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기타연습실

이범희 / 잊혀진 계절 - 이 용 외

박연서원 2019. 9. 18. 07:07

잊혀진 계절

                        작사 : 박건호, 작곡 : 이범희, 노래 : 이   용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경음악

 

 

 

이   용

 

 

아이유

 

미기

 

서영은

 

국카스텐(Guckkasten)

 

김범수

 

노래말 뒷이야기

언제 부터인가 10월이 되면 꼭 들어야하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詩人]보다는 [作詞家]로 유명세를 치뤄왔던 박건호씨가 자신이 어떤 여자에게 실연당한 사연을 가사로 옮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1980년 9월 비가 내리는 어느날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박건호씨 그가 소주 한병을 거의 다 비운 것은 그 동안 만났던 여자와 헤어지기로 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만나면 그녀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할 무렵 그녀를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서 오늘 이후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 생각으로 일부러 더 취했다고 한다.

비틀거리는 박건호씨를 차에 태우며 그녀는 [이분 흑석동 종점에 내리게 해 주세요...]라고 안내양에게 당부 했으나 그는 다음 정거장에서 바로 내렸다.

[여긴 흑석동이 아니에요.]

안내양의 제지를 뿌리치고 버스가오던 길로 내달렸고 동대문에서 창신동으로 가는 중간 지점쯤에서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자 급하게 뛰어온 그는 숨도 고르지 않은채 그녀 앞으로 달려가서..

[정아씨~! 사랑해요.]

그 한마디를 던지고 동대문 방향쪽 오던 길로 다시 뛰어갔고,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작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는 [9월의 마지막 밤]으로 가사를 만들었지만, 앨범 발매시기가 10월로 늦춰지는 바람에 가사를 10월의 마지막 밤으로 바뀌었고...

친근한 노랫말과 이용의 가창력이 당시 각종 가요 차트 1위를 기록했고 대중성으로 많이 따라 부르던 국민가요로 무명의 [이용]을 톱으로 만든 노래이다.

 

박건호 [朴建浩, 1949.2.19~2007.12.9]

 

1949년 2월 19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69년 서정주의 서문이 실린 시집 [영원의 디딤돌]을 펴냈으며, 1972년 박인희가 부른 가요 [모닥불]의 가사를 쓰면서 작사가로 데뷔하였다.

이후 작사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이수미가 부른 [내 곁에 있어주]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 나미가 부른 [빙글빙글]과 [슬픈 인연], 조용필이 부른 [모나리자] 등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가사를 지었다.

모두 3000여 곡의 작품을 남겼으며, 1982년 KBS 가요대상의 작사상,1985년 한국방송협회가 주최한 아름다운 노래 대상,1985년 국무총리 표창 등을 받았다.

대중음악 작사 이외에도[타다가 남은 것들][고독은 하나의 사치였다][추억의 아랫목이 그립다] [기다림이야 천년이 간들 어떠랴] [그리운 것은 오래전에 떠났다] 등의 시집과 에세이집 [오선지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등의 저서를 남겼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뇌졸중으로 언어장애와 손발이 마비되는 중풍을 앓았으며, 신장과 심장 수술을 받는 등 오랜 기간 투병하면서도 작품 활동을 하다가 2007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이   용

 

 

1980년대는 조용필의 시대였다. 1979년 혜은이 이후 1988년 주현미가 가수왕을 하기까지, 아니 그조차도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 이상 상을 받지 않겠다"며

1987년 가수왕을 거부한 때문이었다 보는 사람들이 많다. 조용필이 가수왕 수상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후로도 몇 년은 조용필이 독식하지 않았을까?

 

1980년부터 1987년까지 - 물론 조용필의 수상거부로 1987년에는 공식적으로 가수왕이 없지만 - 가수왕이라 하면 오로지 조용필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고 있었다. 조용필이 원했다면 그 뒤로도 몇 년을 오로지 조용필만이 가수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 단 한 해, 단 한 사람에 의해서, 그것도 조용필의 전성기에 가수왕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바로 1982년 "잊혀진 계절"을 국민가요로 만들었던 이용이었다.

 

당시 이용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었다. 아니 이용의 인기라기보다는 "잊혀진 계절"의 인기였다. 얼마전 라디오스타를 보니 원래는 조영남에게 갈 노래였다 하던가? 작곡가 이범희가 곡이 잘 나왔다고 조영남에게 들려주었는데 조영남이 별로라 해서 당시 신인이던 이용에게 갔다고.

 

물론 그냥 신인은 아니었다. 1981년 당시 군사정권에 의해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열렸던 국풍81에서 그는 "바람이려오"라는 노래를 통해 장래 슈퍼스타로서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던 터였다. 풍부한 성량과 맑은 음색, 매끄러운 고음, 더구나 진한 감수성을 더하는 독특한 비브라토까지. 그보다 뒤에 데뷔했던 임병수의 비브라토가 그와 닮아 있었다. 그보다는 보다 더 맑고, 보다 더 우수에 젖은. "바람이려오"는 바로 그런 그를 위한 노래였고, "잊혀진 계절"은 그를 위해 준비된 노래였다. 조영남의 말이 아니더라도 과연 이용이 아니었어도 "잊혀진 계절"은 그렇게까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을까?

 

조용필과 전영록과 이용, 이용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이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존재였다. 비록 그 기간은 짧았지만 연이어 히트곡을 내며 그는 또한 당대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하나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1985년 2월. 최고의 스타에서 최악의 파렴치한이 되어 버린 그 날이 아니었다면.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른다. 원래는 동거를 하고 있었고, 동거를 하던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있었고, 그러나 새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모두를 버리고 미국으로 돌연 떠나버렸다. 합의하에 관계를 정리했다는 소리도 있고, 단지 국내 여론을 견디지 못해 미국으로 떠났다는 소리도 있고, 그러나 나 역시 당시 그런 뒷소문에까지 관심을 가지기에는 너무 어렸던 터라. 아니 지금도 남의 뒷소문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렇게 그는 한 순간에 우리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자고 흥얼거리는 가운데. 10월이면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며 청승을 떠는 가운데. 그리고 완전히 잊혀졌다 싶던 어느날 그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트로트로 돌아와 있었다. 그동안의 그의 인생역정을 듣고 있으니 트로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지만. 그때까지도 트로트는 가수가 가는 마지막 막다른 골목이었던 터라. 그리고 지금까지 전혀 관심 밖의 존재로서 어디서 뭘 하는가... 뭘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스타의 영락이라기에는 참...

 

아무튼 그래도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가수는 가더라도 노래를 남긴다던가? 최헌의 히트곡은 "오동잎" 단 한 곡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이다. 마찬가지로 당시 크게 화제를 불러모았던 이별과 배신의 이야기야 다 잊혀지더라도 가수가 부른 노래는 남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여전히 흘러든다. 딱 이맘때. 바로 이 무렵에.

 

시월이면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노래다. 가을도 저물어가는 시월의 마지막 밤, 겨울로 접어드는 11월의 첫날을 앞두고 반드시 빠뜨려서는 안 되는 노래다. 아마 많이들 그렇지 않을까? 이 노래를 기억하는 세대라면. 단 하루, 그러나 그 하루를 위해서 존재하는 노래. 목포를 위해 목포의 눈물이 있고, 부산을 위해 부산갈매기가 있는 것처럼 10월을 위해서는 이 노래 "잊혀진 계절"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참 슬픈 노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미련이라 하던가? 차라리 떨쳐버릴 수 있으면. 차라리 칼로 끊듯 단호하게 끊을 수 있으면.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납득이 될 리 없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이별인데 이해가 될 리 없다. 왜 헤어져야 하는가? 왜 우리가 지금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가? 먼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묻게 된다.

 

"왜 그랬어?"

살다 보면 그런 질문들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연인이 아니라 가족이더라도. 친구더라도. 혹은 다른 관계에서도.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차라리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최소한 변명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납득할 수 있도록.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련이라도 남지 않게.

 

하기는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기에 변명이다.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해명이다. 여전히 의혹이 남고 여전히 미련이 남기에 그래서 변명이다. 한 마디만 더. 단 한 마디라도 더. 내가 듣지 못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 어쩌면 잊지도 않은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 그 대답에 마지막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을 두고.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미련이란 비단 사랑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아마 도박이 그럴 것이다. 매번 패를 돌릴 때마다 사람들은 꿈과 희망에 부푼다. 복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꿈은 아쉽고 안타깝고, 슬픔은 다시금 그 꿈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꿈이 클수록. 바람이 클수록. 도박을 끊지 못하고 복권을 계속 사는 이유는 그래서다. 그 꿈을 놓지 못하기에. 그 바람을 저버릴 수 없기에. 미련을 놓을 수 없기에.

 

끊어낼 수 있는 단호함이. 그러나 끊어낼 수 없는 나약함이. 결코 이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마음이 몇 번의 계절이 다시 돌아도록 미련을 부여잡고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미 죽은 아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모의 마음 속에 아이는 죽지 않았다. 항상 기다린다. 문을 열어 놓고. 혹시라도 열린 문으로 밝게 웃으며 돌아오는 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양. 죽은 것을 알면서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도저히 믿지 못하겠어서.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죽음마저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라.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얼마의 계절이 다시 돌아온 것일까? 몇 번 째의 시월이고 마지막 밤인 것일까? 그때를 떠올리는 것은? 그때의 말들을, 몸짓을, 눈빛을 떠올리는 것은. 그러면서 미련을 놓지 못하는 것은. 헤어짐을 알고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간들은.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라는 것은 그것이 가을이므로.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저무는 잊혀짐으로 가는 길목이므로. 노래가 슬픈 것은 끝내 그것이 잊혀질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잊혀져야 함을 알기에. 여전히.

 

이용의 목소리가 있어 우울함은 차라리 아름답기조차 하다. 헤어짐보다 더 슬픈 것은 미련이라고. 끝내 지난 시간을 놓지 못하는 미련일 것이라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래서 슬픔과 동의어이리라. 끝내 잡지 못한 시간을 아쉬워하며. 10월의 마지막 저무는 밤이 아름답다. 음악이 흐른다. 밤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