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Piano Concerto No.5 "Emperor"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b장조 Op.73 "황제"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
이 곡은 1809년 베토벤의 38세 때 작품으로 그의 원숙기를 대표하는 최대의 걸작이다.
당시 그는 빈의 성벽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빈은 나폴레옹군의 공격을 받아 큰 혼란이 일어났었고 수습하기 어려운 큰 소동이 일어나 도시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지만, 베토벤은 지하실에 피신한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악상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그가 작곡에 태연히 열중했던 당시 만들어진 곡이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이다.
한 번은 그가 프랑스군의 장교와 마주쳤을 때, 주먹을 불끈 쥐고 "내가 만일 전술에 대한 것을 대위법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았을텐데.."라며 분개를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곡의 제목인 ≪황제≫는 누가 먼저 지어냈는지 모르지만 곡의 당당함과 호탕함이 왕의 품격과 같다는 의미에서 딱 맞는 제목이라 하겠다.
작곡자 베토벤도 이 제목의 유래에 대해 전혀 몰랐고 어느 특정한 황제와 관련이 없지만,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최고라는 뜻에서 이렇게 불려진다는 해석도 있다.
이는 고금의 피아노 협주곡을 통틀어 규모나 내용상 황제의 지위에 가장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
전악장 이어듣기
Friedrich Gulda, Piano
Horst Stein, Cond /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Krystian Zimerman, Piano
Leonard Bernstein, cond / Wiener Philharmoniker
구성
1st. mv. Allegro
Rudolf Serkin, Piano
Bruno Walter, Cond / New York Philharmonic
(Recorded 1941, Mono)
Youri Egorov, Piano
Dirigent Wolfgang Sawallisch, Cond / Philharmonia Orchestra London
Friedrich Gulda, Piano
Horst Stein, Cond /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1악장
도입부에서부터 드러나는 전투적 리듬의 강렬한 화음이 곡 전체를 지배한다. 이와 함께 화려하게 펼쳐지는 피아노의 카덴자풍 연주가 작곡자 자신의 절망감이나 증오감을 더욱 열정적으로 표현한다.
약 20분간에 걸친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첫 악장은 시작부터 특별하다. 관현악의 힘찬 화음에 이어 피아노가 곧바로 등장하여 화려하고 당당한 카덴차를 연주해 보이며 출발하는 것. 협주곡의 고전적인 틀에서 벗어난 이런 개시법은 이후 슈만, 그리그, 차이코프스키 등 수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혁신적인 개시부에 이어 관현악이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제1주제와 스타카토 리듬에 실려 등장한 후 유려하게 펼쳐지는 제2주제를 제시한다. 이후 피아노가 다시 등장하고 음악은 때로는 충만한 열기와 긴장감 속에서 강력하게, 때로는 섬세하고 유연하면서도 멋스럽게 진행된다. 이 악장은 두 차례의 장쾌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후 힘차게 마무리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특별한 점은 통상 재현부와 종결부 사이에 놓이는 독주자 임의의 카덴차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 베토벤은 '카덴차는 필요 없음. 그대로 계속해서 연주할 것'이라고 지시하는 대신 카덴차에 상당하는 독주부를 직접 채워 넣었다. 즉, 자신이 의도한 흐름이 독주자의 기교 과시에 의해서 단절되거나 왜곡될 위험을 차단했던 것이다. 이 역시 슈만과 브람스를 비롯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부분이다.
아울러 이 악장에서는 트럼펫과 팀파니의 활약을 통해서 팡파르풍의 울림과 행진곡풍 리듬이 유난히 부각된다. 또한 전편의 치열하고 박진감 넘치는 흐름은 다분히 전투적이다. 그래서인지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이 협주곡을 ‘군대 개념의 변증론’이라고 불렀는데, 혹시 베토벤은 이 곡에서 나폴레옹 군대, 혹은 그로 상징되는 '적군'에 대한 자기 나름의 투쟁을 전개했던 것은 아닐까?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했던 시절, 베토벤은 프랑스군 장교와 마주친 자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 대위법만큼 병법에 정통했더라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도처에서 포탄이 터지는 듯한 장면마저 연출하는 이 곡을 들으며 (물론 비유적인 견지에서) 관현악을 병사들로, 피아노를 그들을 이끄는 장수로 상정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2nd. mv. Adagio un poco mosso - attacca
Rudolf Serkin, Piano
Bruno Walter, Cond / New York Philharmonic
(Recorded 1941, Mono)
Friedrich Gulda, Piano
Horst Stein, Cond /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Krystian Zimerman, Piano
Leonard Berstein, Cond / Wiener Philharmoniker
▶2악장
1악장이 전쟁의 강렬함이 감도는 악장이라면 2악장은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의 아름답고 느린 진행. 오케스트라와 독주자가 서로 교대로 등장했다 사라지는 고전적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겸손한 듯 등장했다가 다시 오케스트라의 합주 속에 조용히 사라져가는 피아노의 모습은 마치 베토벤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선 악장과 사뭇 대조적인 완서악장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온화하게 이어지는 흐름, 그리고 그 위에 신중하게 얹히는 독주 피아노의 선율. 이 명상적인 악장에는 숭고하고 성스러운 기운마저 서려 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체르니에 따르면 찬미가풍의 주제는 오스트리아의 순례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이 빈에서 물러간 얼마 후인 11월 22일에 베토벤이 라이프치히의 출판업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격렬한 파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난을 겪은 뒤에 우리는 약간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나는 몇 주 연속해서 작업했지만 불멸성보다는 죽음을 위한 작업으로 여겨집니다. (...) 이 죽어버린 평화에 대해 당신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이 시대에 더 이상의 안정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확실성은 우연한 기회뿐입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다시 한 번 절망을 딛고 일어섰다.
이 악장은 그 극복의 통로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그는 반추하고, 기도하고, 음미한다. 그리고 새 희망을 꿈꾼다. 그의 후기 음악에 나타나는 영적인 차원의 환상적인 음률이 이미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 악장은 베토벤이 남긴 가장 심오하고 감동적인 음악 가운데 하나이다.
3rd. mv. Rondo, Allegro
Rudolf Serkin, Piano
Bruno Walter, Cond / New York Philharmonic
(Recorded 1941, Mono)
Youri Egorov, Piano
Dirigent Wolfgang Sawallisch, Cond / Philharmonia Orchestra London
Friedrich Gulda, Piano
Horst Stein, Cond /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3악장
8박자의 론도 형식. 피아노 기교의 극치를 보여주는 무곡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빠르게 튀겨지는 화려한 음악처럼 세계의 엄청난 변화도 결국 서로를 껴안으며 원무를 추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앞선 악장의 끝부분에서 중단 없이 이어지는 이 악장에서 음악은 다시금 첫 악장의 기세와 분위기로 복귀한다. 이 '승리'를 향한 행진곡에서, 춤곡풍의 주제는 마치 곡예를 펼치는 듯하며, 피아노와 관현악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술래잡기를 하는 듯하다. 협주곡 고유의 경쟁의 묘미와 돌파의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박진감 만점의 멋진 피날레이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1809년 초, 베토벤의 생활은 비로소 든든한 반석 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일단 3월 1일부터 '평생 연금'을 받기 시작했는데, 세 명의 젊은 고위 귀족, 로프코비츠 공작, 킨스키 공작, 루돌프 대공이 그에게 매년 4천 플로린이라는 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다만 베토벤이 '빈 혹은 오스트리아 황실 폐하의 다른 세습 영지를 거주지로 하는 대신'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써 안정적인 재정 기반을 확보한 베토벤은 들뜬 기분에 여행이나 결혼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고, 특히 친구인 글라이헨슈타인 남작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신붓감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해 5월,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침공에 대한 대응에 나선 프랑스군이 에크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다음 내친 김에 빈까지 진격해 왔고,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왕족과 귀족, 부유층들은 서둘러 빈을 탈출했다. 뒤에 남은 시민들이 나름대로 도시를 수호하겠다고 나섰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무기가 턱없이 부족해서 극장에 있던 총과 창, 칼 등의 소품들까지 꺼내 왔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빈은 포위된 지 일주일 만인 5월 13일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의 빈 함락 시기에 작곡된 이 곡은 베토벤의 시대적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장대한 스케일, 찬란한 색채
빈에 남게 된 베토벤의 상황은 절박했다. 적군의 포탄이 쏟아지는 동안에는 약해진 청력을 보호하기 위해 책상 밑으로 들어가 베개를 머리에 두르고 있어야 했다. 또 프랑스군이 도시를 점령한 뒤에도 한동안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으로 인한 전투가 계속되어, 그는 사방을 뒤덮은 전쟁의 참화와 진군의 북소리, 군화소리로 인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후원자들이 모두 도시를 떠나면서 경제적 원조가 끊기는 바람에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힘겨웠는데 피난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가까스로 동생의 집에 의탁한 그는 여름에 쓴 한 편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가장 심각한 형태의 비참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5월 4일 이후 나는 일관성있는 작품을 거의 하나도 쓰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단편 이것 저것 뿐입니다. (...) 바로 얼마 전에 내가 쌓아올린 생존의 기반이 불안정해졌습니다. (...) 주위에서는 온통 파괴적이고 무질서한 행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북소리, 대포소리, 모든 형태의 비인간적인 처참함 뿐입니다.”
그의 마지막 협주곡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9월에 베토벤은 자선 연주회에서 <영웅 교향곡>을 지휘했고, 전황이 정리되어 감에 따라 빈의 질서와 생활도 점차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아갔다. 일련의 상황은 10월 14일 쇤부른 궁전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되었고, 베토벤도 다시금 기지개를 켰다. 그 전란의 와중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장조>는 베토벤 최고의 역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의 장대한 스케일, 왕성한 추진력, 찬란한 색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지어 베토벤 자신조차도 이 정도로 대담하고 격렬한 협주곡은 쓴 적이 없었다. 그는 이 곡에서 특유의 강력한 피아니즘을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하게 펼쳐 보였고, 그 결과 이전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G장조>에 이어 다시 한 번 피아노 협주곡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영웅적인 기개와 경이로운 조성 전개
이 협주곡은 베토벤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훗날 슈만과 브람스가 계승하게 되는 ‘교향적 협주곡’(Symphonic Concerto)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이 곡은 분명 ‘협주곡’이지만 관현악부가 독주부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며, 두 파트가 긴밀하게 어우러져 더없이 절묘하고 역동적인 음악세계를 펼쳐 보인다. 발터 리츨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작품은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에서 영웅적인 기개를 과시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경이로운 조성 전개의 극치를 보여준다. 강렬한 개시 화음들은 경이로운 조성 전개의 건물 안으로 이끄는 웅장한 입구와도 같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자크 다비드, 610x931cm, 1807
(우)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프리즈>의 부분. 이 곡에 '황제'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영웅적인 기개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흔히 이 곡의 제목처럼 통용되는 '황제'라는 별명은 정작 베토벤 자신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베토벤이 한때 존경하던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서 격노하여 <영웅 교향곡>의 원래 표지를 찢어버렸다는 일화를 떠올리자면, 베토벤의 가장 돋보이는 걸작 중 하나에 '황제'라는 별명을 붙이는 것은 심히 불경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별명을 누가 붙였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설에는 J. 크라머라는 영국의 출판업자가 거론된다. 그는 이 작품이야말로 모든 피아노 협주곡들 가운데 황제의 자리에 놓일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꽤나 그럴듯한 발상 아닌가? 더구나 젊은 시절에는 혈기왕성했던 베토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보수적인 성향으로 변해갔으며 한때 황실 악장의 직함을 원하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싶다.
Friedrich Gulda (1930.5.16~2000.1.27)
1930년 오스트리아 빈의 교육자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음악 애호가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 교육을 받아 12세에 빈 음악원에 입학하고, 1946년에는 16세의 나이로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바두라스코다, 데무스와 함께 빈의 삼총사 중의 한 사람으로, 셋 중에서 가장 손가락을 잘 움직인다는 정평이 있다. 젊은 시절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명수로 인정받았으며 두 번에 걸쳐 베토벤 전집을 녹음하는 기록을 남겼다.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할 때는 악보에 없는 음부를 치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내림나장조>등에 그의 흩뜨리지 않는 연주 특징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연주회에 연미복이 아닌 티셔츠에 모자를 쓰고 나타나는 일이 많았고, 언론에 자신이 죽었다는 보도문을 팩스로 보내놓고 며칠 뒤 유유히 나타나 부활 콘서트를 여는 기행도 보였다. 만년에는 재즈와 즉흥음악에 심취해 자주 협연을 했다. 2000년 1월 27일에 자신의 저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Krystian Zimerman (1956.12.5~ )
짐머만은 5세때 피아니스트인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2년후 Andrzej Jasinski의 학생으로 들어가 1973년까지 사사받았다. 1975년 가을, 제 9회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금메달과 <마주르카 상>, <폴로네이즈 상을 받아 화려하게 세계 피아노 음악계에 등장한 인물이다. 이 때의 나이는 불과 18세...
쇼팽 콩쿠르 역사를 통해서 가장 나이 어린 우승자로 기록된다.
게다가 이 콩쿠르가 폴란드에서 열리는 것인데 정작 폴란드 출신의 우승자는 제 4회(1949년) 때의 하르나 스테판스카와 제 5회(1955년) 때의 아담 하라시에비치에 그쳤을 뿐 이후 20년간 외국인의 차지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짐머만의 우승은 폴란드인에 의한 20년만의 쾌거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짐머만은 1956년, 폴란드의 자브제에서 출생하여 카드비쉐 음악원의 안제이 야신스키의 문하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다. 이미 소년 시절에 폴란드 국내에서 실시된 여러 콩쿠르를 석권하였고, 대망의 쇼팽 콩쿠르에 도전장을 던진 것은 음악원을 졸업하던 바로 그 해였다.
다른 우승자들과 마찬가지로 짐머만의 연주가로서의 전도는 쇼팽 콩쿠르의 우승이 보증하는 것이었고, 예상했던 것처럼 유럽 여러 도시에서,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서 그의 무대는 빛나는 광채로 장식 되었다.
아담 하라시에비치라는 엄청난 거장이 그 동안 폴란드의 피아노를 대표했다고 한다면 짐머만은 다음 세대의 폴란드를 탄주하는 피아니스트로서 착실히 그의 길을 가고 있는 연주가이다.
특히, 그가 연주하는 쇼팽이야말로 "견줄 데 없을 만큼 시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세평(世評)이다.
Leonard Bernstein (1918~1990)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년 8월 25일 - 1990년 10월 14일)은 미국의 작곡가이자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인정을 받은 첫 지휘자였고,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여 찬사를 받은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 시리즈 등과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캔디드》와 같은 다수의 작곡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번스타인은 1918년에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러시아 Rovno에서 이주한 유태인 가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샘 번스타인은 회사원이었으며, 처음에는 번스타인의 음악에 대한 관심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번스타인은 종종 루이스(아들의 별칭)를 오케스트라 공연에 데려갔다.
한번은 번스타인이 피아노 공연을 듣고 곧 마음이 사로잡혀서 곧장 어린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 번스타인은 보스턴 라틴 스쿨에 다녔다.
보스턴 라틴 스쿨에서 졸업한 후, 번스타인은 하바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월터 피스턴에게서 음악을 배우고,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지휘를 프리츠 라이너에게서 배웠다.
커티스에 있는 동안, 번스타인은 또한 Helen Coates와 Heinrich Gebhard에게서 피아노도 배웠다.
그는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그리고 교육자로서 크게 인정받았고, 특히 대중들에게는 장기간의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했으며,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음악을 썼다. 그는 또한 세 개의 교향곡, 두 개의 오페라, 다섯 개의 뮤지컬 음악 외에 다수의 작품을 썼다. 번스타인의 정치적 성향은 확고한 좌파였지만, 다른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그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에 블랙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다.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초반에, 그는 흑표범단(Black Panther Party)을 위해 자선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공개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다.
1943년 11월에, 그는 아픈 브루노 발터의 대역으로 뉴욕 필을 지휘해 지휘자로 데뷰했으며, 즉시 성공을 거뒀다. 1949년에 그는 올리비에 메시앙이 작곡한 튀랑갈릴라 교향곡을 세계 초연했다.
1957년에 그는 텔 아비브에서 Mann Audiotorium의 개관 공연을 했으며, 거기에서 많은 녹음을 진행했다. 1960년대에, 그는 미국에서 공영 텔레비전을 위한 《청소년을 위한 연주회》 시리즈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의 작곡은 유대교 전례 음악(특히 그의 교향곡 1번과 3번, 그리고 치체스터 시편), 구스타프 말러, 조지 거슈윈, 그리고 그의 친구 아론 코플랜드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89년의 크리스마스 날(12월 25일)에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식의 일부로서 연주했다. 공연은 20개국 이상 100만 명 가량의 청중에게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그 때에, 번스타인은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 가사를 바꿔서, 단어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꾸어 사용했다. “나는 베토벤이 우리에게 그의 축복을 내렸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번스타인이 말했다.
번스타인은 많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크게 인정받는 지휘자였으며, 특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하며 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는 특히 구스타프 말러, 아론 코플랜드, 요하네스 브람스,
번스타인의 개인사는 지휘자로서의 영광, 작곡가로서의 생산성, 그리고 그의 열정 넘치는 정치적 활동으로 인한 비판 사이에서 고통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번스타인은 또한 그의 가족에 대한 헌신과 그의 양성애적 성향 사이의 충돌을 느꼈다고도 전해지지만, Arthur Laurents(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번스타인의 조력자)는 Charles Kaiser(《The Gay Metropolis》의 저자)에게 번스타인은 단지 “결혼한 게이였다. 그는 전혀 충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게이였다”라고 말했다. 다른 번스타인의 친구인 Shelly Rhoades Perle는 번스타인의 전기작가인 Meryl Secrest에게 자신은 “그가 성적으로는 남성을, 감성적으로는 여성을 원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번스타인은 그의 만년에 우울증 발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의 여배우인 Felicia Montealegre와 1950년에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Montealegre는 번스타인의 세 번째 교향곡인 《Kaddish의 1960년대 뉴욕 필하모닉과의 연주에 화자(본래 이스라일 출신의 전설적인 여배우 Hanna Robina가 공연했던 역할)로 참여했다.
그 자신은 한 명의 사랑하는 아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번스타인은 음악 세계에서 그의 난잡한 성생활로 악명높았다. 부부는 1970년대에 그녀가 번스타인이 여러 동성애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에 이혼했다. 그의 아내와의 결별 이후에, 번스타인은 1971년부터 그의 파트너였던 Tom Cochran과 살았다. 그는 그의 아내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아프게 되었을 때에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돌아왔다.
닉슨 대통령을 암살하려 시도했던 정신병자 Samuel Byck은 그의 계획의 세부를, 한 사람으로서도 지휘자로서도 존경했던 번스타인에게 보냈었다고 한다. 번스타인은 뉴욕 브루클린의 그린우드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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