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화의 화식서식(話食書食)]
나주의 옛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나주 남파고택 박경중가옥>
호남의 중심지역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주에 가면 옛이야기 속에 ‘나주목’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목사’라는 관직은 고려 중엽 이후와 조선시대 관찰사 밑에서 목(牧)을 맡아 다스린 정3품 외직(外職) 문관을 말한다.
고려 성종(983년)은 지방제도를 정비하며 전국의 주요지역에 12목을 설치했는데 이때 호남에는 나주와 승주, 전수 3곳에 목이 설치되었다.
이후 현종(1018년)이 8목으로 조정할 때도 나주만이 유일하게 호남에서 목으로 남게 되었다.
983년부터 1895년까지 고려와 조선 천년에 걸쳐 운영된 목에 306명의 목사가 나주를 거쳐 갔다.
그래서 나주는 '천년고도(千年古都) 목사고을'이라 불리고 있다. 지금도 나주 금계동에는 목사의 살림집인 ‘목사내아’가 남아 있어 원하는 사람들에게 고택스테이를 할 수 있게 개방하고 있다.
나주는 예로부터 나주평야 일대의 곡류와 금성산 주변의 산채가 풍부하였고 영산포는 옛날 전남의 관문역할로 해산물이 모이는 장소이자 진상품의 호남 집산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최초로 오일장이 선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근래에 호남철도와 호남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배로 이동하며 활발했던 영산포의 기능은 퇴조했고 영산강 하구언의 건설로 뻘밭이 육지화되면서 근래 이전의 음식은 환경 변화와 더불어 점점 퇴조하게 되었다.
옛 음식의 흔적을 얘기할 때 나주 사람들은 나주의 생산물보다는 집산지로 모인 홍어 등 산해진미 등을 회상하며 이야기한다.
나주의 옛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궁금하던 차에 ‘남파고택(남파 박재규의 가옥. 남파는 현재 종손 박경중의 고조부)’을 찾게 되었다.
겨울 양식 김치로 밀양박씨 남파종가에는 ‘반동치미’가 있다.
해남에서 나주로 시집온 강정숙 종부는 반동치미를 결혼 후 처음 접했다고 한다.
예부터 어른들의 반상에서는 국물음식이 기본으로 올라갔다.
나 또한 대학시절 전라도 어느 시골집에 가서 밥을 먹게 되었을 때 '싱건지'라는 푸른빛 열무물김치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
이후 싱거지라는 사투리가 인상깊었는지 내내 잊어지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남도 쪽에서는 물김치를 통칭하는 단어로 싱건지가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반동치미 또한 싱건지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종부의 친정 해남 또한 타 지역과 다름없이 동치미에는 길쭉한 무를 이용해 담갔었는데, 나주의 반동치미는 중간 크기의 무를 이용하여 1.5cm간격으로 세로로 길쭉하게 칼집을 넣어 그 사이에 소를 넣는다.
이때 소는 미나리, 조기살, 밤채, 마늘채, 쪽파, 새우젓 등을 넣어 만든다. 절인 배추에도 같은 소를 넣는다. 세로로 칼집 낸 무 안에 소를 넣었기에 소가 나오지 않도록 실로 묶고 배추와 함께 항아리에 차곡차곡 쟁여놓는다.
그리고 새우젓을 넣은 물을 끓여 식혀 놓았다가 3일 후에 동치미와 배추 위에 부어준다.
보름 후면 반동치미의 맛을 볼 수 있게 된다. 반동치미는 일반 김장김치처럼 오래 먹는 김치가 아니다.
보통 설 전까지 먹고 설 지나고서는 일반적인 동치미를 꺼내서 먹게 된다.
동지에 팥죽을 끓여서 반동치미와 곁들이는 것이 환상의 조화라고 종부는 자랑한다.
겨울에 맛봤던 반동치미의 맛, 그 시원함이 추운 날 가끔 그리워진다.
그리고 종가의 김부각과 깨송이부각이 기억난다.
종가 부각의 묘미는 찹쌀풀 반죽에 있다. 찹쌀풀에 설탕, 참기름, 소금을 넣어 김이나 깨송이에 발라 볕에 말린 뒤 서늘한 곳에 보관한다.
이렇게 말린 부각을 옛날에 뒤주에 보관했는데 현대엔 냉동보관을 하고 있다.
그리고 먹기 직전에 기름에 튀겨낸다. 찹쌀풀이 살짝 부풀어지면서 고소한 김과 깨송이의 맛이 물씬 나게 된다.
흔히 부각은 가을에 만드는데 나주 종가의 김부각은 봄에 눅눅해진 김을 이용해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집의 부각은 찹쌀풀을 되게 쑤어 바르는 것이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때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기차에서 일본인이 한국여학생을 희롱한 것에 항의해서 한일 집단 싸움으로 번진 ‘나주역사건’이 있었다.
이후 사건은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고 전국항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때 중심인물이었던 박준채와 박기옥 사촌이 살았던 남파고택이기도 하다.
이 집안은 해방이후 고등공민학교를 세우 어려웠던 시절 교육실천을 했고 현재 나정숙종부도 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재임하다 박경중 종순을 만나 남파고택에 살며 교육활동과 집안의 내림음식을 전하고 있다.
주소 : 전남 나주시 금성길 13 (남내동 95-7)
전화 : 061-332-6100
나주의 모 역사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물관 내 초등생 체험 메뉴가 홍어회무침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른들도 호볼호가 강한 톡쏘는 홍어를 어린이들이 만들고 먹는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역시 남다른 나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도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오랫동안 지켜온 나주는 여전히 먹을 곳이 많다.
홍어거리, 장어거리 명물거리를 비롯해 금성관 인근 곰탕 거리에는 늘 사람들이 즐비하다
<하얀집>
나주지역에서 곰탕으로 제일 오래된 집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자리를 지키며 한결 같은 맛으로 사랑 받아왔다.
특히 1960년부터 이어받은 3대 길한수 명인은 곰탕 명인으로 지정되어 나주 곰탕의 산증인으로 인정받았으며, 현재는 4대째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번은 하얀집 뒷주방에 들어가 고기저온창고를 보게 되었다.
탕에 들어가는 고기라고 하는데, 금방 육회로 무쳐먹고 싶을 정도로 선도가 좋은 고기들이 걸려있었다. 역시 맑은 국물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국내 고기국물을 비유할 때 맑은 고깃국물의 대표주자 격이라 할 수 있는 나주 곰탕은 탁한 뽀얀 국물의 곰탕과는 달리 깔끔하면서도 시원한 국물 맛이 특징이다.
입구에서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가마솥에 곰탕이 팔팔 끓고 있는 오픈키친의 풍경은 장관이다.
두 번 끓여낸 맑은 국물에 정성껏 토렴해 내주는 곰탕은 함께 나오는 익은 김치와 깍두기가 잘 어우러져 맛을 더한다.
메뉴 : 곰탕 9,000원 / 수육 35,000원
주소 :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6-1(중앙동 48-17)
전화 : 061-333-4292
그 외 역사의 곰탕집이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여기저기 보인다.
모두 나름의 국물 내공이 대단하다.
<삼대나주곰탕원조집(노안집)>
메뉴 : 곰탕 9,000원 / 수육곰탕 12,000원
주소 :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1-3 (금계동 23-5)
전화 : 061-333-2053
<남평할매집>
메뉴 : 곰탕 9,000원 / 수육곰탕 12,000원
주소 :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1-1(금계동 19)
전화 : 061-334-4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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