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트레킹)/걷기 정보

인제 백두대간트레일 싸리재 정상~간촌교 15km 걸어

박연서원 2018. 9. 20. 09:18

[화제 | ‘아름다운 숲길 원정대’와 국가대표 숲길 걷기 1회차]

오지 아침가리의 절경 기대했지만…

입력 : 2018.06.26 11:19

[584호] 2018.06


폭우로 다리 끊어져 코스 변경 단축…

인제 백두대간트레일 싸리재 정상~간촌교 15km 걸어


아침가리는 ‘삼둔 사가리’ 중 하나다. 삼둔 사가리란 강원도 홍천과 인제에 걸쳐 있는 오지마을들을 일컫는 말로 <정감록>이 소개하는 ‘난리를 피해 숨을 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삼둔은 홍천의 살둔·월둔·달둔, 사가리는 인제의 아침가리·적가리·연가리·명지가리를 일컬으며 삼둔에 달둔 대신 인제의 귀둔이 들어간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정감록>에 삼둔 사가리란 언급이 아예 없다는 주장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 지역이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천혜의 오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아침가리는 삼둔 사가리의 제왕이다. 아침가리는 아침에 잠시 밭을 갈 정도의 해만 비치고 금세 져버릴 만큼 첩첩산중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현재도 조금만 산 속으로 걸음을 옮기면 휴대폰 통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궁벽지다. 숨겨진 깊이만큼 여전히 태고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어 야생화와 옥빛 계류를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는다.

천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해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는 아침가리계곡을 탐방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다. 하루 최대 100명까지만 출입할 수 있고,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하며 휴장일 때가 많아 때를 잡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진행하는 ‘아름다운 숲길 원정대’의 1회 원정지가 바로  아침가리계곡이었다. 이 행사는 매회 100명 내외의 참가자를 모집해 우리나라의 대표 숲길을 걷는 프로그램으로 재참여율이 20~30%대일 만큼 만족도가 높다.

아침가리계곡에서 자연에 파묻혀 걸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갖고 5월 19일 오전 9시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생활체육공원에 모였다. 하지만 17~18일 인제 지역에 100mm 넘는 폭우가 내려 계곡물에 의해 다리가 파괴됐다. 안전을 위해 코스를 귀둔농협에서 방동약수로 이어지는 백두대간트레일 5구간으로 변경했다. 5구간은 총 25.5km지만 중간의 하이라이트 15km만 걷기로 했다. 아쉽지만 이 구간도 삼둔 사가리의 영역이라 하니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박용희 숲길이용국 국장은 “인제 지역은 영동과 영서 지방의 영향을 동시에 받아 날씨를 종잡을 수 없다”며 “인원이 많아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기린면 생활체육공원에 모인 원정대는 국민체조로 준비운동을 마쳤다.

기린면 생활체육공원에 모인 원정대는 국민체조로 준비운동을 마쳤다.


백두대간 트레일은 기점마다 이정표가 설치돼 있다.

백두대간 트레일은 기점마다 이정표가 설치돼 있다.


아름다운 숲길 원정대가 소나무와 참나무로 뒤덮인 숲길을 걷고 있다.

아름다운 숲길 원정대가 소나무와 참나무로 뒤덮인 숲길을 걷고 있다.


백두대간 바라보며 숲길을 걷다


집결지인 생활체육공원에서 20분가량 버스를 타고 산행 들머리인 싸리재 정상으로 향했다. 일부 지도에서는 쓰리재라고 명명돼 있으며, 실제로 현지 주민들 대부분 쓰리재라고 부른다. 하지만 싸리재라는 명칭은 고개에 싸리나무가 많아 붙여진 것이기에 싸리재로 부르는 게 맞다고도 한다. 싸리재 정상(해발고도 760m)부터 산허리에 난 임도를 따라 해발고도 200m대의 간촌교까지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15km를 걷는 게 오늘의 코스다. 

싸리재에서 설악부터 점봉산, 가칠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을 잠시 바라보다 숲길로 뛰어든다. 들머리에는 백두대간트레일 이정표가 서 있다. 이 코스는 임도기 때문에 경사가 완만하고 널찍하며 샛길이 없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길 주변으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뒤섞여 자라고 있다.

안내를 맡은 사단법인 내린천약수길의 이재철 사무국장은 “원래 기린면은 참나무림이 우세한데 이 구간만은 소나무림이 특별히 발달돼 있다”며 “가을의 송이버섯 철이 되면 이 주변이 전부 송이버섯 밭이 된다”고 설명했다. 가을이 되면 인근 마을주민들이 산림청에 채취권한을 획득해 송이버섯 작목반을 운영한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과 떨어질 수 없는 나무예요. 우리 민족은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에 소나무 가지를 걸어 잡귀와 부정을 막으려 했고,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살다가 죽을 때는 소나무 관에 묻혔습니다. 그런 소나무가 소나무재선충병으로 고사되고 심지어 한반도 온난화로 2090년에는 멸종될 것이라고 하니 더욱 아껴 주세요.”

코스 초입에는 소나무가 우세하다. 소나무 햇가지 끝에는 지름 6mm 정도의 자주색 암꽃이 자라 있다. 목소리가 걸걸한 한 대원이 장난스럽게 “소나무 꽃은 100년에 한 번 핀다”는 낭설을 퍼뜨린다. 암꽃을 처음 본 대원들은 신기해 하지만 사실 매년 핀다.


고도가 높은 코스 초입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히 자라 있다.

고도가 높은 코스 초입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히 자라 있다.


백두대간 트레일 5구간은 부드럽게 산허리를 감싸 도는 코스다.

백두대간 트레일 5구간은 부드럽게 산허리를 감싸 도는 코스다.


싸리재 정상에서 바라본 점봉산 일원. 굽이쳐 흘러가는 백두대간이 보인다.

싸리재 정상에서 바라본 점봉산 일원. 굽이쳐 흘러가는 백두대간이 보인다.


평지와 다름없는 길을 걷다 보면 동쪽의 나무 틈새로 시원하게 뻗어 내린 백두대간 능선이 보인다. 고도가 높아 나무 사이로 조금씩 조망이 터지는데 고속도로와 국도가 시야에 걸려 삼둔 사가리답지 않다. 계곡도 없고 산의 중턱이라 울창하고 오밀조밀한 식생을 기대하긴 어려운 점이 아쉽다. 길 주변에는 수액이 빨간 피나물, 곰취 등 산나물과 늑장을 부린 민들레와 제비꽃이 간간이 피어 있다.

이 국장은 “자기가 걷고 싶은 대로 걸어도 된다”고 말했다. 길이 넓고 샛길이 없기 때문이다. 빨리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두로 치고 나가고 들풀과 나무를 들여다보며 천천히 걷는 이들은 후미에 남았다. 조용히 걷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혼자 걷고, 가족들은 왁자지껄 웃으며 걸었다. 단, 8km 지점에 있는 점심 식사 장소에 12시까지 모두 모이기로 했다.

산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임도는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하며 조금씩 고도가 낮아진다. 이 국장은 “오른쪽에 서 있는 산은 무명봉”이라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저 뒷동산과 진배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지도상에도 이름이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자 참가자 중 기린면에 사는 한 주민이 이 지역에서는 용각산龍角山으로 전승되고 있다며 유래를 전했다.

“산 정상에 돌출된 바위 부분을 보고 용의 뿔 같다 해서 지금은 용각산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름은 장군바위였어요. 옛날에는 장군이 태어나면 반란 위험이 있다 해서 죽였답니다. 그런데 한 아기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가마니를 들고 하니깐 관아에서 장군이라고 보고 아기 위에 쌀가마니를 10개 쌓아서 압사시켰어요. 그러자 장군과 함께 태어난 용마龍馬가 죽음을 알고 슬피 울다가 산 정상에 올라가 바위가 됐다고 해서 장군바위랍니다.”


보통의 존재를 위한 숲길


등산트레킹지원센터 박용희 사무국장.

등산트레킹지원센터 박용희 사무국장. 이날 행사를 총괄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점심은 임도 밑으로 펼쳐진 골짜기를 바라보며 노지에서 해결했다. 절골이다. 남쪽 나무 사이로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보이고 그 너머로 방태산 일원이 보인다. 참가자들이 모여 도시락을 먹고 가져온 음식을 나눴다. 일부 참가자들은 아직도 아침가리계곡에 대한 미련이 남았지만 쾌청한 날씨가 이들을 달랬다. 이 날은 중국 북동지방의 고기압 영향으로 전국이 맑은 날씨를 보였다. 대간능선이 또렷하게 보이고 숲길은 선명했다. 이파리 하나하나가 빛을 발해 감탄이 나온다.

식사 후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평탄했던 길이 조금씩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참나무가 조금씩 모습을 더 드러낸다. 도채골이다. 산은 전 날 내린 비를 잔뜩 머금고 있어 임도 곳곳에서 개울이 흐른다. 유독 바람에 잎을 떠는 나무들이 보인다. 사시나무다.

“이 나무가 사시나무예요. 일조량이 많으면서도 서늘한 곳에서 주로 자랍니다. 체온을 식히려고 빨아올린 수분을 잎을 통해 분출하는데 이 모습이 마치 부채질하듯 잎을 흔들기 때문에 사시나무 떨 듯 떤다는 표현이 생겼죠. 바람이 없는 날에도 미세하게 흔들립니다.”

찬란한 날씨에 고즈넉한 숲길이지만 다소 지루하다. 고도를 내릴수록 조망이 좁아진다. 길의 변화도 식생의 변화도 적은 그냥 보통 길이다. 하지만 박 국장은 이것이 바로 숲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로지 정상만 오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야기가 있고, 문화와 생태가 있는 길들로 걸음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숲길은 이제 단순히 울창한 숲에 난 길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보통 사람이 걸을 수 있는 보통의 길로 봐야 돼요. 이를 위해 백두대간 좌우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트레일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대개 등산할 때면 발 디딜 자리만 보고 걷지만 이제는 고개를 들고 주변의 자연을 바라보며 걷는 패러다임이라는 설명에 듣던 이들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쩌면 아침가리계곡에 대한 기대감으로 숲길에 대해 강박적인 환상을 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꼭 울창한 군락을 통과하거나 깊은 계곡을 지나는 숲길이 아니더라도 자연과 어우러져 편안히 걸을 수 있다면 좋은 숲길이다.

도채골을 뒤로하고 산허리를 돌자 가파른 내리막이 나타난다. 휘적휘적 내려오면 418번 지방도로에 닿는다. 산행 거리 15km. 소요 시간 5시간.


인제 백두대간트레일 5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