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joy]수원 화성 한바퀴 걷기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쪽 대문이다. 사실상 화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있다. ‘장안’이 상징하는 바는 ‘수도’이다. ‘나라 안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보1호 숭례문보다 더 큰 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 람은 많지 않다. <김진국·김준혁의 ‘정조의 혼 화성을 걷다’에서>》
한양도성이 ‘구체제의 상징’이라면, 화성은 ‘새로운 조선’을 뜻했다. 한양은 기득권세력의 아지트였다. 양반 벼슬아치들의 세상이었다. 아무리 임금이 개혁을 외쳐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한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박 터지게 싸울 뿐이었다.
화성은 한양도성의 판박이다. 4대문이 있고 임금숙소인 행궁이 성안에 있다. 한양을 바라보는 북문은 장안문이고 남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게 팔달문(八達門)이다. 팔달은 '사통팔달'의 뜻을 담고 있다. 서문은 화서문(華西門), 동문은 푸른 용의 기상을 담은 창용문(蒼龍門)이다. 화성 성곽 길은 군사요새 냄새가 물씬 난다. 성벽엔 대포나 활을 쏘기 위한 구멍이 곳곳에 나 있다. 사내아이들은 그곳에서 손가락을 내밀며 “탕! 탕∼” 총 쏘는 흉내를 낸다. 군사지휘본부인 장대(서장대, 동장대), 대포발사를 위해 지은 3층의 5개 포루(砲樓)도 군사시설이다. 포루는 지대가 높은 서쪽이나 북쪽엔 하나씩밖에 없지만 평지에 쌓은 동쪽엔 3개나 설치했다. 2층으로 지은 또 다른 5개의 포루(鋪樓)도 마찬가지다. 포루는 군사들 초소이자 대기소 역할을 했다. 그만큼 지대가 낮은 동쪽방어에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 동쪽엔 봉홧불을 놓아 신호를 주고받던 봉돈(烽墩)도 있다. 벽돌로 쌓은 5개의 불항아리. 현대미술작품 같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소박하면서도 은근한 멋이 우러난다. 군사들은 이곳에서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엔 불빛을 보냈다. 용인 석성산의 봉화가 응답하고, 그를 이어받아 서해안 홍천대 봉화가 대답했다. 평상시엔 매일 밤낮으로 1개의 벽돌항아리에 불을 피웠다. 적군이 국경 근처에 다가오면 2개, 국경선에 닿으면 3개, 국경선 침범 땐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피웠다. 청나라 요동의 돈대(墩臺)를 본떠 만든 동북공심돈도 아름답다. 동북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망루다. 겉은 사각형이지만 내부는 나선형벽돌 계단을 통해 꼭대기에 올랐다. ‘소라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화성 성곽길은 아기자기하다. 쉬엄쉬엄 나무늘보처럼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주위를 한눈에 살펴보면서도 주위풍광을 즐길 수 있는 각루(角樓)가 4곳이나 있다. 한마디로 군사 망루 겸 정자다. 싸울 땐 요새지만 평상시엔 풍류를 즐기는 곳이다. 동북각루(東北角樓)가 가장 빼어나다. 사람들은 아예 ‘꽃을 찾고 버들을 좆는 정자’라는 뜻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고 수 부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오른다. 마루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바로 정조가 앉았던 자리이다. ‘凸(철)’ 모양의 볼록 튀어나온 꼭짓점이다. 저마다 앉아 본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양반다리를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는다. 일본 관광객들은 다소곳이 공손하게 앉는다. 문양이라면 단연 연무대 뒷담장의 영롱담장 무늬가 으뜸이다. 허리띠처럼 펼쳐진 잿빛 기와꽃무늬 담장. 영롱담장은 보면 볼수록 그 속으로 빨려든다. 마치 먹빛이슬이 아침햇살에 영롱하게 빛나는 것 같다. 멀리서 보면 포도 알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997년 12월 등록)이다. 수원시민들은 성밖을 따라 걷기도 하고, 성안 길로도 걷는다. 성안엔 낡고 오래된 건물이 많다. 4824개의 건축물 중 반 이상이 30년 넘었다. 문화재보호법 적용으로 4층 이상은 지을 수 없다. 성밖은 삐죽삐죽 고층건물이 병풍처럼 둘러 있다. 사람들은 갈수록 성밖으로 빠져나간다. 도심이 달동네가 돼 가는 것이다. 정조는 1804년에 14세가 되는 아들 순조에게 국왕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화성에 묵으며 상왕으로 살고자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19세기가 시작되는 1800년에 눈을 감았다. 정약용은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됐다. 조선은 정조 사후 110년 만에 무너졌다. 만약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새로운 조선’이 이뤄졌을까. 개혁과 개방으로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됐을까. 신행정도시 수원화성은 ‘새 조선의 심장’이 됐을까. 생풀냄새가 코에 쎄∼하다. 고추잠자리 떼가 빙빙 맴돈다. 어르신네들이 손바닥만 한 그늘에서 다리품을 쉰다. 성 너머 푸른 하늘이 아슴아슴하다. 늦여름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제주목사가 올린 장계를 보니 전복을 따는 힘겨운 장면이 눈에 선하다. 공물을 줄이는 것이 낫지 우리 백성을 왜 고생시키겠는가? 내가 어찌 (진상품으로 올라오는) 전복 삼킬 생각이 나겠는가?’ ―정조 2년(1778년) 수원화성은 읍성이자 산성이다. 읍성은 평지에 성을 쌓지만, 산성은 주위의 지형을 활용해 쌓는다. 깎아지른 절벽부분엔 낮게 쌓고 골짜기엔 높이 쌓는 식이다. 화성도 팔달산 인근의 서장대는 지형지물을 활용해 성곽건물을 지었다. 동문지역은 평지에서부터 쌓아올렸다. 보통 읍성은 규모가 작고 산성은 크다. 읍성은 조선 초기 전국에 179개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산성은 전국에 3000여 개의 흔적이 있을 정도로 많았다. 조선 한양도성의 둘레는 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18.2km이다. 1396년(태조 5년) 1월 전국에서 11만8000명을 동원했다.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으니 한양 주민보다 인부가 더 많았던 셈이다. 전체 성곽을 180m씩 97개 공사구역으로 나눠 진행했다. 수원화성은 둘레가 5.74km에 이른다. 한양도성의 3분의 1 수준이다. 남한산성(외성 옹성 포함 11.76km, 본성 약 7km)이나 북한산성(12.7km)보다는 짧다. 하지만 해미읍성(1.8km), 낙안읍성(1.4km), 고창모양읍성(1.684km)보다는 훨씬 길다. 수원화성의 성안 넓이는 0.188km²(약 5만6000평)로 남한산성 본성 안쪽 면적 2.32km²(약 70여만 평)보다 좁다. 북한산성 6.6km²(약 200만 평)나 한양도성 7.66km²(232만 평)에도 훨씬 못 미친다. 행궁은 임금이 한양도성을 떠나 지방 나들이를 할 때 머물던 곳이다. 정조는 24년 임금 노릇을 하면서 66번이나 지방행차를 했다. 한 해 2.7회꼴로 직접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살폈다. 수원은 13차례 오갔다. 과천행궁-안양행궁-사근참행궁-시흥행궁-안산행궁은 수원 가는 길에 머물던 곳들이다. 화성행궁은 576칸이다. 북한산성행궁 120칸, 남한산성행궁 98.5칸보다 규모가 크다.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新豊樓) 앞에는 350여 년 된 느티나무 세 그루가 ‘品(품)’자 형태로 서 있다(사진). ‘품’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3정승을 상징한다. 행궁을 지을 때 140년 쯤 된 느티나무 세 그루를 이곳으로 옮겨 심은 듯하다. 정조는 이곳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쌀과 소금을 나누어줬다. 홀아비, 과부, 고아 등 539명과 서민 4813명에게 쌀 368석을 베풀었다. 정조의 화성행차 수행인원은 6000명에 말이 1400필에 이르렀다. 창덕궁을 떠나 한강을 건널 때는 노량진에 800척의 배를 쇠줄로 묶고 철판을 깔아 배다리(1km)를 만들었다. 그 아이디어 역시 다산의 머리에서 나왔다. 1795년(정조 19년) 8일간 화성행차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효도행차였다. 아버지 사도세자 능 참배는 기본이었다. 정조는 군복차림에 말을 타고 가면서 쉴 때마다 어머니께 문안인사를 올렸다. 정조는 봉수당 앞마당에서 어머니 회갑잔치를 열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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