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Trois Gymnopédies
에릭 사티 / 3개의 짐노페디
Erik Satie (Éric Alfred Leslie Satie), 1866~1925
Erik Satie, piano
Daniel Varsano, piano
Jean-Yves Thibaudet, piano
Orchestral(관현악)
Gymnopedie 1,2,3 Gnossienne 1,2,3,4,5,6
Erik Satie - Piano Dreams - 01 - Gymnopedie N°1
Erik Satie - Piano Dreams - 02 - Gymnopedie N°2
Erik Satie - Piano Dreams - 03 - Gymnopedie N°3
Gnossienne No. 1
Gnossienne No. 2
Gnossienne No. 3
Gnossienne No. 4
Gnossienne No. 5
Gnossienne No. 6
Pascal Rogé, piano
Gymnopedie No. 1 Lent et douloureux(느리고 비통하게)
Lajos Lencses, oboe
Giselle Herbert, harp
Anders Miolin, alto guitar
Aldo Ciccolini, piano
Gymnopedie No. 2 Lent et triste(느리고 슬픈)
Gymnopedie No. 3 Lent et grave(느리고 무거운)
1번 느리고 비통하게 Lent et douloureux
뉴에이지의 시초가 어떤 누구 하나에 의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명상적 특성, 간결미, 맑고 깨끗한 화성, 절제된 멜로디, 신비스러움 등의 모습이 바로 1866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에릭사티(Eric Satie)의 음악에서 잘 나타난다. 약 150여년 전 당시의 음악매니아 및 작곡가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음악으로 치부되었던 작품들이 지금의 뉴에이지를 예견하고 있었다.
뉴에이지 음악은 1990년대의 중/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다원론적 경향에 묘하게 일치된 점이 많았다. 사실 그 음악은 요한 파헬벳의 '카논'이나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등에서도 일찌기 그 조짐이 보였었지만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못했다가 최근에서야 몇몇 아티스트들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 대중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변화기 있었기 때문이다.
Gymnopedies(1888)
"Gymnopedie".....복수 여성 명사. 그리스어의 '금노스:벌거숭이'와 '파이스 또는 파이도스:어린이'에서 유래된 말. 고대 그리스의 리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행해진 나체의 어린이 또는 남성에 의한 아폴론이나 박카스를 찬미하는 춤을 말한다.
[라루스 백과사전]에 의하면 짐노페디는 아폴론을 찬양하는 축제하고 한다. 짐노페디는 지방의 작은 축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큰 규모였으며, 핀다로스의 회고에도 올림피아, 퓨티아, 이스토미아, 네미아 등 여러 경기와 함께 그 명칭이 언급될 정도이다. 어쨌든 이 말에는 나체와 소년이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사티는 의식적으로 고대어를 찾아낼 만큼 청소년 교육에 있어 충기의 엄격함과 혹독한 훈련으로 잘 알려진 스파르타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사티의 작품 중 '짐노페디'와 '찌그러진 춤'만이 진정한 의미로 하나의 곡상에 의한 세 개의 변주곡이라 할 수 있다. 공통 부문은 장.단조의 리듬에 의한 반주에 실려서 조용히 흐르는 선율선이며 이것은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변화가 없다.
사티 작품의 거의 대부분은 세 개씩 묶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히 '3'이 많지만, '7'도 있다.
드뷔시는 짐노페디의 제1곡과 제3곡을 관현악 곡으로 순서를 바꾸어 편곡했다. 이 관현악 편곡은 '짐노페디' 본래의 성격을 왜곡했다 해서 비난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드뷔시는 친구 사티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었고 사티에게 도움이 되었다. 사티는 드뷔시의 관현악보를 사보하기까지 했는데 전혀 수정하지 않고 그 악보를 베꼈다 한다.
짐노페디를 연주할 때 곡이 일정한 속도 이상으로 느려지면 레가토나 가락이 끊어지게 된다. 꼭 필요한 레가토나 가락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속도를 발견해야 한다. 악보에 지시된 메트로놈 속도는 사티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고 참고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이전에 출판된 악보에는 이런 지시가 없었다.
작품의 구성
3개의 짐노페디는 초기의 사티를 대표하는 가곡군으로 유명하다. 그에 앞서〈3개의 사라방드〉가 샤브리에의 작품 등에도 이미 알려진 비해결 화음의 연속에 의한 어두운 음향을 가진 데에 비해서, 단음으로 연주되는 애조 띤 선율선과 그것을 지배하는 섬세하고 선법적인 불협화음만으로 구성되는 〈짐노페디〉는 획기적인 작풍과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짐노페디 Gymnop die〉라는 말은 고대 그리이스에서 나체의 남자가 춤추던 의식 무도를 가리키는 'Gymnopaedic'에서 사티가 만든 말이다.
'3개의 짐노페디' 는 청정지대에서 길어 올린 맑은 샘물처럼 세속의 때가 묻지 않고 투명하다. 현란한 기교와 숭고하고 장엄한 분위기만을 음악의 미덕으로 삼던 시류에 반기를 든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솔직담백하다. 멜랑콜릭한 부분이나 밝고 쾌활한 악절이 모두 그렇다.
짐노페디는 고대 스파르타의 연중 행사의 하나인 제전으로 나체로 젊은이들이 합창과 군무로써 신을 찬양하는 것을 말한다. 샤티는 이 이색적인 소재를 프로벨의 소설 <사란보>의 일부에서 착상하여 1888년에 3곡의 조곡으로 작곡하였다. 그후 드뷔시가 이 조곡의 1번과 3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현재 연주되고 있는데, 드뷔시는 3번을 1번으로 하고 있다. 관현악 반주의 하프 연주도 감미롭지만, 역시 관현악 반주의 바이올린 연주도 무척이나 감미롭다. 여기서 바이올린은 약음기_울림을 작게 하는 장치를 끼고 연주하고 있다.
짐노페디 제1번 느리고 비통하게 Lent et douloureux(i=66) 3/4박자.
왼손이 낮은 G음, D음을 시이소식으로 반복하는 4마디로 도입한 후, 단순한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전30마디로 구성되는 악절이 함축적인 언어로 되풀이되는 모두 78마디의 소품이지만, 이들을 형성하는 짧은 프레이즈의 길이가 통일되지 않았다는 점과 비기능적인 화성이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불안감을 자아내어 진부함을 피하고 있다.
1888년에 작곡된 이 곡은 플로베르의 소설 < 살랑보 > 의 일부에서 착상된 것이다. 3개의 짐노페디 중, 반복되는 리듬이지만 이국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다.
Aldo Ciccolini 알도 치콜리니
나폴리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 양친이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에 4 세 때부터 피아노의 초보를 배웠다. 1934년 9세 때 작곡가 칠레아에게 인정되어, 규정보다 4년이나 빨리 나폴리 음악원에 입학이 허가되어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했다. 1940년에 먼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또 1943년에 작곡과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47년에는 모교의 교수로서 초청되었다. 1949년에 롱-티보 국제 콩쿠르에 우승하여 일찌기 그 재능을 주목 받고, 1950년에 미트로풀로스 지휘로 뉴욕 필과 협연하여 미국에 데뷔했다. 그 후 1960년경부터 주로 파리에 살며, 유럽 전지역에 걸쳐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치콜리니는 무척 많은 레퍼터리의 소유자이다. 디스크 그래피를 보아도 거의 피아노곡이라 이름이 붙은 것은 모두 녹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느 것이나가 높은 수준의 연주로, 그의 레코드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최근은 특히 사티의 스페셜리스트라는 말을들으며, 그의 《사티 피아노 음악 전집》은 오늘날 사티 붐을 일으킨 느낌이 있다. 날카로운 리듬과 빛나는 음색으로 화사한 연주가 매력이다.
Erik Satie 에릭 사티(1866 ~ 1925)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는 당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형식과 권위를 깨뜨리고자 했던 독창적인 작곡가였다. 그의 초기대표작에 속하는 3개의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 양식에 심취해 있던 사티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으면서 단순한 듯하지만 극히 교묘한 선율로 작곡되었다.
우리에게 소설 '개미' '뇌' 등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소설 '아버지들의 아버지'를 쓰면서 드볼작의 신세계 교향곡과 함께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수 십번 들으면서 집필했다고 알려진 곡이기도 하다.
프랑스 근대의 독특한 작곡가이다.
해운업자의 아들로 옹프루르에서 태어나, 오르가니스트 비노로부터 피아노와 그레고리오 성가와 신비 사상에 관한 기초를 공부했다. 색다른 성격의 숙부로부터 성격적인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1878년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아카데믹한 교풍을 싫어하여 중퇴한 다음 안데르센 동화를 탐독하였다. 1888년에 피아노곡 《3개의 짐노페디》를 발표하였고, 1890년에는 조표(調記號)와 마딧줄(小節線)을 폐지한 《3개의 그노시엔느》를 작곡했다.
이것은 드뷔시나 라벨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피아노를 쳐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장미 십자단이라는 종교단체에 들어가 《별의 아들》(1891)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미사》(1895)를 작곡했다. 1898년에 파리 교외의 빈민가 아르퀴유-카샹으로 거주를 옮겨 동회 일이며 아동 복지를 위해 힘쓰는 한편, 밤에는 몽마르트르의 흥행장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샹송을 작곡했다.
1903년에 드뷔시로부터 ‘좀 더 형식을 생각해야 한다’는 충고를 받고, 피아노 연탄용의 《배(梨) 모양을 한 3개의 피아노곡》을 써서 이 충고에 보답했다. 1905년, 30살 때에 뱅상 댕디가 주재하는 스콜라 카토룸에 학생으로 입학하여 대위법과 이론을 연구하고 1908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1910년에 독립음악협회에서 ‘사티의 밤’을 개최했는데, 이로부터 그의 명성이 급속히 높아갔고, 사티주의자도 증가해갔다.
《관료적인 소나티네》, 《바싹 마른 태아》, 《엉성한 진짜 전주곡(개를 위한)》이라는 기묘한 제명들이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피아노곡을 발표하였다. 또한 권총이나 사이렌, 비행기의 폭음까지 도입한 발레 음악 《파라드》(1917) 등으로 충격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파라드》는 장 콕토가 대본을 쓰고, 피카소가 무대 장치와 의상을 맡고, 마시느의 안무에 의해서 디아길레프 무용단이 상연했는데, ‘큐비즘의 발레’라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만년에는 교향적 극작품 《소크라테스》 등으로 간소한 작풍에 이르러서 후의 신고전주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영화음악이나 발레에도 손을 댔으나 1924년에 성 조세프 병원에서 타계했다.
사티의 작품은 드뷔시, 라벨, 프랑스 6인조, 아르쾨유 악파의 젊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음악성은 간결하고 순수하여 이내 친숙해 진다. 정신적으로는 반골적이지만, 낭만적인 정감이나 철학적인 정신성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근년에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