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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3

박연서원 2019. 1. 22. 06:50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나그네 인생


11. 사또 아들의 훈장님으로


통천에서 산송을 해결하고 이곳 사또에게서 소개장까지 받아든 김삿갓,

산넘고 물건너 열흘만에 안변에 당도하자 이곳 사또부터 찾았다.

안변 사또는 목소리도 걸걸하고 체격도 우람한 대장부였는데,

첫눈에 김삿갓은 그와 의기가 상통할 것같았다.

"이렇게 찾아뵈온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원래 나는 놀기를 좋아해서 내 문전에는 시인 묵객이 자주 왕래합니다.

이왕 오셨으니 마음 편히 계십시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조금씩 친숙해갔다.
"오늘 안변 구경은 하셨습니까? "
"예, 가학루와  표현정 경치를 구경하였습니다."
"그곳을 보시고 그냥 내려오시지는 않았겠지요?"
은근히 시 솜씨를 보자는 말이었다.

"예, 표현정 저녁 경치가 좋아 스스로 읊조려 보았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김삿갓은 아까 읊조렸던 시를 낭송했다.

"참 좋습니다. 표현정을 두고 많은 시객들이 시를 지었습니다만, 김선비같은 시인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번으로는 어쩐지 서운합니다. 한 수만 더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시란 쓰는 맛과 보는 맛도 무시할 수 없으니 자, 여기에 적어 주십시오."
사또는 지필을 내놓았다.

김삿갓은 한 수가 아니라 열 수라도 사양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필을 들기 무섭게 죽죽 써내려 갔다.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임정추기만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토고윤월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聲斷普雲中 
새홍하처거      성단보운중

숲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었으매, 
글 짓는 나그네의 심사는 덧없이 슬프도다.

물길은 멀어 하늘에 닿을 듯 푸르른데,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을 받아 붉기도 하여라.

산은 둥그런 달을 외롭게 내뿜고,
강은 멀리서 오는 바람을 먹음었네.

변방에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느냐,
구슬픈 소리가 저믄 구름 속에서 들려오누나.

"김선비,이런 글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거요?
실로 탄복할 일입니다!"
사또는 동그런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기막히다는 표시였다.
"내 숱한 시객을 만났지만 이런 시를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오."

시를 아는 사또는 김삿갓의 시풍에 깜빡 반해 버렸다.

술상이 나오고 취기가 도도해지자 두 사람은 비록 나이의 차는 있으나 십년지기처럼

흉 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지자 사또는 정갈한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그리고 내 집에 온 것처럼 불편을 느끼지 말고 지내라고 누누히 당부를 하였다.

다음 날 조반은 일찍 들어왔다. 사또는 오전중 공사를 보느라고 자못 바쁜 눈치였다.
김삿갓은 따뜻한 방안에서 홀로 딩굴고 있노라니 세상 근심 모두가 사라지는 듯했다.
점심상을 물리고 나니 사또가 몸소 김삿갓 방으로 들어왔다.

"혼자 무료하셨겠구려."
"아닙니다. 사또님 덕분에 세상 편하오이다."
"내 오늘 저녁에는 큰 잔치를 베풀까 하오. 더불어 이 근방에 글깨나 하는 양반들을 초청하여

시회를 겸할까 하니, 김선비의 재주를 한 번 보이도록 하시오."

글을 짓는 놀음이라면 어찌 김삿갓이 싫다하랴. 덕분에 푸짐히 먹고 놀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한가지 청이 있소이다."
사또는 낯빛을 고쳐가지고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내게는 아들이 둘, 딸이 셋 있습니다. 큰 딸은 작년에 출가를 하였고 

장남은 올해 열 일곱으로 과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지방 향교(鄕校)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지난 달부터 집으로 돌아와 홀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애가 과거를 볼 때까지 스승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내 사례는 톡톡히 하리다."

김삿갓은 자못 심각해졌다. 과거를 준비하고 있다면 이미 기초를 뛰어 넘어

수준 높은 경서나 문집을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김삿갓이 걱정하는 것은 가르치는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쳤다 손치더라도 따라 공부하는 학동의 수준이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열심히 공부를 하였더라도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면

선생 노릇을 한 보람을 찾을 수 없다 여겼기에 그는 망설였다.

"어떻소이까? 바쁜 일정이 아니라면 내 청을 들어주시오."
사또가 재삼 이렇게 말을 하자 비로서 김삿갓이 입을 열었다.
"한낱 떠돌아 다니는 과객을 그토록 생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하오나 소생의 글이 워낙 짧아, 감히 소임을 이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무슨 말씀이시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하였소. 그대의 시를 보고 읽는 순간,

나는 오늘에서야 내 자식의 큰 선생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였소.

아울러 내 자식이 가히 아둔한 아이가 아니기에 가르치는데도 애를 먹지는 않을게요.
시경(詩經)에 중점을 두어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소. 꼭 부탁을 합니다."

김삿갓은 역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승락을 하였다.
"본인이 천학비재(賤學非才)이오나, 사또님의 지극한 분부가 있어 수락하오니 너무 큰 기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하하하하.. 역시, 겸사의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하긴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하였으니 그대의 겸양지사가 평소의 풍모를 보는 듯하오,

그대같은 스승을 모시게 되어 아들놈도 크게 기뻐할 것이오."

이로부터 사또는 김삿갓을 "김선생님"이라 불렀다.


12. 가련이와 은밀하게


김삿갓은 안변 사걸들이 넋을 잃은 것을 보자 심히 통쾌하였다.
뻘쭘해진 연회 분위기는 가련이 때문에 바뀌었다.
"참 훈장님은 시상이 무궁무진하신가봐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말이예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요즘 세상에는 돈 있으면 양반 행세를 하잖아요?​ 족보도 산다는데요, 뭘."
가련이가 이렇게 말하자 문첨지가 호통을 쳤다.

"예끼 이년, 방자하게 어디서 입방아를 찧느냐! 아직 젖비린내 나는 것이 뭘 안다고."
"호호호, 첨지님은 항상 쇤네를 미워하시더라. 언제 살풀이를 해야겠어요."
가련이가 이렇게 받아넘기자 문첨지 입이 벌어진다.
"살풀이 거 좋다. 네 집 안방에서 하자꾸나. 오늘 밤에 가랴?"

"아이, 서진사 어른 허락부터 받으셔요."
"허허, 그런가?"
웃음이 한바탕 일자 좌중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훈장님, 시 한 수만 읊어 주셔요. 쇤네의 청을 들어 주시겠죠?"
"얘야, 너도 시를 아느냐?"
조석사가 핀잔을 준다.
"석사님도 모르시는 말씀을 하시네요. 쇤네는 시를 지을 줄은 모르오나 읽어 새길 줄은 안답니다."
가련이가 곱게 눈을 흘기며 조석사를 반박했다.
이런 가련의 청순한 교태가 김삿갓의 가슴에 무엇인가 찌르르 전해진다.

"옳지, 너는 당송 팔대가도 잘 알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네가 시제를 한번 정해보거라."
사또가 가련을 그윽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했다.
"가인(佳人)이라 하면 어떠실런지요."

"아름다운 사람이라, 그 것 좋네!"
김삿갓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붓을 들었다.

抱向東窓 弄未休  (포향동창 농미휴)
그대 살풋이 안고 하룻밤을 지새울제

半含較態 半含着  (반함교태  반함착)
그 모습 수줍달가 교태롭다 할거나

低聲暗問 相思否  (저성암문 상사부)
내가 좋으냐고 나직이 속삭이니

手整金釵 小點頭   (수정금채 소점두)
금비녀 매만지며 고개만 끄덕이네

"하하하하, 역시 훈장님다운 솜씨요. 마치 서진사와 가련이의 모습을 그린 것같소이다."
사또는 탄복하였다. 사또의 말을 들은 서진사는 처음으로 입을 헤벌죽 벌리고 웃었다.

가련은 새카만 눈을 들어 김삿갓을 은근히 쏘아 보았다.

그리고 눈길이 마주친 김삿갓에게 싱긋 웃음을 보여 주었다. 추파였다. 김삿갓은 가슴이 떨려왔다.

안변 사걸들도 이 글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제각기 몇 번씩 낭송하며 기생의 허리를 껴안으며 술잔을 들었다.

연회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온 김삿갓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옷을 입은 채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동짓달도 중순으로 접어들자 날씨가 매섭게 차가워졌고 눈까지 많이 내렸다. 겨울이 한층 깊어진 것이다.

김삿갓은 사또아들 선규를 가르치며 한겨울을 사또 곁에서 보내리라 마음먹고 있는 터라

되도록 하루하루를 편한 마음으로 지내려고 하였다.

어차피 방랑에 나선 몸, 한 두해로 끝날 방랑이 아니기에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눈이 소담스럽게 내린 어느 날, 관노 한 놈이 작은 쪽지를 들고 김삿갓을 찾아왔다.
"훈장님, 소인입니다."
관노는 김삿갓 방문 앞에서 그를 이렇게 찾았다.

김삿갓은 방문을 열었다.
"자네가  무슨 일인가?"
"예, 어느 총각 녀석이 훈장님 드리라고 이 쪽지를 주고 갔습니다."
"쪽지를?"
"예, 여기 있습니다."

김삿갓은 쪽지를 받았다.
관노가 물러가자 그는 방문을 닫고 쪽지를 펴 보았다.
쪽지에는 언문으로 또박한 글씨로 이렇게 씌여 있었다.

김선생님 전상서.
소녀가 이렇게 외람되이 글월을 올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은 천지가 온통 은백색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런 때 선생님의 시를
경청할 수 있다면 무상의 즐거움을 얻겠나이다.
원컨데 금일 저녁 소녀의 누옥으로 납시어 주옵소서.
지필묵을 준비하고 오시길 기다리겠나이다.
                                                  가련 올림.

내용은 평범한 초청장이었으나, 언문이지만 가련의 글씨가 달필인 것에 김삿갓은 저윽이 놀랐다.
쪽지를 읽은 김삿갓은 웬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들가지인양 교태가 자르르 흐르면서도

가을 하늘 아래 피어있는 한떨기 국화처럼 청초하기 그지없는 가련의 자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야지. 암 꼭 가고말고."
김삿갓은 혼잣말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저녁 공부가 끝나자 김삿갓은 바쁜 걸음으로 관아를 빠져나왔다.

협문지기가 김삿갓을 보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물었다.
"훈장님 어디를 가시는뎁쇼?"
"내 오늘 밤 늦을 것이니 혹시라도 사또님이 찾아 묻거든 뽕을 따러 갔다고 말씀드리게."
"뽕을요? 겨울에도 뽕이 있습니까?"
"암, 겨울에도 따는 뽕이 있다네."

김삿갓은 이렇게 관아를 나선 후 재빠른 걸음으로 가련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통인에게 자세히 물어두었던 터라 가련의 집을 찾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이리 오너라."
그는 대문 앞에서 낭랑한 소리로 아랫 것을 불렀다.
이내 대문이 열리더니 계집아이가 나타났다.

"뉘시온지요?"
"삿갓이 왔다고 가련아씨께 알려라."
"그러세요? 훈장님이시군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우리 아씨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계집애의 호들갑이 보통이 아니었다. 김삿갓은 계집애가 안내하는대로 따라 들어갔다.

"어서 오셔요."
분홍빛 호박단 치마 저고리를 입은 가련이가 섬돌 아래까지 내려와서 김삿갓을 맞았다.
"그간 잘 있었느냐?"
"네, 쇤네는 무고하였사옵니다."
가련은 김삿갓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인도했다.

"오늘은 웬일인가? 나 같은 훈장을 다 초청하고."
가련은 눈을 곱게 흘기며 말을 했다.
"전 혹시 안오시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어요."
"허허, 내가 무슨 뚝심으로 안 올 수가 있겠나? 오히려 감지덕지하며 달려왔네,
헌데..오늘 이후 내 두 다리가 성하게 될지 그게 염려스럽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련이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김삿갓을 요염하게 바라보았다.
"자네 눈치가 그렇게도 없었나? 서진사가 이 꼴을 본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게 아닌가?"
"아이, 훈장님도 서진사와 제가 어쨌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하긴, 절 좋아는 해요.

별의별 소리로 나를 어찌 해보시려는 것같은데, 기생의 몸으로 부르면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라서

상대는 하고 있습니다만, 별 깊은 관계는 아닌걸요."
"알았네. 내 별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닐세."

술상이 들어왔다. 김삿갓은 이전과 달리 가련과 단둘이서 술상을 놓고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훈장님. 처음 뵈올 때부터 아무래도 보통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숨기고 계신 일이 있으신 것같아요."
술이 몇 잔 기울여지자 가련이 말문을 열었다.

"그건 어째서인가?"
김삿갓은 취기가 오른 눈으로 가련을 건너다 보며 물었다.
"글쎄요. 삿갓을 쓰고 계셔서 그런가..호호호, 아녜요, 훈장님의 시를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거, 훈장님 훈장님 하지 말게. 자네가 자꾸 훈장을 찾으니까 절로 시가 떠오르네."
"어머.. 그렇지 않아도 한 수 청하려고 했는데 들려주세요."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련이가 내미는 붓을 들었다.

세상수운 훈장호     무연심화 자연생  
世上誰云 訓長好   無燃心火 自然生

왈천왈지 청춘거     운부운시 백발성  
曰天曰地 靑春去   云賦云詩 白髮成

수성난청 칭도어     잠이역득 시비성  
雖誠難聽 稱道語   暫離易得 是非聲

장중보옥 천금자     청촉달형 시정상  
掌中寶玉 千金子   請囑撻刑 是情相

세상에 누가 훈장노릇을 좋다고 했는가             
연기도 없이 속은 타서 심화는 절로 나는데

하늘천 따지 하는 사이에 청춘은 지나가고          
부가 어떻고 시가 어떻고 하는 사이 백발이 되네

비록 지성으로 가르쳐도 좋은 소리는 듣기 어렵고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궂은 소리 듣기 십상이네

손아귀에 보석과 천금 같은 자식을 맡기면서
때려서라도 잘 가르쳐 달라는 청이 딱하기도 하여라.

"호-"
시를 읽고 난 가련이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 왈천왈지..하늘천 따지 하는 사이에 청춘은 지나가고의 구절에 마음이 딱 꽂혔다.
그것은 가야금 장고 소리에 청춘이 지나가는 자신의 처지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13. 그녀와 첫날밤

"훈장 노릇이 그렇게도 괴로운 일인가요? "
"안해본 사람은 모르지. 그러니 훈장님 훈장님 하지말게."
"그럼 뭐라 부르지요?"
"자네 마음대로.."
"그럼, 서방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거 좋군!"

두 사람은 여기서 말을 멈췄다.
가까운 곳에서 밤개 짖는 소리가 나는 듯한데, 그 소리가 무엇엔가 파묻혀 아득하게 들린다.
이 순간, 밖에서 눈이 내리는지 방안의 공기는 잠잠하고 촛불은 흔들림 없이 고요한 빛을 내고 있었다.
김삿갓은 갑자기 가련을 안아보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서방님, 서방님께서 지으신 시가 웬지, 소첩의 신세를 읊은 것같아 눈물이 나려 하는군요."
"아니 그건 내 신세타령을 한 것인데 자네 처지와 같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김삿갓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감정이 미묘해졌다.

그것은 가련이 입에서 나온, 서방님과 소첩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권주가를 부르고, 가야금과 장고 소리에 저의 꽃다운 시절이 모두 지나가 버릴 것같아서요."
"허허, 그럴 법도 하군. 허나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모두 다 그렇게 지나는걸..."
"그럴까요?"
"그렇다니까, 그러니 자기 생각대로 뜻있게 살아가면 되는걸세."

"서방님, 소첩도 부모님 덕분에 시문을 좀 배워 알고는 있지만 서방님같은 시재는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서방님, 소첩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한 가지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뭔가? 말해보게."

김삿갓은 가련이 기생의 몸이다 보니 말을 함에 있어, 해라를 하여도 될 것이나 혀가 돌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가련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엉거주춤한 반말이 되었다.
"서방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시문을 배웠으면 해서요..."
"이번에는 가련의 훈장 노릇을 하란 말인가?
하하하..이러고 보니 다 뜻이 있어 날 불렀군 그래."

"달리 생각지는 마세요. 첫째로는 서방님이 좋으니까 곁에서 모시려고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시가 좋아 배우려는 것이에요. 들어주시겠어요?"
가련이는 말을 하며 엉덩이를 방바닥에 끌듯 붙여, 삿갓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앉는다.
"그러다간 이 안변 땅에서 쫒겨나기 십상이지."
"그건 또 왜요?"
"사또 자제의 훈장 노릇을 하는 것도 시기가 나, 나를 쫓아내려는 사람이 많은데,

한 발 더 나아가 자네, 가련이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나보게.

나를 기둥서방이라고 점찍어 배 아파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걸세."

"서방님, 제가 누구에게 매인 몸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우선 서진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게야."
"서진사가요? 호호호호..."
가련이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 영감이 제게 침을 흘리고는 있지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지난 봄에는 제 머리를 얹어 주겠다며

이천 냥을 줄테니 당신 소실로 들어오라고 며칠을 두고 치근덕거렸지요."
"그래, 거절했단 말인가?"
"거절했지요. 누가 그런 영감탱이한테 순결을 바치겠어요?"

"순결?"
삿갓은 눈이 크게 떠졌다. 기생이 순결이라니..별스럽게 들리기까지 했다."
그러자 가련이 눈치를 채고..
"서방님은 기생에게는 순결이 없는 줄 아세요?"
"글쎄, 정절이라는 말은 들은 바 있으되 순결이라는 말은 아직 들은 바 없네."

가련이는 갑자기 샐쭉해지더니 한숨을 푹하고 쉬었다.
"기생이 순결을 말하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가당치 않지요. 하지만 소첩은 아직 동기(童妓)예요.
여자는 첫 정을 준 남자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법이에요. 우리같은 기생들도 마찬가지죠.
그동안 머리를 얹어 주겠다는 사내들은 많았지만 어차피 사내들 틈에서 시들어갈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첫 정만큼은 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바치고 싶었지요."

김삿갓은 가련의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평생 처녀의 몸으로 늙어가겠군."
"호호호...걱정 마세요. 가련이의 처녀성도 이제는 경각에 달렸으니까요."
"경각이라니?"
"아이참, 서방님도 어쩜 그리 둔감하세요. 제 머리는 오늘밤 서방님의 손으로 정히 올려질거예요."

이 말을 듣자 김삿갓은 가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련의 첫 정의 상대가 되나?"
김삿갓은 어림없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건 외람되오나 제가 결정할 문제예요. 서방님, 부디 제 곁에 오래만 있어 주세요.
제가 서방님을 편하게 모실 수 있어요. 싫다 하시면 기생질을 못해도 좋아요."

김삿갓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가련이와 정이 들더라도

이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하룻밤 불장난이라면 모르겠지만...
김삿갓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련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따듯한 손이 그녀의 마음을 손에 쥐어 보는 것같았다.

"헛참 이거 정말 큰일이군!"
김삿갓은 이런 마음이 앞섰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따로 놀았다.
가련의 앵두같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보았다.
가련의 입에서 흥건한 향기가 났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마신 향기로운 술 냄새였다.
김삿갓은 가련의 목덜미를 자신의 팔로 감아 더욱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혀를 가련의 입 속으로 넣었다. 코 끝에 가련의 깊은 숨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가련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속 숨을 아낌없이 교환했다.
"아아..이러면 안되는데..." 김삿갓의 머리 속에선 가련을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샘솟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가련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가련이 삿갓의 손을 살며시 걷어냈다.
"서방님 잠깐만.." 가련은 김삿갓의 성급함을 말렸다.
난데없는 가련의 제지로 김삿갓은 머쓱해졌다.
"상 좀 물리고 금침을 펼게요."

가련의 의도가 늦게나마 파악된 삿갓은 무안의 웃음을 지었다.
"자네로 향하는 마음이 너무 성급해 미안하네..."
김삿갓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가련은 눈동자를 위로 하고 삿갓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안해진 김삿갓은 빠른 손놀림으로 주안상을 윗목으로 물리는 가련의 모습을 멍하고 보다가
술이 취한 척 그 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서방님, 서방님..."
상을 물리고 비단금침을 펴놓은 가련은 술취해 잠든 척 누워있는 삿갓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자신의 입을 삿갓의 귀에 대고 소근소근 불렀다. 삿갓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성급했던 무안감 때문에 이제는 모든 것을 가련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아이 참.." 가련은 술취한 척 누워있는 삿갓의 옷을 살며시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활활 타던 황촛불을 끄고 바스락 소리를 내며 옷을 벗더니 삿갓 곁으로 파고 들었다.
팔팔한 젊은 남녀가 자리를 같이 하니 열정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애무했다. 마치 비단잉어를 만지듯 가련의 몸은 매끄럽기 그지 없었다.
"내 언문 시조를 한 수 읊을까?" 좀 전까지 취한 척했던 삿갓이 속삭이듯 가련에게 말했다.
"그러셔요." 이렇게 말을 한 가련의 입에서는 더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

"큰 솔밭 밑에 작은 솔밭.. 작은 솔밭 아래 옹달샘.. 옹담샘을 돌아가니 여우굴이 나왔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삿갓은 가련의 귀에 대고 소근소근 말을 했다.
"얼굴이지요. 큰 솔밭은 머리털이고 작은 솔밭은 눈썹일테고...여우굴은 콧구멍이 아니겠어요?"
"참말, 맞았다..." 삿갓은 어둠 속에서 빙긋이 웃었다.

삿갓이 가련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다가 살금살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 수 읊으랴?"..
"농담하시면 싫어요." 가련은 샐쭉 눈을 흘겼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어루만져 쓰다듬으며 나지막히 말을 했다.

"창 밖에는 동지섣달 함박눈이 내리는데 금침 속에서는 봄을 맞아 복숭아 두 알이 향기롭게 익었도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언덕 아래 옹달샘은 월궁 선녀가 목욕하는 자리인가?"
김삿갓은 이렇게 읊조리며 가련의 옥문을 더듬었다.
"아이..." 가련은 몸을 꼬았다.

쌍심지에 불을 붙인 듯 활활 타오르는 삿갓의 욕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삿갓은 가련의 몸 위에 포개졌다.

가련의 아래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삿갓은 냄새에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처(妻)와 첫날밤을 맞았을 때와 같은 냄새였기 때문이다.

다음 날 김삿갓은 느즈막히 눈을 떴다.
어느 결에 일어났는지 가련은 이미 몸단장을 곱게 한 뒤였다.
"잠도 곤하게 잘 주무시네요." 가련이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자네 탓일세.."

잠이 덜 깬 삿갓의 능청스러움에 가련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눈은 게눈처럼 샐쭉 흘겼다.
"예쁘다..."
누워서 올려다 보니 가련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14. 그녀와의 영원한 이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김삿갓은 항상 안변을 떠나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가련과의 사랑에 얽매어 좀체 다시 길을 떠날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련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항상 걱정이 되는 것은

혹시라도 가련의 몸에 아기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가련과 일생을 같이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김삿갓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처없는 방랑길에, 한순간의 불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저지르고 있는 일인데,

만일 아기가 생긴다면 자신보다 가련의 불행이요, 아이의 불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 때문에 김삿갓의 마음이 이곳 안변에 더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사또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더니 사또가 펄쩍 뛰었다.
"이왕 방랑길에 나섰음에, 무엇이 그리 바쁘단 말이오.
우리 집 아이가 급제하는 것이나 보고 떠나도록 하시오.

누가 가르친 아이인데 결말을 아니보고 떠난단 말이오? "

사또는 김삿갓을 극구 만류하였다. 사람과의 일로 거만이나 아니꼬운 사태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만  인정과 도리에는 약한 김삿갓, 인정에 얽매어 마냥  속절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사또의 자제가 알성시에 응시하여 장원은 아니었으나 급제를 하여 한양으로 떠났다.

그러자 안변 일대에 돈깨나 있는 집안에서는 김삿갓을 독선생으로 모셔가려고 난리가 났다.
그들은 사또에게 별의별 청을 하는 등 한동안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사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김삿갓을 편하게 하고 곁에 두고싶어 했다.
그해 가을이 가고 겨울도 가고 봄이 오자 김삿갓은 이제는 기필코 떠나리라  결심을 했다.
지난 일년여처럼 편히 먹고 계집과 잠자리를 즐기려고

고생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을 두고 가출한 그가 아니었다.

이곳 저곳을 정처없이 떠돌면서 후한 대접보다는 박대를 받는 것이 오히려 편했고, 

또 글로써 그들을 매도하여 질타하는 것을 보람과 즐거움으로 여기는 김삿갓이 아니던가?

어느덧 사월이 되어 푸른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산야는 진달래의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새 봄 바람에 얹혀 삿갓을 쓰고 훠이훠이 도포자락을 날리며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삿갓은 가련이와 술상을 마주한 자리에서 슬며시 말을 꺼냈다.

"임자, 내가 그동안 너무 바깥 세상을 외면하고 지냈네.

사또의 은혜와 자네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었지.

이제 봄도 되었으니 북쪽으로 두만강까지 두루 유람을 하였으면 하네."
김삿갓이 말을 마치자 가련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제 곁을 떠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잠깐 외지 바람을 쏘이겠다는 것이지.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올 것이니 걱정 말게나."
"그렇게나 늦게요?"
김삿갓의 방랑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련은 겨울이 오기 전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모양이다.

"자고로 시인 묵객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법이네.

그러면서 자기의 시를 살찌울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지.

내, 일정 전이라도 자네 품이 그리우면 그대로 돌아올 것이니 너무 염려는 말게나."
김삿갓은 되도록 가련이를 안심시켜 주려고 이렇게 말을 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가련이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서방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꼭 돌아 오시는거죠?"
몇 번이라도 그녀는 다짐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틀림 없대두. 함흥, 북청으로 해서 두만강까지 갔다 오려면 빨라야 늦가을쯤 되겠지..."

"꼭 돌아오셔야 해요. 만약 동짓달까지 서방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가련이는 죽고 말거예요."
"죽어?" 김삿갓은 가슴이 뜨끔했다.
"네, 저를 살리려면 꼭 그때까지 돌아오세요."
"돌아오지"
허나 자신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이별을 앞둔 그날 밤, 여늬 날보다 더 두 사람의 사랑은 불보다 뜨거웠다.

다음날 아침 밥상을 물린 김삿갓은 시를 한 수 지었다.
"막상 길을 떠나려니 나도 웬지 서글프구나. 붓을 주게."
그의 심정은 매우 착잡했다.

오가다 만난 인연이었지만 일년이라는 시간의 거미줄에 서로의 깊은 정을 얽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먹물을 찍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다.

가련문전 별가련    가련행객 우가련 
可憐門前  別可憐   可憐行客  尤可憐
가련막석 가련거    가련가망 귀가련 
可憐莫惜  可憐去   可憐不忘  歸可憐

가련이 문전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행객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하게 떠남을 슬퍼 말아라
내 너를 잊지 않고 떠난 듯이 다시 오리라.

가련이 시를 읽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에 슬픔은 더욱 북받쳤다.
가련이는 노잣돈을 후하게 내놓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임자, 돈을 쓰면서 유람하는 것은 내 분수에 맞지 않네. 그냥 두어두게. 나는 빈 몸이 좋아."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에서 눈물을 흘리는 가련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김삿갓이 관아로 돌아와서 사또에게 불문곡직, 하직을 고하니

사또가 매우 섭섭해 만류하였으나 삿갓의 결심이 너무도 굳건한 것을 알게 된 사또는 체념을 하였다.
그 역시 후하게 돈을 내어 놓았으나 삿갓이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자,
"그래 가련이와는 이야기를 잘 나누었소?" 가련이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또가 물었다.
"예, 돌아 다니다가 고달프면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하오나 기약없는 약속이지요."

"관북을 모두 돌아 보려면 이 삼년은 족히 걸릴 것이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주시오.
내 그때까지 이곳에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자리가 바뀌더라도 일러놓고 가리다.
그리고 아들놈 가르친 수고는 권해도 받지 않으려 하니, 대신 가련에게 보내도록 하겠소."
"보살펴 주신 은혜도 백골난망이온데, 더 없는 배려를 하심을 어찌 잊겠습니까."

김삿갓은 큰 절로써 사또와 작별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삿갓은 일년이 넘도록 정이 들었던 안변을 떠나 다시 정처없는 방랑길에 올랐다.

비 내리는 고모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