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ic Poem 'Till Eulenspiegels lustige Streiche',Op.28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교향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Richard Georg Strauss, 1864 ~1949
이 곡은 분명한 표제음악이지만 R.슈트라우스는 표제에 대한 해설을 붙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춘향전, 흥부전 하면 모르는 이가 없는 것처럼 틸 오일렌슈피겔 이란 인물에 대한 것 역시 독일어권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틸 오일렌슈피겔은 14세기경에 생존했던 인물로 일생을 방랑하며 기발한 행동을 많이 해 많은 이야기꺼리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음악을 통한 유머, 해학, 그리고 인간의 오묘한 감정의 세계를 이처럼 그려낸 작품도 찾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틸 오일렌슈피겔은 14세기 경 독일 북부지방에 실존했던 전설적인 인물로, 독일인에게는 장난꾸러기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이 전설적이고 유쾌한 쾌남아 틸을 소재로 작곡한 유머러스한 작품이 바로 이 교향시이다. 전주와 후주가 있는 규모가 큰 론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교향시는 슈트라우스가 1894년에 작곡에 착수하여 1895년 5월 6일 뮌헨에서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5일 쾰른에서 초연되었다.
생을 희극으로 보낸 장난꾸러기 틸은 거리에서 파는 물건을 밟아 버리기도 하고 정장을 입은 부인을 때리기도 하며, 목사차림으로 설교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어린 아이로 변장하는가 하면 기사로 변장하여 여인에게 구애하다가 거절을 당하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한다. 귀족이나 학자인체 하는 자와 위선자 등을 조소하며, 인간을 냉소하고 사회에 반항한다. 심지어 너무 심한 장난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태연하게 휘파람을 불면서 병졸과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슈트라우스는 이같은 틸의 모습을 이 교향시로 그려내었는데, 틸의 성격을 비롯하여 당시의 환경과 대화, 모든 정경들을 매우 유머러스하게 묘사하고 있다.
Lorin Maazel, cond.
Oslo Philharmonic Orchestra
Thomas Dausgaard, cond.
DR(Danmarks Radio) SymfoniOrkestret
Copenhagen Concert Hall 2012
Christoph von Dohnányi, cond.
NDR Elbphilharmonie Orchester
14. June 2008
Rudolf Kempe, cond.
Staatskapelle Dresden
1970
Zubin Mehta, cond.
New York Philharmonic
1992 Movie Live
Dr. Carolyn Watson, cond.
Detroit Symphony Civic Orchestra
4/29/2014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가운데 최대 걸작을 하나만 꼽으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꼽아야겠지만, 사실 이 곡과 거의 대등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슈트라우스의 관현악곡은 이외에도 많으며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현인(차라투스트라)보다 중세 독일의 장난꾼(틸 오일렌슈피겔)을 더 좋아할 사람도 그다지 적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이 곡은 길이가 [차라투스트라]의 절반가량에 불과하고(클래식을 들으면서 졸음과 싸우는 분들 입장에서는 무시할 조건은 아닐 것이다), 원래의 소재뿐만 아니라 악상도 다분히 포괄적이고 사변적인 [차라투스트라]보다 더 직접적이고 묘사적인 요소가 강해 더 친숙해지기 쉬운 장점이 있다.
음악으로 변신한 어느 장난꾸러기의 전설
음악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 같다. 대체 ‘틸 오일렌슈피겔’은 누구인가? 전설에 따르면 그는 1300년경에 브룬스비크 근교의 크나이틀링엔(Kneitlingen)에서 태어났으며, 독일 북부에서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신성로마제국 전역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주로 언어유희로써) 위선과 어리석음, 탐욕 등의 악덕을 풍자하다가, 1350년에 페스트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장난’은 여러 민담을 통해 전해지다가 대략 16세기 초부터 책으로 출판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각국 언어로 널리 번역되었다.
슈트라우스는 1889년에 교향시 [죽음과 정화]를 완성한 뒤 극음악에 관심을 돌리던 중에 키스틀러라는 작곡가의 오페라 [오일렌슈피겔]을 접한 뒤 이 소재에 흥미를 느껴 직접 틸을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본은 완성되지 않았고, 다른 오페라([군트람])의 실패도 있어 슈트라우스는 한동안 극음악에 대한 흥미를 잃은 채 다시 교향시 작곡에 매진했다. 그러나 소재 자체에 대한 흥미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결국 1894년 가을에 작곡에 착수했고 이듬해인 1895년 5월 6일에 작업을 마무리했다.
중세의 판화에 묘사된 장난꾸러기 틸 오일렌슈피겔의 모습 <출처 : wikipedia>
이 곡은 분명 교향시이지만 슈트라우스는 ‘론도 형식의, 옛날 무뢰한의 이야기에 의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이라고만 적었을 뿐 이 곡이 교향시(사실 슈트라우스가 선호한 명칭은 ‘교향시 Symphonic poem’가 아니라 ‘음시 Tone poem’였다)임을 명기하지는 않았으며, 각 대목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 곡은 1895년 11월 5일에 쾰른에서 초연되었는데, 지휘를 맡은 프란츠 뷜너가 표제에 대해 편지로 질문했을 때도 작곡가는 ‘나는 [오일렌슈피겔]에 표제를 달 수 없습니다. 내가 각 부분에서 생각한 것은 말로 이해되지 않는 게 많을뿐더러 때론 방해되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장난꾸러기에 의한 수수께끼를 듣는 사람이 풀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답장했다. 그러나 나중에 동료 작곡가가 곡 해설을 맡게 되었을 때는 총보의 여러 대목에 설명을 써주었으며, 오늘날에는 이 설명을 토대로 곡을 이해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곡은 초연 이후로 대단히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냈는데,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초연은 문자 그대로 대성공이었다. 지휘자 뷜너가 열렬한 바그너파였으며 슈트라우스의 작품도 이전에 여러 차례 연주한 바 있었던 것도 그 요인 중 하나였다. 이 곡은 초연 뒤 넉 달도 채 되지 않아 보스턴, 런던, 모스크바 등 각지에서 공연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는 이 곡의 악보가 초연 이전에 이미 출판되어 있었던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초연 후 며칠 뒤인 11월 29일에 작곡가 자신이 지휘한 공연도 찬사를 받았으며, 아르투르 니키슈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 대접받았으며 베를린 필의 2대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다)가 지휘한 파리 공연을 참관한 드뷔시는 ‘정신병자가 써낸 새로운 음악의 한 때’라고 깎아내렸지만 니키슈의 지휘만은 격찬했다. 1896년 1월에 빈에 소개되었을 때는 ‘비평의 교황’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를 제외한 대다수 언론과 평론가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브루크너의 경우에는 상당한 흥미를 보였으나 처음 들었을 때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한 번 더 들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 곡은 니진스키 (20세기 초의 저명한 발레 무용수이자 안무가.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초연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의 요청으로 발레화되기도 했다.
이 곡은 장난꾸러기 광대를 주제로 다채롭게 진행된다 <출처 : NGD>
옛날 옛적에, 그리고…
앞서 밝혔듯이 슈트라우스는 표제에 이 곡이 ‘론도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밝혀놓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뚜렷하게 론도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이 곡은 A-B-A-C, 혹은 더 세분화해 A-B-A-C-A-B-A로 나눌 수 있다고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강의 구분이고 형식면에서는 매우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슈트라우스가 동료 작곡가(빌헬름 마우케라는 인물이다)에게 써준 설명은 해설이라기보다는 간단한 주석 정도에 불과한 것이지만, 워낙 여러 대목에 써놓아서 모아놓으면 그리 짧지는 않다. 여기서는 그 내용 전부를 싣되, 각 구절이 어느 악구에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그랬다간 너무 길어질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곡을 듣는 즐거움을 앗아가 버릴 것 같다). 각자 들으면서 상상해보시길,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ma non troppo).
‘옛날 옛적에 한 명랑한 어릿광대가 있었다 - 그 이름은 틸 오일렌슈피겔 - 그는 대단한 장난꾸러기였다 - 새로운 행동을 취한다 - 기다려라, 위선자여 - 뛰어라, 말은 시장의 여인들 속으로 - 한 걸음에 7마일이나 간다는 장화를 신고 달아나 모습을 감춘다 - 사제복을 입은 채 정열과 도덕을 강론한다 - 그러나 큰 발 밑에 불량배의 모습이 보인다 - 종교를 조롱하여 죽음에 떤다 - 기사가 된 틸은 아름다운 숙녀와 정중한 인사를 나눈다 - 사랑을 고백한다 - 예쁜 바구니가 거절을 의미한다 - 전 인류에게 복수하리라 맹세한다 - 속물 학자의 동기 - 틸은 속물 학자들에게 두세 개의 터무니없는 주제를 던져주고는 그곳을 떠나, 학자들을 당황케 한다 - 멀리서 얼굴을 찡그린다 - 틸의 속요(俗謠) - 틸의 재판 - 틸은 남의 일마냥 휘파람을 불어댄다 - 사다리를 타고 교수대에 걸려, 호흡은 멈추고, 최후의 번민. 틸의 운명은 끝났다’
‘명쾌하게’(Gemächlich)라고 기재된 F장조, 4/8박자 첫머리는 온화하고 느긋한 바이올린 선율로 시작한다. 이것이 ‘옛날 옛적에 한 명랑한 어릿광대가 있었다’에 해당한다. 이어 바이올린 트레몰로를 배경으로 호른이 ‘그 이름은 틸 오일렌슈피겔’ 악상을 연주한다. 다른 악기들이 이 주제를 받아 확장한 뒤, 클라리넷이 새로운 주제(‘그는 대단한 장난꾸러기였다’)를 연주한다.
틸 오일렌슈피겔의 조각상
이후 ‘틸 오일렌슈피겔’ 주제와 ‘장난꾸러기’ 주제를 중심으로 악상이 계속 변화하면서 틸의 행각을 다채롭게 묘사한다. 음폭을 넓히면서 급속히 상승하는 셋잇단음표는 말을 타고 시장에 뛰어드는 모습을, 목관과 비올라가 엄숙한 선율을 연주하는 대목은 사제복을 입고 나타나 설교를 늘어놓는 장면을 그려낸 것이며, 이후로 사랑을 고백한 뒤 실연당하고, 속물 학자들을 골탕 먹이는 등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러다가 작은북의 리듬 위에 금관이 강력하면서도 단조로운 동기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대목이 틸이 붙잡혀 처형되는 장면이다. 이후 곡은 조용히 끝날 듯하다가 갑자기 ‘장난꾸러기’ 주제가 등장해 강렬하고 익살스럽게 마무리된다.
이전에는 틸 오일렌슈피겔에 대한 이야기를 기존의 계급질서에 대한 하층민의 도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의 행각이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보다는 우리가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이른바 ‘상식’에 대한 비판에 가까웠다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틸의 저항정신에 대한 평가가 더 인색해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따지고 보면 상식이란 일차적으로는 다수에 의해 공유되는 가치체계이지만 그 자체가 다른 사고방식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으며, 여기에 대해 저항한다는 것 역시 가치 있는 일이다. 자유로운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네티즌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그리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틸 오일렌슈피겔’들이 아닐지?
장난꾸러기 틸 오일렌슈피겔의 모습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Strauss, Richard Georg, 1864~1949)
독일의 작곡가. 뮌헨궁정관현악단의 명 호른주자였던 아버지 프란츠.J.슈트라우스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1871년 뮌헨음악원의 교수가 되었으며, 1873년 왕립 바이에른 실내악단 주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바그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반면 브람스 음악의 동조자이기도 하였다. 리하르트는 1875년부터 궁정악장이었던 마이어에게 작곡이론을 배웠으며, 1882~85년 아버지가 조직한 소편성의 아마추어 악단에서 제1바이올린을 담당하는 등 관현악에 관한 경험을 쌓기도 하였다. 1885년부터는 마이닝겐 관현악단의 제2지휘자로 취임하였고, 이후 1889년 바이마르 궁정극장, 1894년 뮌헨궁정관현악단에서 각각 제2지휘자를 역임하고 1895년에는 뮌헨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1898~1918년 베를린 궁정가극장의 제1악장을, 1919년~24년 빈 국립가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24년부터 빈의 직위를 사임하고 객원지휘자로서 활동하며 작곡활동에 열중하였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정치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찬가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그는 나치의 요청이나 명령을 쉽게 거부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그의 일족이 유대인의 피가 섞였기 때문에 당국을 자극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1942년 전란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극장이 파괴되었을 때 뮌헨국립극장에서 《다프네》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종전후 연주활동을 재개하였으나, 1946년 맹장수술후 체력이 떨어진 가운데서도 1947년 스위스와 영국을 연주여행하였으며, 1948년 비나치화 재판에서 무죄가 인정되었으나, 1949년 심장장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독일 낭만파 최후의 거장이며 지도자로서 교향시와 가극에 대작을 남겼는데, 처음에는 고전적인 작풍이었으나, 뒤에 신낭만주의로 전향하여 지휘활동을 하는 한편, 교향시 《돈 주앙》 《죽음과 변용》 등을 작곡하여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다졌다. 그는 작곡가로서 종교음악을 거의 작곡하지는 않았지만 오페라, 교향시, 가곡등 그외의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의 음악은 바이에른 출신답게 명랑하고 밝은 기분이 감돌고 적절한 성격묘사와 감정표출, 독특하게 흐르는 선율이 있다. 오페라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으나, 바그너보다도 감정적, 관능적이며 동적이다. 특히 《장미의 기사》에서 빈적인 정서와 고전파적 감각을 담아 20세기 초기의 오페라로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는 20세기 전반 최대의 작곡가의 한 사람이기는 하나, 낭만주의적 경향이 남아 있어 현대 음악에 미친 영향은 적다.
대표작품으로 관현악곡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교향시 《돈 주앙》 오페라 《장미의 기사》 《살로메》 교향곡 《알프스 교향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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