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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낙도(安貧樂道)

박연서원 2019. 12. 26. 09:54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가난하게 살지언정 술은 필수적이다.

 

[선비의 덕목]
조선 시대는 양반 사회였다. 따라서 양반은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양반을 사대부(士大夫)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士)와 대부(大夫)를 통칭한 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은 소설 「양반전」에서 “글을 읽는 사람을 선비[士]라 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서 대부(大夫)가 된다.”라고 하였다. ‘선비’란 벼슬하지 않고 글을 읽으며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할 수 있지만, 한 시대의 주역으로서 선비를 규정할 때에는 그 의미가 다양해진다.

 

『순자(荀子)』 애공(哀公) 편에 공자(孔子)가 정의한 선비를 찾을 수 있다. 공자는 선비의 덕목을 묻는 노나라 애공에게, “선비는 많이 아는 것보다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며, 말과 행동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을 제대로 하였는지, 옳은 행동을 하였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공자는 선비가 추구해야 할 학문과 삶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 시대 포천 지역 사람들이 생각한 선비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포천 출신으로서 조선의 4대 서예가 중 한 사람인 양사언(楊士彦)은 1549년(명종 4)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자작동에 세워진 ‘효우 정려문’과 관련한 글인 「효우문전(孝友門傳)」에서 유인선(柳仁善) 5형제의 우의를 칭송하고 있다. 특히 그는 유인선의 성품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나[참참(斬斬)] 타인에게는 너그러우며[정정(井井)], 스스로 만족하여 바라는 것이 없으나[효효(囂囂)] 옳은 일에는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한다[악악(諤諤)].”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 포천 출신 문신인 성대중(成大中)은 훌륭한 선비의 요건으로서 “가난하고 천하면서도 원망하고 탓하는 마음이 없으며, 부유하고 귀하면서도 교만하고 인색한 마음을 끊어야 한다.”고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쓰고 있다. 또한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어도 지척인 듯 가깝게 여겨지며 죽은 지 몇 년 안 되었어도 아득히 먼 옛날인 듯 느껴지는 자가 모두 뛰어난 선비”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유교에서 강조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실천적 모습이자 선비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자신의 인격 도야는 물론이고, 사회 교화에 헌신한 인물 몇몇을 통해 포천 지역의 선비 정신과 그 영향을 교학 상장(敎學相長)과 애민(愛民), 절의 충정과 추원, 안빈낙도와 풍류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교학 상장과 애민]
포천 지역 선비의 특징으로는 첫째, 교학 상장과 애민을 들 수 있다. 교학 상장은 『예기(禮記)』 학기(學記) 편에 나오는 글로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뜻이며, 애민은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포천 지역은 한양으로부터 97리[38.09㎞] 떨어져 있어 100리[39.27㎞] 내외에 두도록 하였던 왕릉은 없지만, 대신 왕자나 사대부의 무덤은 많다. 또한 관직에서 은퇴한 후에도 왕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한양과 가까운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는 명문가가 많았다. 현재 포천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김(金)·이(李)·박(朴)·최(崔)·정(鄭) 등 83개 성씨에 이르며,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많은 집성촌이 사라져 가는 실정이지만 군내면의 연안 차씨(延安車氏)·밀양 박씨(密陽朴氏)·경주 이씨(慶州李氏)·전주 이씨(全州李氏)·고성 이씨(固城李氏)·청주 양씨(淸州楊氏)·풍천 임씨(豊川任氏), 일동면의 양천 허씨(陽川許氏), 영중면의 청풍 김씨(淸風金氏) 등이 지금도 집성촌을 형성하여 세거하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출신의 학자인 불정산인(佛頂山人) 홍지성(洪至誠)은 성품이 고상하고 우아하며, 간결하고 검소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 모두 통달하였으며,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성품과 학문을 대하는 자세는 그의 아버지 홍유손(洪裕孫)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았는데, 홍유손은 김종직(金宗直)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걸어서 영남을 왕래하였다고 한다.

 

왕방산인(王訪山人)을 자처한 홍춘수(洪春壽)는 왕방산 아래 선단산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선 남인 4선생의 하나인 조경(趙絅)의 아버지 조익남(趙翼男)이 그의 문인이었다. 성대중이 현자라고 일컫던 박필점(朴弼漸)은 동음(洞陰)[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에 은거하여 늘 거문고를 안고 한적한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관리나 선비들에게 모든 일에 의심나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글을 읽고 공부하라고 가르쳤다.

 

형제 간 우의를 중시하였던 유인선(柳仁善)은 추천을 받아 사산감역관이 되었으나 몇 개월 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 포천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와 함께 일하였던 인부들이 그의 귀향길을 막으면서, “하늘이 어버이 같은 이를 앗아 가니 우리는 장차 어찌할꼬?”라고 슬퍼하였으며, 그 후 포천을 드나드는 행인을 만나면 유인선의 안부를 묻었다고 한다. 유인선이 봉직한 기간 동안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애민의 마음을 갖고 임무를 수행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유인선은 예로써 몸을 닦고 상례와 장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여 늘 좋은 평판을 받았다. 제사를 받드는 데도 반드시 친히 집행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포천 지역 선비들의 모습은 집안의 가풍에 연유한 것으로, 나아가 포천 지역 학풍으로 자리 잡아 훌륭한 학자와 관리들을 배출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 중에는 포천의 양류촌이라 일컬어지는 양희수(楊希洙)-양사언·양사준(楊士俊)·양사기(楊士奇)-양만고(楊萬古) 등의 청주 양씨와 유종(柳淙)-유사공(柳思恭)-유연·유순(柳洵)-유인선·유지선(柳智善)·유예선(柳禮善) 등의 문화 유씨 등이 있다. 이 밖에 성여완(成汝完)-성석린(成石璘)…성대중(成大中)-성해응(成海應)[창녕 성씨], 홍유손(洪裕孫)-홍지성[남양 홍씨], 정구(鄭球)-정희등(鄭希登)[동래 정씨], 권종(權悰)-권현(權灦)[안동 권씨], 조익남-조경-조위봉(趙威鳳)[한양 조씨], 이예신(李禮臣)-이몽량(李夢亮)-이항복(李恒福)[경주 이씨]등은 포천 지역 선비의 가풍을 잇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절의 충정과 추원]
포천 지역은 예부터 충절의 고장으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궁예(弓裔)가 세운 태봉의 전략 요충지였으며, 조선 전기 왕실의 강무장(講武場)이 설치되어 군사 훈련과 사냥터로 이용되어 저항 의식과 강인함이 지역 주민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포천 지역 출신 중 무과 출신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고, 한말 의병 전쟁과 독립 만세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해 나간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절의의 인물로는 성여완, 유응부, 홍유손 등이 있다. 고려의 관리였던 성여완은 고려가 멸망하자 왕방산 아래 계류촌에 은거한 후 왕방거사라고 자처하며, 조선 조정에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이 밖에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죽음을 당한 유응부와 세조를 미워해 벼슬을 버리고 술과 시로 여생을 살다간 홍유손 등이 있다. 충정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권종, 병자호란 때 순국한 조득남(趙得男) 등이 있다. 권종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금산 군수로 있으면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충신이었다. 조득남은 인조를 호종하고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조선 후기 기자헌(奇自獻)은 광해군 옹립에 적극 나섰지만, 인목 대비 폐모론에는 반대하는 한편 이후 인조반정에도 반대했다가 옥사한 인물이다. 비록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무덤이 이곳 소흘산 축문령 아래에 자리했기에 직접·간접적으로 포천 지역민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항복 역시 광해군의 인목 대비 폐모에 반대하여 북청으로 유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와 반대로 인조반정에 적극 동참하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로는 한인급(韓仁及)과 이중로(李重老)가 있다. 한인급은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으나 무덤이 직동리에 있다. 이중로는 조선 개국 공신 이지란(李之蘭)의 후손으로 추동리에 자리한 청해사(靑海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조선 후기 인물로는 김수항(金壽恒)과 그의 세 아들, 곧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등을 들 수 있다. 세 형제 모두 문장과 시에 탁월하였다. 김창협은 아버지가 기사환국으로 죽음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영평에 숨어 살았고, 동생 김창흡 역시 은거하였다. 특히 김창흡은 원래 벼슬에 뜻이 없어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다.

 

절의 충정의 마음은 조상을 기리고 선현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어져 갔다. 추원(追遠)은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줄임말로서 조상을 추모하며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포천 지역 사람들은 절의 충정의 인물들을 본받고 정신을 잇기 위해 지역에 서원 세 곳을 건립하였다. 용연 서원(龍淵書院)은 1691년(숙종 17) 남인계 유생들을 중심으로 창건되어 이덕형과 조경을 제향하고 있다. 화산 서원(花山書院)은 1631년(인조 9) 포천 유림의 공의로 창건한 백사 서원(白沙書院)의 후신으로 이항복을 제향하고 있다. 이항복은 서인의 성향을 띠고 북인과 대립하였다. 옥병 서원(玉屛書院)은 1649년(인조 27) 포천 유림의 공의로 창건되었으며, 박순(朴淳)을 제향하다가 50여 년 뒤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다. 박순은 서인계 인물이었으며, 김수항은 노론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밖에 사당이나 영당을 건립해 선현들을 추모하였는데, 유응부를 모신 충목단(忠穆壇), 김창흡을 모신 요산단(堯山壇) 외에 청성사(淸城祠), 채산사(茝山祠), 청해사, 동음사(洞陰祠), 길명사(吉明祠)[양사언], 산앙단(山仰壇)[ 김권(金權), 김평묵(金平默), 유기일(柳基一)], 용주공 별묘(龍洲公 別廟), 권종 충신문(權悰 忠臣門), 운담 영당(雲潭影堂)[송시열(宋時烈), 이항로(李恒老), 김평묵] 등이 있다. 이러한 풍습은 많은 효자와 열녀들이 나오게 된 배경이기도 하여, 효자 오백주 정문(孝子吳伯周㫌門), 신급(申礏) 정문 등 많은 열녀문과 정려를 남겼다.

 

[안빈낙도와 풍류 정신]
포천 지역은 사회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고장은 아니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땅이 많이 메마르고 일찍 추워지는 고장으로, 포천현은 전체 경작지 중 논의 비율이 25%, 영평현은 13% 정도라고 하였다. 15세기경 포천 전체 지역 논은 경작지의 약 19%로서 지역 주민 생활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 속에서 포천 선비들은 청덕(淸德)과 안빈낙도를 실천하게 되었다. 안빈낙도를 생활화한 인물로는 정 장령(鄭掌令)과 권기(權頎)를 들 수 있다.

 

정 장령은 원래 이름이 전하지 않고, 장령은 그가 지낸 벼슬로서 이것으로 현재까지 불린다. 18세에 과거 급제하여 30세 때 장령이 되었고, 나이 70이 되도록 도로써 본분을 마쳤다고 양사언이 「정장령포기(鄭掌令浦記)」에서 전하고 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포천현 북쪽 10리 떨어진 신관포(新灌浦)의 물로 논에 물을 대어 농사짓고 살았는데, 살림이 조금 여유로워지자 “쓸데없다” 하고 모두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로서, 어떤 이가 그에게 풍악산[금강산] 유람을 권유하자 “첩첩 쌓인 운산(雲山)이 이미 나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으니 정신을 가지고 놀면 그만이지 역관(驛館) 사람들을 부리고 다리와 목을 수고롭게 한 뒤에 속세 밖의 노는 뜻을 이룰 수 있으리오.”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거절하여, 주변의 어떤 이도 풍악산 유람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급제까지 한 인물임에도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개간을 하여 살아야 했던 경제 상황이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지만,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청빈하나 지조를 잃지 않은 권기를 소개하고 있다. 권기는 권종(權悰)의 증손자로서 1710년(숙종 36) 증조할아버지의 묘갈을 지었는데,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노년에 포천에서 살았으며,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고 제자들만 가르치며 누구와도 적당히 교유하지 않았다. 마을 주민 박중휘(朴重輝)란 사람이 부유하면서도 손님 접대를 잘하였다. 마을 사람들과 귀한 손님이 그의 집을 드나들고 방문하였지만 권기만은 찾아가지 않았다.

 

하루는 박중휘와 친분이 있던 김창흡이 금강산 유람 길에 그의 집에 묵으며 시를 남기고 떠났다. 그러자 권기가 박중휘를 찾아가 그 시를 보자고 청하였다. 박중휘는 그가 온 것을 기뻐하여 김창흡을 대접하듯 준비하고 시를 내주었다. 권기는 시를 다 보자마자 일어서 나가 자신의 학동(學童) 집에 들러 배 몇 개를 따서 먹고는 가 버렸다. 한 번은 추운 밤에 홀로 잠을 자는데 강도가 방에 침입하였다. 이불을 안은 채 미동도 없이 “노인에게 이불이 없으면 어떻게 겨울을 나겠나. 자네들, 이불은 가져가지 말게.” 하니, 강도 역시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당시 포천 지역 선비들은 물욕에 따른 풍속의 천박을 우려해 어린 아이들에게는 돈을 손에 대지 못하게 하였고, 공적인 일은 남보다 먼저 하고 사적인 일은 남보다 뒤에 하라고 가르쳤다. 또한 임황(林煌)이 아버지 봉급으로 친구 성효기(成孝基)의 부채를 몰래 갚아 주었다는 일화가 있듯이 선비들은 재물을 함께하고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았으며, 직접 돈을 주고받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포천 지역에는 벼슬을 달가워하지 않고,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던 선비가 많다. 대쪽 같은 선비 이시백(李時白)은 대간들로부터 어리석다는 탄핵을 당하자 바로 벼슬을 버리고 화산(花山)으로 돌아와 학문을 즐기고 행실을 돈독히 하였으며, 임종 때 후손에게 벼슬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학식과 인품을 갖춰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관리로 발탁되는 것을 유일(遺逸)이라고 하는데, 포천 지역 선비로는 김석문(金錫文)과 이서(李漵)가 대표적이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할 때까지 그칠 줄을 몰랐던 김석문은 말년에 대곡에 살면서 일축정(一筑亭)을 짓고, 연꽃을 심고 물고기를 기르는 등 자연의 정취를 즐겼다.

 

포천 지역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고장으로 예부터 많은 시인과 묵객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 이 때문에 포천 출신 문인들의 시문과 포천을 경유하였던 문인들의 시문이 많이 전하는데, 주로 영평 팔경의 자연 경관을 노래한 시와 기행문이다. 금수정(金水亭)에는 조선의 4대 서예가로 손꼽히는 양사언과 한호(韓濩)의 글씨가 전한다. 박순(朴淳)이 은거하였던 창옥병(蒼玉屛)은 많은 시인 묵객이 즐겨 찾았던 곳으로 유응부(兪應孚), 양사언, 박순, 이덕형, 이시성(李時省), 이서구(李書九) 등의 작품이 전한다.

 

풍류를 즐기면서 기인, 도인, 기사(奇士)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들이 있다. 양사언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신선의 풍채, 도인의 기골’이라고 칭송하였고, 남효온(南孝溫)이 이인이라고 불렀던 홍유손(洪裕孫)은 세조 찬위 후 ‘죽림칠현’을 자처하며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논하며 술과 시로 세월을 보냈다. 76세에 처음으로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홍지성이다. 홍지성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입(李岦)은 절의를 숭상하고 의기를 즐겨 사람들이 기사(奇士)라고 불렀다.

 

[선비 정신이 남긴 영향]
포천 지역은 한반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고, 남북 이동의 경유지로서 주변 지역의 문화 유입과 전파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포천 지역민은 새로운 문화와 사상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하는 특징을 보인다. 포천 지역 선비는 끊임없이 글을 읽을 것을 권장하며,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조와 의리를 중히 여겼다. 이렇게 자신의 수양과 단속을 게을리 하지 않는 한편, 백성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해결하는데 앞장을 서기도 하였다.

 

포천 지역 선비 정신은 전형적인 서민 문화라고 할 수 있는 「포천 메나리」를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인간의 삶이 담겨 있는 메나리는 강원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특유의 음률로 승화시켜 고유의 포천형 메나리를 만들었다. 선율과 가창 방법 및 가사에서 개성을 가미한 점은 포천 민중의 창의적이고 밝은 품성, 창의력을 말해 준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노골화되어 갈 때,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 구한말 항일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고종 대 무관직을 역임한 이청열(李淸烈) 외에 독립운동가 이범영(李範英)·최면식(崔勉植)·권동진(權東鎭), 한국 천주교의 개조 이벽(李蘗) 등이 있다. 이들은 의병을 모집하고 외세에 저항하였으며, 그 저항 의식은 농민에게 계속 이어져 1910년까지 의병 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1919년 3·1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이해조(李海朝)는 「자유종」 등 신소설을 발표하여 봉건 제도 비판, 여권 신장, 미신 타파, 사회 풍속 개량 등과 우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듯 열악한 사회경제적 배경 속에서 궁핍하지만 깨끗함과 고상함을 잃지 않았던 선비 정신은 계승 발전시켜야 할 포천 지역의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소확행(小確幸)과 안빈낙도(安貧樂道)


▣ 2018 트랜드 : 소확행(小確幸)

세상 많은 사람들, 돈을 행복의 기준으로 여기고 있다. 돈이 많으면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나누어 줄 것도 많아서 좋다. 그러나 돈은 쉽게 얻지도 못하고 남들 같이 많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과 비교하다보면 늘 내가 덜 가진 것 같다. 그래서 더 많이 갖기를 바란다. 돈은 내가 많이 가지면 남의 것은 줄어들고, 남이 더 많이 가지면 내 것이 줄어든다. 결국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커지게 된다. 돈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사건이 발생하고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결국 돈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 행복의 기준을 마음에 두는 사람도 있다. 마음은 아무리 나누어도 내 것이 줄어들지 않는다. 생각하기에 따라 마음은 쉽게 키울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 2018 트랜드로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얻자’는 말이다. 크고 멀리 있는 행복을 쫓는 것이 아니라, 내 가까이에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있다. 그것이 소확행이다.


노자는 “만족을 아는 자가 부자이다[知足者富].”라고 했으며,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논어》에서 소확행을 찾고, 가난하지만 참 행복을 누리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본다.


노자 <도덕경> '지족자부(知足者富)'


▣공자의 수제자, 안회의 안빈낙도(安貧樂道)

공자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중에서 공자는 안회(顔回)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안회의 자(字)가 자연(子淵)이라서 흔히 안연(顏淵)으로 불린다. 『논어』 속에서 공자는 안회에게 한결같이 칭찬하고 있었다. 편애한 것이 아니라 칭찬을 들어 마땅할 만큼 덕행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회는 30일에 아홉 끼 밖에 못 먹었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스물아홉에 백발이 되었으며, 결국은 영양실조에 걸려 일찍 죽고 말았다. 공자는 안회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세상이 나를 버렸구나 세상이 나를 버렸구나.(噫, 天喪予 天喪予ㆍ희, 천상여 천상여).”라며 탄식하였다.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 《논어》 제6 옹야편.

   (자왈, “현재 회야. 일단사 일표음, 재루항 인불감기우, 회야. 불개기락 현재, 회야.)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지내면서도 다른 사람은 그 근심을 견디어내지 못하거늘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는구나. 어질도다 안회여.”


어느 누가 대소쿠리에 담긴 깡보리밥, 표주박에 담긴 물 한모금, 허물어지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오두막살이를 좋아하겠는가? 비록 안회라 할지라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안회가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어도 ‘도(道)를 찾아가는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뜻이 더 높고 큰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https://munchon.tistory.com/1151 [황보근영의 문촌수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즐거움 

 

옛사람들은 어렵고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참다운 인생을 즐길 줄 알았습니다.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았지요.

'안빈낙도'란 그래서 생긴 말입니다.
안빈낙도란 가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참된 인생을 즐기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지혜를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관적인 생활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책을 읽어보면,
우주의 기운은 마치 자력과 같아서
우리가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무척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삶의 무게입니다.
그것이 그 삶의 빛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한 물건도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들
아무런 손해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는데
가난한들 손해될 게 무엇이겠습니까?

또 살 만큼 살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하긴 죽을 때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세상에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의 선물을, 神이 주신 선물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 기간이 끝나거나 관리를 잘못하면
곧바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리듬이지요. 

- 법정 스님 < 참 맑은 이야기 >에서 -  


[김부조 산문]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분지족(安分知足)

시인 서정주는 ‘무등을 보며’라는 시에서 “가난은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구차하고 궁색하면서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평안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감을 뜻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전통적 가치관을 반영한 시구(詩句)다. 욕망에 구속되는 것보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것이 더욱 여유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지혜라는 점에서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 간이나 되는 넓은 집, 곳간에 쌓인 만 섬 곡식, 백 벌의 비단 옷도 나는 하찮게 여겼지만 늘그막에 즐거움을 주는 몇 가지는 갖고 싶다. 서책 한 시렁에 거문고 한 벌, 바람 들일 창문 하나, 신고 나갈 신 한 켤레, 차 끓일 화로 하나, 햇볕 쪼일 쪽마루, 늙은 몸 지탱할 지팡이 하나, 그 위에 경치 찾아 나설 때 타고 다닐 당나귀 한 마리가 있다면 더욱 좋겠다’ 조선 중종 때 문신 김정국(金正國)이 남긴 글이다.

옛 선인들의 청빈(淸貧)은 가난 속에서 오히려 마음의 여유를 찾고 삶의 즐거움을 일궈내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 정극인(丁克仁)은 세조의 왕위 찬탈 때 낙향해 자연 속에 파묻혀 사는 즐거움을 ‘상춘곡(賞春曲)’에 담았고,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벼슬 버리고 가난한 옛집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는 즐거움을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읊었다.

‘부귀도 내 원하는 바가 아니고 신선이 되는 것 또한 기약할 수 없는 일, 기분 내키면 홀로 나다니고 때로 지팡이 꽂아 놓고 김을 맨다.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 맑은 물가에서 시를 읊는다. 잠시 자연에 맡겼다가 돌아갈 뿐, 천명을 즐기면 되었지 무엇을 더 의심하랴.’ 그렇게 세상 욕심 털어내고 천명 따라 살면서 도연명은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며 안빈낙도했으니 그야말로 행복한 시인이었다.

조선 초기 황희(黃喜) 정승과 함께 청빈의 표상으로 전해지는 맹사성(孟思誠)은 맹고불(孟古佛) 정승으로 더 알려진 청백리였다. 여름철이면 허름한 베옷을 입고 소를 타고 다녀 ‘소 탄 정승 맹정승’이란 유행어를 남길 만큼 소탈한 공직자였다. 좌의정이란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오두막집에서 낡은 베잠방이를 입고 초라한 밥상을 받는 그의 삶이 사치와 허례에 빠진 당대 고위 공직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일화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사람이 청빈하게 살기는 마음먹기에 따라 가능하지만 무소유의 개념을 실천하기란 여간해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세속에서의 무소유란 곧 ‘알거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정 스님이 바랐던 무소유란 본디 그런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없어도 될 것을 없애는 것. 그것이 바로 무소유의 본질 아니었을까.

무소유란 받아들이지 않아서 궁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쌓인 불필요한 것을 머물게 하지 말고 내보내라는 뜻으로, 예컨대 샘물을 퍼내면 줄곧 퍼낸 만큼 고여 들게 마련이니 겁내지 말고 좋은 데다 거리낌 없이 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질’이 소득에 비해 낮은 편이란 정부 기관의 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주요 20개국(G20)에 포함되어 있는 39개국 가운데 우리나라 삶의 질이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다른 분야의 경쟁력은 중위권인데 삶의 질이 하위권에 쳐져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1인당 국민 소득이 꾸준히 증가해 왔는데도 삶의 질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