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글링카 / 종달새

박연서원 2020. 1. 20. 10:36

The Lark (Zhavoronok) for Songs & Piano

글링카 / 종달새

Mikhail Ivanovich Glinka, 1804 ~1857




The Lark (arr. Balakirev/Balakirew)

Sylvia Kersenbaum, piano



The Lark (arr. Balakirev/Balakirew)

Evgeny Kissin, piano


The Lark (arr. Balakirev/Balakirew)

Anna Shelest, piano


Songs - "The Lark" (1959)

Boris Christoff, bass


Mikhail Ivanovich Glinka (1804 ~1857)


<음악을 창조하는 것은 국민이요, 우리들 예술가는 그것을 편곡하는 것뿐이다>라고 한, 19세기 국민음악의 선구자 <글링카>는 1804년 6월 1일, 지금의 <민스크>에 가까운 서부 <러시아> <스몰렌스크>현(縣)의 <노보스파스코에> 마을에서 귀족 지주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좋은 음악적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음악에 흥미를 가져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하고 또 농민의 합창에도 귀를 기울였다. 1817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가 고등사범학교 부속기숙학교에 다녔다. 한편 그는 유명한 <영국>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필드>(Field, John;1782~1837), <마이어>(Meyer, Carl)에게 피아노를, <고디>에게 성악을, <빔>(Bohm, Joseph)에게 바이올린을 각각 배웠으며, <러시아>의 시인(詩人) <푸시킨>과 사귀어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822년 기숙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 숙부집의 관현악단을 지휘하면서 <독일> 고전 작품을 가까이 하고 관현악법의 지식을 얻었다. 1824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페테르부르크>의 철도청에 근무하고, 이듬해 1825년 수도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자들이 제정(帝政)에 반대하여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반란(<反亂)>은 그에게 강한 감동을 주었다. 그 즈음부터 그는 <푸시킨>이나 극작가 <그리보에도프>(Griboedov, Alexsandr Sergeevich;1795~1829), 시인(詩人) <<주코프스키> 등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살롱에 출입하면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새로운 사상에 접하였고, 사교계의 음악회에서는 피아노를 독주하고 작곡 발표도 하여 젊은 천재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원래 허약한 체질을 타고난 <글링카>는 1828년 직장에서 물러나 1830년 봄에는 음악을 배우기 위해 <독일>과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여행하였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도니젯티>, <벨리니>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와 만나 <이탈리아> 스타일의 작곡 양식을 익혔으며, <베를리오즈>나 <마이어베어> 등과도 사귀었다. <이탈리아> 체재중의 작품 <비창 3중주곡>(1832)은 <러시아> 최초의 실내악곡으로 젊은 <글링카>의 정열이 넘쳐 있다.


1833년 귀국하는 길에 <비인>을 거쳐 <베를린>에 당도, 그곳에서 유명한 음악 이론가 <덴>(Dehn, Siegfried;1799~1858)에게 5개월간 작곡학을 배웠다. 명교사인 <덴>은 <글링카>의 예술관을 확립시키기 위해 유럽의 음악 문화를 가르쳤고 <글링카>는 그것을 지성적으로 파악하였다. 이것은 <글링카> 이전의 <러시아> 작곡가에게 전혀 결여되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 음악을 배우면 배울수록 <러시아> 국민을 위한 음악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1834년 4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얼마 안되어 그는 <주코프스키>의 제안에 따라 오페라 <이반 수사닌>을 작곡, 1836년 11월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명령으로 <황제에게 바친 목숨>으로 이름을 고쳐, <페테르부르크> 제실(帝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것은 1613년 <폴란드>군 침입 당시 농부 <수사닌>이 취한 애국적인 행동을 제재로 하여, 당시 귀족 음악이 돌보지 않았던 <러시아> 민요조를 음악적인 소재로 한 것인데, 상연되자 귀족들은 냉소(冷笑)했지만 <푸시킨> 등은 <러시아> 최초의 국민 오페라가 출현했음을 진심으로 축하하였다.


이어 <글링카>는 <푸시킨> 원작에 의한 제2의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작곡에 착수, 1838년까지에 그 일부가 작곡되었으며, 이 시기에 <쿠코르니크> 백작의 애국적 비극 <홀름스키공(公)>의 부수음악에 손대어 1840년에 완성하였다.


1842년 11월, <알브레히트> 지휘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특히 서곡)에 있어서의 오케스트레이션의 색채적 효과의 강력함은 그 이후의 <러시아> 교향악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 오페라의 진가를 인정한 것은 극히 일부에서였다.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형식상으로는 <글룩>과 <모짜르트>의 오페라에 가까우며, 국민적 입장은 전작 <이반 수사닌>만 못하나 극적 효과면에서는 훨씬 앞서 있다.


<이반 수사닌>이 역사적, 영웅적인 내용이라면,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내용이며, 이 두 오페라에 의해 <러시아> 음악의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었다. 이 두 오페라의 창작 기간 중에 <글링카>는 제실(帝室) 성가대(현재의 레닌그라드 아카데미 합창단)의 악장이 되고, 또 1835년 결혼하였으나 이내 파탄을 일으켜 1841년 이혼하였다. 오페라는 완성했지만 <글링카>의 고민은 깊어, 1844년 <파리>로 떠나, 이후 3년간의 방랑생활이 시작된다.


<파리>에 온 <글링카>는 이곳에서 <베를리오즈>와 알게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그의 작품의 이해자로서 <글링카><파리> 악단에 소개하였다. 그와 동시에 <글링카><베를리오즈>를 비롯한 낭만파 작곡가들로부터 수법상의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18455, <글링카><프랑스>떠나 <스페인>으로 가 약 2년간을 주로 <마드리드><그라나다>에서 지냈다. 이 동안에 <스페인>의 남국적인 정서를 살려 관현악을 위한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한 화려한 카프리치오>(1846)를 작곡하였다.


1847<글링카>는 고국(故國)으로 돌아가 <스몰렌스크><바르샤바>에 살았다. 1848<바르샤바>에서 완성한 환상적 서곡 <마드리드의 여름밤 추억><스페인> 체재중의 인상과 그곳에서 수집한 민요에 바탕을 두고 작곡된 것인데, 생생하게 다룬 관현악 속에 훗날 인상파 음악에서 볼 수 있는 회화적(繪畵的)인 이국정서(異國情緖)가 전개되어 간다. 같은 해의 작품 <카마린스카야>는 두 <러시아> 민요에 의한 관현악 환상곡인데, <러시아>의 민요를 교향적(交響的)으로 처리한 곡으로서는 최초의 것이다. 이 곡에 있어서의 주제의 단순한 제시와 거기 이어지는 전개 수단으로서의 장식적인 변주나 충전법(充塡法)은 민요를 소재로 하는 국민악파 음악의 수법상 모범이 된 것이었다.


1852, 다시 <파리>로 간 <글링카><크리미아>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로 돌아와 유명한 <회상록>을 썼다. 1856년 또 다시 <베를린>에 가서 옛 스승 <>을 찾아 이론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 215, 간장병으로 객사(客死)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이상 든 것 외에 <현악 6중주곡 E장조><현악 4중주곡 F장조>가 유명하다. 가곡으로 그는 <러시아의 슈베르트>라 불리며 뛰어난 작품이 많은데, 그 중에는 <한밤중의 열병(閱兵)>(1837), <멋있는 추억>(1838), <종달새> 등이 알려져 있다.


<글링카><러시아> 국민음악의 기초를 구축(構築)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전통은 다음 시대에 <다르고미시스키>(Dargomizhsky, 1813~1869), <세로프>를 거쳐 <러시아> 국민악파의 소위(所謂) <5인조> 음악 속에 힘차게 계승되어 갔다.

<5인조>의 작곡가 =<발라키레프>, <보로딘>, <큐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제각기 자기 입장에서 <글링카>의 오페라 수법, 관현악 수법, 가곡 수법을 흡수하고 깊이 파헤쳐 <러시아>의 땅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는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러시아> 음악이 세계적인 음악으로 된 것은 이 사람들의 시대부터이며, <글링카>는 그들을 낳게한 원동력(原動力)이었다. 또 <글링카>가 개척한 국민주의의 수법은 <헝가리>의 <리스트>, <체코>의 <스메타나>와 <드보르작>, <노르웨이>의 <그리그> 등의 음악 속에도 나타나, 19세기 후반의 빛나는 국민악파의 조류>(潮流)로서 발전해 간 것이다. <글링카>는 이 모든 것의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