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Harold en Italie (Harold in Italy), Op.16
베를리오즈 / 이탈리아의 해롤드
Louis Hector Berlioz, 1803∼1869
Complete
Sir Thomas Beecham, cond.
Royal Philhamonic Orchestra
I. "Harold aux montagnes" 00:00II. "Marche des pèlerins" 15:56III. "Sérénade" 23:27IV. "Orgie de brigands" 30:00
Wolfram Christ, viola
Lorin Maazel, cond.
Berliner Philharmoniker
Live Concert
Gilad Karni, viola
Nicolae Moldeveanu, cond.
Transylvanian Philharmonic Orchestra
2012 Cluj - Romania
Anibal Dos Santos, viola
Francesco Beli, cond.
Orquesta Filarmónica de Bogota (Bogota Philharmonic Orchestra)
23 October, 2015
제1악장 <산 위의 헤럴드> (Harold in the Mountains: Scene of melancholy, happiness and joy)
이탈리아 각지의 산을 방황하며 고통스럽게 삶과 세계를 탐험하는 헤럴드를 그린다. 느리고 비감 어린 오케스트라의 서주 후에 등장하는 비올라의 노래는 간절함과 유장함을 담고 있다. 구원을 찾는 젊은이의 구도자의 심경과 방황의 마음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이 선율은 곡 전체의 고정 악상으로 등장한다.
Yuri Bashmet, viola
Valery Gergiev, cond.
Orchestra of the Mariinsky Theater
제2악장 <순례자의 행진> (March of the Pilgrims singing their Evening Prayer)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을 통해 죄를 참회하면서 구원을 바라는 순례자들과 만난 헤럴드. 그 속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까. 코랄풍의 경건한 울림으로 시작된다.
제3악장 <세레나데> (Serenade of an Abruzzi mountaineer to his beloved)
아브루치에서 듣는 세레나데. 감미로움과 감각적인 울림을 통해 잊혀졌던 쾌락과 세속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듯하다. 다양한 악기들이 절묘하게 조합하여 베를리오즈 특유의 서정성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제4악장 <건달패의 술판> (Brigands' orgy: Reminders of the preceding scenes)
헤럴드는 건달들의 술판에서 어지러움과 폭력을 보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이끌리는 헤럴드 자신의 욕망과 그를 거부하는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비올라의 주제가 거듭 등장하며 앞의 악장들과 달리 빠르고 격정적인 울림과 흐름이 주목할만하다.
Portrait of Byron(1788-1824)
베를리오즈에게 바이런은 깊은 예술적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낭만주의 시대 영웅적 시인이자 당대 유럽 젊은이들의 가슴을 들끓게 했던 바이런의 <차일드 헤럴드의 편력>을 음악화 하려는 의욕은 파가니니의 비올라 협주곡 위촉을 통해 현실화된다. 여기에서 비올라를 독주 악기로 선택한 것은 새로운 비올라를 구한 파가니니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가니니가 독주 부분에 불만을 가져 이 곡을 거부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부분을 리스트가 피아노로 옮긴 2중주의 형태도 널리 소개되어 있으며 색다른 멋이 더해진다.
베를리오즈는 파가니니가 원했던 기교 과시용 비올라 협주곡은 그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대신 그는 표제 교향곡과 같은 성격을 지닌 장대한 곡을 완성한다. 삶과 세상에 대한 비관 속에서 탈출구를 찾아보려는 젊은이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방황, 다채로운 편력을 노래한 바이런의 작품 가운데 이탈리아편을 주목하여 음악화 한다. 멀티미디어적 감각을 지녔던 베를리오즈에게 비올라는 시의 주인공이자 방황하는 헤럴드를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베를리오즈는 리스트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의 파노라마와 같은 음향 세계를 선구적으로 다채롭게 그리고 있다. 1830년 문제작 <환상교향곡>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지, 4년 후 1834년에 나온 작품으로 과감한 시도와 착상이 베를리오즈 특유의 세련된 오케스트라 술과 융합된 걸작이다.
바이런(Byron, 6th Baron, 1788.1.22~1824.4.19) 영국의 낭만파 시인
런던 출생. 아버지는 미남이었으나, ‘미치광이 존’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방종한 가난뱅이 사관(士官)으로, 전처의 자식이 있었다. 후처로 들어온 바이런의 어머니 캐서린 고든은 스코틀랜드의 어느 부호의 재산 상속인이었으며, 바이런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1791년 아내의 재산마저 탕진해 버린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방랑하다가 죽자,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항구도시 애버딘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오른 다리가 기형인 아들에게 냉담하기도 하였으나 독실한 청교도(淸敎徒)인 유모 메이 그레이의 캘빈주의의 종교교육을 받아 후일 이 시인의 악마주의(惡魔主義)는 심각한 내부적 반항으로 승화되었다.
1798년 제5대 바이런 남작(男爵)이 죽음으로써 제6대를 상속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노팅엄셔의 낡은 뉴스테드 애비의 영주(領主)가 되었다. 이듬해 런던에 올라와 다리지의 예비 칼리지를 거쳐 해로 스쿨에 다녔다. 다리는 부자유하였으나 수영과 크리켓도 잘 하였다. 1805년,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가, 시집 《게으른 나날》(1807)을 출판하였다. 이 시집에 대한 《에든버러 평론》지의 악평에 분개하여 그는 당시의 문단을 비평한 풍자시 《잉글랜드의 시인들과 스코틀랜드의 비평가들》(1809)로 울분을 풀었다.
그 후 생활태도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모험의 꿈을 안고 소작인의 아들과 종복(從僕), 친구 홉하우스를 데리고 배로 고국을 떠났다. 그는 이 때 이미 성년(成年)으로 상원(上院)에 의석을 두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육로로 에스파냐를 돌아보고, 몰타섬과 알바니아를 거쳐 아테네와 마라톤에 들렀으며, 스미르나에 머물면서 장편서사시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遍歷)》(1, 2권, 1812)을 썼다. 그 후 2년 남짓한 긴 여행을 끝마치고 1811년에 귀국하였다. 1812년 상원에서 산업혁명기 방직공의 소요탄압(騷擾彈壓)에 항의하는 열변을 토해 이름을 떨쳤으며, 또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의 출판으로도 생의 권태와 동경을 실은 분방한 시풍과 이국정서(異國情緖)가 큰 호응을 얻어 일약 유명해졌다.
그 후 스콧의 뒤를 이어 담시(譚詩) 《아바이도스의 신부》(1813) 《해적》(1814) 《라라》(1814) 등을 잇달아 출판하였으며, 반속적(反俗的)인 천재시인, 미남인 젊은 독신귀족이라 하여 런던 사교계의 총아로 등장하였고, 캐롤라인 램 남작부인, 이복 누이 오거스터 리 부인, 옥스퍼드 백작부인 등과 관계를 가졌다. 1815년 양가의 딸인 애너벨러 밀뱅크와 결혼하였으며, 《헤브라이 영창(詠唱)》(1815) 《파리지나》(1816) 《코린트의 포위》(1816)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딸 출생 후 아내의 별거 요구로 1816년 고국을 떠났다. 그 해 여름을 셸리 부부와 스위스에서 지내면서,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3권, 1816) 《실롱의 죄수》(1816) 등을 썼다. 그 후 베니스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도 《맨프렛》(1817) 《타소의 비탄》(1817) 《베포》(1818)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4권, 1818) 《마제파》(1819) 등을 썼으며, 또 대작(大作) 《돈 주안》(1819∼1823)에 착수하였다.
셸리가 영국에서 온 이듬해인 1819년에는 테레사 귀치올리 백작부인과 동거생활을 하였는데, 그 동안에도 《돈 주안》을 계속하여 썼으며, 《단테의 예언》(1821)과 4편의 시극(詩劇) 《마리노 팔리에로》(1820) 《카인》(1821) 《포스카리 2대》(1821) 《사르다나팔루스》(1821)를 썼다. 1822년에 셸리와 리헌트를 불러 《리버럴》지를 발간하여, 풍자시 《심판의 꿈》(1822) 등을 발표하였으나, 셸리의 익사(溺死)로 4호밖에 내지 못하고 폐간하였다. 1823년 그리스 독립군을 도우러 갔다가, 고난 끝에 1824년 4월 미솔롱기온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러나 바이런의 비통한 서정, 습속에 대한 반골(反骨), 날카로운 풍자, 근대적인 내적 고뇌, 다채로운 서간 등은 전유럽을 풍미하였고,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그의 작품이 널리 애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