 그 이튿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녀의 뱃속에는 8개월 된 아기가 있었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에는 '첼로 연주자(The Cellist, 1909)', '여인의 두상(Head of a Woman, 1911)',
'섕 수틴의 초상(Portrait of Chaim Soutine, 1916)', '붉은 누드(Red Nude, 1917)',
'잔 에뷔테른의 초상(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8)', '앉아있는 누드(Seated Nude, 1918)',
'아기를 안고 있는 집시 여인(Gypsy Woman with Baby, 1919)' 등이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드〉

Female Nude

1916, 캔버스에 유채, 92.4×59.8cm

 

Woman's Head with Beauty Spot, 1906-07

 

Portrait of a Woman, 1907

 

Portrait of Maude Abrantes, 1907

 


Woman's Head in Profile, 1907

 

Head of a Young Woman, 1908

 

1906년 21세 때 파리로 진출한 모딜리니아가 23세 때 그린 작품이며, 그로서는 파리 정착 이후 첫 번째의 공식 작품이 되는 셈이다.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굶주리고 외로운 유랑기를 2년 동안 보내면서 그는 자신 속에 잠재하는 영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피카소의 변모를 싫어했고 미래파의 권유를 뿌리치면서 그는 자신의 독자성만을 모색하고 있었다. 1907년 살롱 도똔느 에서 개최된 세잔의 대회고전은 그에게 큰감명을 준다. 이 첫 번째 공식 작품은 그 다음해인 1908년에 앙데팡당전에 출품하게 된다. 아직 모딜리니아의 유연한 데포르마 숑인 생(生)의 곡선(曲線)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경직된 지적(知的)인 성찰(省察)로서의 주제 파악이 역력하다. 세잔과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The Jewish Woman, 1908


[젊은 여인의 얼굴]과 함께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작품이지만, 전자와는 현저한 표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여겨지기 어렵다.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과도기를 말해 준다 하겠다.

 

처음 파리로 왔을 때 그는 조각가가 되는 게 꿈 이었지만, 단테와 니체, 그리고 다눈치오 를 암송하고 15세기[콰트로첸토] 르테상스의 고전을 규범으로 했던 교양인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교양 즉 그의 문학성은, 조각과 회화 사이인 입체와 평면 사이의 미련[未練]의 가교 같은 구실을 한다.

 

이 작품이 풍겨 주는 표현주의적인 어두운 분위기는 이러한 그의 미련을 바로 반영해 주고 있다. 세기말 의식인 고뇌의 그림자가 역력하다. 고뇌는 젊은 예술가의 특권이었으며, 그 궁극에 멜랑콜리의 존중이 움트고 있다.

 

Portrait of a Young Girl, 1910

 


석재 조각 <두상>

 

[카리아티드]의 에스키스와 함께 이 조각 작품은 1912~14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가 되는게 꿈이었고, 오른쪽의 두상은 1912년 살롱 도똔느에 출품했던 일곱 점의 석상 가운데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브랑쿠지와 립시즈로부터 조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인 긴장은 극에 달했었다고 한다. 폐가 나쁜 그는 조각에 대한 열의를 저버리지 못했으며, 죽는 날까지 언제인가는 유명한 조각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수직으로 길쭉한 코의 선맥과 원통형의 목줄기가 신선한 조형미를 유발시켜 주고 있다. 어딘지 먼 시대로의 환상이 맥박처럼 들려오는 이 두상은, 당시의 파리 미술가들이 심취하기 시작했던 아프리카의 원생 미술인 그 충실감과 데포르마숑을 연상시킨다.

 

Study of a Head, 1913

 

Portrait of Frank Burty Haviland, 1914

 

Fat Child, 1915

 

Head, 1915

 

Head of Red-Haired Woman, 1915

 

Little Louise, 1915

 

Madame Othon Friesz, La Marseillaise, 1915

 

Madame Pompador, 1915

 

이 퐁파두르 부인은 본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비아트리스를 대용해서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비아트리스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 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하며 타일렀다는 것이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같다.

 

Pierrot, 1915

 

Portrait of a Woman, 1915

 

Portrait of a Woman, 1915

 

Portrait of Young Girl, 1915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5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5

 

Portrait of Pablo Picasso, 1915

 

이 작품도 리베라의 초상처럼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습작풍의 작품이다. 이것은 리베라를 그린 다음해의 작품이며 모딜리 아니의 독자적인 양식이 극도로 제약된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우수에 찬 조용한 서민들의 표정과는 달리 피카소의 눈은 짙은 눈동자가 끼워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앙드레 살몽과 피카소를 도움의 카페에서 자주 만났으며, '피카소는 우리들보다 언제나 2년을 앞서 있었다.'고 그 재기를 찬양하기도 했다.

모딜리아니의 피카소는 여기서처럼 그리스 신화의 목신처럼 그려져 있으며, 그처럼 급진적인 변모를 싫어했던 그의 중용적이고 고전적인 입장이 이처럼 피카소를 어떤 어두운 환영처럼 느끼게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Raimondo, 1915

 

Rosa Porprina, 1915

 

Serving Woman, 1915

 

Teresa, 1915

 


The Fat Child, 1915

 


Woman Seated in front of a Fireplace, 1915

 


Woman's Head, 1915

 


Woman's Head, 1915

 

81 x 54 cm,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Woman's Head, 1915

 


Woman's Head, 1915

 


Woman with Velvet Ribbon, 1915

 


Young Woman with a Small Ruff, 1915

 

Bride and Groom, 1915-16

 

모딜리아니의 전(全)작품은 언제나 한 인물의 초상화이고 한 화면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 건 <립시즈 부처>의 작품말고는 이것이 나머지 예이다. 또한 그의 모티브는 항상 서민적인 애환이 조용하게 표정짓는 삶의 모습들인데, 여기서처럼 정장한 한 쌍의 부르조아가 등장하는 경우도 이것이 마지막 예이다.

 

앞에 적은 조각상인 길쭉한 수직선과 견주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당시의 그는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를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두드러지던 징후는 입체파적인 조형 감각이었다.

 

화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한 다음 각기의 인물의 중앙선을 관통한 선상에서, 가령 남자의 오른쪽 뺨 위의 원형의 선과 여자의 그것이 대응한다는 게 여기서의 예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묘는 불필요한 색채의 텐션(tension)을 효과적으로 제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선맥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살리고 있다.

 

Head of a Woman in a Hat, 1916

 

미남자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었다는 것은 그의 전기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의 카페에서 그리고 망파르나스의 로톤드나 도움의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처녀들은 빠져들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기 들은 용모를 띠고 있으며, 양가집의 처녀같지는 않다. 필경 술집같은 데서 활달하지만 내던지듯 인생을 살아가는 여성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딜리아니의 여성상인 깊고 우수에 찬 여느 침정으로서의 표정은 이 모델의 경우 어디에도 없다.

다만 로롯트의 왼쪽에 그려진 꽃은 모딜리아니가 마음먹고 정물화를 그렸다면 훌륭한 작품을 그렸으리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Head of a Young Girl, 1916

 

Madame Dorival, 1916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6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6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6

 

The Beautiful Confectioner, 1916

 


The Servant, 1916

 


Victoria, 1916

 


Young Girl Wearing a Rose, 1916

 

Chakoska, 1917

 

Elena Picard, 1917

 

Girl with Pigtails, 1917

 

Jacques and Berthe Lipchitz, 1917

 

Jeanne Hebuterne with Hat and Necklace, 1917

 

Jeanne Hebuterne with Necklace, 1917

 

Louise, 1917

 

Lunia Czechowska, 1917

 

Madame Georges van Muyden, 1917

 

이 작품의 구도는 회화의 자율적인 운영만으로 잡혀진 것이라기보다 모델인 대상의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는 화면이다. 가령 크로드 로와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모델은 흔히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긴장을 푼 상태의 가을 날씨처럼 가라앉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여기서 100퍼센트의 이탈리아 적인 유화한 풍취를 찾아볼 수도 있겠고 또는 100퍼센트의 현세적이고 식물적인 무관심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며, 혹은 온화한 몽상적인 육감을 맛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모딜리아니의 모델들이 모두 틀에 박힌 듯한 하나의 유형으로 그려졌다는 이른바 매너리즘으로만 간주될 때 야기되며, 미술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태도 여하로 결정된다는 관념론자의 경우를 대표한다 하겠다.

 

Minoutcha, 1917

 

Portrait de Madame L, 1917

 

Portrait of Anna Zborowska, 1917

 

Portrait of Woman in a Black Tie, 1917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7

 

운명적인 사랑

 

1917년 7월 어느 날 모딜리아니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서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잔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서른세 살이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딜리아니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Portrait of Madame Zborowska, 1917

 

Portrait of Pardy, 1917

 


The Blue Blouse, 1917

 


Woman in White Coat, 1917

 


Young Girl in a Striped Blouse, 1917

 

 

Lunia Czechowska, 1917-18

 

Jeanne Hebuterne, 1917-8

 

한 모델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모딜리아니...평생을 모딜리아니의 곁에서 모델이 된 여인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의 아내 쟌느이다. 모딜리아니의 부모는 유태인으로 스스로 유태인임을 자랑스러워했고 잔느의 집안은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다. 사랑했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잔느는 사랑하는 그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