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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어헌터'와 임종덕

박연서원 2016. 1. 20. 00:26

영화 '디어헌터 The Deer Hunter (1978)'

 

1968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전이 짙어가고 월남과 월맹의 전쟁이 미국과 월맹의 전쟁으로 변모해가자
미국 내에서는 이유없이 죽어가는 미국 젊은이들에대한 연민과 비판이 드세지고 있었다. 러시아계 주민들이 모여사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작은 마을은 아직 그런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지않고 있었다. 스티븐과 안젤라의 결혼식과 피로연을 겸해 베트남전에 입대하는 스티븐, 닉, 마이클의 송별회가 열린다. 이들과 액셀, 스텐을
포함한 다섯 명은 제철소에서 근무하며 휴일이면 사슴 사냥을 즐기는 젊은이들이었다.
송별회를 끝내고 스티븐을 제외한 4명은 사슴 사냥을 떠난다. 월남전으로 인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터. 이들은 위험한 정글에서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잔혹 행위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게 되고 지옥의 전장에서 폭격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스티븐과 닉은 우연히 마이클을 만나게 되고 곧 이 세 사람은 베트콩의 공격으로 포로가 된다. 그 곳에서 베트콩들이 벌이는 죽음의 게임 러시안 룰렛에 그들의 목숨을 거는 처지가 되어 무자비한 폭력과 신체적, 심리적인 고통을 겪게 된다. 마이클의 과감한 판단으로 이 상황을 빠져나와 극적인 탈출을 감행하는데 탈출 과정에서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면서 탁류에 휩쓸린 닉은 구출되어 사이공 육군병원을 거쳐 퇴원하지만 마이클과 스티븐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혼자만 구출된 닉은 러시안 룰렛으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분열을 일으켜 이 게임을 상습적으로 벌이는 도박판의 세계로 빠져든다.

 

한편 유일한 생존자로 베트남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마이클. 전쟁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전쟁 이전으로 자신을 되돌려 보려고 친구들과 다시 사슴 사냥도 떠나고 해보지만 예전 같지가 않다.
스티븐과 닉을 베트남에 남겨두고 혼자 온 죄책감도 마이클을 괴롭힌다. 그런 와중에 마이클은 닉을 그리워하는 닉의 애인 린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마이클은 친구들을 통해 스티븐이 베트남에서 돌아온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안젤라를 통해 스티븐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가정에 돌아오지 못하고 재향 군인병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베트남에서 스티븐에게로 송금되는 돈을 보고 닉이 아직 베트남에 있다고 확신한 마이클은 닉을 찾으러 곧바로 베트남으로 향한다. 마이클은 러시안 룰렛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닉을 발견한다. 마이클은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닉을 되찾아 보려고 하지만 마이클이 보는 앞에서 러시안 룰렛의 총을 맞고 죽어간다.

 

닉의 장례식을 마친 마이클과 그의 친구들이 바에 모여 어색한 분위기에서 God Bless America를 부르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역설적인 장면이다. 미국이 패한 전쟁인 베트남전으로부터 상처받은 미국을 달래주기 위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미국의 축복을 바라는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표정에서 희망보다는 좌절과 상실감만 느껴질 뿐이다. Deer Hunter는 미국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패한 전쟁인 베트남전을 부정적으로 다룬 첫영화인데 이 장면을 통해 미국의 젊은이들을 헛되이 죽음과 비극으로 몰고 간 미국의 자성을 바라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전쟁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 뿐만아니라  전쟁과는 멀어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까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남긴다. 그리고 전쟁이 가져다준 비극을 전쟁을 통해서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바뀐 삶을 통해 보여줌으로서 오히려 훨씬 더 아프게 다가오고 있다.

 

감독 Michael Cimino는 이 한편의 전쟁 영화를 통하여 반전, 친전을 떠나 전쟁이 사람들을 어떻게 망쳐놓는가를 새삼 깨우치도록 역설한다. 이 영화 The Deer Hunter는 미국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리얼하게 영상화하는데 성공한 작품으로 1979년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Christopher Walken), 편집상, 음향상, 등 5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또한 Michael Cimino가 각본, 감독, 제작을 담당한 The Deer Hunter는 전쟁으로 인해 전쟁을 직접 경험한 젊은이들과 그들로 인해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들을 The Deer Hunter의 음악을 담당한 Stanley Myers(스탠리 마이어스)의 Cavatina의 기타 선율과 함께 가슴시리도록 잔잔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감독 마이클 치미노 (Michael Cimino)

주연 로버트 드 니로 (Robert De Niro) 마이클 역 

출연 존 카잘 (John Cazale) 스탠 역, 존 사베지 (John Savage) 스티븐 역,

        크리스토퍼 월켄 (Christopher Walken) 닉 역, 메릴 스트립 (Meryl Streep) 린다 역,

        조지 준쥬 (George Dzundza) 존 역, 척 애스퍼그렌 (Chuck Aspegren) 액셀 역, 

        셜리 스톨러 (Shirley Stoler) 스티븐 엄마 역, 루타냐 알다 (Rutanya Alda) 안젤라 역, 

        메이디 캐플란 (Mady Kaplan) 액셀의 소녀 역, 에이미 라이트 (Amy Wright) 신부들러리 역, 

        리차드 커스 (Richard Kuss) 린다 아빠 역, 조 그리파시 (Joe Grifasi) 밴드 리더 역, 

        빅토리아 카너펠 (Victoria Karnafel) 슬퍼보이는 소녀 역, 커트우드 스미스 (Kurtwood Smith) POW 역,

음악 스탠리 마이어스 (Stanley Myers)

 

 

He Was Beautiful

Cleo Laine

 

Cavatina (Theme Music from 'The Deer Hunter')

 

 

 

 

John Williams, guitar

 

CARisMA Guitar Duo

Malaysian Philharmonic Orchestra

 

Susan Wong

 

피아노 연주

 

영화 '디어 헌터'

 

철광마을의 제련소에서 일하는 마이클, 닉, 스티븐은 틈만나면 사슴사냥을 즐긴다.
베트남전에 함께 참전하게된  이들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날 다른 친구들과 사슴사냥을 한다. 산에 도착한 이들 앞에 장엄한 대자연의 경치가 펼쳐지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합창곡이 흐르고, 사냥을 끝내고 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술을 마시기 위해 클럽을 찾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시끄럽게 떠들면서 술을 
마시는데, 누군가 클럽 한켠에서 친구들을 전쟁터로 떠나 보내는 애끓은 마음으로 쇼팽의 녹턴 G단조 Op.15. No. 3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모두들 조용히 숙연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다,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세 사람중 닉은 탈영을 해서 행방불명이 되고, 스티븐은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되지만 마이클은 건장한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그저 오랫동안 혼자 연모의 정을 가진 닉의 애인 린다가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는 친구들을 배웅하는 것을 먼발치서 지켜보는데 이 영화의 주제곡인 스탠리 마이어스의 카바티나가 흐른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존 윌리암스가 연주한 후 클래식 기타의 명곡이 된 곡.

 

그로부터 얼마가 지난 후 마이클은 행방불명이 된 닉을 찾아 다시 베트남에 온다.
그곳에서 러시안 룰렛을 하는 닉을 발견하지만,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린 닉은 마이클을  알아보지 못한다. 닉은 마이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러시안 룰렛을 하고 방아쇠를 당긴 총이 머리를 관통하고 만다.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닉은 고향 땅에 묻히고, 장례 후 린다의 집에 모인 친구들은 끓어오르는 음을 참으며 모두들 닉을 위해 축배를 든다.

 

카바티나 (이탈리아어 cavatina)

 

1.오페라에서 서정적인 독창곡. 아리아보다 단순한 형식

2.속도가 느린 짧은 기악곡

 

오페라, 때로는 칸타타와 기악음악에 나타나는 음악형식.

18세기초 칸타타(J. S.바흐의 칸타타가 가장 유명함)에서 카바티나는 짧고 경구적인 소품인데

보다 서정적인 아리오소와 일상적인 언어와 비슷한 레치타티보의 중간에 등장했다.

 

오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1~2부분이 반복 없이 연주되는 화려한 성격의 아리아를 지칭했다.

카바티나의 발전은 예전에 즐겨 사용되던 다 카포 아리아(ABA 형식으로 A가 변주되어 반복되는 아리아 형식)의 쇠퇴와 시기를 같이하며 모차르트·베버·로시니의 오페라에서 카바티나 아리아를 발견할 수 있다.

카바티나는 또한 노래의 성격을 닮은 기악곡의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예를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작품 130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미국 육사 교과서에 기록된 한국인 영웅
- 6.25전쟁과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백악관 비서관이 되기까지 기적의 인생 드라마 -

 

하우스보이란 6.25 전쟁때 미군 부대에서 막사 청소를 하고 미군의 군화를 닦아주고 그리고 각종 심부름을 해주는 소년을 말한다. 주로 전쟁 고아들 중에서 선정했는데, 당시 미군부대의 하우스 보이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6.25 전쟁때 하우스 보이로 성공한 잘 알려진 인물로는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이된 신호범 장로와 수원중앙교회 김장환 원로목사, 그리고 미국 하바드대학교 정치학박사 임종덕 장로를 들 수 있다.

 

이들 세사람 중에서 임종덕 장로는(2011년 현재 나이 75세) 그가 오늘이 있기까지 살아온 그 파란만장의 위대한 생애를 아는 사람이 많치 않다. 그 이유는 임종덕 장로는 미국 육군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백악관에서 닉슨대통령, 포드대통령, 카터대통령 등 세분 대통령의 안보비서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2014년 까지는 자신의 과거 직책과 관련된 일체의 말을 절대 못하게 되어 있기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 그의 신앙 간증을 요청해도 일체 거절하고 있다.

 

사실 안드레명상도 이미 3년전 임종덕 장로의 인생 역정을 게재할려고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는데, 마침 지난 5월 한국을 찾은 임장로를 송승엽 안수집사의 소개로 다시 만나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단, 백악관 안보비서관 시절의 그의 직책과 관련된 내용은 일체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되어버린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가서 교실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후 인민군 찌프차가 집앞에 도착 인민군 요원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데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문자이기 때문에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기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 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 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계속 돌맹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빕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 몇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129명 고아들을 살리기 위해 임종덕은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그리고 약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듸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좀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차 대기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 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파출소로 연행할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즉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이유는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하도록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아들이 되었다”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즉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할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나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 물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민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 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저것도 가지고 가서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장환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적극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후에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 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에서 하루아침에 당장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 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너도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그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코렛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히 넣고 김장환을 꼭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한편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임종덕에게 본격적인 신앙과 교육을 위한 양아버지의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았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 사항이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특히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2011년)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임종덕은 1953년 12월 김장환에 이어 하우스보이 제2호 입양아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한편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100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세워 가며 단어를 외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바드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더 불타 올랐다. 1957년 하바드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지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를 주제로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바드 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제가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한편 임종덕은 <2차 대전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바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날 임종덕의 박사 학위식에 참석한 임종덕의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즉, 소매치기와 절도로 전락한 전쟁 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오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하게 한 하나님의 섭리에 화이트 장군은 계속 감사 기도를 드렸다.

특히 이날 학위식에는 화이트 장군의 가까운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임종덕을 껴안고 박사 학위를 뜨겁게 축하해 주었는데, 하바드대학 개교 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였다.

 

한편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해서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아마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임종덕은 6개월만에 월남전에 지원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어느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찝차로 귀대중 매복 중인 베트공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임종덕을 지켜준 하나님>

임종덕은 먼저 포겟 성경을 끄내어 급히 손에 잡히는데로 몇장을 찢어 몸속에 감추고 성경을 풀속에 던겼다. 이 포겟 성경은 지난날 장교 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이때만 해도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료는 임종덕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까 앞으로 전쟁 터에서 하나님이 너를 꼭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로 성경을 꼭 세 번 읽고 난 후부터 성경의 내용을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임종덕은 그때 비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때 장교시절 자신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동료가 지금 미국 뉴욕에서 거대한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한편 앞서 포로가 되기 직전 성경에서 몇장 찢어서 늘 간직한 것이 성경의 시편 1장에서 3장까지 였는데 특히 3장의 내용이 임종덕에게 항상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석인 기도를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도속에 탈출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라왔다. 단신의 체구에 단 한군데도 부상이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부대는 함성으로 뒤덮혔고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한편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의 고위 지휘자를 납치하며 그리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두번째 포로가 되었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만 이었다. 임종덕은 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장교시절 룸메이트였던 그 친구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하나님은 너를 들어 쓰실려고 이 고된 훈련을 시키니까 지금의 우리들 훈련을 잘 받아내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그 말이 지금에 와서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다시 탈출의 기회를 노리는데 어느날 특별한 심문을 받는 날이 왔다. 즉, 북한군 몇사람이 임종덕을 유심히 보더니 “이 놈은 틀림없는 남조선 군인이다”하면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임종덕은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영어를 사용했다. 즉,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야구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임종덕을 엎드려 놓고 그야말로 개패듯이 내려쳤다. 임종덕은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임종덕의 입에서 “아이구 죽겠네! 아이구!” 이런 말이 단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한국 군으로 인정할려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덕은 고통과 신음 속에 “오마이갓”이란 말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조용한 음성으로 “이 놈이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계속 의심을 하면서 수용소를 나갔다.

 

<2번째 포로가 된 임종덕을 다시 찾아온 하나님>

한편 임종덕은 월맹의 최북단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였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임종덕은 기막힌 현장을 목격했다. 어느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탄창을 몇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다 데고 발사하라는 것이다.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칸에 다행히 실탄이 없으면 살고 만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 한다. 그러니까 생존 확률은 6대 1이다. 소위『러시안룰렛』이란 살인 놀음판이다. 당시 책상에는 승자가 가질 돈이 놓여 있었다.

즉, 임종덕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각자가 택한 것에 돈을 걸어놓고 놀음판을 벌리는 그야말로 인간의 목숨이 파리목숨이었다. 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가 지금 이순간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제 생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으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데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팀의 군인이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다 넣었다. 수용소의 고위 관리자들이 하루 하루 일과가 너무나 심심하니까, 이『러시안룰렛』놀음판을 매일 한번씩 하는데 어떤날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체는 바로 옆에 있는 강으로 던져 악어가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임종덕은 이 절박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나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의 계획을 세웠다.

 

다시『러시안룰렛』놀음판에 불려 나가면 지난번과 같은 상황에서 4초안에 현장에서 그들을 무력화 시키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즉 4초란 것은 1초에 한명씩 박살하고 100미터 정도 떨어진 매콩강에 뛰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던 순서가 임종덕에게는 한달이 되었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임종덕은 날로 초조했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 중국으로 끌려 갈 것으로 생각했다. 임종덕은 한달동안 “4초 탈출”이란 작전을 세우고 마치 운동 연습하는 흉내를 내면서 “4초 탈출”의 연속 훈련을 한달 동안 계속했다.

 

임종덕은 후일 “그때 한달동안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탈출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깨달았다. 한달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임종덕이 그들에게 불려 나갔다. 4명이 권총을 차고 서로 2명씩 마주보고 앉았다. 이날 따라 여자 경호원이 총을 옆에 세워놓고 서 있었다. 임종덕은 경호원 옆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힘차게 불렀다. “하나님 한달동안 훈련시켜준 4초 탈출의 승패가 지금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우선 권총의 탄환이 첫 번째 탄창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 한명이라도 사살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장교 1명이 자기들끼리 보는 앞에서 권총에 탄환 한발을 장전 두루룩 돌린후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받은 임종덕은 순간 용기가 생겼다. 조금전 그토록 불안했던 마음은 순간에 사라지고 틀림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한달간 연습한 “4초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드디어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데는 척 하다가 가장 경계하는 표정의 상대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꼬꾸라지자 임종덕은 평소 그린베레의 무술로 상대방이 권총을 꺼내기 전 평소 훈련했던 4초만에 그들을 격파하고 강을 향해 뛰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이런 순간이었다.

 

강물로 뛰어든 임종덕은 지난날 특수전 훈련때 배운대로 뛰어든 그 물속 그 위치에서 10분을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이 강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잠깐씩 숨을 쉬기 위해 순간 수면에 올라와보니 월맹군들은 멀리 2 백미터쯤 떨어진 강물에 사격을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그동안 2백미터이상 도망간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대형 물뱀과 악어들 속에서 살아난 임종덕>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매콩강 지류이기 때문에 악어와 5미터 이상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임종덕은 강물을 헤엄쳐 떠내려 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저 동물들의 눈을 가려 주옵소서” 계속 이 기도만 했다.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매일 같이 큰 개구리를 잡아 먹었으며 어떤 날은 4미터 이상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임종덕은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고 판단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날 미군 헬리곱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미친 듯이 펄쩍 펄쩍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곱터는 베트공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하고 그가 베트공인줄 알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임종덕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단 한군데도 부상없이 밀림 속에 숨었다. 임종덕은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웠다.

 

의식이 몽롱해진 임종덕에게 다시 그 헬리곱터 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큰소리로 외치면서 무조건 백사장으로 다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펄쩍 펄쩍뛰었다. 순간 미군 헬리곱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했다. 즉, 비록 베트공의 군복을 입었지만 저 사람은 분명 월남군인의 패잔병으로 판단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임종덕은 헬리곱터에 타자마자 실신되어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임종덕은 의식이 회복되자 자신은 미군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즉시 신원을 확인한 미군 수사관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임종덕을 조금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다 아버지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 주었다. 공군 참모총장 토마스 D. 화이트 공군대장 이라고 적어 주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밀림속에서 미군 헬리곱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 아버지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너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 당한데는 없느냐”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 했잖아요”…… 임종덕은 1주일간 공군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특히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되는날 임종덕은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손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임종덕은 즉시 아버지께 이 내용을 알렸드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다면서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은성 무공 훈장과 1계급 특진을 받은 임종덕>
임종덕은 키가 팔대장 같은 거구의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한편 대위에서 6년후 소령이 되는데 임종덕은 대위에서 바로 소령 특진을 받았다. 특히 은성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키가 1m 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자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 이 영화가 바로 디어헌터 (The Deer Hunter)였다. 1978년에 제작된 디어헌터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영화 펜들을 감동시켰다. 임종덕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불을 받았다.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다시 월남전선으로 복귀한 임종덕 소령은 그린베레로서 맡은 직무 수행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존슨 대통령이 물러나고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닉슨은 하바드대학교에서 국제외교 분야의 베테랑급인 키신저 교수를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장차 중국과의 수료를 위한 극비 연구를 지시했다. 닉슨이 키신저 교수를 보좌관으로 임명한 것은 과거 타임즈에 게제되었던 『21세기의 공존 공생』이란 기사를 감명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사에서 키신저가 제자인 임종덕 학생의 글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내용을 언급했는데, 닉슨은 당시 임종덕 학생을 만나기를 원했다. 키신저는 며칠후 임종덕이 월남전선에서 그린베레 소령으로 근무하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닉슨에게 보고하자 닉슨은 즉각 임종덕을 백악관으로 불러 오라고 지시했다.

 

<백악관에 두번째 불려간 임종덕 소령>

존슨 대통령을 만난지 5년만에 임종덕은 키신저와 함께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닉슨은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하바드 대학교 57년도 학생잡지를 임종덕에게 보이면서 여기 당신의 글을 관심있게 읽었다면서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변하겠느냐고 물었다. 임종덕은 닉슨 대통령에게 “사상과 이념의 역사는 100년이상 간 것이 없었다”는 아놀드 토인비 교수에게 들은 강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지금부터 (1970년) 앞으로 40년 후에는 (2010년) 지금의 중국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이것은 바로 군사력과도 직결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만일 공산주의를 포기하면 중국은 세계 문화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난 닉슨 대통령은 이날 바로 임종덕 소령을 미국 국가안전보장 이사회 근무를 명하고 키신저와 함께 중국과의 수교를 위한 극비 작업을 지시했다.……임종덕은 이날밤 호텔에서 하나님께 불평어린 기도를 했다. 즉 “하나님 나는 전쟁터에서 미군 포로를 탈출시키는 특수 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그린베레인데, 어떻게 저를 갑자기 백악관 근무를 하게 하십니까, 나는 국가간의 비밀 외교수립을 배워 본적도 없는 문외한(門外漢)입니다.……그러나 임종덕은 기도를 하는 중에 갑자기 큰깨 달음이 왔다. “내 인생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된 모든 과정이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앞날을 인도하고 있다는 즉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한편 임종덕의 아버지 화이트 공군 참모총장은 미국 군인의 최고의 자리인 합동참모본부 의장 즉, 합참의장으로 승진했다. 화이트 장군은 아들이 백악관 대통령 안보 비서관으로 오게된 것을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의 승진과 아들의 백악관 근무는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모처럼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 예배를 드렸다.

 

<중국과의 수교를 위한 임종덕의 사명>

임종덕은 대통령 특별안보 보좌관인 키신저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중국 근세사를 열심히 공부 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완전 적성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일체의 교류가 없던 시절이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바로 탁구 시합을 구상하게 되었다. 때마침 1971년 3월 제31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가 일본 나고야에서 개최되었다. 임종덕은 이 대회 기간에 미국과 중국과의 탁구 경기를 상호 친선방문 개최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중국의 모택동이 나고야 대회가 끝나는 날 4월 6일밤 현지에 있는 중국 대표단에게 미국 탁구선수단 초청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나고야 대회가 끝난후 3개월만에 미국 탁구선수단이 중국의 공식 초청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때부터 임종덕은 중국의 실권자인 주은래와 미국의 키신저를 만나게 하는 물밑 작업을 비밀리에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임종덕은 파키스탄에서 대기중 중국으로부터 상해로 오라는 비밀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이 자리에서 키신저와 주은래의 회담 주선이 결정되어 71년 6월 키신저는 임종덕을 데리고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한다. 키신저와 주은래의 베이징 비밀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은 서로가 적성국이지만 앞으로 수교를 하자는데 합의하고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일정까지 정했다. 키신저는 귀국길에 우방국인 일본을 방문 일본 수상에게 베이징의 비밀회담 내용을 알렸다. 한편 임종덕은 키신저에게 한국에도 이 사실을 당연히 알리자고 말하자 키신저는 한국은 당신이 가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임종덕의 첫 만남>

임종덕을 처음 본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한국인이 미국 대통령 외교 안보비서로 근무한다는 것에 대해 격려를 해 주었다. 특히 임종덕의 신장(1m64cm)이 자신과 같다는 것도 호감을 가졌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임종덕으로부터 보고를 듣고 이때 새로운 구상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앞으로 적성국과도 외교를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의 자주국방을 확고하게 진행해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그후 임종덕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청와대를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교분을 쌓아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임종덕이 36세의 나이에 아직 미혼인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꼭 자신이 중매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임종덕은 대통령의 중매 이야기는 안드레 명상에 언급하지 말라고 했지만 필자가 탐문한 바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에게 의뢰를 했고 육영수 여사가 좋은 규수감을 물색하던중 독립지사의 가문인 즉, 민영익의 후손으로 대학교수인 민씨 집안 아가씨를 선정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때부터 박대통령과 임종덕의 사이는 더욱더 가까워졌다.

 

한 번은 임종덕이 박대통령에게 아들 지만이를 미국에 유학을 시키자고 하면서, 모든 학비 일체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제의를 했다. 이 말을 듣고난 박대통령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내 아들을 유학을 보내면 지금 장관 차관 그리고 국영기업체 사장들이 내 눈치만 보고 있는데, 자기 자식들도 전부 다 유학 보낼 것이다. 공장의 여 직공들이 피눈물로 벌어드리고 있는 외화가 장관 차관 자식들의 학비로 사라진다면 이 나라가 언제 자립하고 언제 자주 국방을 하겠느냐!! 지만이는 육사 졸업후 다행히 중령까지 가서 예편한다면 그 연금으로 살 수가 있다. 그러니 자네 앞으로 지만이 유학 이야기는 절대 입밖에도 내지 말게!!……

 

한편 임종덕은 이때 자신이 알고 있는 중대한 정보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다. 즉, 미국의 무기회사 부사장이 박대통령에게 한국의 무기 구입에 대한 감사의 표시(리베이트)로 무려 100만 달러의 수표를 건네자, 박대통령은 이를받아 “이 돈이 내 개인 앞으로 주는 것이냐 혹은 청와대에 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무기회사 부사장은 “이 돈은 대통령 각하 개인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이 수표를 청와대 공식 봉투에다 넣고 “이 100만 달러는 지금부터 내 개인의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겠다”고 하면서 이 돈을 다시 부사장에게 건넸다. 무기회사 부사장은 당시 박대통령의 그 청렴한 애국정신과 특히 자주국방을 위한 그 투철한 집념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 회사가 전세계와의 무기 거래 역사상 국가 원수가 자기 개인주머니로 들어오는 거액의 돈을 거부한 예는 전무후무한 일로서 그 소문이 백악관은 물론 미국 정부 고위층에도 알려졌다고 한다. 한편 임종덕은 백악관에서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 등 3명의 대통령 안보비서관을 지내다가 장군 진급을 2개월 앞두고 갑자기 백악관을 떠나게 된다.

 

임종덕은 그동안 모택동을 다섯 번 만났고 당시 중국 총리였던 주은래와도 여러 차례 만났으며, 특히 임종덕의 또 하나의 이름인 임성래란 이름도 당시 주은래가 작명을 해줄 만큼 주은래는 임종덕을 동생처럼 호의를 베풀었다.한편 미국 탁구 선수단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를 순방하면서 탁구 경기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미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 방문에서 합의한대로 닉슨 대통령은 1972년 2월 중국을 공식 방문 상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세계 역사는 이때를 서로 적성국가였던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 즉 탁구 외교가 양국간 수교의 징검다리의 출발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 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이 탁구 경기만이 중국 정부와 국민들의 거부 반응이 없었다. 불과 2.5g의 가볍고 작은 탁구공이 미국 중국간의 외교 관계를 성사시키는데 일등공신이요 이야말로 노벨평화상 감으로 전세계를 흥분시겼다.

 

<미국 LA에 이민 교회 창립에 나선 임종덕>

임종덕은 미국 LA를 출장중에 우연히 한국에서 온 목사의 부흥회 장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설교를 하는 목사의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었다. 바로 1953년 임종덕이 열다섯살 소년때 서울 여의도의 미공군 교회 주일예배때 한국 공군 장병들에게 설교를 했던 당시 공군군종감이 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 장군이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임동선 군종감의 설교에 감동했던 임종덕은 약 20여년만에 이곳 부흥회에서 다시 만났다. 두사람은 그때 주일예배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임종덕은 임목사에게 중대한 제의를 했다.

 

즉 70년대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올 것인데, 이들을 위해 빨리 이민교회를 만들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1970년에 오늘의 LA 동양선교 교회가 창립되었다. 동양선교 교회는 미국으로 이민 온 많은 한국 사람들이 낫선 타국땅 이역에서 서로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모이기 시작하여 성도 수가 한때는 8천명에 달하는 미국의 한인교회중에 가장 큰 교회가 되기도 했다. 한편 임종덕은 주일날만 되면 꼭 LA에 있는 동양선교 교회에서예배를 드리기 위해 워싱턴에서 LA까지 먼 거리를 왕복하면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국가 공무로 국내외 출장이 잦은 관계로 매 주일마다 LA까지 가는 교회 출석이 쉽지 않았다.

 

교회 창립 5주년이 되던 1975년 동양선교 교회는 교회창립의 맴버였던 임종덕을 장로 추대에 나섰다. 이때 임종덕은 과연 자신이 장로가 될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장로 후보자의 필독서로 알려진 이판석 장로의 <장로학>과 이성봉 목사의 <장로란>두권의 책을 밤을 세워가며 여러번 깊이 탐독했다. 결론은 아직 장로로서 직분을 감당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장로 추대를 사양했다.

한편 자신과 함께 일했던 헨리 키신저 외교안보 보좌관이 국무장관이 되면서 미, 중 외교관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임종덕은 1974년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날을 맞이했다. 즉 그의 양아버지였던 화이트 장군이 83세로 소천했다.

 

서울역에서 소매치기와 절도행각을 했던 자신을 오늘이 있기까기 키워준 그 아버지의 위해했던 일생이 끝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 임종덕은 하루종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많이 울었다. 화이트 장군은 아들 임종덕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켜준 하버드 대학교와 또한 자신의 모교인 미공군 사관학교에 유산을 기중했다.

 

<백악관을 떠나야만 했던 임종덕 대령>

핑퐁외교 즉 탁구 친선경기로 시작된 미,중국간 외교는 드디어 1979년 양국간의 국교가 수립됨으로서 임종덕의 중차대했던 사명도 끝났다. 그러나 임종덕은 계속해서 닉슨, 포드, 카아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백악관 대통령 안보 비서관으로써 세계 각국의 정보를 대통령께 보고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한편 임종덕의 백악관 근무에 생각지도 않았던 시련이 다가왔다.

 

 

즉 카아터 대통령이 주한 미지상군을 4,5년 사이에 완전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장 싱글러버 소장이 기자회견에서 철군 반대를 주장했다. 싱글러버 장군은 1977년 5월 17일자 워성턴 포스트지와의 대담에서 “지난 1년간의 집중적인 정보 활동결과 북괴의 군사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도 철군 결정자들은 북괴의 군사력에 대해, 2,3년전 낡은 정보에 근거를 두고 철군을 할려고 한다.”라고 하면서 카아터의 철군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상과 같은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대담 기사가 나간지 이틀 뒤 즉 5월 19일 카아터 대통령은 크게 분개하여 싱글러버 장군을 즉각 소환하라고 브라운국방 장관에게 명령했다. 즉 미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자신에게 철군 반대에 대해 직접 보고 하라고 했다. 싱글러버 장군은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UN군 측 수석대표에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장 등 서열에서는 제3인자의 위치였다. 미국 대통령이 해외 주둔 미군 장성을 소환한 것은 1951년 6.25 전쟁때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소환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임종덕은 당시 카아터 대통령과 싱글러버 장군과의 대담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한편 카아터 대통령은 싱글러버 장군을 주한미군참모장 직에서 해임시킨 뒤 어느날 임종덕을 불러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 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 보시고”라고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평소의 생각대로 말했다. 즉 4만여명의 주한 미군이 있으므로 북한이 전쟁도발을 하지 못하며 대신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한편 임종덕이 카아터에게 정면으로 강력하게 제시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것이 그가 백악관을 떠나야 할 계기가 되었다.

 

즉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카아터 대통령은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친 도망병들을 전부 사면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자 임종덕은 카아터의 사면 지시를 반대한다고 했다. 즉 자신이 월남전 참전용사로서 전투중에 자기만 살겠다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친 장병에게 대통령이 사면을 한다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바쳐 전투를 하겠느냐고 말했다. 임종덕의 반대 의견을 듣던 카아터의 심기가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임종덕은 대령에서 장군 진급을 불과 두달 앞두고 있었는데, 자신도 앞서 싱글러버 장군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임종덕은 사사건건 대통령에게 결레가 되는 처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자진해서 대통령에게 대통령 안보비서관 직에서 다른 군부대 전근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임종덕은 미국의 어느 예비군 부대의 심리전과 창설 임무를 받고 백악관을 나섰다, 정든 백악관을 나올 때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보면서 그의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텅빈 교회안에서 그는 모처럼 하나님께 긴 시간의 감사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임종덕은 1986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하면서 LA동양선교교회 장로 장립을 받았다.

 

현재 부인과 함께 LA에 살고 있으며 슬하에 딸만 셋을 두고 있는데 이 딸들에게 학생시절 조국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서울 정신여고에 청강생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고국에 올 때마다 서울역을 찾아간다>

서울역은 임종덕에게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고향이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올 때마다 서울역을 찾아간다. 서울역앞 광장을 넋을 잃은 듯이 보고 있는 동안 임종덕의 머리에는 61년전 14살의 전쟁 고아로 배고팠던 그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밥을 얻어먹지 못할때는 종로구 내자동의 무물가를 찾아가서 물배라도 채우겠다고 샘물을 꿀꺽 꿀꺽마셨다. 어느날 허기에 지쳐 우물가에 힘없이 누워있던 임종덕에게 외국 신문기자가 와서 영어신문 한 장을 펴서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임종덕 자신의 얼굴이 나와 있었다. 즉 신문에 난 자신의 모습은 너무 배가 고파서 두레박으로 물을 올리던 할머니에게 물을 얻어 먹는 장면의 사진이었다. 후일에야 알았지만 이 사진은 미국의 타임즈 기자가 찍은 “우물가의 소년”이란 기사로 당시 너무나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 기자상을 수상했던 사진이었다.

 

한편 서울역 광장은 당시 임종덕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생활의 근거지요 직장이었다. 15살의 나이에 수십명의 코 흘리게 전쟁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의 눈은 항상 돈과 귀중품을 가진 사람만 노리고 있었다. 15살 소년 임종덕의 소매치기와 절도 기술은 그야말로 귀신도 놀랄 정도었다. 매일같이 진행되는 소매치기와 절도의 순간적인 기술의 승패는 바로 임종덕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어린 고아들의 생사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아예 그 순간의 실패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서울역에서 큰 절도 사건이 터지면 형사들이 제일먼저 임종덕을 지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임종덕은 지금도 1년전 이곳 서울역 광장에서 양아버지와의 그날의 인연은 바로 하나님이 맺어준 것임을 천번 만번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임종덕으로 하여금 미국 제5공군 사령관인 3성 장군의 가방을 훔치게 하여 임종덕을 장군의 양아들로 입적 시키기 위한 바로 하나님의 완벽하고 빈틈없는 시나리오였다고 굳게 믿고 있다. 만일 그날 하나님께서 그날의 인연을 맺어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영영 그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교도소를 평생토록 드나들며 70평생을 폐인으로 망쳤을 것이라고 했다. 임종덕이 서울을 방문하면 서울역 이외에도 앞서 언급했던 굶주린 배를 즉 물배로 채워줬던 내자동, 그리고 양아버지와 함께 난생 처음 교회를 나갔던 여의도를 가본다.

 

그러나 그때의 내자동 우물터와 여의도 비행장의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고층 빌딩들은 뉴욕의 맨하탄을 방불케 한다. 6.25 전쟁으로 페허가 되었던 당시 서울 거리는 넝마주의 소년들과 거지들이 줄을 이었고 빈(貧)과 궁(窮)은 이 나라 산천을 휩쓸었다.

 

올해(2011) 75세인 임종덕도 바로 그 시대에 불쌍한 고아였다. 자신 혼자도 먹고살기 힘든 그 난리판에 소매치기와 절도로 어린 고아들을 먹여 살리던 임종덕을 하나님은 결코 무심치 않았다. 이말은 바로 하나님은 남을 위해 스스로 돕는자를 도와 준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다.

 

한편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최고 두뇌들만 일할 수 있는 백악관에 그것도 대통령의 안보비서관으로 등용시킨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임종덕은 또 한 번 강조했다. 서울역 광장은 임종덕 인생에 너무나도 창피스럽고 또한 슬픔과 눈물의 기억만 있어 두번 다시 찾을 곳이 못되지만 그래도 그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첫사랑을 받은 장소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부르는 찬송이 404장이라고 하면서 필자와의 대담을 마쳤다.

 

『하늘을 두루마리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다 쓸까. 저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여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출처]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백악관 대통령 비서관이 되기까지 |작성자 유석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