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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그림과 삶

박연서원 2015. 12. 31. 21:51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직선으로 그린 자화상

〈소묘 자화상〉, 소묘, 1899~1901, 22.5×16.5cm, 프랑스 파리 피카소 박물관

<소묘 자화상〉, 소묘, 1899~1901, 22.5×16.5cm, 프랑스 파리 피카소 박물관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1908년 살롱전에 출품한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의 작품 〈에스타크의 집들〉을 보고, "브라크의 그림은 마치 작은 상자(cubic)를 모아 놓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 미술평론가 보셀(Louis Vauxcelles, 1870~1943)은 「질 브라」라는 저널에서 "브라크는 모든 사물의 형태를 기하학적 도형으로 바꿔 놨다"라고 언급했다. 브라크의 그림에 대한 마티스와 보셀의 논평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 사조인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의 선언이 되었다.

입체주의(cubism)는 기존 회화에서 강조해온 명암법과 원근법을 무시하고, 그리려는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분해하여 하나의 화폭 안에서 사물의 앞면과 옆면 등 다양한 각도에서의 모습을 담아낸 미술 사조를 말한다. 다시 말해 회화의 2차원적 평면성을 극복해 3차원에 도달하고픈 화가들의 열망이 하나의 화풍을 이룬 것이다.

입체주의의 중심에는 20세기 미술의 거장 피카소가 있다. 피카소는 정물화의 대가 세잔이 사물을 관찰하면서 얘기했던 "자연을 원통, 구와 원추를 통해 그린다"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눈에 보이는 대상을 어떻게 분해해서 재구성할 수 있는가를 작품을 통해 규명해 왔다.

피카소는 특히 입체주의 화풍의 실험 대상으로 인물을 삼았다. 사람의 변화무쌍한 모습과 표정이야말로 미술로 구현해내는 가장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피카소는 인물 가운데서도 스스로에게 지운 예술적 숙제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1900년에 완성한 〈소묘 자화상〉은 피카소가 첫 개인전을 열었던 바로 그 해에 그린 것이다. 당시 피카소는 소년티를 막 벗은 열아홉 살 피 끓는 청춘이었다. 피카소는 아직 화가로서 이름을 내세우기에는 경력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과 열정만큼은 기성화가 못지않았다. 자신의 그림을 전시해줄 미술관을 구하지 못한 피카소는 단골 카페를 빌려 첫 전시회를 치른다. 여기에는 150여 점이 넘는 데생이 전시되었는데, 이 〈소묘 자화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피카소는 이 그림에서 곡선보다는 직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 속 화가의 모습은 턱 선을 비롯한 이목구비가 날카로운 각을 유지하고 있다. 두껍고 거친 선으로 면을 분할하는 소묘 솜씨는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빼어나다. 화면의 구도를 어떻게 장악해야 하는지 피카소는 어린 시절부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색시대의 자화상

 

피카소가 스무 살 되던 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찾아온다. 둘도 없는 친구 카사게마스(Casagemas)가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형제처럼 지내온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에 피카소는 망연자실한다. 이 충격으로 피카소는 한동안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젊은 미술학도의 피 끓던 열정이 한 순간 꺾이고 만 것이다.

얼마 간 시간이 흐르고 다시 캔버스에 앉은 피카소는 그림에 유독 파란색만 사용했다. 피카소는 파란색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절망을 뜻하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피카소의 파란색에 대한 집착은 놀라울 정도였다. 심지어 그는 옷조차 파란색 계열만 입고 다녔다. 이렇게 파란색만으로 그린 그림은 알코올 중독자, 시각장애인, 거지, 부랑자 등 처절하게 밑바닥 삶을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파란색 그림들 가운데는 카사게마스의 초상화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화상도 있었다. 〈파란 외투를 입은 자화상〉은 당시 피카소가 자신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스물한 살의 나이와 걸맞지 않게 화가의 외모는 상당히 나이 들어 보인다. 눈과 얼굴까지 푸른빛을 띠어 창백한 인상을 준다.

이때까지만 해도 피카소는 아직 입체주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림에서 파란색 배경과 외투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고 수염과 입술에만 황금색과 분홍색을 사용했을 뿐이어서 화면은 전체적으로 차갑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 조형미 역시 매우 간결하여 마치 판화로 제작한 효과를 준다.

미술사에서는 피카소가 파란색에 집착해 그림을 그리던 1900년부터 1903년까지를 가리켜 '피카소의 청색시대'라고 부른다.

 

〈파란 외투를 입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01, 81×60cm, 프랑스 파리 피카소 박물관

〈파란 외투를 입은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01, 81×60cm, 프랑스 파리 피카소 박물관

 

장밋빛 시대의 자화상

 

피카소가 이십 대를 보내던 20세기 초에 스페인은 여전히 미술의 변방 취급을 받았다. 벨라스케스가 활약했던 17세기에 스페인 미술이 잠시 각광받기도 했지만 그가 죽자 이내 수그러들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유럽의 대다수 화가들은 프랑스 파리를 동경했다. 피카소도 마찬가지였다. 1904년 피카소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가난한 예술가였던 피카소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바토라부아르'(Bateau-Lavoir, 세탁선이라는 뜻의 아파트로, 건물의 흉한 외관이 빨래터로 쓰이는 강변에 늘어선 낡은 배들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역주)라고 하는 건물이었다.

피카소는 이곳 세탁선에서 올리비에(Fernande Oliver, 1881~1966)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피카소는 친구의 죽음으로 겪었던 충격과 고통을 사랑하는 여인 올리비에를 통해 위로 받는다. 그리고 그 동안 파란색에 집착했던 강박관념도 떨쳐 버린다. 당시 피카소는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따뜻한 삶이 주는 행복에 눈을 뜨게 된다.

피카소는 1906년경 야수파의 대표 화가 앙리 마티스와 조우하면서 그의 화풍에도 큰 변화가 찾아온다. 그림 속 색채가 갈수록 밝고 화려해진 것이다. 그 해 말에 피카소는 초기의 대표작 〈아비뇽의 여인들〉이란 작품을 완성한다. 이 그림은 미술사적으로 입체주의를 알리는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06, 92×73cm,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06, 92×73cm,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훗날 평론가들은 당시 세탁선에서 머무르던 시기를 가리켜 '피카소의 장밋빛 시대'라고 부른다. 이때 완성한 자화상이 바로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이다. 이 그림은 청색시대에 그린 〈파란 외투를 입은 자화상〉에 비하면 색채의 사용이 훨씬 사실적이다. 붉게 그을린 그림 속 화가의 피부는 가슴이 깊게 파인 브이넥 흰 셔츠와 매우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20세기 최고 화가의 삶이 집약된 자화상

 

앞서 살펴봤던 청색시대나 장밋빛 시대처럼 미술사가들은 피카소의 예술 인생을 특정한 시기별로 각각 이름을 붙여서 분류한다. 그렇게 분류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현대 화가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산업과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화가의 삶에 다양하고 복잡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거대한 '문화의 창고' 덕분에 본보기로 삼을 만한 위대한 작품과 성과가 20세기로 갈수록 풍부하고 다채로워진 점도 한 몫 한다. 아울러 서양의 변화와 발전을 이끈 예술가에 대한 자료가 현대로 갈수록 풍부해짐에 따라 깊이 있는 연구가 가능해지기도 했다.

피카소는 20세기 미술계 최고의 거장답게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의 긴 인생 여정을 따라 다양한 주제와 장르를 넘나들며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대부분의 유명 화가들이 평생 특정한 스타일을 되풀이해서 작품을 발표했던 것에 반해, 피카소는 모든 역사적 전통은 물론 새로운 예술 사조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피카소는 야수파와 같이 색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세잔과 같이 형태에 주목했다. 그는 다양한 변화와 다차원적인 분해, 그리고 단순화된 평면적 조형 기법을 이용하여 참신한 회화적 언어를 만들어냈다. 또 사물의 외적인 표상을 충실히 그리는데 연연하지 않고 그 안에 함축된 의미를 인식하고 해석하려 했다.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72, 65.7×50.5cm, 개인 소장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72, 65.7×50.5cm, 개인 소장

 

피카소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그린 〈자화상〉은 그의 예술적 위대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자화상〉은 그가 아흔이 넘은 나이에 그린 것이다. 현대 입체주의 회화의 창시자로서 말년의 피카소는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를 더욱 깊게 꿰뚫어 봤다. 특히 극도의 추상적인 기법으로 초상화의 형태에 변형을 가해 기하학적인 형상을 만들어 냈다. 눈 아래의 V자 선과 반원의 곡선은 나이든 화가의 주름진 얼굴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림 전체에서 공격적인 성향이 넘쳐나는 건 여느 젊은 화가의 작품 못지않다.

 

미래를 비추는 그림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말라가(Malag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미술교사인 덕택에 그는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초등학교 시절 읽기와 쓰기에 큰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다. 미술공부를 정식으로 시작한 마드리드 왕립 미술학교 시절에도 학교생활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피카소가 처음으로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열아홉 살 때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면서부터다. 그는 몽마르트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당시 인상파 화가들인 마네, 모네, 피사로, 세잔 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이후 피카소는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직업화가로의 길을 걷는다.

 

〈아비뇽의 여인들〉, 캔버스에 유채, 1907, 243.9×233.7cm,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아비뇽의 여인들〉, 캔버스에 유채, 1907, 243.9×233.7cm,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1906년 발표한 〈아비뇽의 여인들〉이 계기가 되어 문턱 높기로 소문난 파리의 미술계는 이 스페인의 젊은 화가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피카소는 치열한 창작 활동으로 중·장년기를 보내면서 입체주의 미술 사조를 완성하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그는 예술가로서 탄탄대로의 길을 가는 대신 때로는 어렵고 고통스런 선택을 하기도 한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중에 프랑코 독재정권이 독일군에게 게르니카(Guernica)라는 작은 마을에 대한 폭격을 허락하는 참사를 자행한다. 게르니카 폭격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자와 노약자였다. 당시 스페인 정부는 피카소에게 프랑스 만국 박람회에 출품할 그림을 의뢰했지만 그는 이 참사를 문제 삼아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 대신 게르니카 참사 현장을 그린 대작 〈게르니카〉를 완성한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통해 전쟁의 비열함과 잔인함을 유럽 전역에 고발한다. 하지만 이 그림으로 인해 당시 독재 정권으로부터 갖은 위협을 감수해야만 했다.

 

〈거울을 보는 소녀〉, 캔버스에 유채, 1933, 162.3×130.2cm,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거울을 보는 소녀〉, 캔버스에 유채, 1933, 162.3×130.2cm,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아울러 피카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의 폭격이 난무하는 파리에 남아 레지스탕스에 가담한다. 종전 후에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이른 바 좌파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사람들은 내전과 세계대전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피카소가 일찍 세상을 떴다면 20세기 미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정한다.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지만, 피카소가 일찍 죽었더라면 현대 미술의 진화가 멈췄을 것이란 가정은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않는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완성한 〈자화상〉 속 화가의 부리부리한 눈은 무한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예술의 미래를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