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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甫 김기창 화백

박연서원 2019. 6. 28. 07:28

雲甫 김기창 화백의 작품

동양화 / 한국화

 

군마도/ 1986, 비단에 수묵채색, 177 x 278 cm

 

밤새(부엉이)/ 1972, 종이에 수묵채색, 99 x 182 cm

 

전복도(戰服圖)/ 1934, 비단에 채색, 71.5 x 57.5 cm

 

아악의 리듬/ 1967, 비단에 수묵채색, 86 x 98 cm

 

세 악사/ 1970년대, 비단에 수묵채색, 64 x 75 cm

 

춘정(春庭)/ 1976, 비단에 채색, 64 x 62 cm

 

닭/ 1977, 비단에 채색, 61 x 69 cm

 

바보화조/ 1987, 비단에 채색, 56 x 56 cm

 

문자도/ 1984, 적색 종이에 수묵, 69 x 88 cm

 

서상도/ 1984, 비단에 수묵채색, 103.6 x 84.4 cm

 

십장생/ 1984, 비단에 수묵채색, 104.5 x 85 cm

 

귀로/ 1993, 비단에 수묵채색, 130 x 160.5 cm

 

점과 선 시리즈/ 1993, 종이에 수묵채색, 181 x 337 cm

 

부엉이/ 1976, 비단에 수묵채색, 120 x 83 cm

 

초저녁/ 1974, 종이에 수묵담채, 128 x 131 cm

 

청산도/ 1967, 비단에 수묵채색, 85 x 100.5 cm

 

백운도(白雲圖)/ 1978, 비단에 수묵담채, 82 x 105 cm

 

수묵 청산도/ 1976, 비단에 수묵담채, 53 x 61 cm

 

탈춤/ 1961, 종이에 수묵채색, 48.5 x 35 cm

 

바라춤/ 1961, 종이에 수묵채색, 47.6 x 40.8 cm

 

청자(靑磁)의 이미지/ 1960~1964, 종이에 채색, 165.5 x 111.5 cm

 

연(蓮)II, 유자, 학과 매병, 연꽃과 고양이/ 1958~1959, 종이에 수묵담채, 66 x 70 cm (4폭)

 

군해(群蟹)/ 1966, 종이에 수묵담채, 174 x 462 cm

 

 

보리타작/ 1956, 종이에 수묵채색, 84 x 267 cm

 

정청(靜廳) / 1934 종이에 채색 193 x 130 cm

 

흥락도(興樂圖) / 1957 종이에 수묵채색 221 x 168 cm

 

복덕방 / 1953~1955 종이에 수묵담채 75 x 96 cm

 

가을(엽귀) / 1935 비단에 채색 170.5 x 109 cm

 

군상(群像) / 1959 종이에 수묵담채 136 x 69 cm (4폭)

 

군작(群雀) / 1959 종이에 수묵채색 142 x 319 cm

 

호박꽃 / 1959 종이에 수묵담채 57.5 x 35 cm

 

금붕어 / 1960년대 비단에 수묵채색 57.5 x 52 cm

 

고양이와 나비 / 1964 종이에 수묵채색 98.5 x 50.3 cm

 

청산도 / 1970 비단에 수묵채색 82 x 101 cm

 

청록산수 / 1976 비단에 수묵채색 84 x 101 cm




청산농경(靑山農景) / 1970년대 / 비단에 수묵채 / 69 x 138 cm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의 청록산수

붓으로 말한 한국의 畵仙'


雲甫 김기창은 191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6세 때인 1930년부터 이당(以堂)의 문하에서 그림수업을 시작하였다.
1931년 5월 조선미술 전람회에서의 입선을 시작으로 1931년-1940년까지 잇달아 선전에서 입상하였다.

1963년에는 제2회 5월 문화상을, 1971년에는 제12회 '상일문화상'을, 1981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
1986년에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雲甫 김기창 화백의 작품들은 30년대의 초기작에서부터 80년대 후반의 근작에 이르기까지 60년간의 화력을 통해 매우 급진적이고도 역량 있는 변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꺼질 줄 모르는 생명의 힘으로 용솟음치는 조형에의 욕구를 끊임없이 작품으로 형상화시키는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으며 기존회화의 단순한 모방에서 벗어나 자기 혁신을 거듭하는 실현적 시도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안주를 기피하는 창의적인 예술가의 진취적 기질에 연유하는 화력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과 노력을 통하여 드러나는 운보의 예술은 결국 하나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는 현재 우리 나라 화단에서 독보적인 그의 위치를 대변해 준다고도 할 수 있다.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화백은 전통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하며 2만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긴 한국화의 1인자’였다.


또한 청각 장애를 예술을 통해 뛰어넘은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상실한 그는 그림에 온 힘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던 자신의 처지를,

“가슴에 응어리진 피눈물의 표현이지. 날뛰고 포효하고 내닫고 울음 울고 하는…”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그림 입문 직후 곧바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화가 박래현(朴崍賢)과 열애 끝에 46년 결혼했다.

둘은 결혼할 때 “작품활동에서 서로 협조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으며 평생 이를 지켰다.

그는 76년 부인의 타계 이후 더욱 작품에 몰두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2개월 만에 완성한 ‘바보산수’는 미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雲甫 김기창 화백의 "병신새끼들아" 한 마디.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청송교도소는 교화대상에서 제외한 다른 교도소의 고질적인 전과자나 흉악한 범죄자들만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청송교도소’라면 ‘날짐승마저도 피해 간다.’는 말이 있었던 곳이다. 죄질이 흉악한 범죄인들 200여명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 행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70이 넘은 운보 화백은 그 칼날이 시퍼런 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의 특유한 대화체로 ‘병신 새끼들아!’는 욕으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그 시절 삼중스님은 사형수를 교화하기 위하여 청송교도소를 드나들었다. “재소자들의 마음을 교화하기 위해 좋은 미술품을 재소자들에게 보여서 그들에게 편안한 마음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화백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송교도소의 벽에 운보 화백의 그림을 걸고자 한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려는 깊은 뜻에서 그림을 기부 받고 싶다.”고 부탁을 하였다. 얼마 후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버님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자신이 직접 청송교도소로 그림을 가지고 가고 싶답니다.


”재소자들을 위해서 운보 자신의 귀중한 하루를 보내려는 그의 깊은 속뜻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유명한 화백들이 기부한 그림 50점을 기념하는 행사는 청송교도소 앞마당에서 열렸다. 기념식장에서 운보 자신도 강연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행사 식순에 없던 갑작스런 그의 강연의사에 진행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분위기에도 ‘나또 하마띠 타고 시타(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강하게 했다. 그래서 주변의 양해를 구하고 연단에 그의 손을 잡고 올라갔다.


첫 마디부터 심상치 않았다.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이 첫 마디에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은 화들짝 놀랐다. 파랗게 놀란 눈으로 앞마당 재소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 출렁이더니 조금 지나자 조용해졌다. 화백의 말은 이어졌다.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그렇지만 나는 몸은 병신이지만 정신만은 건강하다. 그런데 당신들은 몸은 건강하나 정신은 병신이다. 그래서 내가 욕을 한 것이다. 나같이 몸이 병신이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는 타고난 재주나 조건을 믿지 않았다. 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왜 건강한 몸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교도소에 들어와서 이 지옥에서 죽을 고생들을 하느냐?”며 재소자들을 몰아 세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보 화백의 말에는 진실로 그들을 아끼는 마음을 느꼈던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더니 숙연하게 듣고 있었다.


참 이 기막힌 장면에 모두가 많이도 놀랬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받은 진실한 선물은 재소자, 교도관, 그리고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커다란 마음의 출렁임을 주었다. 운보 자신과 같은 처지인 벙어리 재소자를 만나 보고자 하는데 문제는 장소였다. 청각장애 재소자들이 먹고 자는 감방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야겠다는 황소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청각장애자가 수감된 감방’이라는 장소를 지적하는 그의 고집에 주변사람들의 애간장을 끓게 하였다. 아무리 말려보아도 소용이 없자, 법무부의 특별 허락을 부탁했다.


드디어 운보 화백은 청각장애 재소자의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감방 안에 들어 선 운보 화백은 벙어리 재소자를 꽉 껴안더니 볼을 비비면서 울었어요. ‘병신된 것도 서러운데 왜 이런 생지옥에서 이리 서럽게 살고 있느냐?’


울음 속에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어요. 볼을 서로 부비면서 우는 통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어요. 통곡으로 변해 서로 엉켜진 몸 타래를 풀어내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진정한 우애의 정을 내비치는 운보 화백의 모습에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은 녹아 내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운보 화백도 저 먼 제주교도소까지 다니면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더 귀중하게 사용했다. 화백이 청송교도소 강연장에서 내지른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는 목소리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