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스트라빈스키 / 무용모음곡 '불새'

박연서원 2017. 6. 23. 09:34

The Firebird Suite(L'Oiseau de feu)

스트라빈스키 / 무용모음곡 '불새'

Igor Fedorovich Stravinsky, 1882∼1971



이어듣기 (14번부터)

1. Introduction
2. Kashcheis Enchanted Garden

3. Appearance of the Firebird

4. Dance of the Firebird

5. Tsarevich Captures the Firebird

6. Supplication of the Firebird

7. The Princesses Game

8. Sudden appearance of the Tsarevich

9. Khorovod
10. Tsarevich enters Kashcheis Palace

11. Magic Carillon

12. Dance of Kashcheis Retinue

13. Infernal Dance

14. Disappearance of the Palace - End

Vladimir Fedoseev, cond.

Moscow Radio Symphony Orchestra


James Levine, cond.

Chicago Symphony Orchestra


Frederick Fennell, cond.

Tokyo Kosei Wind Orchestra

April 20th, 2000 / Tokyo Bunka Kaikan


1. Introduction


2. Kashchei's Enchanted Garden


3. Appearance of the Firebird

    pursued by Ivan Tsarevich


4. Dance of the Firebird


5. Ivan Tsarevich Captures the Firebird


6. Supplication of the Firebird


7. The Princesses Game (Game of the Princesses)

    with the golden apples


8. Sudden appearance of the Tsarevich


9. Khorovod (Round dance of the Princesses)


10. Tsarevich enters Kashchei's Palace (Daybreak)


11. Magic Carillon,

      appearance of Kashchei's guardian monsters and capture of Ivan Tsarevich


12. Dance of Kashchei's Retinue under the spell of the Firebird


13. Infernal Dance of all Kashchei's subjects


14. Disappearance of the Palace - End (Lullaby of the Firebird)


15. Collapse of Kashchei's palace and dissolution of all enchantments -

      Reanimation of the petrified pisoners - General rejoicing


1. Introduction: L'oiseau de feu et sa danse (불새와 춤)


2. Variation de l'Oseau de feul (불새의 변주)


3. Ronde des Princesses (공주의 원무)


4. Danse infernale du roi Kachtchei (카츠체이 왕의 죽음의 춤)


5. Berceuse (자장가)


6. Final(춤곡)


한낱 무명 작곡가였던 스트라빈스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던 발레음악 <불새>는 스트라빈스키의 나이 28세 때인 1910년 작품이다. 작곡가 경력 초기의 최고 걸작에 속하는 이 작품은 근대 무용예술의 거목 디아길레프가 새로 창단한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 러시아의 유명한 전설에 기초하고 있어 러시아 민요 선율들을 풍부하게 들을 수 있으며, 격정적인 감정 분출, 현란한 색채와 약동하는 리듬이 가득하다.

세계적 명성의 로열 발레가 완벽한 춤의 세계를 보여주며, 특별히 `결혼`의 안무는 니진스키의 여동생인 전설적인 안무가 니진스키의 것에 따르고 있는데 정말 황홀하다. 3번도 작곡되었으나 그 곡들은 거의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는 실정이다.



발레음악 "불새"


장르 : 발레
음악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대본 : 미하일 포킨(Mikhail Fokine)
초연안무 : 미하일 포킨
초연안무 및 장소 : 1910년, 파리 오페라극장


러시아의 민화를 테마로 해서 불새의 도움으로 마왕에게 잡힌 왕녀들을 구출하기까지의 경위를 환상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제1장]


Arthur Arnold, cond.

Moscow Symphony Orchestra


생물들이 동료를 부르는 듯한 소리, 메아리소리, 그리고 먼 곳에서의 천둥소리가 계속 울려퍼지는 가운데 춤추듯 날아오르는 새소리가 들린다. 무대에 있는 한 그루의 나뭇가지에는 금빛 과일이 가지가 휘어질 듯이 달려 있다. 그리고 새 한 마리가 무대 뒤쪽을 향해 날아간다. 그때 사냥꾼 차림의 왕자가 활을 들고 나타난다. 푸드득 날아오르는 소리와 함께 빛을 발하면서 불새가 나타나자 왕자는 시위를 당긴다. 날아갔던 불새가 돌아오자 왕자는 재빨리 붙잡고 불새는 도망치려다 지쳐서 깃털 하나를 내놓고 풀려난다.



[제2장]


Arthur Arnold, cond.

Moscow Symphony Orchestra


숲속 깊숙한 곳에 이어진 계단을 왕자가 올라가자 구슬픈 음악이 들리면서 12명의 소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소녀들이 마법의 나무를 흔들자, 나무에 매달린 금사과가 떨어지고 왕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귀하게 보이는 여인이 마법사의 성이므로 빨리 떠나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 왕자는 떠나려 하지 않는다. 갑자기 숲이 환해지면서 마귀 무리가 몰려온다. 그들은 왕자를 붙잡고 마법사가 오기를 기다린다. 곧이어 마법사가 나타나 마법을 걸려고 하지만 불새의 깃털을 흔들자 깊은 잠에 빠져버린다.



[제3장]


Arthur Arnold, cond.

Moscow Symphony Orchestra


무대가 밝아지면서 마법사의 영토였던 숲은 사라지고 불새도 사라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소녀들이 늘어선 가운데 왕자 이반이 사랑했던 소녀가 내려온다. 이어서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건네 받고 사람들은 그를 군주로 인정한다.

당시 아직 무명이었던 스트라빈스키는 이 발레음악으로 일약 온 유럽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되었고, 특히 그 색채적인 관현악법과 리듬의 다양함이 20세기의 음악에 끼친 영향은 크다.



스트라빈스키 [Igor Fedorovich Stravinsky, 1882 ~ 1971]


프랑스, 이어서 미국으로 귀화한 러시아의 작곡가. 페테스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의 유명한 베이스 가수 표도르 스트라빈스키 Fëdor Ignat'evich S.의 아들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1905)하는 한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문하에서 작곡을 공부했다(1902~08). 그의 개성이 분명히 나타나 있는 최초의 작품 환상적 스케르쪼와 불꽃은 질로티 콘서트에서 초연(1909. 2)했는데 그곳에는 디아길레프가 와 있었다. 이 만남으로 인해 1929년 디아길레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두 사람의 협력의 시작이 되었고 스트라빈스키가 발레에 눈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디아길레프는 불새(1909~10)의 작곡을 스트라빈스키에게 위촉했고 그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렸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러시아 음악을 일약 국제적인 무대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발레를 초연할 때 파리에 온 스트라빈스키는 이때부터 겨울은 클라렌스(스위스)에서, 여름은 우스틸루크(볼린, 러시아)에 있는 아내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스틸루크에서 그는 이교 러시아의 한 폭의 그림인 봄의 제전을 시작했으나 한 피아노협주곡의 작곡으로 인해서 중단되었다. 그리고 이 피아노협주곡은 디아길레프의 충고에 따라 페테스부르크의 해군 광장에서 벌어지는 민중의 육식주(肉食周)의 제전과 인형극의 가장 유명한 등장인물의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작품 페트루슈카(1911)가 되었고 이 작품에 의해서 니진스키 Vatslav Nizhinski?가 명성을 거두게 된다. 봄의 제전(1913)이 샹젤리제 극장에서 야기시킨 스캔들은 이듬해의 콘서트 형식에 의한 초연의 성공을 생각한다면 음악보다는 무용과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이 작품에 의해서 스트라빈스키는 시대의 최첨단에 나서게 된다. 그 입장이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그는 쇤베르크와 함께 혁명적 음악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작품은 그 이후 더 이상 작곡되지 않았다. 1912년 완전히 러시아를 떠나 몬테 카를로에 본거지를 둔 러시아 발레단과 이동을 같이 한 스트라빈스키는 드뷔시, 라벨, 사티, 팔랴, 그리고 카젤라 등과 알게 된다. 한편 보(스위스)의 은신처에서 결혼(1914~17)과 〈무대공연을 위해 연주되고 불려지는 부를레스크풍의 이야기〉인 여우(1916~17)를 작곡하던 중 스위스의 시인 라뮈 C. F. Ramuz를 알게 되는데(1915), 그가 작곡중인 작품의 대본을 라뮈가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형태로 두 사람의 협력이 성립되었으며, 또 라뮈와는 병사의 이야기가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대본을 쓴 이 작품은 나레이터와 7인의 연주자에 의한 순회 극장을 위한 것으로 인간의 영혼 소유를 둘러싼 선과 악의 싸움을 테마로 하여 약간 신랄한 유머를 다루고 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스위스에 있던 스트라빈스키를 놀라게 했고, 이 혁명에 의해서 그는 재산을 잃었으며 1962년이 될 때까지 고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1920). 이 조국 상실과 밀접하게 결부되는 형태로 그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은 유럽적인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퍼져 나갔으며 또 그는 종교적 문제의 색채를 강화시키는 보편성의 엄격한 탐구로 바뀌었다. 디아길레프의 주문에 따라서 페르골레지와 그밖의 주제에 기초하여 만든 풀치넬라(1919)와 함께 난봉꾼의 행각(194851)까지 계속되는 이른바 〈신고전주의〉의 시대가 시작된다.

1923년 이후 물질적인 이유에서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니스트로 변신하려고 했고(이것이 피아노곡의 작곡으로 이어졌다), 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1925년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1927년에는 자신의 작품을 녹음했다. 1934년에 프랑스에 귀화한 뒤 미술아카데미의 자리를 지원(1936)했으나 플로랑 슈미트에게 빼앗겼다.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쳐서 하버드 대학에서 〈음악의 시학〉에 대한 강의를 요청받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헐리우드에 거주했다. 그리고 1945년에 미국의 국적을 얻은 후에 죽을 때(1971)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62년 미·소 문화교류의 형태로 다시 조국의 땅을 밟았는데 이것이 〈현대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서 환영받는 개선여행이 되었다. 당시에 그는 1953년 이래 로버트 크래프트의 영향 아래 음열기법을 사용했으나 이 기법은 카발레프스키와 하차투리안과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고 비난을 받았다.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창작은 관례적으로 러시아 시대, 신고전주의 시대, 음열 시대 등 3기로 나눈다. 사실 불새에서 결혼까지의 스트라빈스키는 그가 다룬 주제나 또는 선율과 리듬이란 점에서도 조국의 문화적 유산에서 착상을 얻고 있다. 그러나 1914년 스트라빈스키는 후에 결혼, 프리바우트키, 고양이의 자장가, 4개의 무반주 합창곡의 여성부에서 사용하게 되는 자료를 모으기 위하여 러시아에서 자료 수집 여행을 기획하고,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1876년부터 1878년에 걸쳐서 모은 민족음악이 기입되어 있는 노트를 원용(cf. 페트루슈카)했지만, 민간 전승의 음악적 소재를 그대로 차용했다기 보다는 재창조한 것이고(가령 결혼에서 그대로의 형식으로 사용한 민중의 노래의 주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 소재를 초월하여 추상(抽象)에까지 이르고 있다. 실제로 보리스 드 슐뢰저 Boris de Schloezer가 지적했듯이 스트라빈스키 예술의 폴리포니나 조성적 구조, 화성적인 복잡성까지도, 또 싱코페이션의 리듬도 러시아적인 것이 아니다. 특징들이 모두 서구의 몇몇 전통의 달성을 보여주고 있다. 확장된 음정과 화성적인 핵으로서의 증4도(cf. 불새, 페트루슈카)에 대한 그의 선호, 또 불록별의 서법(봄의 제전)에 대한 선호는 미요 이전의 결정적인 다조성의 창시로 그를 인도했다. 이론적으로는, 그가 무조성에 도달한 것은 봄의 제전에서가 아니라 이미 불새의 춤과 카체이의 지옥 장면에서이다. 그러나 그는 불협화를 부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음악을 풍요하게 한다고 보았다. 드뷔시에 의해서 강조된 스트라빈스키의 야만성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리듬에 의해서 생기는 새로움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싱코페이션과 비대칭적인 리듬, 악센트의 이동, 연속적인 단절, 3박자와 2박자의 대립을 수반하는 리듬적 구도의 동시성(폴리리듬)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원시주의는 또 다이내믹한 대조와 기악 주자의 증원(봄의 제전의 오케스트라의 관악기 주자는 38명)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한편 스트라빈스키는 쇤베르크의 가르침(그는 1912년에 베를린에서 달의 피에로의 초연 때 참석했다)을, 형식이 간결하다는 면(3개의 일본의 서정시[1912], 현악4중주를 위한 3개의 소품[1914], 클라리넷 독주를 위한 3개의 소품[1919])과 실내악 분야에서의 종종 예외적인 기악편성(여우, 병사의 이야기, 결혼)의 악기법적 탐구에서 계승하고 있다. 또 스트라빈스키는 이 시기부터 종래의 장르들을 음악적 문제로 삼았고, 후에 바르눔과 바를레의 코끼리를 위한 서커스 폴카(1942)를, 그리고 브로드웨이의 쇼 프로듀서인 빌리 루스 Billy Roose를 위하여 발레의 정경(1944)을 작곡하게 된다. 페트루슈카에서 요제프 란너의 왈츠나 〈그녀는 의족이었다 Elle avait un' jamb'de bois〉의 유명한 노래가 콜라주 수법에서 왔다면, 병사의 이야기에서의 재즈의 영향(거기에는 또 파소도블레, 탱고, 왈츠도 있다)은 그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이 래그타임은 이미 집단적 표현과 보편성의 탐구이고, 11개의 악기를 위한 래그타임, 피아노 래그 뮤직 및 우디 허먼의 앙상블을 위한 에보니 협주곡(1946)을 예시하고 있다. 도대체 이만큼 강한 개성이 파스티쪼(혼성곡)로 향할 수 있었을까? 스트라빈스키의 행적은 1919년 이후 확실히 대중과 비평가들을 크게 당황하게 했다. 실제로 스트라빈스키의 방법은 페르골레지의 주제에 기초한 풀치넬라에 의해서 시작되는 로의 회귀로써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화성과 악기 편성면에서 독자적인 점을 보임으로써 그는 자신의 개성을 지키려 했다. 드뷔시를 추모하여 헌정된 관악기를 위한 심포니(1920)와 함께 마브라(1922)에 의해서 스트라빈스키는 잃어버린 이 세상에 대한 이별의 말처럼 조상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이 마브라라는 작품은 푸시킨의 스토리에 의한 1막의 오페라 부파로서 글린카, 그리고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양식상의 관례에 기초하고 있다.

관악8중주곡(1922~23)은 순수한 실내음악으로서의 회귀를 보여주고 있지만 특히 이 작품은 음열적인 작품에까지 존속하게 되는 폴리포니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선적인 대위법을 위하여 색채에 기초한 탐구를 버리고 그 결과, 애매한 대위법과 박자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바흐로부터의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이 소재를 질서있게 하기 위한 구도에 대한 관심에 의해서 스트라빈스키는 이 3중의 일(선, 화음, 율동)이 가능한 악기, 즉 피아노를 전면으로 내밀게 되었다. 종종 2성부의 피아노 서법은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협주곡(1923~24)에서는 라이프찌히의 칸토르를 연상케 하고(스트라빈스키는 바흐의 오르간 코랄의 하나를 음성과 악기를 위한 것으로 편곡했다), 피아노 소나타(1924)의 아다지에토의 장식은 18세기 프랑스의 클라브생곡 작곡가(라모, 그는 또 뮤즈의 신을 거느리는 아폴론에서도 원용했다)의 양식을 연상시킨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3번의 친밀한 성격은 후에(1938) 협주곡 E♭조의 대위법적 정신을 이끌게 된다(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도 참조). 이렇게 하여 시편 교향곡(1930)의 제2악장의 4성부 푸가에서 볼 수 있는 폴리포니의 극치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 곡은 합창과 오케스트라 사이의 2중 푸가로 끝나고 있다. 이 회귀는 고전주의적인 3부 형식으로의 회귀이기도 하다(8중주곡,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카프리치오[1929], 바이올린협주곡[1931], 소나타 형식의 제1악장과 스케르쪼 악장을 가진 교향곡 C조[1939~40]). 이들 작품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점차 그 엄격성을 맑고 명랑하게 완화시켜 보려고 했다. 그 최고의 성과가 바로 3악장의 심포니(1945)로, 거기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베토벤의 창조적 에너지를 재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이와 같은 틀 속에서도 고전적 폴리포니와 복조성의 결합을 단념하지 못했던 것 같다(cf. 현악 4중주를 위한 콘체르티노[1920], 교향곡 C조,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943]). 조지 발란신 George Balanchine을 위한 발레음악 오르페우스(1947)는 몬테베르디를 통해서 그가 발견한 중세와 르네상스 음악으로의 회귀를 보여준다(그는 또 제수알도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당시의 정신에 따른 즉흥적인 편성의 사용, 폴리포니의 어떤 준엄성, 그리고 선법어법 등은 거기에서 유래했다. 미사(1945~47)도 또한 마쇼나 비잔틴 음악을 참고하고 있으며, 특히 글로리아 합창에서 독창과 응창이 교대로 나타나는 부분에서 같은 정신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시편 교향곡(1930)에서 서구 음악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의도가 보이고 있다. 즉 살모디의 사용과 그레고리오 성가의 정신을 따른 좁은 성역의 노래의 사용, 객관성을 보증하는 원격화의 요소인 동시에 의식상의 소재이기도 한 라틴어와 각종 교회 양식의 이용 등이다. 이 성서적인 주제는 소포클레스에게서 차용한 신화적 주제 오이디푸스 왕과 쌍을 이룬다. 콕토에 의해서 번안되었고 그것을 다시 스트라빈스키의 요구에 따라 장 다니엘루 Jean Daniélou가 라틴어로 번역한 오페라 오라토리오는 극히 축소되어 표현이라기보다는 거의 하나의 다큐멘터리라고 할 만큼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구성을 보이고 있다(서곡도 간주곡도, 또 레치타티보도 아니다). 그리고 난봉꾼의 행각은 모짜르트(돈 조반니)에서 글룩과 베르디를 통해서 구노에 이르는 서정극의 전통을 구제하려는 최후의 시도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로의 회귀는 예상되는 양식의 분석에 대한 호기심과 그 뛰어난 분석같은 것을 초월하여 스스로를 서구화함으로써 새로운 근원을 찾아내려는 스트라빈스키의 욕망을 나타내려는 일종의 적합 행위인 것이다.

이 내면의 흐름은 문화적 행위인 동시에 창조적 행위이기도 하다. 한편 이 모델은 그에게는 하나의 성취, 즉 파스티쪼(혼성곡)가 아니라 하나의 탐구적 출발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형식과 정신의 보편성의 틀 속에서의 양식상의 객관성에 대한 탐구이며, 이 보편성은 또한 〈시간을 초월한〉 거의 의식적인 주제에 대한 그의 흥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는 원형과 양식의 탐구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통일성이 숨겨져 있다. 그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개체를 초월한 것〉에 대한 그의 동경을 구체화한 〈어느 시대의 집단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 현대음악제 때 상연된 그의 난봉꾼의 행각의 초연(1952)에 참석하기 위하여 유럽을 여행한 후에 스트라빈스키가 음열의 사상을 채용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분명히 12음음악의 열렬한 지지자인 로버트 크래프트와의 1947년 이래의 우정은 이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그들은 함께 미터실에 있는 베베른의 묘를 참배했다). 이렇게 하여 15세기와 16세기의 작자 미상의 시에 기초한 칸타타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점차 자신의 작품에 음열기법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3개의 가곡(1953), 7중주곡(제2악장, 1952~53), 딜런 토머스의 시에 의한 장송 카논 딜런 토머스 추도(1954), 칸티쿰 사크룸(1956) 또는 트레니(1958) 등이 그것이며, 이 마지막에 든 작품은 예레미아 애가에 기초한 종교적 작품으로 음열 사상에 충실하여 모든 소재가 12음음열로 되어 있다.

이와 병행하여 그는 1954년에 주인 없는 망치를 듣고 그것을 탐구의 시대를 나타내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불레즈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열로의 전향을 우롱했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가 만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음열의 기법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결코 자신의 생각을 버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해서 그는 빈 악파와는 의견을 달리하는 제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7중주곡과 아곤에서 그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 작품에는 음열성과 선법성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변주 정신의 궁극적인 도달점인 음열성은 아곤에서처럼 푸가와 카논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폴리포닉이 대위법적 서법에 대한 그의 관심과 만나게 된다(cf. 뒤피를 추도하는 곡 2중 카논[1959]). 이러한 점에서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은 가장 의미심장한 작품일 것이다. 즉,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에서 음열(및 그 결합)의 관념과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기초로 한 변주의 관념을 관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옛 형식을 버린 것이 아니고(아곤에는 가이야르드, 파반느, 브랑르 등이 다루어지고 있다), 레퀴엠 칸티클스(1965~66)에서는 음열의 네 가지 기본 형태가 도입부에서 정선율의 역할을 하고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신고전주의의 시기에서도 음열의 시기에서도 형식과 어법에 대하여 같은 의식적 질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관적인 요소를 배제한 엄밀성에 대한 마음가짐을 항상 표명했다. 결국 스트라빈스키의 음열성의 선택(거기에서 그가 발견한 화선상의 풍요성과는 별도로)은 그의 이른바 신고전주의의 시기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음열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시기적인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원형을 추구하면서 스트라빈스키가 선택한 것은 20세기의 유일한 집단적 음악현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이미 가입과 이탈의 계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깊은 통일성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