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

박연서원 2015. 6. 12. 11:26

Symphonic Fantasy, 'Die Frau ohne Schatten' Op.65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 중 '교향적 환상곡'

Richard Georg Strauss, 1864 ~1949

 

Die Frau ohne Schatten - Finale - Salzburg 2011

Christian Thielemann, cond.
Wiener Philharmoniker

 

1919년 빈 국립 오페라 좌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는 슈트라우스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복잡한 것 중 하나이다. 대본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썼는데, 그 내용은 형이상학적인 분위기와 도덕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예외적으로 화려하고 풍부한 이 작품의 음악성은 위대한 후기 바그너풍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서, 후기 낭만주의의 장엄한 관현악법과 교향악적인 복잡함과 강렬함은 가수들로서는 거의 소화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황제비는 원래 정령 케이코베드의 딸이 었는데, 사슴의 모습으로 있을 때에 황제에게 사로잡혀서 지금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반은 정령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정령과 결혼하는 사람이 일년 안에 그녀를 완전한 인간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면 돌로 변하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Die Frau ohne Schatten (1st scene of Act 2 of the three brothers)

 

Die Frau ohne schatten 2 (2nd scene in Act 2 of the three brothers)

Antal Dorati, cond.
Detroit Symphony Orchestra

 

막이 오를 때는 3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다. 다른 등장인물들 중에서 중요한 배역은 황제비의 사악한 유모와 염색공 부부인 바락과 그위 부인 등인데, 이 부부는 입단의식을 닮은 정신적인 여행 중에 그들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황제비는 그녀의 정령에 대한 거부와 황제에 대한 인간애를 통해 황제와 다시 인간으로서 결합하게 된다.

 

타이틀 : Die Frau ohne Schatten (The Woman without A Shadow). 전3막. 대본은 R. 슈트라우스와 콤비인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fmannsthal)이 썼다.

초연 : 1919년 (우리나라에서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난 해) 비엔나 슈타츠오퍼

주요배역 : 바락(염색장이), 바락의 아내, 황제, 왕비, 유모, 메신저, 사원 문직이, 젊음의 혼백, 활콘의 음성

음악 하이라이트 : 독한 황제를 표현하는 첼로 멜로디

에피소드 :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라고 하면 R. 슈트라우스의 ‘그림자없는 부인’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라는 말이 있다. ‘그림자없는 부인’은 마법을 주제로 한 오페라이다. 기본적으로는 동화이다.

 

줄거리 :

제1막. 섬나라 궁전의 테라스. 정령들의 왕인 케이코바드의 사자(使者)가 왕비의 유모를 찾아온다. 케이코바드는 아이 없는 왕비,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는 왕비의 아버지이다.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사자는 아직도 임신하지 못하고 있는 왕비가 그림자를 되찾을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세 밤 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그 기간 안에 그림자를 찾지 못하면 당장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며 그럴 경우, 그의 남편인 황제는 석상으로 변하게 된다. 황제가 잃어버린 매를 찾으러 다시 사냥을 나가자 왕비와 유모는 그림자를 찾으러 인간 세상으로 내려간다.

 

왕비 역의 레오니 리자네크(Leonie Rysanek)

 

Die Frau Ohne Schatten ACT1 Empress's Entrance

Empress(Kaiserin) - Deborah voigt, sop.
Nurse - Renhild Runkel

Christian Thielemann, cond.
Wiener Philharmoniker

 

 염색장이 바락(Barak)의 오두막집에서 못난이 형제들이 바락의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 집에서도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과 아직은 아니라는 주장 때문에 다투고 있다. 실상 바락은 아이를 갖기 원하지만 바락의 아내는 내키지 않아 하고 있다. 엄마 노릇에 아무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걱정이어서 그렇다. 바락이 집을 비우자 왕비와 유모가 변장을 하고 나타난다. 유모는 마법에 능숙하다. 바락의 아내에게 화려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으로 보여주며 남편과 3일 동안만 동침하지 않고 버티면 부자로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자기들 두 사람은 그 3일 동안 바락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겠다고 말한다. 왕비와 유모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바락의 아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운명을 한탄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바락의 아내는 유모와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바락이 집에 돌아와 보니 함께 쓰던 침대가 둘로 나뉘어져 있다.

 

염색장이의 아내 역 에바 마튼(Eva Marton)

 

제2막. 하녀로 변장한 왕비가 바락을 일터로 내몰고 나자 유모는 마법으로 어떤 젊은이를 불러온다. 그 젊은이는 실은 형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바락의 아내는 젊은이를 좋아하게 된다. 한편, 사냥을 떠난 황제는 왕비와 유모가 은밀하게 염색장이의 오두막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 황제는 왕비가 자기를 싫어하여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신의 결정을 따르고자 신전으로 향한다. 다시 바락의 오두막집. 왕비는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르는 바락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서 점점 괴로워한다.

 

Die Frau ohne Schatten Op.65 - ACT II

Joseph Keilberth, cond.
Bayerisches Orchestra

 

바락의 오두막집에 어둠이 깔린다. 유모는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왕비의 마음속에는 인간애가 싹트기 시작한다. 한편, 바락의 아내는 자기 그림자를 포기한다. 아내에게 그림자가 없는 것을 보고 남편 바락이 화를 낸다. 바락은 칼을 잡아 아내를 내려치려하자 두 사람 모두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바락의 아내는 그제서야 그림자의 귀중함을 알게 된다.

 

정령들의 왕과 왕비, 그리고 염색장이 바락과 아내

 

제3막. 정령들의 왕 케이코바드의 지하 동굴. 바락과 그의 아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는다. 그러면서 자기가 남편을 끔찍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고 회개하며 울부짖는다. 그러자 두 사람에게 계단을 따라 올라가라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 왕비와 유모는 보트에 태워져 신전으로 오게 된다. 케이코바드의 사자가 유모를 꾸짖으며 인간 세상에서 방황하라고 전한다. 신전안 생명의 분수 앞에 꿇어 엎드린 왕비는 바로 앞에 남편인 황제가 돌로 변해있는 것을 본다. 멀리서는 바락과 그의 아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왕비는 바락의 행복을 대가로 남편인 황제를 구하려는 일을 거절한다. 그러자 왕비에게 그림자가 생겼으며 황제도 돌에서 구해진다. 지상에서는 바락과 그의 아내가 재결합하여 아들 딸을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을 찬양한다.

 

왕비 역의 카렌 후프슈토트(Karen Huffstodt). 1997 제네비 그랑 테아터. 왕비는 우주에 살고 있는 존재이므로 음성도 초인간적이고 우주적이어야 한다. 바그너의 브륀힐데와 같은 압도적인 음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Die Frau ohne Schatten Op.65 - ACT III

Joseph Keilberth, cond.
Bayerisches Orchestra

 

1919년 빈 국립 오페라 좌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는 슈트라우스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복잡한 것 중 하나이다. 대본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썼는데, 그 내용은 형이상학적인 분위기와 도덕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예외적으로 화려하고 풍부한 이 작품의 음악성은 위대한 후기 바그너풍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서, 후기 낭만주의의 장엄한 관현악법과 교향악적인 복잡함과 강렬함은 가수들로서는 거의 소화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황제비는 원래 정령 케이코베드의 딸이었는데, 사슴의 모습으로 있을 때에 황제에게 사로잡혀서 지금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반은 정령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정령과 결혼하는 사람이 일년 안에 그녀를 완전한 인간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면 돌로 변하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막이 오를 때는 3일 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다. 다른 등장인물들 중에서 중요한 배역은 황제비의 사악한 유모와 염색공 부부인 바락과 그위 부인 등인데,

이 부부는 입단의식을 닮은 정신적인 여행 중에 그들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황제비는 그녀의 정령에 대한 거부와 황제에 대한 인간애를 통해 황제와 다시 인간으로서 결합하게 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Georg Strauss, 1864 ~1949)

 

뮌헨 출생. 아버지 F.슈트라우스도 뛰어난 음악가로서 뮌헨 궁정관현악단의 제1호른 주자 겸 왕립음악학교 교사를 지냈다. 부모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은 그는 11~16세 때까지 그곳 궁정악장(宮廷樂長) 마이어에게 사사하여 12세 때 《축제행진곡》(작품 1)을 작곡하고 13세 때는 멘델스존의 협주곡과 바흐의 평균율(平均律)을 연주하였다 한다.

1882년~83년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고, 쇼펜하우어에 심취하였다. 또 그 사이 자기의 작품을 가지고 빈·베를린 등지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뷰로와 사귀는 등 그의 재능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84년 《교향곡》(작품번호 12)이 뉴욕필하모니에서 초연되고, 같은 해 뷰로의 뒤를 이어 마이닌겐 관현악단의 악장에 취임,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브람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슈트라우스는 철저한 반(反)바그너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감화로 바그너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 후 점차 리스트와 바그너에 심취, 마침내는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페라에서는 바그너보다 감미로우면서도 관능적인 선율로, 교향시(交響詩)에서는 리스트보다 자유로우면서도 광범한 내용 속에서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87년에는 소프라노가수이자 자신의 가곡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자가 된 파울리네와 결혼하였다.

그 후 그는 뮌헨·바이마르·베를린·빈 등지의 각 오페라극장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또 베를린필하모니와 빈필하모니의 지휘도 맡고, 잘츠부르크음악제를 비롯한 유명한 음악제에서도 지휘를 맡았다. 1908년 뮌헨 근교에 산장을 짓고 때때로 연주여행을 하는 이외에는 주로 그곳에서 음악 창작에 몰두하였다.

슈트라우스의 생애에 오점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은, 만년에 그가 나치스정권에 협력한 결과가 된 몇몇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주의 ·사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독일 후기낭만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대작곡가로서의 공적은 부인할 수 없다.

주요작품으로는 《살로메:Salome》(1905) 《엘렉트라:Elektra》(1909) 《장미의 기사(騎士):Der Rosenkavalier》(11) 등 15개의 오페라, 《돈 후안 Don Juan》(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돈키호테 Don Quixote》(98)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99) 등을 비롯한 10곡의 교향시, 그리고 수많은 가곡과 약간의 실내악곡 등이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 인생은 기름 램프의 시대에서 원자력의 시대로, 신생 제국에서 분단 독일로 이르는 근현대 독일사의 질풍노도와 궤를 같이 했다. 간단치 않은 시대를 살아갔던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작곡가도 드문 것 같다. 생전에도 그러했고 1949년에 세상을 떠난 뒤 수십 년이 흐르면서도 그러했다. 한 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을 하는 위험스런 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던(그의 초기 작품 '살로메'는 요즘말로 하면 X등급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슈트라우스는 무척이나 다작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년에는 더 이상 가망 없어 보이는 불꺼진 화산 정도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히틀러의 제3제국과의 관계는 그의 만년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슈트라우스는 반유태인 정서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태계 손부가 낳은 손자를 무척이나 귀여워하게 되어 결국 그러한 정서를 극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그에 대한 재평가가 서서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한 재평가는 특히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후기 작품들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슈트라우스의 음악적 성취를 평가하는데 빠질 수 없는 측면으로 부각되어 온 셈이다.

"지휘를 할떄는 당신이 땀을 흘리면 안된다. 다만 청중들만이 감동의 뜨거움을 맛보아야 한다". 1925년,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젊은 지휘자를 위한 황금율 가운데 하나로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슈트라우스는 말러, 니키쉬와 더불어 19세기 지휘법의 한 전형을 만들어냈던 독일의 대표적인 지휘자이다.

지휘에 대한 그의 이상은 앞서 인용한 그의 말에서도 엿볼수 있듯 객관적이고 지적인 시선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성적인 행보는 많은 지지파와 적지 않은 반대파를 만들어내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클레멘스 크라우스나 카를 뵘은 그의 제자였으며, 죠지 셸이나 토머스 비첨은 그의 연주가 둔하기 짝이 없다는 식으로 깎아내리기도 했다.

슈트라우스의 지휘이력은 1883년, 19세의 나이로 시작된다. 당시의 중요한 포스트였던 마이닝엔에 머무르고 있던 한스 폰 뷜로는 보조 지휘자로 그를 채용했는데, 슈트라우스는 불과 2년 만에 정지휘자의 자리를 따내는 행운을 차지한다. 이후 뮌헨 궁정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1894∼1895), 베를린 오페라, 그리고 나치의 점령으로 지휘대에서 내려와야 했던 브루노 발터의 후임으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대를 차지하는 등 순탄한 항진을 계속했다.

슈트라우스가 나치의 치하에서 음악국 총재를 지내는 등 부도덕한 행동을 했다는 지적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슈테판 츠바이크와 같은 뛰어난 유태인 작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고초를 겪기도 했다. 츠바이크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 <말없는 여인>이 끝내 말썽을 일으키자 압박이 덜한 빈으로 무대를 옮겨 지휘를 계속했다.

이 선구자적인 지휘자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보다 면밀하게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많지 않은 그의 레코딩을 통하여 우리는 한 낭만주의 신봉자의 잣대에 의한 19세기 오케스트라의 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슈트라우스의 본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파헤쳐야 할 명분이 있다.

'애국가'의 작곡가이자 세계적 지휘자였던 안익태 (1906~1965).

1938년부터 1949년까지 안익태(1906-1965)가 슈하르트로부터 작곡과 지휘를 사사했기 때문이다. 흔히 애국가의 작곡가로만 알려진 안익태의 생전 본령은 작곡보다는 지휘에 있었다.

 

1930년대 말부터 스승 슈트라우스의 주선으로 베를린 필과 빈 심포니,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 로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런던의 빅 5, 부다페스트와 부카레스트 국립 교향악단 등을 수시로 지휘했던 안익태의 면모는 동양인으로서는 가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타계 1년 전 도쿄에서 안익태가 펴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전기는 슈트라우스의 요체를 집약한 명저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