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ㅣ ‘아름다운 숲길 원정대’와 국가대표 숲길 걷기 4회차]
섬 안의 숲, 숲 안의 나
입력 : 2018.09.17 09:51
[587호] 2018.09
한라산둘레길 천아숲길 18.5km… 올레길처럼 지겹거나 등정처럼 부담스럽지 않아
한라산둘레길은 한라산 해발 600~800m의 국유림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병참로(일명, 하치마키 도로)와 임도, 표고버섯 재배지 운송로 등을 활용해 조성된 환상環狀숲길이다. 지난 2010년부터 조성에 들어가 현재는 북제주 방면 15km 구간을 제외한 55km 구간이 운용되고 있으며, 올해 안에 사려니숲길 입구에 한라산둘레길 안내센터가 건립되고, 내년 하반기에 전 구간 80km가 완공될 예정이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 등정 코스인 성판악탐방로나 관음사탐방로, 제주도 해변을 한 바퀴 도는 올레길에 비하면 한라산둘레길의 유명세는 떨어지는 편이다. 아직 전 구간이 완공되지 않은데다가 신중을 기하기 위해 2014년 완공예정을 2019년으로 연기하며 보완작업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트레커들의 만족도는 더 높다. 고즈넉한 숲길을 오롯이 자신만의 것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17년 제주도 산림휴양과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무려 94.4%가 재방문의사를 밝혔을 정도다. 한라산 정상 등산은 부담스럽고, 올레길은 다소 지루한 사람들에게 이 둘의 장점을 융합한 한라산둘레길이 가장 적격이다.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가 주관하는 ‘아름다운 숲길 원정대’의 네 번째 원정지는 한라산둘레길의 천아숲길 구간이었다. 천아수원지입구에서 출발해 상천리훈련장입구까지 총 18.5km. 천아숲길은 천아수원지부터 돌오름까지 10.9km 구간이지만 숲길로 접근하고 나오는 길이 가산됐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사려니숲길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구간이다.
천아숲길은 인근에 돌오름, 한대오름, 노로오름, 천아오름의 사이를 지나는 숲길이다. 노로오름 인근 한라산중턱 해발 1000고지 일대에는 검뱅듸, 오작지왓이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습지인 ‘숨은물 뱅듸’가 있고, 무수천계곡으로 흘러가는 수자원의 보고인 광령천이 흘러내려와 천아수원지를 이룬다. 무릎을 부드럽게 스치는 조릿대 군락과 울창한 삼나무·편백나무 숲 속을 거닐 수 있는 태고의 숲길이다.
광령천을 건너면 천아숲길이 시작된다.
된비알 오르면 천혜의 숲길 펼쳐져
“반갑수다.”
7월 28일 제주종합경기장에서 한국등산트레킹센터 제주지부 한라산둘레길 안내센터의 김서영 팀장이 제주도 사투리로 원정대에 인사를 건네며 원정 시작을 알렸다. 이번 원정은 육지에서 온 대원과 제주도민을 합쳐 12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석해 최대 규모로 이뤄졌다.
대절한 버스에 탑승해 30분 정도 달려 들머리인 천아수원지 입구에 도착했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검색되지 않으며, 어승생삼거리에서 1100로를 따라 남쪽 700m 지점에 위치한 삼거리 분기점이 해당 위치다. 여기서부터 천아숲길로 진입하는 2.2km의 임도가 펼쳐진다. 소나무가 양옆으로 끝없이 이어진 가로수길이다.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오른쪽 초원에서는 제주도 특산 흑우들이 풀을 뜯고 있고, 그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사유지 오른편 내리막을 따라 천아숲길로 진입한다. 머리 위를 단풍나무가 덮어준다. 오른편에 마른 계곡이 광령천이다.
“이곳에서 무수천과 광령천이 합류합니다. 골짜기가 깊은 만큼 경관이 매우 빼어나죠. 특히,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지금은 말라 있지만 한 번 비가 와서 흐르기 시작하면 유속과 유량이 무시무시해요. 그래서 한라산둘레길은 우천 시 2일간 출입을 통제합니다.”
2일이나 통제하는 건 너무 과민 반응이 아닌가 싶을 때 계곡 하류 방향에 콘크리트와 철근 잔해가 보인다. 안내센터의 송순익씨가 뒤에서 다가와 “비가 오면 수m 이상 물이 불어 시멘트 다리도 박살이 난다”고 귀띔한다.
1100도로에서 숲길 입구로 가는 2.2km 구간의 도로는 경치가 탁 트인 가로수길이다.
위험을 방증하듯 흉물스럽게 뒤틀려 꺾여 있는 철근을 뒤로한 채 계곡을 건너면 가파른 된비알이 시작된다. 15분쯤 땀을 쏟으면서 오르고 나면 무릎 밑에 넘실거리는 조릿대 바다와 서어나무 군락지 사이에 파묻힌다. 신체와 정신에 묻어 있던 문명을 털어내고 오롯이 자연만이 남는다.
제법 고도를 높인 것 같은데 조망은 없다. 김 팀장은 “이 구간의 단점이 오름들 사이로 난 길인데다 숲도 울창해 조망이 없다는 것”이라며 “하지만 온통 숲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장점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솔잎이 짙게 깔린 길을 따라 차분히 굽이치며 조금씩 고도를 높여도, 온 사방이 숲으로 에워싸여 있어 위치를 짐작하기 어렵다. 바다에 갇힌 섬 안의 숲 속에 갇힌 꼴이다. 나뭇가지 위에서 청아하게 울리는 휘파람새 소리만이 정적을 가볍게 흔들어 놓고 퍼져갈 따름이었다. 짙은 녹색의 바다 사이에 으름난초가 간혹 고고히 피어 있었다.
삼나무 군락지를 지나는 원정대.
제주이야기가 있는 숲길걷기
육지는 40℃를 넘나드는 폭염이 이어졌지만 해발고도가 높고 제주도 자체의 기온도 높지 않은 탓인지 더위를 느끼기 어려웠다. 서어나무와 조릿대군락과 삼나무군락이 고도에 따라 번갈아가며 그늘을 씌워 준다. 당당하게 솟아 있는 삼나무군락은 이국적인 숲길의 풍광을 선사해 준다.
광령천에서 임도삼거리를 지나 노로오름삼거리까지 5.2km를 진행한 후 식사를 겸한 휴식을 가졌다. 삼삼오오 그루터기나 나뭇등걸에 앉아 한껏 자연을 호흡하고 있자 권오택 해설사가 아득한 옛날의 제주 민담을 풀어놓는다. 이른바 <삼공본풀이>다.
“옛날 옛적 제주 윗마을에는 남자 거지 강이영성이 살고 아랫마을에는 홍문소천이 살았습니다. 둘이 결혼해서 딸 셋을 낳았는데 각각 이름이 동네사람들이 밥을 준 그릇의 이름을 따 은장아기, 놋장아기, 감은장(나무바가지)아기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딸들에게 누구 덕에 잘사는가를 묻자 감은장이 ‘배또롱(배꼽) 아래 선그뭇(배꼽부터 음부 쪽으로 내려 그어진 선) 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진 위)녹색의 바다로 넘실거리는 서어나무와 조릿대 군락지.
(사진 아래)제주민담 <삼공본풀이>를 들려주는 권오택 해설사.
화가 난 부모는 감은장을 쫓아냈는데, 그후 바로 패가망신하고 장님이 돼버렸죠. 쫓겨난 감은장은 돌아다니다 마를 삶아 먹던 마퉁이네 가족 셋째와 결혼해 부자가 됐답니다. 부모가 거지가 된 걸 알게 된 감은장은 거지 잔치를 열어 부모를 찾고, 감은장이 자신이 딸인 걸 밝히자 이에 부모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권 해설사는 익살스런 몸짓과 말투로 긴 이야기를 갈무리하며 “부부가 서로를 잘 대하고, 부모를 공경하면서 정착생활을 하는 사람을 높게 본 것을 알 수 있다”며 “예로부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일궈 나간 강인한 제주 여성의 단면을 볼 수 있다”고 함의를 설명했다.
(사진 위)광령천을 건너면 바로 가파른 오르막이다.
(사진 아래)삼나무 군락지를 지나는 원정대.
한라산둘레길의 역사도 곁들여
삼엄한 소나무 숲과 조릿대군락을 연이어 지나면 표고버섯 임도가 나오는 보림농장사거리다. 구간 곳곳에는 자생하는 소나무 군락을 이용한 표고버섯 재배지가 산재해 있다. 여기서부터 한껏 높인 고도를 조금씩 떨어뜨리게 된다.
돌오름길종점까지 나아가면 분기점이다. 여기서 상천리훈련장으로 빠져 나간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한라일보 이윤형 기자는 “한라산둘레길의 기초가 된 하치마키鉢卷(머리띠, 한라산 중허리를 한 바퀴 도는 데서 유래)도로는 1937년부터 삼림착취를 위해 만들었다”며 “이외에도 제주를 군사기지화하며 360여 개 오름 가운데 100여 개 오름 등지에 일본군 지하 갱도진지가 파헤쳐져 있다”며 제주의 아픈 역사를 들려줬다. 근현대사의 고난과 비극의 길이 현재는 좋은 숲길로 남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숲길은 아름드리 삼나무 사이를 호젓하게 지나간다.
하산길은 기나긴 내리막이다. 쉽게 부서지는 부드러운 빨간 송이길 양옆으로 빛 한 점 스며들지 못하도록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펼쳐진다. 나무 그늘 아래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하다. 내려서는 끝까지 완벽한 숲길이다.
다만, 임도이기 때문에 자동차 등 탈 것을 타고 지나는 사람이 많은 점이 아쉽다. 오승목씨는 “계도 이외의 법령에 근거한 단속이나 진입 저지를 할 수 없어 탐방객들이 스스로 사고에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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