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1. 밝혀진 집안 내력의 비밀
어머니로부터 조부(祖父) 김익순에 대한 내력을 듣게 된 병연(炳淵)은 비틀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벽을 바라보고 꿇어 앉아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꺾고 있었다.
희미한 등잔불은 가끔씩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출렁거렸다.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여보, 밤이 깊었어요."
남편이 평소와 전혀 다른 실성한 모습으로 벽을 향해 앉아 있자
병연의 아내도 물끄러미 앉아 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늘 집에 오실 때 백일장에 참례하여 장원급제하셨다고 좋아하시더니"..
병연의 아내는 불과 한 시각 전에 남편 모습이 어머니 방을 다녀온 후 돌변한 것이 의아했다.
그러나 병연은 대답이 없었다.
"여보, 어서 자리에 드세요."
아내가 다시 말하자 병연은 그제서야 아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잔불로 어두운 방안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신 아직까지 자지 않았구료."
"당신이 그러고 계시는데 제가 어찌 잠자리에 들 수 있겠어요."
"그렇군 내 미안하오."
자조섞인 말투로 대답한 병연은 다시 아무 말없이 공연스레 고개를 몇번 끄덕이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아내에게 감추려는 듯 시선을 천정으로 향했다.
그리곤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천정으로 시선을 향했다.
"여보!"
남편의 부름에 아내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얼굴과 시선을 병연의 등 뒤로 향했다.
"오늘, 내 당신을 앞으로 고생시키지 않고 호강시키리라 생각되더니 모두가 허사가 된 것 같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남편의 다정한 말을 듣자 더욱 궁금한 아내가 가슴 떨려하며 되물었다.
"장원급제의 기쁨도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소, 벼슬길도 이제 아득하게 멀어지고..
아까부터 모든 것이 헛된 꿈이요, 뜬구름을 쫒는 신세가 된 기분이오."
"저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내의 궁금증은 다시 입을 다물고 있는 병연의 모습으로 더욱 커졌다.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오."
아내가 뒤이어 아무 말 없자 병연은 한참후 입을 열었다.
"오늘, 백일장의 시제는
논공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 , 嘆金益淳罪通于天)이었소."
"제가 그런 어려운 글을 아나요"..
아내가 이렇듯 대답하자 병연은 당연하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인 후 다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입을 연 병연은,
"그 시제로 장원이 되었으나 알고보니 내가 절절히 탄핵했던 김익순이 사실은 나의 조부였소."
병연의 아내는 이제서야 남편이 그토록 괴로워한 까닭을 헤아린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하오, 당신을 고생시켜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남편의 말을 들으니 병연의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여보, 저..."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무슨 말이오?"
병연은 천정을 쳐다본 채 물었다.
아내는 몇 번인가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아기를 가진 것 같아요."
"아기를?"
병연은 그제서야 아내를 향하여 돌아서며 자세를 고쳐 앉아 아내에게로 얼굴을 향했다.
병연이 마주 보자 아내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깊게 떨구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병연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생각해보면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였겠다, 아내는 태기가 있겠다.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병연에게는 기쁨보다 슬픔이 앞섰다.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더라도 미천한 아비로 인해 신분이 제한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아내의 말을 듣고도 기쁨에 앞서 가슴만 더욱 메어왔다.
병연은 아내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뜨거운 눈물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차라리 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병연은 밤새 한잠 못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해가 산마루를 넘어왔다.
사립문 밖으로 나온 병연의 눈에는 세상이 온통 새벽 안개속에 묻힌 듯 뿌옇게 보였다.
어제 이 시각의 병연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에 소생하는 만물처럼 야심찬 사나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속에 희뿌연 재만 남고 희망도 용기도 없는 타락한 몰골이었다.
잡목 숲을 얼마나 걸어다녔는지 모른다.
병연은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아..."
무거운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그는 잠이 들어 있었다.
잠들었다기보다 허탈감이 주는 공허함에 가사상태였다.
종달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병연은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해는 이미 중천 높이 솟아 있었고 봄볕은 따사롭게 움트는 나뭇가지를 비추고 있었다.
넋을 잃고 망연히 눈앞에 펼쳐진 봄 풍경을 바라보던 병연은 문득 당시(唐詩) 한 수가 떠올랐다.
초색청청 유색황 (草色靑靑 柳色黃),
도화력난 이화향 (桃花歷亂 梨花香)
동풍불위 취수거 (東風不爲 吹愁去),
춘일편능 야한장 (春日偏能 惹恨長)
풀빛은 푸르나 버들은 아직 황색인데,
복사꽃은 만발했고 배꽃은 향기롭네
동풍은 나의 시름을 불어내어 갈 줄 모르고,
봄날은 한도 많고 길기도 하여라.
지금 처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시였다.
그렇다, 이 화창한 봄날은 그에게는 한도 많고 지루하도록 길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문득 단시 한 귀절이 떠올라 읊조리는데
만사 개유정 (萬事 皆有定),
부생 공자망 (浮生 空自忙)
모든 일은 운명에 따라 정해지건만,
사람이 공연히 떠돌며 찾는구나.
2. 병연의 방랑준비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병연에게는 시야 말로 생의 전부였다.
애써 생각지 않아도 시상은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지금까지는 입신출세를 해보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자신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었고 문장을 가다듬고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에 시작을 붙였다.
하지만 출세가 뜬구름이 된 지금, 문장이 무슨 소용있으며 시 또한 무슨 필요있단 말인가.
폐족의 낙인이 찍혀 있는 마당에 시를 해서 무엇 한단 말인가.
자괴감에 빠져 며칠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병연, 뜬구름같은 인생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자연에 묻혀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하면서 주유천하(周遊天下)로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병연은 자기의 결심을 실행하기에 앞서 소년시절부터 자기를 깨우쳐 준 서당의 스승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올리리라 마음 먹었다.
"허어, 병연에게는 더 가르칠 것이 없구나. 너를 가르치기엔 나의 글이 너무 짧구나."
스승은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공부가 깊어갈수록 병연의 깨우침이 스승을 앞섰고 이제 그 결과로 백일장 장원을 하였으니 즉시 스승님을 찾아 뵙는 것이 도리이지만 어지러운 심경 탓도 있고 급제한 바를 떳떳하게 자랑할 처지도 못되었기에 당장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오르게 되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라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올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서당이 있는 아랫 마을로 내려갔다.
"스승님!"
방안에서는 학동을 가르치는 스승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냐?"
"저 병연이옵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학우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자네 이제 왔는가?"
학우들이 그를 반기는데 병연의 장원급제 소식을 뻔히 듣고있던 터에 조금 늦게 나타났다는 질책어린 대답이었다.
병연은 말 없이 방안으로 들어가 스승께 큰 절을 올렸다.
"일찍 찾아 뵈오려 하였으나 신병으로 늦었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병연은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래? 많이 아팠더냐? 그래 지금은 괜챦으냐?"
스승은 병연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병연의 병을 염려하였다.
"네 지금은 염려하신 덕에 거의 낳았습니다."
"허허헛, 장원급제를 하더니 너무 기쁜 나머지 병을 얻은 모양이다.
거의 다 낳았다니 마음이 놓인다."
스승은 자기 문하에서 장원급제가 나왔으니 여간 즐겁지 않았다.
연실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병연을 바라보며 마냥 만족해 하였다.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오늘도 소식이 없었으면 자네 집으로 올라갈
참이었네.
그나저나 자네의 장원 급제를 축하하네."
그제서야 동문수학 하던 친구들이 저마다 나서며 병연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정말 고맙네. 내가 재주가 있다기보다 평소에 스승님께서 잘 가르쳐주신 은덕이고
학우들이 도와준 덕분일쎄."
병연은 이렇듯 답례를 하였지만 친구들의 축하가 여간 거북스럽지 않았다.
"백일장 다음 날 읍내에 나갔더니 저자거리나 주막거리나 할 것 없이 장원급제한 선비 이야기로
들끓더군.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어떤 사람은 자네가 산신령의 화신이라고까지 말을 하더군."
학우의 이 말에 병연은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이번에는 스승이 한마디 하셨다.
"내력을 알 수 없는 젊은이가 당당히 급제를 따냈으니, 뒷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쯤 출사하기로 하였느냐?"
"아직 결정된 것은 없으나 미구(未久)에 있을 것으로 압니다."
병연은 대답을 아니 할 수도 없어 생각되는 대로 말했다.
"매우 장한 일이다. 이제부터는 네 앞 길이 열려있는 셈이다. 더욱 정진하도록 하여라."
스승은 정색을 하고 병연을 훈계했다.
"예"
병연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 뿐, 학우들이 서둘러 병연을 위한 축하연을 베풀었다.
처음에는 스승님을 모셔놓고 주안상을 벌였지만 스승님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면서부터 젊은이들 판이 되었다.
"여보게 병연이, 자네 벼슬길로 나아가더라도 우릴 괄시해선 안되네.
우리들이야 천자문에 명심보감 몇 줄이나 읽고 쓰다 곧 집어치울 팔자가 아니던가?"
"엑끼 이사람들아!"
술이란 좋은 것이다.
술 몇 잔을 마신 병연은 어느새 조금전까지 침울했던 기분에서 벗어나 차차 호기를 되찾고 있었다.
"읍내에는 기생도 많지 않은가? 자네는 젊고 잘 생긴데다 글까지 일필휘지(一筆輝之)로 통달하였으니 기생은 마음대로 골라잡아 놀 수 있겠구먼."
"그야 물론이지. 출세하면 권세는 물론이요, 계집은 자연히 따르는 법, 그래서 모두들 출세하려고 발버둥치는 것 아니겠나? 자네도 병연이가 부럽거든 어서 장원급제를 하게."
학우들은 마음껏 마시고 떠들었다.
병연도 오랫만에 가져보는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병연은 학우들의 얼굴을 하나씩 처음 보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오늘 헤어지면 평생 다시 만날 것같지 않아서였다.
(아니 모르지...바람따라 떠돌아 다니다가 먼 훗날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밀려왔다. 그것은 훗날 다시 만날지도 모를 이 친구들, 오늘의 젊음은 간 곳 없고 서로 늙고 피곤한 모습으로 상봉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어서였다.
축하연은 날이 저물어서야 끝났다. 병연은 많은 잔을 마셨지만 좀체 취기가 돌지 않았다.
헤어질 때 병연은 학우들의 손을 일일히 잡으며 조만간 있을 이별에 서러운 마음을 담으며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병연은 그동안 보아오던 책을 정돈하여 깊숙히 처박았다.
그의 야망을 북돋아 주던 책들이었다.
병연은 이렇게 지난 시절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와 작별하는 심정으로 책들과 작별을 나누었다.
3. 집 떠나는 김삿갓
이제 언제 떠날 것이며 유랑의 길을 어떻게 잡느냐만 남았다.
(떠나기로 결심한 바에야 봄이 가기 전에 떠나도록 하자. 봄바람을 타고 발길 닿는대로 가면 되지 않겠냐.)
생각이 이렇게 굳어지자 내일이라도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금강산도 보고싶고 구월산도 보고싶고, 할아버지가 봉직했다는 선천 땅도 밟아보고 싶었다.
선천땅에 가면 할아버지의 체취를 맡을 수 있으리란 막연한 생각도 함께 들었다.
병연은 떠날준비를 서둘렀다. 사실 돈을 가지고 유람을 가는 것도 아니라서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었지만.
싸리나무로 삿갓을 만들었다.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 보면 심한 바람도 만날 것이오, 줄기찬 비도 맞게 될 것이오, 때로는 눈보라도 닥칠 것이니 이것들을 다소라도 이겨내려면 삿갓이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삿갓은 삼일만에 커다랗게 만들어졌다.
그는 우선 머리에 써보았다. 차양이 널찍하여 하늘을 가렸다. 또 깊숙이 눌러 쓰니 땅밖에 보이지 않아 누군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삿갓아, 너는 오늘 내 손에서 태어났으니 영원한 친구가 되겠구나. 너는 내 머리 위에 올라 타 나보다 더 멀리, 더 빨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즐거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는 삿갓을 어루만지며 쓸쓸하게 말했다.
다음으로 그는 단단한 박달나무를 잘라 지팡이를 만들었다. 지팡이와 삿갓 하나, 이것이 그가 가지고 떠날 모든 것이었다.
그날 밤 병연은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여보, 그래.. 뱃속에 아기는 잘 자라고 있소?"
병연은 내일 일찍 떠나리라 마음 먹고, 마지막으로 아내를 사랑해주고 싶었다.
병연은 시집와서 자나 깨나 일밖에 모르는 온순한 아내가 오늘이 지나면 생과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안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내는 남편이 갑자기 정답게 말을 걸어오자 오히려 온 몸이 떨려왔다.
책밖에 모르던 남편이 아니었던가.
병연은 아내의 배를 만져 보았다.
아내는 부끄러운듯 몸을 꼬았다.
"그래.. 이 속에 우리 아기가 있단 말인가?"
"아이 당신도....."
아내는 숨을 색색 내쉬었다.
"하늘이 점지해주신 생명이니 잘 키워야지. 한데 여보, 내가 없더라도 아기는 잘 키워야 하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달콤한 흥분에 취해 있던 아내는 남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음..나 바람이나 쏘이고 싶구료. 새처럼 세상을 훨훨 날아보고 싶소."
말을 한 병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집을 떠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글쎄 바람부는대로 돌아다니고 싶소."
"당신 답답한 심정은 저도 알아요. 울적하신 판이니 바람을 쏘이셔도 좋겠지요.
하지만 집을 영영 떠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내는 남편이 아주 집을 나가버릴까 염려되는 모양이다.
"당신이 집을 지키고 있는데 어찌 달리 생각하리오?
내 답답함을 풀겸 천하를 두루 유람하다가 돌아오리다."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을 했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인가는 자신도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잠시후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돌아오도록 하세요."
병연은 말이 없었다. 비록 빈 말이라도 그러마하고 자신있게 대답하기에는 어딘가 가슴이 찔렸다.
"염려말아요."
병연은 망설이다가 겨우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책임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병연은 아내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손을 뻗어 아내의 목덜미부터 가슴과 봉긋해진 배와, 둔부까지 더듬으며 쓸어내렸다.
병연의 부드러운 손이 스칠 때마다 아내의 몸은 새삼스럽게 놀란 듯한 반응이 손끝에 전해졌다.
갖 이십을 막 넘긴 아내의 몸은 보드랍고 탄력이 있었다.
유방은 엎어놓은 사발처럼 솟아 올랐고 그 한가운데 솟은 유두가 종의 추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얕은 모래 언덕같은 둔부로 손이 가자 아내는 부끄러워 어쩔줄 모르고 몸을 비틀며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까지 얕게 뱉었다.
병연이 몸을 반쯤 일으켜 아내의 양 허벅지에 손을 넣어 다리를 벌리고 정상위 자세를 취하자
아내는 병연의 가슴을 양 손으로 막으며 작게 속삭였다.
"안돼요.."
병연은 난감했다. 그러면서 일편 아내의 제지에 부끄러워졌다.
그것은 이미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내의 배를 압박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과 어떤 방식으로 아내와 사랑을 나누어야 할 것인지, 자신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잠시 아내의 세운 무릎, 발 끝에서 멈칫했던 병연...
그의 아내는 이런 병연의 모습을 즐기고 있는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곤 그녀는 병연의 팽창한 그것을 한 손으로 곱게 잡았다.
그리고 자기 앞으로 천천히 끌어 당겼다.
그는 그녀가 이끄는대로 얌전히 두 무릎을 꿇고 끌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속으로 인도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아침 상을 물릴 때쯤 병연은 어머니께 자기 뜻을 말했다.
"어머니, 저 바깥 세상 구경이나 좀 할까 합니다."
어머니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니 좀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을 것이야,
그래 어디로 갈 셈이냐?"
병연은 어머니가 선뜻 응락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금강산을 둘러볼까 합니다."
"가볼 만한 곳이지. 그러나 길이 험하다고 들었으니 각별히 몸조심해야 할 것이다."
"네, 말씀하신대로 조심하지요. 또 젊은 몸인데 별 일이야 있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언제 떠날 셈이냐?"
"오늘 떠날까 합니다."
"오늘?"
어머니는 의아한 양 물었다.
"예"
"먼 길을 떠나자면 준비해야 할 것도 있으려니와 오늘로 되겠느냐?
또 얼마쯤 노자도 마련해야 할 것이어늘 .."
"노자를 가지고 여유롭게 떠날 처지가 아니오니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지내볼까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어차피 아들에게 노자를 마련해줄 형편이 아니고 보니, 아들의 뜻에 맡기는것이 오히려 편할 것 같았다.
"내 네 마음을 알아 만류하지 않는다만, 여름이 되기 전에 돌아오도록 하여라."
"예,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병연은 즉시 행장을 차렸다. 무명 두루마기를 걸치고 삿갓을 쓰고 박달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어머니,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뜰 아래서 어머니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옆에 서있는 아내에게도 눈길을 돌려 얕트막히 말했다.
"당신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병연은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사립문을 나섰다.
형 병하와 동생 병호가 사립문 밖까지 따라 나왔다.
"형님 이놈을 용서해주십시오."
"병연아 그런 말 하지 말고 가서 마음이나 안정시키고 돌아 오너라. 그리고 이건 몇푼 안된다만 곤란할 때 쓰도록 하여라."
형님은 이러면서 엽전 몇 닢을 병연의 손에 쥐어 주었다.
병연은 거절하기가 어려울 것같아 받아 넣었다.
병호가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을 연신 껌뻑이며 형에게 인사를 했다.
"형님 속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몸조심하세요."
"그러마, 어머니 잘 받들고 네 형수도 잘 보살피거라."
사립문 밖에서 병연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마음을 모질게 먹고 첫 발걸음을 떼기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쏜살같이 숲속길로 빠져 나갔다.
"형님..."
동생 병호의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렸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렇게 병연의 방랑은 시작되었다.
"이제 내 이름 병연은 저 구름에 실어 흘려보내자. 이제부터 내 이름은 삿갓이다.
김삿갓, 불러보니 그럴 듯한 이름이구나, 하하하...."
병연, 아니 김삿갓의 너털 웃음은 봄바람 타고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는 마을 어귀를 휘돌아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라는 곳도 없고 가야할 곳도 없기에 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발이 아프면 쉬고, 피로하면 양지 바른 곳에서 자면 그만이었다.
4. 방랑의 시작
따듯한 봄볕을 받으며 김삿갓은 망연히 북쪽으로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던지 야산 기슭이 끝나고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산골에만 살던 그는 넓은 들판을 보니 일순 가슴조차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논에서는 농부들이 한창 모내기를 하고 있었고 어디선가 농악 소리도 들려왔다.
김삿갓은 구성진 못줄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모내기를 하고 있는 두렁길에 발길을 멈추고 구경을 하였다.
농군들은 못줄 넘기는 소리와 함께, 빠른 손 놀림으로 신명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만히 서서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새참거리라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해를 쳐다 보니, 오시(午時)는 지난 듯하고 얼추 새참이 나올 시간이 임박해 보였다.
농사철이 되면 농군들은 하루 다섯끼를 먹는다.
아침 조반을 마치고 들에 나가면 점심전에 막걸리가 나오고, 다음으로 점심을 먹게 되고 저녁전에 국수를 곁들인 술이 나온다.
"음..농사철이라 음식이 흔하겠구나."
김삿갓은 입맛이 먼저 다셔졌다.
집을 떠나올 때 이미 아침을 설친 채 줄곧 걸어왔으니 시장기가 느껴질 법도 하였다.
그는 농부들의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못줄을 잡은 사람이 선창을 하면 모심는 사람들은 대꾸를 하였다.
어라뒤야 상사뒤야 여보소 농군님네 얼마나 남았나.
문전옥답 서마지기 반달만큼 남았네.
어라뒤야 상사뒤야 여보소 농군님네들 ~
이농사 잘지어 풍년가 불라치면 ..
어라뒤야 상사뒤야 풍년이들면 뭣하겠소 ..
한양가서 비단사서 우리님 곱게 입혀보세~
어라뒤야 상사뒤야..
신명나는 일소리를 들은 김삿갓은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려졌다.
그도 논으로 당장 뛰어들어 그들과 같이 어울려 보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이때 마침 아낙네들이 커다란 함지박을 이고 논두렁길을 걸어왔다.
"이크, 새참이 나오는구나."
자기를 대접하려고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장기가 든 김삿갓은 무엇보다 반가웠다.
"자, 쉬었다 합시다."
못줄잡이가 줄을 높이 쳐들며 새참이 나왔음을 알리자 엎드려 있던 농군들이 일제히 허리를 펴며 흙탕물에 손을 흔들어 씻고, 하나씩 아낙네들이 새참을 차리는 논두덕으로 나왔다.
아낙네들은 그릇 그릇 넉넉한 국수를 담아냈고, 막걸리 동이에는 표주박도 띄워 놓았다.
이를 바라보던 김삿갓은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리곤 그쪽으로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며 주의를 끌기 위해 우선 한마디 내던졌다.
"거 농부가 한번 구성지고 신명납니다그려, 허허허...."
농군들은 일제히 그를 돌아다 보았다. 무명 두루마기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폼이 마치 어느 심심유곡에서 내려온 도사(道士)같이 보였다.
"길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니오?"
늙수구레한 못줄잡이가 김삿갓의 행색을 살펴보고 말대꾸했다.
"길이야 밟고 지나가라고 있는 것인데, 잘 들고 못 들고 할리가 있겠소이까?"
"허, 보아하니 염불이나 조아리는 땡중은 아닌 것같고, 그렇다고 선골도인(仙骨道人)도 아닌 것같고..."
말이 끝나자 김삿갓이 바삐 다음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문전걸식 비렁뱅이도 아닌 것같다는 말씀이오?"
"허허, 그 양반 눈치도 빠르네. 여보시오 도사 비슷한 양반, 보아하니 출출하신 모양이니
새참국수에 막걸리나 자시오."
그러자 눈치껏 새참을 이고 온 아낙이 새로 국수 한사발을 말아 김삿갓 앞에 내밀었다.
농사철 들녘 인심은 좋은 법이다.
너나없이 지나는 사람을 불러 차린 상에 젓가락을 얹어주고, 누구라도 맛있는 들녘 음식을 지나치기 또한 어려운 법이다.
김삿갓은 순식간에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막걸리도 꿀꺽꿀꺽 마셨다.
배가 불렀고 이제사 살 것 같았다.
먹은 값을 한다고 모내기를 하는 논에 들어갈 처지가 아니라서 잘 먹고 간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어디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꽤 큰 동네로 들어갔다. 이집 저집을 살펴보다가 사랑채가 있을 만한 어느 큰 집에 이르러,
"주인장 계시오" 목청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뉘시오?"
안채에서 풍채가 그럴싸한 중년 남자가 탕건을 쓰고 나타났다.
"길을 가던 과객인데 어둠을 만나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합니다."
김삿갓은 처음으로 해보는 구걸 행각이라 차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과객이라고 ?"
순간, 주인장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과객이 날이 저물면 주막을 찾을 것이지 여염집을 왜 찾는단 말이오.썩 돌아가시오."
서릿발같은 말씨로 매정하게 말을 한다.
세상 인심이 이럴 수 있을까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었지만 김삿갓은 꿀꺽 참았다.
(어차피 아쉬운 것은 나인데, 화를 낸들 뭐 한단 말이냐.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을 다반사로 겪게될 터인즉...
허허.. 그러나 오늘 인심은 한번 고약하군.)
이렇듯 생각한 김삿갓, 그래도 밸이 틀려 한마디 하는데,
"허, 안된다면 그만이지 뭐 그깐 일로 호령을 하오?"
"아니, 저 놈이!"
놈자가 서슴없이 튀어 나왔지만 이미 돌아선 그의 등 뒤에 꽂혔다.
김삿갓은 들은척 만척 그집 문전을 떠났다.
몇 집을 더 찾아가 가까스로 어느 허술한 사랑채에 들어가게 된 김삿갓은 저녁도 굶은 채
더벅머리 낮선 머슴놈과 더불어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왠지 기가 막힌 생각이 들어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 듯한데,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가 자신의 처지처럼 애처롭게 들렸다.
김삿갓은 문득 시상이 떠올랐다.
사양구립양시비 / 斜陽邱立兩柴扉
삼피주인 수각휘 / 三被主人手却揮
두우역지풍속박 / 杜宇亦知風俗薄
격림제송불여귀 / 隔林啼送不如歸
날이 저물어 두어 집 문을 두드렸는데
주인은 번번히 손을 휘둘러 쫒는구나.
두견새도 이 박한 인심을 알고 있는지
수풀속에 떨어져 집에 돌아가라고 울어주누나.
어느 사이 눈물이 김삿갓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나그네 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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