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트레킹)/걷기 정보

지리산둘레길 하동호~양이터재 구간 원점회귀 11.2km

박연서원 2018. 9. 28. 10:42

[트레킹|‘아름다운 숲길 원정대’와 국가대표 숲길 걷기 5회차]

순례자의 마음으로 걷는 ‘어머니의 길’

입력 : 2018.09.18 09:55

[587호] 2018.09


지리산둘레길 하동호~양이터재 구간 원점회귀 11.2km


지리산이 ‘어머니의 산’으로 불리듯, 지리산둘레길은 둘레길계의 대모다.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둘레길이기 때문이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난 2008년, 남원 산내에서 함양 휴천까지 시범구간이 개통된 이후, 2010년 하동구간(25.9km)과 구례구간(51.3km)이 조성됐으며, 2014년에 이르러 순환로를 포함한 총 285km 22구간이 운영 중에 있다.

지리산둘레길의 성공은 전국 지자체와 공원 등에 둘레길 조성 붐을 몰고 왔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명소가 생겼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육체적으로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걷기 문화가 확산됐으며, 정신적으로는 한국 고유의 결과주의, 1등 지향 문화에 뿌리를 둔 정상 지향 등산 문화를 일부 해체했다는 의의를 가진다. 자연적으로 산의 피로도를 둘레길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가 주관하는 ‘아름다운 숲길원정대’의 다섯 번째 원정지가 지리산둘레길의 위태~하동호 구간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 원정은 청암체육공원(네이버 지도 상 청암축구장)에서 출발해 하동호와 나본마을을 지나 양이터재에 오른 뒤, 우회로를 통해 청암체육공원으로 돌아오는 11.2km 원점회귀코스로 진행됐다.

이 코스는 나본마을과 양이터재를 잇는 수려한 계곡길을 지나며, 하동호를 따라 조성된 데크길을 걸을 수 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또한 빽빽한 대나무 숲과 신갈나무, 굴참나무 군락이 수시로 그늘을 드리우며, 우회로를 따라 내려오는 길은 능선 위의 소나무, 편백나무와 함께 하동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 등 풍부한 식생과 경관을 자랑한다.


“아아~ 그대 이름 지리산”


8월 11일 청암체육공원에 모인 원정대는 원정 출발 전, 박문옥 작사·작곡, 정용주 노래의 ‘지리산’에 맞춰 준비 운동을 했다. 딱딱한 국민체조가 아니라 춤에 가까운 쉬운 동작들이라 처음 접하는 대원들도 재밌게 따라할 수 있었다. 또한, 대원들을 3개조로 나누어 거리를 두고 한 조씩 출발시켜 숲길을 혼잡하게 걷지 않도록 했다. 지리산둘레길을 오랫동안 관리해 온 사단법인 ‘숲길’의 노하우가 엿보이는 조치였다.


이국적인 경관을 선사해주는 대나무 숲.

이국적인 경관을 선사해주는 대나무 숲.


고요한 하동호 따라 걷다


원정대는 경기도 의정부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대원들로 구성됐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팔도 사투리의 향연이 펼쳐졌다. 지리산둘레길에 대한 첫 제안이 좌·우를 초월한 생명평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잉태된 것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지리산둘레길에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공원을 나서면 임도를 따라 평촌교를 지나 즉각 하동호 제방으로 오른다. 농어촌공사 하동호관리소를 지나면 취수탑 너머로 골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하동호가 눈앞에 펼쳐진다. 하동호는 하동군과 사천시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84년 착공돼 1993년 준공된 저수지다. 지금은 아름답고 맑은 산중호수로 각광을 받고 있으나 수몰민에게는 짙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공식적으로 수몰된 마을은 9개 마을, 194세대, 1,036명이지만 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야 했어요. 사람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도 떠나고, 옆 동네 마을이 사라지니깐 마음이 헛헛해져 떠나고. 이렇게 떠나간 사람들이 거의 2,000명은 될 겁니다.”

사단법인 ‘숲길’의 한 진행요원은 “지리산 자락 120여 개 마을이 전부 쇠락해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리산 골짜기마다 귀농·귀촌 인구로 가득하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는 것과는 달리 정작 원주민들은 이를 마을의 활력으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례없는 폭염과 가뭄으로 수위가 한껏 내려간 하동호의 고요함이 숙연하게 느껴진다. 길 주변에는 대나무와 편백나무가 군데군데 무리지어 들어 서 있다.

데크를 따라 길을 잇다 보면 큰 쉼터가 나온다. 나본마을 쉼터다. 나본螺本이라는 이름은 본래 고둥이 많이 나는 고장이라 해 붙었다고 한다. 여기서 팔뚝만 한 오이를 보급 받고 약사기도도량 고래사 비석을 따라 마을길을 오른다. 민가 몇 채를 지나치면 왼편에서 계곡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10분쯤 오르면 우천 시 우회길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양이터재에서 나본마을까지 2.6km는 깊은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라 비가 오면 임도인 우회로를 이용해야 한다.


양이터재 주변에는 도법 스님이나 박남준 시인 등 지리산둘레길 조성에 기여한 다양한 사람들의 글귀가 적힌 돌들이 놓여 있다.

양이터재 주변에는 도법 스님이나 박남준 시인 등 지리산둘레길 조성에 기여한 다양한 사람들의 글귀가 적힌 돌들이 놓여 있다.

노래 ‘지리산’에 맞춰 준비운동을 하는 대원들.

노래 ‘지리산’에 맞춰 준비운동을 하는 대원들.


계곡 길 초입에서는 차분히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계곡 길 초입에서는 차분히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잠깐 언덕 하나를 넘자 빽빽한 대나무 군락 앞에 작은 공터가 나온다. 잠시 자리에 앉아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으세요. 의도적으로 숨을 쉬려 하지 않고 몸이 숨을 들이 마실 때 길을 열어주고, 다시 내쉴 때 닫는다는 느낌으로요. 자기 몸 하나 하나마다 가볍게 마음만 두어볼게요. 허리, 어깨, 발. 이젠 가볍게 스트레칭 할게요. 몸을 억지로 잡아당기지 말고 그저 몸이 편안하게 흘러가게 두세요.”

하동호를 보며 느낀 상념을 명상으로 털어내고 본격적으로 숲길로 들어선다. 계곡을 건널 때마다 숲의 광경이 제각각으로 변한다. 마치 중국 무림 속 한 장면 같은 대나무 숲도 나오고, 신갈나무와 졸참나무가 시원한 계곡 옆에 파라솔처럼 서있기도 하다. 계곡물은 맑고 시원한데다 바위마다 이끼가 두껍게 깔려 있어 천연의 계곡을 따라 오르는 느낌을 준다.

제법 고도를 빠듯하게 높이고 나면 하동군 옥종면과 청암면을 잇는 양이터재에 닿는다. 양이터재는 임진왜란 때 양씨梁氏와 이씨李氏가 이곳으로 피란할 때 넘은 고개로, 양씨가 먼저 들어와 양이 앞에 붙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해 김해 분성산까지 이어지는 낙남정맥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궁항마을 부녀회에서 제공해 준 비빔밥으로 식사를 한 후에는 숲 속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아름다운 숲길 원정대는 재방문율이 높다. 1회차부터 5회차까지 전부 개근한 한 참가자.

아름다운 숲길 원정대는 재방문율이 높다. 1회차부터 5회차까지 전부 개근한 한 참가자.


숲 속 작은 음악회도 열려


먼저 논산에서 온 홍미경씨가 박남준 시인의 시 ‘지리산 둘레길’을 낭송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몸 안에 한 그루 푸른 나무를 쉼 쉬게 하는 일/때로 그대 안으로 들어가며/…(중략)…/그리하여 둘레길을 걷는다는 건/그대 안에 지리산을 모신다는 일이네.”

인사할 때만 해도 수줍은 듯 속삭이던 홍씨의 목소리는 시를 낭송하자 천둥처럼 우렁차고 준엄하게 변해 순식간에 청중을 휘어잡았다. 앵콜 요청이 쏟아지자 홍씨는 더운 날씨를 달래자며 송이눈 사락사락 쌓이는 겨울을 배경으로 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까지 이어 낭송했다.

다음 순서는 전주에서 온 이동구 씨와 함께 가객 정용주의 노래 ‘지리산’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출발 전 체조 음악으로 이미 한 번 귀에 익었기 때문인지 대원 모두 곧잘 따라 불렀다. “아무 말이 없구나. 스치는 바람 소리뿐’으로 시작하는 가사는 애절했지만, 경쾌한 기타 반주에 맞춰 모두들 한껏 흥이 나 따라 불렀다.


하동호 둑을 따라 걷는 원정대.

하동호 둑을 따라 걷는 원정대.


대나무 숲이 우거진 나본 마을의 임도길.

대나무 숲이 우거진 나본 마을의 임도길.


청암체육공원에서 하동호 둑으로 올라가는 가로수길.

청암체육공원에서 하동호 둑으로 올라가는 가로수길.


다시 청암체육공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임도길이다. 더위를 씻어내는 보슬비를 맞으며 하동호를 향해 성큼성큼 내려선다. 능선 위의 적송과 편백나무와 길 바로 옆 대나무 군락이 장쾌하게 늘어서 있다. 능선과 나무에 막혀 하동호의 조망은 가끔 설핏 터질 뿐이다. 그래도 시원한 칠성봉을 위시한 삼신지맥을 배경으로 가로로 꽉 차게 들어선 하동호의 진면목이 보이는 길이다. 다시금 하동호 제방을 따라 원점회귀하면서 트레킹을 마무리했다. 거리 11.2km, 소요시간 5시간.

지리산둘레길은 여느 둘레길과는 다르게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지지 않는다. 사단법인 ‘숲길’ 이사이자 지리산시민활동가인 이상윤씨는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을 유람하며 나라, 사람, 삶 등을 고민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자취가 남은 길”이라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걷는 이에게 위로와 선물이 될 수 있도록 숨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했다.

지리산둘레길이 ‘순례자들의 길’이라고 심심찮게 불리는 것은 이처럼 길 위에선 보이지 않는 애환과 고민이 길 속에 서려 있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