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김삿갓(1807~1863년)은 조선 후기 풍자, 방랑시인이다.
본명은 金炳淵,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한자 이름으로는 金笠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 부사로 있다가 항복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 장원 급제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을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방 : 방랑자의 유랑길에 지팡이가 유일한벗
랑 : 낭패로다 양반가문 하루아침 몰락폐족
시 : 시와술로 해학풍자 세상인심 희롱하네
인 : 인정머리 야박하다 곳곳마다 문전박대
김 : 김을메는 아낙네야 멀건죽도 과분하니
삿 : 삿갓벗고 걸터앉아 한끼요기 청할적에
갓 : 갓끈조차 풀기전에 부지깽이 날아오네
"自知는 晩知"
(자지는 만지고)
"스스로 알려면 늦어지고"
"補知는 早知라"
(보지는 조지라)
"도와주면 알 수 있다"
"김삿갓 서당 욕설 시"
김삿갓(본명 김병연)이 시골 서당에 찾아가
하루밤 재워 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개 취급을 하여 내쫓는다.
화가 난 김삿갓이 더러운 욕설 시를 한수 써 붙힌 시(詩)
"서당 내조지(書堂 乃早知)"
(서당은 내 조지요)
"글방을 알고보니 좌중이 모두 거만 하구나"
"생도 제미십(生徒 諸未十)"
(생도는 제미 십이고)
"학생은 모두 열명도 안 되는데"
"선생 내불알(先生 來不謁)"
(선생은 내 불알이라)
"선생은 찾아와 보지도 않네."
1807년 개화기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좋아하여
열 살 전후에 사서삼경 독파 이십세 전에 장원급제 했네
안동 김씨에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어머니를 모시고 아들 둘에 처 하나
백일장 과거에서 조상을 욕한 죄로
하늘이 부끄러워 삿갓 쓰고
이름도 버려 가정도 버려 욕심도 버려
양반 또한 버렸다
그 후로 한평생 삿갓 쓰고
삼천리 방방 곳곳 떠돌아 다니니
사람들은 그를 보고 김삿갓이라 하네
삿갓 쓰고 죽장 짚어
바람이 부는 대로 구름처럼 떠돌며
착한 서민의 친구가 되어
못된 양반 혼내준 의리의 사나이
도인에는 도
시에는 시로 맞서
시짓기 내기에서 져본 일이 없어
산첩첩 수중중 구경하고
동가식 서가숙 방랑하네
외롭고 고독한 방랑의 생활
술은 삿갓의 유일한 친구
한잔하면 시상이 떠올라
두잔하면 세상이 내것이라
한잔술에 시한수 또 한잔술에 시한수
신선의 목소리 무아의 경지로다
천재로다 천재로다
그의 이름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김삿갓이 일생을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세상을 유람하다가 단천(端川) 고을에서 결혼을 한 일이 있었다.
젊은 청춘 남녀의 신혼 밤은 시간 시간마다 천금이 아닐 수 없지 않는가?
불이 꺼지고 천재 시인과 미인이 함께 어울어졌으니
어찌 즐거움이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뜨거운 시간에 취해 있었던 김삿갓이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사람처럼
부리나케 일어나서 불을 켜더니 실망의 표정을 지으면서
벼루에 먹을 갈고 그 좋은 명필로 일필휘지하니
"모심내활(毛深內闊)"
"필과타인(必過他人)"
"털이 깊고 안이 넓어 허전하니"
필시 타인이 지나간 자취로다.
김삿갓은 이렇게 써놓고 여전히 입맛만 다시면서 한숨을 내쉬고 앉아 있었다
김삿갓의 그러한 행동에 신부가 의아해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원앙금침에 홀로 남아 부끄러움에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고
김삿갓이 써놓은 화선지를 살펴보곤 고운 이마를 살짝 찌뿌리듯 하더니
이불에 감싼 몸을 그대로 일으켜 세워
백옥같은 팔을 뻗어 붓을 잡더니 그대로 내려쓰기 시작했다.
"후원황률불봉탁(後園黃栗不蜂坼)"
"계변양유불우장(溪邊楊柳不雨長)"
"뒷동산의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벌어지고"
"시냇가의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니라."
글을 마친 신부는 방긋 웃더니 제자리로 돌아가 눈을 사르르 감고 누었다.
자기의 처녀성을 의심하는 글월도 글월이거니와
이에 응답하는 글 역시 문학적으로 표현해 놓았으니
유머도 이쯤 되면 단순히 음담패설이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로다.
알려고 하기 보다 즐기기 위해 살아가는 한 남자!
바로 그가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아니더냐!!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시시비비비시시 시비비시비비시)"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시비비시시비비 시시비비시시비)"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이 꼭 옳진 않고"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난고 김삿갓은 안동김씨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태사의 후예, 휴암공파계 제24대 손입니다.
1807년(순조7년) 3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진사 부 김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납니다.
본명은 병연(炳淵), 자는 성심(成深), 호는 난고,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5세 때 선친 부사인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 난 때 반란군에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고, 할머니 전주이씨는 광주의 관비로 축출되며, 부친은 남해로 귀향을 가게 됩니다. 김삿갓은 형 병하와 함께 노복 김성수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으로, 모친은 애기 병호를 데리고 여주 이천으로 피신합니다.
후일에 조부의 죄가 멸족(滅族ㆍ한 가문이나 종족을 망하게 하여 없앰)에서 폐족(廢族ㆍ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서 자손이 벼슬할 수 없는 족속)으로 감형돼 형제는 모친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나 부친이 홧병으로 죽고 세인의 괄시와 천대가 심하자 모친은 가족을 이끌고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합니다.
김삿갓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모른채 자랐으며 20세때 한살 연상인 장수 황씨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해 영월 동헌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시제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ㆍ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음을 탄한다)에 대해, 가산군수 정씨를 예찬하고 선천 부사이자 방어사이던 조부 김익순을 호되게 비판하는 글로 장원급제합니다.
그러나 후일 모친으로부터 집안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자책감 때문에 강원도 산골짜기 (하동면 와석리 어둔)로 옮겨 은둔생활을 하다 방랑길에 오릅니다.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삿갓에 죽장을 짚고 다녀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 불렸습니다.
김삿갓은 전국을 떠돌다 화순의 빼어난 산수와 동복면에 있는 적벽(赤壁)의 경관에 매혹돼 세번이나 찾습니다. 적벽은 1519년 기묘사화 후 이곳에 유배온 신재 최산두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중국 양자강 상류의 적벽과 그 형태가 비슷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는 1863년 3월29일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창원(昌原) 정치업(丁致嶪)선생의 증손 정시룡(丁詩龍)댁에서 57세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3년 뒤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돌던 아들 익균이 그의 유골을 수습, 이장합니다.
김삿갓 묘(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 선생의 노력으로 발견됩니다. 와석리 노루목 묘역 근처에 문학공원도 함께 조성돼 있습니다. 그가 방랑하기 전까지 살았던 주거 유적지엔 200년된 고염나무와 돌배나무, 250년된 밤나무가 있습니다.
문학관이 들어선 곳은 본래 하동면이었으나 김삿갓 묘가 발견되고 그의 문학적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김삿갓면으로 바뀌었습니다. 2003년에 문을 연 문학관에는 김삿갓의 친필과 작품, 연구사료가 전시돼 그의 문학세계와 생애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매년 10월 초순경 이곳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삿갓 문화제가 열립니다.
방랑시인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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