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다운 색과 면 분할을 보세요. 나이프로 정교하게 마무리한 터치도 그렇고, 정말 놀랍지 않나요? 대체 마크 로스코 보다 못할 게 뭐가 있나요?”
김인혜 학예연구사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개막한 전시 ‘유영국, 절대와 자유’(11월 4일~2017년 3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를 설명하는 3일 오전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시는 일본 유학시절인 1937년부터 99년 절필작까지 총 150여 점을 총망라하는 자리로, 대부분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어 평소 보기 힘든 작품들이 대거 나왔기 때문이다.
경북 울진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31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 1년 전 자퇴하고 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몬드리안을 좋아했던 그는 당시 도쿄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미술이었던 ‘추상’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떻게 시대를 앞서가는 미술을 받아들였을까. 장남 유진(66)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스무 살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시고는 ‘내가 할 게 없구나. 난 새로운 걸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전했다.
이곳에서 그는 동경제국대학 미학과 출신의 화가이자 평론가인 하세가와 사부로(長谷川三郞·1906~1957)를 비롯한 추상 미술계 리더들과 교유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세 살 많은 김환기, 동갑내기 이중섭과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사진에 관심을 보여 부친이 땅을 팔아 보낸 돈으로 카메라를 구입해 실험적인 화면을 추구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43년 고향으로 돌아온 유 화백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어선을 몰고 나가 고기를 잡았으며, 한국전쟁 때는 양조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김 학예사는 “유 화백은 재주가 다재다능한 분이셨다”며 “어부로 지낼 때는 고기도 잘 잡아 최고 어획량을 기록하기도 했고, 양조장을 할 때는 ‘망향’이라는 소주를 만들어 실향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안정기로 접어든 양조장을 접은 것은 그의 나이 마흔 무렵. 그는 부인에게 “금(金)산도, 금밭도 싫다. 이제 나는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야겠다.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통보하고 서울로 올라와 약수동에 터전을 마련했다. 57년 모던아트협회, 58년 현대작가초대전, 62년 신상회 등 가장 전위적인 현대미술단체를 이끌던 그는 64년 갑자기 “그룹 활동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첫 개인전을 통해 15점의 신작을 선보이며 화단에 충격을 던졌다. “이 정도 작품은 보여줘야 개인전”이라는 듯.
현대미술 작가들이 속속 파리로 유학을 떠나던 시절, 유학에 대한 미련은 없었을까. 유 교수는 “불어도 못하는 데 가봐야 변방의 화가가 된다”며 떠나지 않으셨다고 술회했다. 한국적인 그림이 화제가 됐을 때는 “전통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나라 사람이 못 그리는 것을 그리면 그게 한국적인 것이다”고 말씀하셨다고 덧붙였다.
“육십까지 그림 공부 좀 하겠다”는 그는 하루 종일 그리기에 매달렸다. 오전에 그림, 점심식사, 오후 그림, 저녁식사의 스케줄을 묵묵히 반복했다. 물컵 하나를 가득 채운 술로 반주를 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과묵했다. 심지어 “저희에게 남기실 말씀은 없으신가요”라고 여쭙는 장남에게 병상의 유 화백이 한 말은 “없다” 한 마디뿐이었다.
전시장에서 실제로 본 그의 작품은 도록이나 잡지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가 t단순하게 그려낸 원색의 산과 자연에서는 기묘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의 화면을 두고 김 학예사는 “색이 아니라 빛”이라고 말했다.
‘구글 컬처럴 인스티튜트’가 국내에 처음 들여온 아트 카메라를 이용해 10억 픽셀 이상의 초고화질로 잡아낸 영상 이미지도 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