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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2

박연서원 2019. 1. 17. 07:26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나그네 인생


5. 드디어 금강산이...

청운의 큰 뜻이 이루어져 청루거각에 누워 있어야 할 몸이 멍석이 깔려있는 낯선 사랑방에 누워 있다니 대체 어느 쪽이 잘못되어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모두 뜬 구름이야, 뜬구름"
"아니 이 양반이 잠꼬대는 웬 잠꼬대"

더벅머리 머슴놈이 부지중에 김삿갓이 내뱉은 말을 잠꼬대로 들었던지 툭툭 발길질을 한다.
"총각, 내 잠세."
김삿갓은 이렇게 말하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김삿갓은 계속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절은 벌써 오월이었고 집을 떠난지 어언 한달이나 되었다.
봄도 지금은 다 지나가고 신록과 더불어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양구를 거쳐 금강산의 관문인 단발령에 도착하였으니 집에서부터 오백리 길을 걸은 셈이다.

단발령.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쫓겨 이곳을 넘었을 어린 단종의 심사가 어떠하였을까 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김삿갓의 마음을 무겁게 짖눌러 마루턱에 앉아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어 있다가 다시 발길을 재촉하였다.

단발령을 지나면 천하의 명산 금강산의 품에 안긴다. 이곳에서 비로봉 까지의 거리는 백리길이지만
수려한 내금강에 첫 머리가 밟히는 지점이었다.
금강산을 눈 앞에 두자 김삿갓의 가슴은 쿵쿵 뛰고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는 길마다 길가에 나무며, 막 자란 풀 한포기며, 딩굴고 있는 돌멩이 하나까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금강산 어귀 골짜기에는 드문드문 동네도 있었는데 명산을 배경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인심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무릉도원같은 마을이 나타났다.
김삿갓은 쉬어갈 겸 동네 어귀로 들어갔다.

마침 글방에서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집이 있어 김삿갓은 다짜고짜 들어갔다.
방안에는 여나믄 학동들이 있었는데 불쑥 나타난 김삿갓을 보자 호기심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침 글을 짓는 시간이군."
김삿갓은 학동들이 쳐다보던 말던 개의치 않고 학동들이 펼쳐놓은 종이를 바라보았다.

글제는 역발산 (力拔山)으로 항우의 글을 지으라는 훈장의 분부였다. 김삿갓은 호기심에 한 학동이 지어놓은 글을 주욱 읽었다.

"남산북산 신령왈 / 南山北山 神嶺曰  
항우당년 난위산 / 項羽當年 難爲山"
"남산 북산 신령이 말하기를 항우가 살았을 적에는 산이 되기 어려웠다더라."

김삿갓은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린 학동이 지었다고 믿을 수 없는 솜씨였다.
그래 옆의 아이는 어떻게 썼는가하고 읽어 보았다.

"우발좌발 투공중 / 右拔左拔 投空中  
평지왕왕 다신산 / 平地往往 多新山"
"오른손 왼손으로 빼내어 공중에 던지니 평지 곳곳에 새 산이 많이 생겼다."

김삿갓은 감탄했다. 어린 학동들의  글 짓는 솜씨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글 좀 하는 선비들은 힘 센 장사는 두려워하지 않지만 글 잘하는 인재는 두려워하는 법이다.
김삿갓도 어린 학동들을 보기가 무서웠다.
그렇다고 슬그머니 나오기도 멋쩍은 일이라서 자기도 한 수 적어놓았다.

"항우사후 무장사 / 項羽死後 無壯士  
수장발산 투공중 / 誰將拔山 投空中"
"항우가 죽은 후 힘쓴 장사가 없었으니 지금은 누가 산을 뽑아 공중에 던질 것인가"

김삿갓 처음에 이곳에 들어올 때는 학동들에게 글 줄이나 가르쳐 주고 하루쯤 쉬어갈 요량이었으나
어름어름할 자리가 아닌 듯하여 황망히 뛰쳐 나오고 말았다.

며칠을 더 걷자 금강산이 눈 앞에 우뚝 서있었다. 때는 여름이 되었고 수풀사이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불경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절이 있었다.
김삿갓은 성큼성큼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를 밟았다.

법당안에는 까까머리 스님 한 분과 유건에 도포를 입은 젊은 선비 하나가 대좌하고 김삿갓이 온 것도 모르고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헴!" 김삿갓은 인기척을 하였다.

"누구요?" 중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절 구경 좀 왔소이다."
김삿갓은 천연스럽게 대꾸하고 다짜고짜 법당 안으로 썩 들어섰다.

"아니 이 양반이 여기가 어디라고 무례하게 함부로 올라오는게요?"
유건을 쓴 선비가 쌍심지를 치켜 세우며 날카롭게 내뱉는다.

"법당이지요, 자비로우신 부처님께서 어디 양반 상놈 가리신답니까?"
"아니 이 사람이?"
선비가 어이없어 하며 김삿갓을 위 아래 훝어보며 행색을 살펴본다.

차림새는 비록 남루하지만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글줄이나 읽은 사람으로 보였는지,
이 무례한 방문객을 보기 좋게 물리칠 계책을 재빨리 궁리했다.

"어디서 오셨소이까?"
이번에는 중이 말문을 열었다.

"예,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 올씨다. 잠시 쉬어갈겸 절 구경을 왔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젊은 선비가 눈쌀을 찌푸리며 노골적인 언사로 말을 하였다.
"여보시오, 우린 지금 긴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자리를 삼가해주시오."

"어허, 보아하니 은밀한 말씀을 나누고 계신 모양인데 참 딱도 하시오."
"아니 뭐가 딱하단 말이오?"

김삿갓은 냉큼 일어날 기색은 없이 그들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6. 부처님 앞에서 풍월 대결

"아니 뭐가 딱하단 말이오?"
중이 험악한 대꾸를 하는데 그의 말에는 칼과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스님, 긴요한 이야기라면 뒷켠 승방에서 나눌 일이지 어찌 부처님 앞에서 나눈단 말씀이오.
앉아 계셔도 구만리를 내다 보시는 부처님이 두렵지 않고 한낮 지나가는 이 과객은 두렵단 말이오?"

"뭣이?"
선비와 중은 동시에 입을 딱 벌리며 기막혀 했다.

말을 듣고보니 이치에 닿는 말이었다. 인간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부처님은 못 속이는 법,
지금까지 부처님 앞에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잘것 없는 나그네 하나를 물리치려던 자신들이 부끄러웠다.

선비는 이 낯선 과객의 말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마침내 한 꾀를 생각했다.
그것은 어려운 글 겨루기를 해서 창피를 주어 내쫒을 심산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풍류 과객을 자처하며 어설픈 글줄이나 읊조리며 밥술이나
얻어 먹으려는 부류들을 많이 겪었지만 제대로 시 한 수 읊는 놈은 본 적이 없었다.

선비는 김삿갓도 그런 치들중 하나로 생각했다. 그래서 글짓기를 하여 뾰족한 코를 뭉개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우선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야 하겠기에 먼저 딴청을 피워 보았다.

"보아하니 풍월깨나 알고 있는 것같은데 진정 풍류를 아는 선비라면 내 톡톡히 선비 대접을 하려니와
글에 자신이 없다면 어서 저쪽 주방으로 가서 찬 밥술이나 얻어먹고 가시구려."
김삿갓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오냐, 네 놈이 글줄이나 읽은 모양인데 어디 한번 혼똥을 싸보아라..)

이렇게 선비를 비웃으면서도 표면으로는 정색을 하면서 점쟎게 말문을 열었다.
"거 듣던중 반가운 말씀이외다. 불초 깊이 배운 바 없으나 일찍이 부친 덕에 천자문을 읽어
하늘천 따지는 머릿속에 집어 넣었고 어미덕에 언문줄이나 깨우쳤으니 하교하시면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김삿갓의 이같은 말에 중이나 선비는 눈쌀을 더욱 찌푸렸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건 은근한 도전이 아니던가.

"좋소. 그럼 내가 먼저 운을 부를테니 즉시 답을 하시오."
선비는 어차피 내친 발길이라 돌릴 수 없어 이렇게 말을 하고 잠시 생각끝에 입을 열었다."
"타!" 그의 입에서 타란 말이 떨어졌다.

"타라니, 이건 한문 풍월이오, 아니면 언문 풍월이오?"
김삿갓은 눈을 반짝이며 선비에게 물었다.

"그야 물론 언문 풍월이지."
김삿갓을 싹 무시하는 말씨였다.

"좋소이다. 그럼 내 답하리다. 사면 기둥 붉게 타!"
"또 타!" "네 절 인심 고약타!"

타자가 떨어지기 무섭게 김삿갓이 내뱉으니 선비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더구나 갈수록 듣기 거북한 말이 나오자 다시 더 부를 마음이 없었다. 잘못 더 불렀다가는 무슨 욕이 나올지 모를 판이었다.

김삿갓은 선비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타!"하고 내뱉으면 "지옥가기 꼭 좋타!"하고 내쏠 작정이었다.

그러나 선비의 입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냥 있기가 안됐던지 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깟 언문 풍월이야 어디 풍월 축에나 들 수 있겠소? 이번에는 진짜 풍월을 해봅시다.
당신이 냉큼 지어내지 못하면 썩 여길 물러나시오."
중의 이같은 말을 들은 김삿갓은 신명이 났다.

"허..그럼 지금까지는 가짜 풍월이었구려. 좋소이다. 진짜 풍월이 어떤 것인지 맛좀 보여주시오
내 맛보고 떫으면 이 자리에서 썩 나가리다."
"허, 이 사람 말도 많구먼."

중이 심히 못마땅한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건방진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까 궁리를 하다가

스스로 묘한 계책을 생각하였노라 내심 감탄을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한문과 언문을 공부했다 하니 내 운을 부르겠소."
김삿갓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역시 대사다운 말씀이십니다. 대사는 항시 공평해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쟎습니까?"
"허허, 당신은 말방아가 너무 심하오."
선비가 한 마디 내쏘았다. 중이 입을 열어 운을 불렀다.

"운은 언문의 "기억"자 "니은"자이고 글제는 산수(山水)로 하시오."
"듣고보니 공평지기는 하나 꽤 까다롭습니다. 하여튼 기왕에 떨어진 운이니 불러 볼 수 밖에
더 있겠소이까?"

김삿갓은 끝까지 중의 말을 물어 뜯으며 지체없이 붓을 들어 종이에 일필휘지로 글을 지어 놓았다.

수작은 저춘색벽 / 水作銀 杵春絶壁  이오 ,  
운위옥척 도청산  / 雲爲玉尺 度靑山 이라 ..


폭포수는 은 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
구름은 옥으로 만든 자가 되어 청산을 가늠토다.

"자 어떻소이까?
시제(時題)의 기억과 니은은 각각 끝자에 붙였소이다."

중과 선비는 내심 깜짝 놀라 김삿갓을 바라보며 마른 침만 삼켰다.
아무리 헐띁을래야 흠을 잡을 수 없는 명구였다. 김삿갓이 차림새와 딴판인 것을 알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김삿갓을 예로써 정중히 맞을 수도 없고 내칠 수도 없어 쩔쩔매게 되었다.

김삿갓은 그들의 심보를 환히 꿰뚫고 있었다.
설사 이들이 더불어 풍월을 더하자고 수작을 걸어 오더라도 상대하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침이라도 퇘퇘 뱉어주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라서 글로라도 그들을 희롱하고 싶었다.

"묵묵 부답인 것을 보니 불초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보구려. 내 한수 더 읇어 드리리다."
김삿갓은 이어 글귀를 한 자 더 써서 두 사람앞에 내밀었다.

승수 단단 한마랑 / 僧首 團團 汗馬閬  이요, 
유두 첨첨 좌구신  /  儒頭 尖尖 坐狗腎 이라 ..
성령 동령 동정   / 聲令 銅鈴 銅鼎  하고 ,   
목약 흑초 락백죽 / 目若 黑椒 落白粥 이로다.


둥글둥굴 중대가리는 땀찬 말부랄이요.
뾰족뾰족한 선비의 머리통 상투는 앉은 개 좃이로다.
목소리는 구리방울을 구리솥에 굴리는듯 요란스럽고
눈깔은 검은 후추알이 흰죽에 떨어진 듯하도다.

정말 지독한 욕설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던 중과 선비는 뒤늦게 자기들을 욕하는 글임을 알아차렸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이런 죽일 놈을 보았나!"
선비가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김삿갓은 벌써 섬돌 아래 서 있었다.

"여보, 선비님 눈을 부릅뜨니 정말 흰죽에 후추알 떨어진 것같소이다. 허허허허...."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날리며 그 절을 나와 버렸다.

다시 산길을 걷는 그의 가슴은 냉수를 마신 것같이 시원하였다.
중과 선비가 화가 치밀어 펄펄 뛰는 양이 눈에 선했다.


7. 김삿갓의 대필시

"물이라도 마시고 가야겠구나."
그는 조심조심 계곡쪽으로 내려갔다. 냇가로 내려가는 비탈은 가파르고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돌멩이도 많았다. 간신히 냇가로 나오자 의외로 냇가는 넓었다.

더구나 그의 눈을 번쩍 뜨게 한 것은 냇가 벼랑 위에 아담한 정자가 있었는데 갓을 쓴 선비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별세상에 들어온 느낌이어서 한동안 김삿갓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 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커니, 시회를 열고 있나보구나."
김삿갓은 제 정신이 들자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정자쪽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급히 걸었다.
그리고 그는 다짜고짜 정자 안으로 올라갔다.

"지나가는 과객입니다만 말석이라도 빌릴 수 있을까요?"
화선지를 펼쳐놓고 시작(詩作)을 하고 있던 선비들은 웬놈이냐는 듯 김삿갓을 쏘아 보았다.

"당신 글줄이나 지을 줄 안다면 어디 끼어보구려. 하지만 글재주 없이 술이나 얻어 먹으려 한다면 딴 데나 가보시오."

노골적으로 하대하는 말씨였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말에는 이미 이골이 난 김삿갓 아니던가.
"그저 책 몇권을 읽었습니다. 보아하니 공짜로 얻어 먹기는 틀린 것 같으니 가르침을 주십시오."

"허허, 무료하던 차에 심심치 않은 구경거리가 생겼군 그래." 좌중에 팔자 수염을 기른 사내가 마치 김삿갓을 장난감으로 생각했는지 이렇게 거들고 나섰다.

"불초가 여러분들의 무료함을 풀어주게 되었다니 천만 다행입니다. 자, 어디 받아 보겠습니다."
김삿갓은 모욕적인 말에도 낯색을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수작을 부렸다.

"운을 떼라는 말이군. 풍월구경을 하긴 한 모양인데, 누가 운을 한번 붙여보지."
팔자수염은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뭐 운이랄 것까지야 있겠소. 그저 생각나는대로 한번 읊어보라고 하시오."
누군가 김삿갓을 얕잡아 보고 말을 하였다.

"보시다시피 불초는 워낙 불학무식한 놈이어서 막연히 글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글제라도 말씀하시면 억지로라도 뜯어맞춰 보겠습니다."

"그럼  금강산의 절경을 읊어보시오. 구경 좀 해봅시다."
"해보겠습니다만 불초가 글을 제대로 쓸줄 모릅니다. 하오니 어느 분께서 대필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내친 김에 김삿갓은 바보행세를 하였다.

"허허, 세상 살자니 별일을 다 보겠구먼. 그래 글씨도 쓸줄 모르면서 어떻게 시를 짓는단 말인가?
이거야말로 기상천외한 일이로군. 좋소, 내가 대필을 할터이니 어서 불러보시오."

얼굴이 동그란 선비가 별꼴을 다 보았다는 듯 무릎까지 치면서 붓을 들었다.
"그럼 부르겠습니다. 소나무란 글자를 두 자 쓰십시오.
김삿갓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소나무 송(松)자를 두 자 쓰라는군. 松松이라..
자 썼소." "다음에는 잣나무란 글자를 두 자 쓰시오."

"잣나무 백자로군. 栢栢이라..썼소."
"그러면 그 뒤로 바위라는 글자를 두 자 적어주시오."

"바위 암자로군..岩岩이라 썼소."
"끝에다 돌다라는 글자를 붙여주시오."

"돌회라.. 廻라 썼소."
이쯤되자 좌중의 선비들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침들을 꼴깍꼴깍 삼키며 글이 이루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럼 이제는 행을 바꾸어 물이란 글자를 두 자 쓰시오."
"물 수(水)자 두 자라고? 水水 썼소."

"다음으론 산이란 자를 두 자 쓰시오."
"묏 산자라, 山山 썼소."

"그럼 곳곳이라는 글자를 두 자 써주시오."
"곳 처라는 글자군, 處處라고 썼소."

"끝에다 왜 기이하다고 할 때 쓰는 자 있지요? 그 자를 한 자 써주시오."
"이상할 기자로군. 奇라 썼소."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끝났으니, 붙여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비들은 김삿갓이 부르는 대로 옮겨 적은 화선지의 조합된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松松栢栢岩岩廻  /  水水山山處處奇
송송백백암암회  /  수수산산처처기

소나무 잣나무 바위가 돌고돌아
물도 산도 곳곳이 기묘하도다.

"허...이거 천하의 명시일쎄!"
선비들은 글을 읊조리고 나서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들은 이미 금강산을 두고 읊은 수많은 시를 많이 보아온 터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금강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쉬운 글자만 사용하여 딱 두 줄로 간결하게 적은 것은 처음이다.

"허어, 금강산의 경치를 이렇듯 쉽게 나타내는 방법도 있었구먼."
누군가는 탄식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금강산 곳곳의  절경 앞에 할 말을 잊고, 이것을 글로 옮길 적당한 문구를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잘 것 없이 초라한 나그네는 물 흐르듯이 쉬운 글자로 술술 읊어버리니 감탄만이 나올 뿐이었다.

"아니 이런 재주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어찌 그토록 시침을 떼셨습니까? 우리가 그간 실례가
많았습니다. 과히 섭섭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뽐낸다고 이 주제꼴에 빛나겠습니까? 칭찬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선비들은 하인을 부르더니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술상을 차려 김삿갓을 상좌에 앉혔다.
"자, 드십시다. 거 볼수록 수작(秀作)이로군"

김삿갓은 배불리 먹고 마셨다. 마신 술이 얼큰하게 올라오자 세상살이 사람의 일생이
한낮의 일장춘몽으로 여겨졌다.

"선비양반, 이제 취향이 도도하시니 한 수 더 들려주십시오. 귀를 씻고 기다리겠습니다."
김삿갓의 구술을 받아 적던 선비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하자 나머지 선비들의 이목이 김삿갓을 향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어떤 시가 나올까 기대하면서 김삿갓의 거동을 주시한다. "원 귀까지 씼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이처럼 대접을 잘 받았으니 감사의 뜻으로 한 수 더 읊어보겠습니다."

김삿갓은 성큼 붓을 잡고 쓸줄 모른다는 글씨를 달필로 청산의 유수가 흐르듯이 쓱싹 휘갈기는데 ..

태산재후 천무북  / 泰山在後 天無北   
대해당전 지진동  / 大海當前 地盡東
교하 동서남북로 / 橋下 東西南北路   
장두 일만이천봉  / 杖頭 一萬二千峰

큰 산이 뒤에 있으니 하늘은 북(北)이 없고 
큰 바다가 앞에 있으니 땅은 동쪽에서 끝났도다
다리 아래로는 동서남북 길이 뻗어있고  
지팡이 든 머리에는 일만이천봉이 걸렸도다.

"명시로다, 명시야...
오늘 우리들이 운이 좋아 시신(詩神)을 만났구려."
좌중은 모두 넋을 잃고 있었다. 시도 시려니와 막힘없이 써내려가는 김삿갓의 재주가 더욱 놀라웠다.

술김에 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다시 한 수를 읊고 싶었다.
"이번에는 오언(五言) 시를 지어보겠습니다."

선비들은 다시 긴장했다. 자기들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시 한 줄 못이루고 쩔쩔매고 있었는데
남루한 차림에 삿갓을 쓰고 불현듯 나타난 젊은 선비는 그대로 시신이요 천재였다.
김삿갓은 다시 필을 들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자를 휘갈겼다.

촉촉 금강산은 / 고봉이 만이천이라    
矗矗金剛山 / 高峰萬二千
수래 평지망 이나 삼야숙청천이라        
遂來平地望 / 三夜宿靑天

우뚝우뚝 솟은 금강산은  
높은 봉우리가 일만이천이라
평지를 바라보고 내려왔건만
사흘밤을 청천에서 잠이 들었네.

"허, 또..기가 막히군."
선비들은 다시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처음 두 줄은 평범하더니 끝 두 줄에 삼야숙 청천이라, 이거 사람 미칠 노릇이군."
한 선비가 김삿갓의 화선지를 들고,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다.

김삿갓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마셨으니 볼일은 끝이 났고 진짜 볼일을 보러 가야만 했다.

"아니 어찌 일어서시오?"
선비들이 깜짝 놀라며 김삿갓을 붙잡았다.

"어줍쟎은 글 덕에 잘 먹고 갑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만나게 되겠지요."
김삿갓은 그 자리를 미련없이 훌쩍 떠나, 시승이 있다는 입석봉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했다.


8. 미모의 여인에게 수작을...(1)

아침을 거르고 나선 길이라 오전이 지나니 몹시 시장기가 들었다. 게다가 날씨마저 춥고보니 따뜻한 불기운이 더욱 그리웠다.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며 시름없이 걷고 있는데 삼거리가 나타났다. 오른쪽 길 저만치에 주막이 보였다.

김삿갓은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향했다.
사실, 수중에는 엽전 한 닢 없지만 그곳으로 가면 무엇인가 생길 것같았다.

주막은 마당도 넓고 마루도 넓었다. 한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반쯤 열려있는 사립문으로 성큼 들어섰다.

"게 아무도 없소?"
비록 가진 돈은 없었지만 우선 호기롭게 주모를 찾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다시 한번 주모를 불렀다.
잠시후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

삼십이 넘었을까 아니면 조금 못되었을까? 첫 눈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어찌 오셨어요?"

여인은 시답지않게 대꾸했다.
"주막에 나그네가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거 무슨 말을 그리 하시오?"

김삿갓은 마루에 걸터 앉으며 여유있게 수작을 부렸다.
"미안하지만 요즘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장사를 안하신다니, 외상술이라도 먹어대는 건달이 많습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장사를 하지 않으니 다른 집으로 가세요.
여기서 한 마장쯤 더 가시면 좋은 주막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여인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주막이 있든 없든 상관 없소이다. 댁이 주막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왔을 것이니까요."
여인은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하지 못하고 돌리려던 몸을 멈추고 김삿갓을 바라 보았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시지 마시오.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다만 문전걸식을 하면서
떠돌아 다니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주막을 찾더라도 돈 주고 술을 마실 형편은 못되는 몸이니 찬 술 한 사발이라도 얻어 마시면 고맙겠습니다."

"보셔요 손님. 우리 집에는 지금 일이 있어 손님을 대접할 형편이 못되니 훗날 다시    
오신다면 그때는 잘 대접해드리지요."
여인의 말씨는 차분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주막이라면 의례 주모가 있어 적당히 수작을 부려도 슬그머니 받아주기 마련인데,
주모같지도 않은 이 여인은 미모로 보나 위엄있는 행동거지를 보나, 뭇 사나이들에게
술이나 팔고 있을 여인같지가 않았다. 해서 김삿갓은 더욱 흥미를 느꼈다.

"나는 떠돌아 다니기는 하지만 한번 지나간 곳을 다시 들리지 않습니다.
후일 다시 찾아오라 하셨지만 다시 뵐 일이 없을 것같으니 오늘의 인연은
술 한잔으로 끝내시면 되겠습니다."

여인은 김삿갓의 요모조모를 뜯어보고 있었다.
차림새는 그렇다치고, 생김새나 말씨가 그냥 허투로 떠돌아 다니며 걸식하는 낭인은 아닌 것같았다. 
(혹시 암행어사?...)

여인의 상상은 이렇게 비약되었다.
새카만 눈썹아래 자리잡은 두 눈은 범인과 다른 총명한 정기가​ 서려있었다.

여인은 속 마음을 감추고 퉁겨보았다.
"미안합니다만 지금 머슴도 없고 주모도 없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떠나심이 좋을 것같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김삿갓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속으론 과연 생각대로 주모가 아니었구나하고 자기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주막에 주모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김삿갓은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만 무슨 수가 날 것같아서였다.

"저를 주모로 알고 계시는 모양인데 이 주막을 맡아서 장사하는 분은 따로 있어요.
그러니 전들 어쩌겠어요?"

"허 참 딱하게 되었소이다. 실인즉 아침도 거른 터이라 이제는 발길을 옮길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따뜻한 숭늉이라도 주셨으면 합니다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여인은 갑자기 수심어린 얼굴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사정이 정 그러시다면 대접할 것은 없지만 저쪽 방으로 드십시오. 시장기나 면하게 해드리지요."

"고맙소이다."
김삿갓은 일이 잘 되어 간다고 내심 기뻐하면서 여인이 가리킨 마루가 이어진 방으로 성큼 들어갔다.

방은 어젯밤 사람이 유했던 듯 아랫목은 따뜻했고 훈기가 돌았다.
그는 바람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이 사이 여인은 안채로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곡절이 있는 집 같았다.
우선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 후에 여인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김삿갓은 깜짝 놀라며 얼른 일어서 밥상을 받아 잡았다.

"차린 것은 변변치 않으나 시장하실 터이니 어서 드시지요."
김삿갓은 밥상을 앞에 놓고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조금 전에 밥상을 건네받을 때 여인의 머리와 자신의 머리가 가까워지면서 여인의 야릇한
체취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인은 보기드문 미인이 아닌가?

집을 떠난 이래로 아내말고 이토록 젊고 예쁜 여인과 마주 대하는 것은 처음일성 싶었다.
"고맙소이다."

김삿갓은 정중히 예의를 차리고 수저를 들었다.
차린 것 없다는 여인의 말과 달리 소반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쌀밥이 주발에 가득 얹혀 있고
갓 끓인 동태국까지 놓여 있었다.

"음식 맛이 이집 마나님 성품을 닮은 모양입니다."
동태국을 한 숟가락 입에 떠넣은 삿갓이 수작을 걸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
"정갈하고 감칠 맛이 있어 해본 소리입니다."

여인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세요."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문쪽으로 옷깃을 여미며 앉은 여인이 물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부인은 아십니까?
소생은 바람과 같은 몸입니다."


9. 미모의 여인에게 수작...(2)


"저는 바람처럼 거침없고,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살고 있지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김삿갓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주막에 주모도 없고 심부름하는 머슴도 없는 모양인데 무슨 곡절이라도 있습니까?"
"곡절은 무슨 곡절이 있겠습니까. 그저 세상만사 모두가 귀찮아 잠시 문을 닫은 것뿐입니다."
"그래요?"
그러나 김삿갓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그는 묵묵히 밥을 모두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여인은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단념한 듯 상을 들고 나가려 한다.
"잠깐만!" 김삿갓은 여인을 불러 세웠다.

"제가 보기에 부인에게는 필시 절박한 일이 있으신 듯한데, 말씀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여인은 상을 다시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걸 어떻게 아셔요."
"부인의 얼굴에 그렇게 씌여 있습니다."
"제 얼굴에요?"
"그렇습니다. 바깥 양반도 안계신 모양인데 소생이 해드릴 수 있다면 오늘 밥값으로라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각별히 바쁜 몸도 아니니까요."

여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관상을 보실줄 아세요?"
"허허, 관상을 볼 줄 안다기보다 어려서부터 주역과 역서를 읽어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의 삶을 조금 들여다 볼줄 알지요."

김삿갓은 여인이 자신의 말에 흥미를 느끼자 이렇게 말했다.
"맞았어요. 저는 이년 전에 혼자가 되었지요. 오늘은 큰집에 제사가 있어 집안 식구들은 모두 그쪽으로
보내고 지금은 저 혼자 있지요. 그리고..."
여인은 한숨을 쉬면서 말끝을 흐렸다.

"복잡한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말씀을 해주시지요. 대단히 어려운 일이 있으신 것같은데."
여인은 삿갓의 말을 듣고 잠시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예사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뵙는 분에게 집안의 사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꺼려졌는데 저의 긴박한 사정을 짐작하고 계신 듯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안에 복잡한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산송(山訟)이 한 건 있습니다."
"산송이라면 묘자리에 얽힌 송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 이년 전 춘삼월에 어느 고명한 지관 한 분이 우리 집에 묵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제 남편은
병석에 누워 오늘 내일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였지요. 그래서 저희 남편을 위해 좋은 자리
하나를 보아달라고 그 지관에게 청을 하였습니다. 

지관은 우리 집에 열흘경 머물면서 이 근방 산야를 두루 살펴보고 마침내 한 자리를 택해주더군요. 여기서 이십리쯤 북쪽으로 가면 갈매봉이란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중턱 남향 자리였지요.
그때 지관에게는 쌀 열섬을 사례로 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난 후 한달쯤 지난 후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어요. 물론 그 명당자리로 장례를 모셨지요."

"그렇다면 일이 잘된 것이 아닙니까? "
김삿갓은 흥미를 느끼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거기까지는 일이 잘 되었지요. 정말 명당자리 덕분인지 주막에 장사가 부쩍 잘 되지 않겠어요.
애초부터 주모를 따로 두고 하는 장사였지만 장사가 잘 되어 남편 죽은 시름을 잊고 지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 가을부터 장사가 잘 되지 않는거예요. 대신 저 위에 주막이 잘 된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하지만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장사란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으니까요.
한데 지난 여름 어느 날 밤,  꿈에 죽은 남 편이 나타나 '여보, 내집 울타리에 침범한 자가 있어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며 말을 하는 것이예요.
그 꿈을 깨고 나서 하도 이상해 남편 산소를 찾아가 보았지요.
그런데 가보니 이게 웬일이래요!"
여인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소이까? "
"남편 묘 옆에, 그러니까 봉분 오른쪽 우청룡(右靑龍) 쪽으로 웬 묘가 하나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하도 기가 막혀 알아보니까 새로 생긴 이 묘는 건너마을 안진사 아버지 묘였던 것이예요.
해서 급히 가서 따졌지요."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집 말이, 지관에게 후히 돈을 주고 자기네 부친 묘자리 하나를 부탁하였더니 그곳에 모시라 하기에 묘를 썼노라고 능청스럽게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 이장을 하라 하였더니 오히려 비용을 물을 것이니
우리보고 이장을 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무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관가에
송사를 내었지요. 그런데 관가에서는 지금까지 차일피일 하면서 해결을 미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관이 양쪽 집에다 같은 묘자리를 팔아먹은 게로군요. 하지만 산소는 이쪽에서 먼저
썼으니 나중에 쓴 안진사네가 마땅히 쓰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도리이고, 썼더라도 파가는 것이 법이거늘, 그나저나 송사를 받은 안 진사네는 지금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가 송사까지 내니까 파가겠다고 하는데, 어디 실천에 옮겨야지요. 관가에서도 이렇다 할
결정도 하지 않고요. 아무래도 관가에서 뇌물을 받아 먹고 어물쩡 미루고 있는  듯싶네요."

"그렇다면 사또께 직접 송사를 해야 하겠군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여인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무럼요. 이쪽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내가 송사를 하지요."

"선비님께서요? 고맙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쓸  것을 준비해주십시오."
여인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더니 종이에 붓과 벼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자 김삿갓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붓을 들었다.

掘去掘去 彼隻之恒言 
捉來捉來 本守之例題
굴거굴거  피척지항언 
착래착래  본수지예제

파간다 파간다 함은 저쪽이 늘 하는 말이고,
잡아오라 잡아오라 함은 이 고을 사또님이 겉으로만 하는 이야기인데

今日明日 幹坤不老 月長在  
此日彼頃 寂莫江山 今百年
금일명일  간곤불로  월장재
차일피적  적막강산  금백년

이토록 오늘 내일 미루기만 하니 천지는 늙지않고 세월만 흐를 것이오, 
이 핑게 저 핑게 하는 사이 쓸쓸한 강산은 어느덧 백년이 될 것이로다.

김삿갓이 이렇듯 쓰고 붓을 놓으니 여인이 경탄을 한다.
"제가 생각했던 대로 과연 선비님은 명 문장가이시군요."
이 말을 듣고 김삿갓도 놀랐다.
여인이 글을 보고 뜻을 알았다는 것인데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면서 여인이 하는 말이,

"내일 사또가 이 글을 보시면 저희 집 산송 처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보아주시니 써드린 보람이 있소이다. 헌데 실례의 말씀 같소이다만, 주막이나 하시면서
지내실 분같지는 않은데요?..."

김삿갓이 이쯤 말을 해놓고 여인을 빤히 쳐다 보았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랑스럽게 말할 것은 아니지만 본래 시댁은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지요.
허나, 윗대에 이르러 뭔가 잘못되어 삭탈관직을 당하여 불운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 원래 황해도가 고향이나 이곳까지 살림을 옮겨오게 되었지요.
이곳은 강원도와 함경도가 접한 곳으로 봄과 가을에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길손들이 많아 주모를 두고 심부름하는 머슴을 서넛 두고도 장사는 잘 되었지요.
안진사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여인의 말씨는 무척 차분했다.
그러나 벼슬은 어떤 벼슬을 하였고,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 밝히려 하지는 않았다.
"내 처음부터 내력이 있는 집안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생각이 맞았소이다.
그럼 대접을 잘 받았고, 이만 떠나가겠소이다."
김삿갓은 삿갓을 찾아 손에 들었다. 그러자 여인이 황망히 그를 만류한다.

"바쁘신 길이 아니라면 며칠 쉬었다 가세요.
내일, 써주신 글을 관가에 낼 터인즉,
그 결과를 보시고 가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삿갓도 휑하니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가까이 말해본 것조차도 얼마 만인가?
그는 못이기는 체하고 주저 앉았다.

"부인이 혼자 계신다 하는데 외간인 제가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그런 것은 괘념치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선비님이 아니셨던들 사또께 내일 청원서를 낼 수
있겠습니까?"

김삿갓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인이 다시 말했다.
"이곳은 길가의 방이라 유하시기 불편하실 터이니 안채로 드세요. 주인께서 쓰시던 사랑방이 있습니다.

김삿갓은 일이 매우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않고 앞선 여인을 따라 사랑으로 들어갔다.


10. 미모의 여인에게 수작...(3)


여인을 따라 들어간 사랑방은 매우 정갈했다.
기름을 잔뜩 머금은 장판은 거울처럼 번들거렸다.
"잠시 기다리셔요. 목욕물을 데워 놓을테니 목욕을 하시지요."
김삿갓은 어안이 벙벙했다. 외간 남자가 안채로 들어온 것도 과분한데, 목욕물을 데워준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허나, 이 순간 모든 것의 결정권은 여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여인이 하자는 대로 그저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혼자 따듯한 방에 앉아 있으려니 졸음이 사르르 찾아왔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마주 대했던 여인의 환영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온 몸을 휘감았다.

"주무셨나봐요."
얼마가 지났을까 여인의 부름소리에 눈을 떴다.
방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여인은 바시시 웃으며 문밖에 서 있었다.

"졸리시면 그냥 주무시게 할걸 그랬나봐요."
"아이쿠, 그만 깜빡 졸았습니다." 김삿갓은 여인의 수고에 겸연쩍게 대답했다.
"목욕물이 데워졌으니 욕간으로 오세요. 저 아래 뜰에 있어요."

김삿갓은 실로 몇 개월만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때가 국수가락처럼 나온다더니
김삿갓의 경우를 두고 한 말인 것같았다.
목욕을 마친 물이 마치 재를 풀어놓은 듯이 쟂빛이었다.

"뜻하지 않게 호강 한번 잘 하는구나."
김삿갓은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목욕을 끝내자 바로 저녁상이 들어오는데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어떻게 닭을 잡았는지 닭찜이 올라와 있었고 향기로운 술도 한병 올려져 있었다.

맛있는 음식에 술 한병까지 모두 비우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세상 참, 배가 부르니 만사가 조그맣게 보이는군"
김삿갓은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후 오늘처럼 마음 편하게 음식을 먹으며 호사를 부린 때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항상  때마다 끼니를 찾아 주린 배를 채웠지만 그것은 피치 못할 형편이었을 뿐,
언제나 부담이 있는 끼니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서의 식사는 편안했다.
그것은 아마도 경계심을 가지고 자신을 대하던 여인의 태도 변화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주인여자는 깨끗한 금침을 들여놓고 자리끼까지 갖다 놓은 후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삿말을 남기고 안채로 들어갔다.


자리에 누운 김삿갓은 갑자기 여인이 그리워졌다. 또 안주인 여자가 아니더라도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청춘의 젊은 피는 본능적으로 이성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불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러면서 지금쯤 안방에서 옷을 벗고 잠자리에 있을 여인의 생각 뿐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나와 같은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까? "
온갖 잡생각이 그의 뇌리를 채우고 넘쳤다.

"안방으로 슬며시 건너가 말을 붙여볼까? ..
일엽편주(一葉片舟)의  고해(苦海)를 건너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함께 논하여 볼까?..."
온갖 잡념이 그를 짖눌렀다.

"아니야..지금쯤 그녀도 내가 오기를 기다릴지 몰라.."
한편으론 "까짓 사내녀석이 과부 하나쯤 꺾지 못해서야 사내라고 할 수 있나!..."
그는 스스로 엉뚱한 자기 생각을 합리화시켜 보기까지 하였다.

"흥, 기껏 목욕까지 하고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 금침을 깔고 누우니

고마운 생각보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구나, 쯔쯧..."
이렇듯 자신을 꾸짖으며 소리를 내 중얼거렸지만


그의 귀와 눈이 자꾸만 안방쪽으로 향하는 본능은 억제할 수 없었다.

"헛참!"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휘둘러 보니 문갑 위에 연적과 필묵이 보였다.
그는 벼루를 꺼내 천천히 먹을 갈았다. 먹물이 짙어지기도 전에 글이 그의 머리속에서 이미 정리가 다 되었다.

쓸쓸한 나그네의 베갯가의 꿈은 산란하고            
客愁蕭條 夢不仁 (객수소조 몽불인)


서리찬 달빛만이 더욱 외로워라                        
滿天霜月 照吾隣 (만천상월 조오린)
푸른대와 소나무는 영원불멸의 절개를 뽐내지만  
綠竹蒼松 千古節 (녹죽창송 천고절)
홍도와 백리는 봄에만 피고지지 않던가              
紅枇白李 片時春 ( 홍비백이 편시춘)
왕소군의 뼛가루도 오랑캐 땅의 한줌 흙이 되었고
昭君玉骨 胡地土 ( 소군옥골 호지토)
꽃같던 양귀비도 마외파 아래 티끌로 변했네       
貴妃花容 馬嵬㕓 ( 귀비화용 마외전)
세상살이 이치가 이러할진대                           
世間物理 偕如此 (세간물리  해여차 )
그대 오늘밤 몸풀기를 너무 아까워하지 마소서    
幕惜今宵  解汝身 (막석금소 해녀신)

김삿갓은 이렇게 써놓고 몇번씩이나 읽어보았다.


복숭아 꽃이나 오얏꽃이나 봄에만 화려하게 피어났다 지고나면 그뿐이며,
청춘도 이같아 일생을 통해 잠깐 지나가는 한때라는 암시였다.

게다가 천하 미녀 왕소군도 흥왕에게 끌려가

임을 그리다 죽으니 한줌 흙으로 돌아갔고,
당 현종을 사로 잡았던 양귀비도 안록산과 함께 잡혀
한 줌 티끌이 되었으니 허무한 일이 아니냐는
충동을 불사르고 어여쁜 밤을 함께 하자는 추파의 글이었다.

김삿갓은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전한다?"
김삿갓은 써놓기는 하였으나 다음 생각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사내 대장부가 먹은 마음을 그대로 실행해야지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고 종이를 들고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방을 살펴보니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살그머니 방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여인은 잠든 것같지는 않았다.​ 가슴은 연신 두근거렸다.
김삿갓은 살며시 장짓문을 열었다. 장짓문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열리는데도 여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척이 없었다. 김삿갓은 문틈으로 살며시 종이를 밀어 넣었다.

"어머나!"
비로서 여인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삿갓은 아무 말 없이 방문을 다시 살며시 닫았다.
여인이 종이를 펼쳐 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한동안  쥐 죽은 듯이 방안의 동정을 살피던 김삿갓은 애가 탔다.
지금쯤이면 글을 모두 읽었을 것인데 방안의 동정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젠장, 글 뜻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게 아니야?)

김삿갓은 자신이 여인의 교양을 너무 높이 본 것 아닌가 여겼다.
그러나 이쯤 나갔으니 이제는 그대로 물러설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에헴!"
잔기침을 해서 아직도 자신이 방문 앞에 서있음을 여인에게 알리고 싶었다.

"누구셔요?"
여인은 딴청을 부리며 물었다.
"사랑채 선비 말고 누가 또 올 사람이 있소이까?"
이번에는 김삿갓이 튕겨보았다.

"어찌 밖에 계셔요. 추우실 터인데.."
"글을 보셨으면 답장을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제서야 방문이 열렸다.

"남녀가 유별할 시각이지만 은밀히 찾아오신 손님을 내쫒을 수야 있나요. 들어오세요."
김삿갓은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 춥다!"
김삿갓은 깔아놓은 비단 이불을 들추고 몸을 밀어 넣으며 능청을 피웠다.

"어머나"...
여인은 얼굴이 상기되며 김삿갓의 무례한 행동을 새삼스럽고 흥미있게 바라 보았다.
"허, 내 오늘 부인의 미모와 교양에 취하여 나비가 되어 찾아왔습니다그려.."
"호호호..그럼 제가 꽃이란 말씀이신가요?"
"아무렴요 향기를 가득 품은 꽃이지요"

여인은 본능적으로 교태를 짓고 있었다. 김삿갓은 슬그머니 여인의 허리를 감았다.
"이러시면 안되요."
여인은 살며시 몸을 꼬으며 삿갓의 애간장을 녹였다.

"아까 나의 뜻을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이 큰 집에는 부인과 나밖에 없습니다.
피 끓는 젊은 남녀가 하룻밤 회포를 푼다고 죄 될 것이 있겠습니까?
부인, 모처럼의 기회 우리 두 사람 회포를 맘껏 풀어봅시다."

이렇게 말을 한 김삿갓은 여인의 허리를 힘껏 껴안은 채 비단 요 위에 천천히 뉘었다.
김삿갓은 초례를 마친 신랑이 신부의 옷을 벗기듯,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옷을 하나씩 벗겨갔다.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여인은 온 몸을 움츠렸다.

울고넘는 박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