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37. 병자호란,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
그로부터 두어 달, 김삿갓이 이천 땅을 떠돌아 다니다가 광주 땅으로 들어섰을 때는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사람이 사는 세상사는 무던히 변덕스럽지만, 계절의 변화는 매년 올곧이 돌아온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추위를 느꼈건만, 입춘이 지나고 보니 조금만 멀리 걸어도 등골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봄볕에 한결 넉넉해진 김삿갓은 문득 시 한 수를 읊조려 본다.
해마다 해는 가고 가고 끝없이 가고
날은 날이 날마다 끝없이 오고 있네
해는 가고 날은 와 오감은 끝이 없는데
우주의 모든 일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네.
年年年去 無窮去
연연연거 무궁거
日日日來 不晝來
일일일내 불주래
年去日來 來叉去
연거일내 내차거
天時人事 此中催
천시인사 차중최
사람의 일생이란 하루 하루가 쌓이고 쌓여 해가 바뀌고,
그런 해가 쌓이고 쌓여 인생이 모두 지나간다.
어느덧 돌아 보면 아무 것도 뜻대로 된 것 없는데,
무정한 세월 탓만을 하는 것은 아닌지?
세상사 모든 일이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 가건만...
사람이 제 혼자 바쁘게 돌아간다.
만사개유정 부생공자망
(萬事皆有定 浮生空自忙)
김삿갓은 모처럼의 봄볓을 맘껏 받으며 무심히 길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남한강이 가까워진 것같은데, 삼전도에 이르러 문득 눈에 띄는
비석(현, 잠실 롯데백화점 건너 석촌호수 사거리 호수앞에 보존)이 있었으니,
비문에 새겨진 글은,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 功德碑)"였다.
김삿갓은 그 비석을 보는 순간 병자호란의 치욕이 머리에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진땀이 솟아났다.
이 비석은 병자년 호란때, 청태종 홍타이지(병사한 누루하치의 8번째 아들)가 남한산성에 은거하던
인조 대왕에게 항복을 받은 후, 우리로 하여금 강제로 세우게 했던 치욕의 비석이었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남한산성 위에 올라 병자호란의 치욕의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1627년 만주(滿州)의 여진족 추장인 누루하치가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새로 세운 후 우리 조선에 국교 수립을 강요해왔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전통적으로 명나라와의 국교가 두터웠던 관계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명나라는 불과 35년전 (1592년), 조선 땅에서 벌어진 왜적의 침입(임진왜란)을 함께 막아낸 조명(朝明)연합의 은혜를 베푼 나라가 아니었던가?
조선의 국교 수립 거절에 앙심을 품어오던 청태종 홍타이지가 인조 14년(1636년), 저들의 국호를 청으로 고침과 동시에 십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왔다.
그 해가 마침 병자년(丙子年)이었고, 우리는 이후로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 부르게 되었다.
청태종이 십만 대군을 몸소 이끌고 심양(봉천:奉天)을 떠난 것은 그해 12월 12일이었고, 그로부터 여드레 후에는 압록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당시 의주(義州) 부윤 임경업 장군은 백마산성을 굳게 잠그고 적의 공격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자 청군은 일부의 병력으로 백마산성의 공격을 계속하며, 주력 부대는 한양으로 한양으로 진격을 계속 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군해오는 청군에게 위협을 느낀 조정에서는 척화론과 화친론이 분분한 가운데
전쟁에서의 대책과 지원을 세우지도 못하고 급기야 임금이 몸을 피하는 천도를 계획하게 되었다.
한양 인근의 강화도는 조수의 간만차가 크고, 내륙과 물살이 매우 빠른 큰 고랑으로 이어져
있는데다 큰 농토와 풍부한 수량(水量)을 품은 곳이다.
따라서 위급한 국가적 재난을 맞았을 때 제일 먼저 천도의 장소로 꼽는 곳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청군은 한양을 공격하기에 앞서, 인조 대왕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강화도를 먼저 점령하여 버렸다.
결국, 한양의 방어가 무너지자 임금은 장안의 백성을 고스란히 버려둔 채, 그 해 섣달 하순에 엄동 설한을 무릅쓰고 대신과 군사 만여 명만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 사실을 알아내고 남한산성을 이중 삼중으로 에워싸고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함과 동시에 사방으로 총공격을 퍼부었다.
이때 남한산성에는 많지 않은 군량과 적은 식수(食水) 밖에 없었으니, 불과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인조 대왕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을 시작한지 꼬박 1년 만인 정축년 1월 30일에 인조 대왕은 특사를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다. 말이 화친이었지, 실질적으로는 항복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승전의 기분이 도도한 청태종이 아래와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첫째,
항복을 하는데 앞서 남한산성 남문 밖 삼전도에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청태종이 항복을 받을 때 올라 앉을 옥좌를 마련할 것.
둘째,
청태종이 수항단에 앉은 후 인조는 왕세자와 함께 성안에서 수항단까지 홀몸으로 걸어나와 땅에 엎드려 세 번 큰 절을 올릴 것.
세째,
두 나라는 그 자리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하되, 조선국은 청나라가 요구하는 모든 조항을 무조건 받아 들일 것.
네째,
청태종에게 항복을 올린 역사적 장소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수항단을 쌓았던 삼전도에 "대청황제 공덕비"를 새로 세울 것.
그러면서 저들의 요구가 단 한 가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한산성을 사흘 안에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엄포도 아울러 밝혔다.
궁지에 몰린 인조 대왕은 마침내 청태종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고 왕세자와 함께 수항단으로 걸어나와
청태종에게 땅에 엎드려 항복의 절을 올렸으니, 그것은 5천년 역사 이래로, 다른 민족과의 전쟁에서 처음 겪은 치욕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때 강화조약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는,
1. 조선의 국왕은 청나라에 대하여 신(臣)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함은 물론이고 이제부터는 청나라 연호(年號)를 쓸 것.
3. 조선은 왕세자와 차자(次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이러한 강화 조약과는 별개로 더욱 막심한 피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백성들의 피해였다.
오랑캐 군사들이 전국을 휩쓸고 돌아 다닐 때, 백성들의 재산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을 뿐 아니라,
무고한 백성 5만 여명을 포로로 납치해 갔다.
그렇게 납치해 간 사람중 남자는 종(從)으로 부려 먹었고, 젊은 여자는 노리개로 삼았다.
전쟁이 모두 끝난 후, 납치해간 우리 백성을 돌려 달라는 요구에 청나라 되놈들은 신분의 차별을 두어 일반 백성은 100냥에서 부녀자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1500냥까지의 보상금을 요구했다.
5만 여명이나 되는 포로의 보상금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가족을 데려오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가진 것 모두를 내다 팔았고, 조선의 경기는 전쟁의 피해와 함께, 형편없이 피폐해졌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이전에는 없었던 "환향녀"(還鄕女)라는 새로운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중에 환속금을 지불하고 돌아온 여자들을 특별히 환향녀로 불렀다.
환향녀란, 글자 그대로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갔다가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갔던 여자들이 깨끗한 몸으로 돌아왔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니 환향녀라는 말 가운데는 정조를 되놈에게 잃은 여자라는 뜻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었다.
이후로 세월이 지나면서 환향녀는 잊혀져 갔지만, 말의 씨앗은 계속 남아,
오늘날에 외방 남자와 정을 통한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부르는 어원은
병자호란 이후, 환속금을 내고 풀려 돌아온 환향녀에서 비롯된 말인 것이다.
불가피하다면 전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단 시간 내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결집하여 승리하여야 한다.
아니, 그것보다는 지나온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고 만전의 사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有備無患"
우리 조선이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에 벌어진 정유재란의 원인을 살펴 방비를 갖추었다면
1636년 병자년 호란때, 밀려오는 되놈들을 격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가슴을 안고, 치욕의 현장인 남한산성을 내려오는 김삿갓의 발걸음은
모래 자루를 매단 듯, 한량없이 무거웠다.
삼전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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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한양의 오얏나무와 풍수
참담한 가슴을 안고 남한산성을 내려온 김삿갓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양으로 향했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봄도 무르익어 이집 저집 담장마다 복사꽃과 오얏나무꽃이 만발해 있었다.
오얏나무는 조선(이씨)과 인연이 깊다.
김삿갓은 李씨를 뜻하는 성씨가 "오얏나무 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엽 공민왕때, 그 당시 한양 땅에는 난데없이 오얏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꽃을 피웠다.
누가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이같이 오얏나무가 무성하더니, 해가 갈수록 그 숫자가 차고 넘쳤다.
"이상하다"... 모두가 이렇게 여기고 있을 때, 어떤 술사(術師)가 이를 보고 장차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한양 땅에서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또, 이런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점 퍼져 나가게 되었고, 급기야 공민왕의 귀에까지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공민왕은 그런 소문을 듣고 크게 걱정하며, 민심을 되돌리는 조치로 송도에서 벌리사(伐李使)를 보내어, 한양 땅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오얏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오얏나무는 웬일인지 베어도 베어도 없어지기는 커녕, 더욱 무성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국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새 나라를 일으켜 송도에서 천도하여 이곳, 오얏나무 무성한 한양에 새로운 도읍지를 정했으니,
한 나라의 흥망이 인력으로는 어쩔수 없는 천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나루를 건너온 김삿갓이 한양 도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이나 수구문(水口門 : 光熙門)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수구문으로 불리는 광희문은 한양 장안에서 죽은 송장이 나가는 유일한 문이었다.
남달리 유난한 김삿갓은 남들이 다니기 꺼리는 수구문을 거리낌 없이 택하여 도성에 입성하였다.
이렇게 장안에 들어서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길을 오가며
사람들끼리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복잡하였다.
"사람도 많고 집도 크고 많구나!"
김삿갓은 처음 보는 낯선 도시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게다가 시장이란 곳에서는 오만가지 장사꾼이 저마다 목판을 깔아놓고 물건을 팔고 있는데,
지나는 누구라도 붙잡고,
"싸구려 싸구려~ 이야~ 기가 막히게 좋은 호박이 나왔어요!"
"동경 사시오, 동경(銅鏡)~ 노친네 새치도 잘 보고 뽑을 수 있고, 규중 처녀 모양새도 다듬는데는 동경이 최고요!"하며, 호객(好客)을 일삼는다.
김삿갓은 전국 이곳 저곳의 시장판을 다녀 보았으나 한양 저자 거리처럼 장사꾼들이 요란스럽게 떠드는 곳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도대체 알아 들을 길이 없었다.
"헛참, 조선 제일의 한양에서도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운 모양이군!"
김삿갓은 종로 육의전(六矣廛) 거리를 지나 남산으로 올라갔다.
이곳으로 오른 까닭은 한양 도성의 면면을 살펴 수학(修學)할 때 읽었던 한양의 풍수 지리를 실제로 확인하여 보기 위함이었다.
그때 김삿갓이 어렵게 구해 읽게 된 한양의 지세와 풍수는 아래와 같았다.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될 당시에 백호(인왕산:仁旺山)가 너무 강하여 청룡(북악산:北岳山)을 누르는 형세였다. 이러한 지형 아래에서는 장손보다는 지손이 성(盛)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 3대 임금이셨던 태종부터, 다음 대인 세종 대왕을 비롯하여 지손이 번성하였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장손으로 등극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 이렇게 권좌에 오른 임금은
권좌를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났거나(문종) 올랐더라도 정변에 의해 폐위(단종)되었다.
한양의 지세가 이러했기에 약한 청룡을 보완하여 흥인문을 흥인지문이라 하여 산맥같이 생긴 之자 한 자를 추가하여 문의 이름을 불렀고 성을 산맥과 같이 둥글게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도성의 출입문에 이름을 고치고 성을 둥글게 쌓은 효과가 없었던지
조선 권좌의 이동은 개국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격변에 의한 논란이 끊임 없었다.
한편, 한양을 처음 수도로 정하고 성(城)과 궁궐을 축조할 때
풍수 지리의 근거로 무학(無學) 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의 의견이 서로 달랐는데,
무학 대사의 주장은 강한 백호를 누르기 위해 궁궐을 지을 때
인왕산을 뒤로 하여 동향으로 앉혀 짓게 되면 그 왼쪽의 청룡이 북악산과 삼각산이 되므로
장손이 번성하는 이상적인 왕도(王都)가 된다는 주장이었고,
반면에 정도전은 유교의 옛 경전까지 인용하면서
"왕은 마땅히 남면(南面)하는 법인데 궁궐의 대문을 어찌 동쪽으로 앉힐 수 있는가?"
하는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새로 집권한 이성계의 추종 세력은 고려시대의 숭불(崇佛)정책에 회의를 품은
유교학자 출신의 문신(文臣)들 이었다. 이성계는 집권 초기 혼란한 왕권을 유지하는데,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의견이 받아 들여져 경복궁은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그때 무학 대사는 크게 탄식했다.
"허, 이거 큰일 나지 않았나. 이렇게 대궐을 조성하면 몇 해 안에 국모가 죽고
용상 바로 앞에서 붉은 피 낭자한 골육 상쟁이 일어날 것인데.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무학 대사의 예언은 과연 적중하여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1392년)
궁궐을 조성한지 불과 2년도 못되어 신덕 왕후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후로 왕자의 난을 거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 이방원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권좌의 이동은 장자 세습의 전통은 이어지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 아니던가?
김삿갓은 쓸쓸한 왕조의 궁궐을 한참동안 바라 보았다.
어느덧 멀리 서산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남산에서 내려온 김삿갓은 하룻밤을 보낼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절간이나 서당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오늘은 여염집에서 신세를 지리라 생각하고 이집 저집 대문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어느 집을 막론하고 대문은 모두 굳게 잠겨 있었다.
(허, 문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교류의 장이 아니던가.
이렇듯 대문을 걸어 잠근 것은 지나는 나그네에게 물 한 잔도 주지 않겠다는 표시가 아닌가.
한양의 인심이 이렇듯 고약한가?)
김삿갓은 한양이라는 고장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러나 어디선가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하겠기에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제법 크게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누군가 나오는 듯 하더니, 중문 안에서 대꾸를 하는데,
"누구시냐고 여쭈어라!"
하고 거꾸로 묻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묻는 폼이 집 주인인 것이 틀림 없었는데, 김삿갓은 한양에 사는 사람들은
하인이 없음에도 하인에게 이르는 것처럼 간접 화법을 쓴다고 이미 들은 바 있었다.
따라서 주인 편에서 하인을 둔 것처럼 대꾸할 때에는 손님인 이 편에서도
하인을 둔 척하고 간접 화법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하룻 밤 신세를 지고 싶어 찾아 왔노라고 여쭈어라!"
하고 솔직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중문 안에서는,
"우리 집에서는 그런 손을 재울 방은 없다고 여쭈어라!"
하며, 씹어 뱉듯 이같은 소리를 내던지고 중문을 힘차게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집으로 가서 대문을 또 두드리며,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더니, 이번에는 숫제 안마당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도 안계시다고 여쭈어라!"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김삿갓이,
"아무도 안 계시다고 대답하는 그 소리는 개 소리냐고 여쭈어라!"
하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뭣~이! 어떤 놈이!"...
안 마당에서 건장한 사내놈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중문이 급하게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크!!!..개같은 놈이 뛰쳐 나오는구나!!!!"..
김삿갓은 지팡이와 삿갓을 각각 손으로 움켜 잡고, ("걸음아 날 살려라"...)
삼십 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39. 한양에서 어렵게 하룻 밤을
잠자리를 찾아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는 동안 어느덧 거리는 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얼마후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저마다 도망이라도 치듯이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렇게도 야단스럽던 한양의 거리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김삿갓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조금 전 들렸던 종소리는 통행 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 소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양 도성에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을 알 턱 없는 김삿갓은,
(그 많던 사람들이 별안간 어디로 가버렸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어둠이 깔린 거리를 혼자서 유유히 걷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가다 보니 저만치서 순라군(巡羅軍)인 듯한 사람 네 댓이
김삿갓 쪽으로 비호같이 달려와 사방으로 둘러싸며,
"이 도둑놈아! 통행 금지 시간에 네 놈은 어디로 무엇을 훔치러 가느냐!"
하고 벼락같이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삿갓이,
"나는 도둑이 아니오."
"이놈아! 네가 도둑이 아니라면 어째서 통행 금지 시간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냔 말이냐?"
"통행 금지라뇨? 한양에 통행을 금지하는 시간이 있단 말이오?"
"허허..이런 촌 놈을 보았나! 너는 도대체 어디서 굴러왔기에 통행 금지도 모른단 말이냐?"
"나는 시골서 조금 전에 한양에 올라온 사람이오. 한양 땅에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오."
그러자 순라군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통행 금지도 모르는 이런 시골뜨기를 잡아다 가둘 수도 없고..이걸 어쩌지?"
그러자 두목인 듯싶은 순라군이 말하는데,
"아무 생길 것도 없는 놈을 잡아다 가두면 뭘 해!
숫제 광교 다리 밑에 움막 아이들한테 갖다 맡기지."
그러면서 김삿갓을 쳐다보며 말한다.
"이놈아! 한양에는 통행 금지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녀라."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본시, 하늘과 땅이란 남여 노소 귀천을 불문하고 만인이 공유하는 소유물일진데,
누구나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이 땅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렇듯 황당한 경우를 당하고 보니
땅을 마음대로 밟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였다.
그러나 잠자리를 구하고 있던 차에 순라군 이야기로 짐작컨데,
잠자리를 구해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그것 참 다행이다.)
김삿갓은 광교 다리밑 움막이라는 곳이 궁금해,
"지금 나를 데려 가는 곳이 어떤 곳이지요?"
하고, 광교 다리밑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는 순라군에게 물어 보았다.
"이놈아! 통행 금지도 모르는 놈이 그런건 알아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감옥 속에서 자는 것보다는 백번 나을 것이니 잠자코 따라 오너라.
그리고 오늘 밤은 움막에서 자고, 내일 아침 파루(罷漏)가 울리거든 어디든지 마음대로 가란 말이다."
김삿갓이 광교 다리까지 끌려와 보니, 다리 아래 개천가에는 제법 큰 움막이 쳐져 있고
그 움막 속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순라군은 김삿갓을 다리 위에 세워 놓고 움막에 대고 소리를 크게 지른다.
"애들아! 통행 금지도 모르는 촌놈 하나 데려왔다.
오늘밤 너희들 틈에 재우고 내일 아침에 보내 주도록 하거라."
그러자 움막 속에서 너 댓 아이들이 날치기처럼 잽싸게 달려 나오더니
김삿갓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순라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오늘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비단 구렁이 한 놈을 잡아 왔어요.
그놈을 고아 먹으면 아저씨 가운데 다리가 "뻘떡뻘떡" 일어설테니 한번 써보세요.
아저씨한테는 특별히 싸게 드릴게요."
구렁이를 팔아 먹으려고 덤비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하, 이놈들이 광교 다리밑에 사는 땅꾼놈들이로구나!)
하고 아이놈들의 정체를 대뜸 알아낼 수 있었다.
순라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끼, 이놈들아! 나는 그런 것을 먹지 않아도
밤마다 육봉(肉棒)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못 견딜 지경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비싼 돈을 내고 그런 것을 사먹느냐.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아라!"
"아저씨가 안 쓰시려거든, 돈 많은 부자 양반들한테 좀 팔아 주세요.
삼백 냥만 받아 주시면 이번에는 섭섭치 않게 구문으로 백냥을 드릴게요."
"알았다, 알았어. 장사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아!"
"네, 손님은 받을테니까 이번 구렁이는 아저씨가 꼭 좀 팔아 주세요.
우리들은 이번에도 아저씨만 믿어요."
순라군과는 예전부터 어떤 거래가 있었던지,
땅꾼 아이들은 그렇게 당부를 하고 김삿갓을 움막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끌려 오셨소.
한양 도성에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셨던가요?"
"나는 한양이 초행이라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수 있는 곳인데,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말이 안되는 소리야!"
김삿갓은 무심결에 통행 금지에 대한 비난을 한 마디 씨부렸다.
그러자 땅꾼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그것 참 옳은 말씀입니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것인데,
대감이니 영감이니하는 날도둑 놈들을 보호하기 위해
통행을 금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웃기는 얘기지요."
광교 다리 밑에 있는 땅꾼들의 움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움막 안을 두루 살펴보니 아이들의 살림살이가 놀랄만큼 풍성하였다.
"오늘 밤은 아저씨도 우리와 한 식구요. 밥은 넉넉하니까 많이 잡수세요."
하며 늦은 저녁을 차려 내는데 개다리 소반에 얹힌 저녁 반찬만 하여도
호박 볶음에 낙지 젓갈이 차려져 있고, 돼지 고기 구운 것과 훈제 오리 고기며,
부추 무침에 각종 쌈 채소조차 있는 것이 정승 댁 잔칫상이 부럽지 않을 지경이었다.
김삿갓은 땅꾼 아이들이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조차
스스럼 없이 인정을 베푸는 것을 보니, 그들의 인간성은 대문을 겹겹히 걸어 잠그고
허세를 부리며 살아가는 한양 양반님네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다정 다감 하였다.
"그럼 나도 자네들과 같이 먹기로 하겠네!"
김삿갓은 몹시 허기지던 판인지라 염치 불구하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넌즈시 말을 걸었다.
"자네들이 이렇게 잘 살아가는 것을 보니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일세.."
하며 그들의 생활상을 떠 보았다.
그러자 우두머리인 듯싶은 땅꾼 아이가 자신 만만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들의 장사는 언제나 잘 됩니다. 그 것만은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지요."
"이 사람아! 장사란 경기를 타는 법인데 자네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런 장담을 하는가?"
"물론 다른 장사라면 시세와 물량에 따라 굴곡이 있겠지요.
그러나 뱀 장사만은 땅 짚고 헤엄치기인걸요."
"어째서 땅 짚고 헤엄치기란 말인가? 얼핏 들어서는 알 수 없네..."
"생각해 보세요. 사내들치고 계집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아하는 계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 하초가 영 신통치 못한 법이지요.
젊고 아름다운 소실이 있어도 배꼽 아래 물건이 영 신통치 못하니까
값은 고하간에 뱀을 사먹지 않을 수 없답니다.
그러니 우리네 장사는 경기도 안타고, 땅 짚고 헤엄치기이지요."
김삿갓이 듣고 보니 과연 그럴 듯한 소리였다.
"아까 잠깐 듣자하니 구렁이 한 마리에 삼백 냥이라 하던데 뱀의 값이 그렇게나 비싼 것인가?"
"아저씨도 참! 뱀의 값이 너무 싸 버리면 뱀을 사려는 사람이 효과를 의심하기 마련이예요.
그러니 처음부터 높은 값을 불러놓고, 흥정을 할 때 못 이기는 척하고 조금 깎아주면
인심도 얻고 뱀도 팔 수 있고, 서로 좋은 일이지요."
"그래도 그렇지 뱀 한 마리가 삼백냥이면 너무 비싸군. 이건 일종의 사기로구먼, 안그래?"
김삿갓이 웃으며 이렇게 말을 하자, 땅꾼 아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저씨는 잘 모르시는 가본데 한양 장안에 부자 양반들은 모두가 백성의 등을 쳐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예요. 그런 사람 돈을 좀 나눠 먹기로 무슨 죄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하하하, 그 말을 듣고 보니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려.
그러고 보면 세상 만사가 돌고 돌아가며 절로 균형을 이루게 되는 모양일세!"
"우리들은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몰라요. 아무튼 뱀이라는 것은 값을 비싸게 부를수록
잘 팔리는 법이예요.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돈이 썩어나는 양반들에게는
돈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고, 오직 정력을 왕성하게 하는 것만이 대단히 중요하거든요."
"음 ..그렇기도 하겠네."
다음 날 아침, 땅꾼 아이들은 아침을 먹기 무섭게 제각기 꼬챙이와 자루를 하나 씩 들고
움막을 나서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산으로 뱀을 잡으러 갈거예요.
아저씨는 서울 구경을 다니다가 잠자리가 없게 되거든 우리한테 또 오세요."
밤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고맙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한다.
"말만 들어도 고맙네. 덕분에 신세를 많이지고 가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사람이니,
섭섭하지만 이만 작별하세. 일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게 되기를 빌어줌세!"
"그래요... 이거, 섭섭해서 어떡하죠?"
그러면서 땅꾼 아이들은 저희끼리 눈짓을 하더니, 한 아이가 엽전 열 냥을 불쑥 내밀면서,
"이거 몇 푼 안되지만, 가시다가 술이라도 한 잔 사드세요."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밤새 신세진 것도 고마운데 돈까지 내밀다니...
너무도 고마운 인정을 만났기에 김삿갓은 눈시울이 후끈 달아 올랐다.
"나는 본시 돈이 필요치 않은 사람인데, 자네들이 정으로 주는 돈이니, 이 돈을 고맙게 받겠네."
김삿갓은 엽전을 주머니 깊이 간직하고 다시 서울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오늘은 풍수 지리상 백호의 기(氣)를 담고 있는 인왕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왕산에서 굽어보는 장안의 풍경은 글자 그대로 장관이었다.
만호 장안(萬戶長安)을 굽어보던 김삿갓은 어제 겪은 일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양 도성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쓰고 살면서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 한 그릇 먹이려 하지 않으니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그런 일에 비한다면 양반님네들이 멸시하고 더럽다 여기는
땅꾼 아이들의 고마움은 상대적으로 크게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한양이란 매우, 극과 극의 삶이 서로 섞여 돌아가는 곳이군...)
이런 생각으로 장안을 내려다 보던 김삿갓, 갑자기 뒤가 마려옴을 느꼈다.
그리하여 바위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장안을 내려다 보며 뒤를 보려는데,
별안간 방귀 한 방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나왔다.
어젯밤 땅꾼 움막에서 과식을 한 탓인지, 방귀 냄새가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요란스런 방귀 한 방을 뀌고 나니, 속이 그렇게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뒤를 보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 한 수를 읊어댔다.
인왕산에서 똥을 누려니 방귀가 먼저 터져 나와
향기로운 냄새로 온 장안이 진동했다.
放糞仁旺 第一聲 방분인왕 제일성
香震長安 億萬家 향진장안 억만가.
이 시는 김삿갓이 인심 사나운 한양 도성을 떠나는 "이별의 시"이기도 하였다.
40.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북쪽으로 북쪽으로만 길을 가던 김삿갓은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길을 가던 초립 동이를 보고 물었다.
"날이 저물어 어디선가 자고 가야 하겠는데 이 부근에 절이나 서당같은 것이 없느냐?"
"절이나 서당은 없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벽제관(碧蹄館)에 주막이 있어요."
김삿갓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래? 그럼 여기가 바로 벽제관이란 말이냐?"
이곳이 벽제관(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이라는 소리에,
김삿갓은 불현듯 임진왜란 당시의 고사(古事)가 떠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질풍 노도와 같이 진격해 오는 왜군을 피해 선조는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눈앞의 압록강을 건너면 명나라 땅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이 때는 이미, 한음 이덕형이 명 나라로 구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명 나라 조정의 분위기를 감지한 한음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 나라 황제가 선뜻 원군을 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 정녕 우리 조선을 구원해 주실 수 없단 말씀입니까?"
한음은 담판을 시작했다.
"그렇소. 조선에 원군을 보낼 수 없소."
명 나라 황제는 손조차 내저으며 거절을 했다.
"우리 조선과 명 나라는 오랜 형제지국입니다.
형제가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 모른 척하시다니오."
"조선국 사신은 더 이상 나를 설득하지 마시오."
황제가 냉정하게 잘라서 말을 했다.
"음...."
그러자 한음은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은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찾는 수 밖에 없겠사옵니다."
"잘 생각했소. 스스로 싸워 이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오."
황제는 빙그레 웃기까지 하였다.
"폐하. 그 길이 어떤 길인 줄 아시옵니까?"
협박하는 어조로 한음이 말했다.
"내가 알 리 있겠소? 그래, 어떤 방법이오?"
명 나라 황제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말씀 드리기 황송하오나, 우리 조선이 목숨을 보존하는 길은
왜적 앞에 나아가 항복하는 길 뿐이옵니다."
한음은 황제를 은근히 협박했다.
"으흠, 그런 방법도 있겠구료."
황제는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였다.
"우리 조선이 왜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면 그들의 길잡이가 될 수 밖에 없사옵니다."
"그야, 뻔한 일이 아니겠소?"
"그리고 왜군은 우리를 길잡이 삼아, 이 명 나라로 진군할 것이 틀림 없습니다. 폐하!..."
"뭐라고?"
명 나라 황제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며 호통을 쳤다.
"조선이 길잡이가 되어 우리 명 나라를 친다고? 감히 누구를 협박하느냐!
당장 저놈의 목을 쳐라!"
그러나 한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침착한 모습으로 황제를 설득했다.
"폐하, 소신을 처단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소신이 이곳에서 기한 내에 돌아가지 않으면
소신의 임금께서 부득불 왜군 앞에 나아가 항복하시게 될 것이옵니다."
"아니 저 놈이 아직도 내 앞에서 함부로 지껄이고 있구나."
"폐하. 고정하시고 소신의 말을 더 들어 주소서. 소신의 임금이 왜군에게 항복을 하면
오래도록 형제국으로 지낸 두 나라는 의리를 저버리게 됩니다.
폐하, 이같은 크나 큰 수치를 역사에 남기지 마소서."
"무엇이?"
명 나라 황제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폐하, 바라옵건데 그런 불행이 없도록 통촉해 주시옵소서!"
한음 이덕형은 이같이 고하고 황제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러자 배석해 있던 명 나라 신하가 말하기를,
"폐하, 조선국 사신의 목숨을 내건 충절이 갸륵하옵니다. 그의 말 대로 조선의 군사를 길잡이로
왜군이 쳐들어 온다면 우리 명 나라도 시끄러울 것입니다.
하오니 조선국에 원군을 보냄이 타당하다 사료되옵니다." 하였다.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신하들도 이구 동성으로 아뢰는데, "원군을 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여송(李如松) 장군이 이끄는 5만의 군사는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성과 개성을 차례로 탈환했는데, 벽제관에서 만은 왜군에게 크게 참패하였다.
승승 장구하던 이여송은 벽제관에서 왜군에게 한번 혼이 나자,
멀찍이 송도까지 퇴각하여 다시는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전국(戰局)은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왜군을 압박하여 무찔러야 할 판인데,
이여송은 이 핑게 저 핑게로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때 이여송의 접대관은 지혜롭기로 유명한,
명 나라에서 돌아온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었다.
이덕형은 이여송에게 속히 싸워 주기를 여러 차례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은 갖은 핑게를 대며 좀처럼 왜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덕형은 간청해 보다 못해, 나중에는 화가 동하여
이여송의 방에 있는 적벽도(赤壁圖) 병풍에 시 한 수를 써갈겼다.
바둑은 승패가 분명해야 하고
군인은 전쟁터에서 우물쭈물하지 않는 법인데
지금껏 적벽 싸움같은 공을 못 세웠으니
장군은 지금 당장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오
그 옛날 중국 삼국시대에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위왕(魏王) 조조(曺操)에게 크게 패한 후,
부하 장졸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모두가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모사 주유(周瑜)와 노숙(魯肅)만은 끝까지 싸울 것을 고집하였다.
이에 손권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칼로 책상을 찍으며, 최후의 선언을 했다.
"우리는 옥쇄(玉碎)할 것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우자."
그리하여 손권은 그 유명한 적벽 대전에서 조조에게 커다란 패배를 안겨 주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적벽도가 그려진 병풍에 한음이 휘갈겨 쓴 시의 뜻을 이여송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여송은 이덕형의 시를 보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왜군을 상대로 진격을 하게 되었고,
전황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우위로 왜군을 점점 쇠퇴시켜 결국은 퇴각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김삿갓은 그 옛날, 이같은 한음의 훌륭한 시 한 편이 임진왜란으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벽제관으로 와서 어느 주막에 잠자리를 정했다.
만포선 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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