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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미술의 대부 <山>의 화가 유영국(劉永國)

박연서원 2019. 7. 6. 08:51




한국 추상미술의 대부 <山>의 화가 유영국(劉永國)

 

 

 

 

  

 

 

 

  

  

 

 

  







유영국(1916. 4. 7 경북 울진~2002. 11. 11 서울)



서양화가 유영국(劉永國)은1916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났다.
1938년 일본 도쿄문화학원 유화과를 졸업하고,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6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초대작가(1968), 국전 서양화 비구상부 심사위원장(1970), 국전 운영위원(1976) 등을 역임하였고, 1979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37∼1942년 일본 자유미술회우전(自由美術會友展)에 출품하고,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1967년 제9회 도쿄비엔날레에 출품하였다.
1978년 파리 살롱드메 초대전에 출품하였고 197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유영국 초대전〉을 가졌으며, 1983년 밀라노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도 출품하였다. 그밖에〈유영국 회고전〉(1985), 〈세계현대미술제〉(1988), 〈갤러리 현대 초대전〉(1995), 〈한국추상회화의 정신전〉(1996)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유영국은 특히 <山>을 주로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1960년대 말부터 그는 ‘산’이라는 모티프를 사용하였는데, 자연을 구체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선·면·색채로 구성된 비구상적인 형태로 탐구하였다. 1930년대 도쿄 유학시절부터 추상작업을 시작한 이래 한국 모더니즘의 제1세대 작가이자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그의 작품은 산, 길, 나무 등의 자연적 소재를 추상화면의 구성요소로 바꿈으로써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과 강렬한 색채가 어우러진 시적 아름다움과 경쾌한 음악적 울림을 자아낸다. 1960년대 말부터 '산'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하는데, 자연을 구체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선·면·색채로 구성된 비구상적인 형태로 탐구하였다.

그 중 《산》(1970)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빨강, 파랑의 색면이 형태와 선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해·산·바다·들판 등을 상징하여 작가의 자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여준다.
최근의 화풍은 서사시적 장대함에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이나, 강렬한 색채와 엄격한 구성이 빚어내는 하모니의 울림에는 변함이 없다.
일본 자유미술전 최고상(1938), 대한민국 예술원상(1976),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2) 등을 수상하였다.


“다른 나라 사람이 못 그리는 것을 그려야 한국적”

탄생 100주년 기념전 …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이 아름다운 색과 면 분할을 보세요. 나이프로 정교하게 마무리한 터치도 그렇고, 정말 놀랍지 않나요? 대체 마크 로스코 보다 못할 게 뭐가 있나요?”

김인혜 학예연구사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개막한 전시 ‘유영국, 절대와 자유’(11월 4일~2017년 3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를 설명하는 3일 오전 기자간담회 자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시는 일본 유학시절인 1937년부터 99년 절필작까지 총 150여 점을 총망라하는 자리로, 대부분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어 평소 보기 힘든 작품들이 대거 나왔기 때문이다.

경북 울진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31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 1년 전 자퇴하고 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몬드리안을 좋아했던 그는 당시 도쿄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미술이었던 ‘추상’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떻게 시대를 앞서가는 미술을 받아들였을까. 장남 유진(66)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스무 살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시고는 ‘내가 할 게 없구나. 난 새로운 걸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전했다.

이곳에서 그는 동경제국대학 미학과 출신의 화가이자 평론가인 하세가와 사부로(長谷川三郞·1906~1957)를 비롯한 추상 미술계 리더들과 교유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세 살 많은 김환기, 동갑내기 이중섭과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사진에 관심을 보여 부친이 땅을 팔아 보낸 돈으로 카메라를 구입해 실험적인 화면을 추구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43년 고향으로 돌아온 유 화백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어선을 몰고 나가 고기를 잡았으며, 한국전쟁 때는 양조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김 학예사는 “유 화백은 재주가 다재다능한 분이셨다”며 “어부로 지낼 때는 고기도 잘 잡아 최고 어획량을 기록하기도 했고, 양조장을 할 때는 ‘망향’이라는 소주를 만들어 실향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안정기로 접어든 양조장을 접은 것은 그의 나이 마흔 무렵. 그는 부인에게 “금(金)산도, 금밭도 싫다. 이제 나는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야겠다.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통보하고 서울로 올라와 약수동에 터전을 마련했다. 57년 모던아트협회, 58년 현대작가초대전, 62년 신상회 등 가장 전위적인 현대미술단체를 이끌던 그는 64년 갑자기 “그룹 활동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첫 개인전을 통해 15점의 신작을 선보이며 화단에 충격을 던졌다. “이 정도 작품은 보여줘야 개인전”이라는 듯.

현대미술 작가들이 속속 파리로 유학을 떠나던 시절, 유학에 대한 미련은 없었을까. 유 교수는 “불어도 못하는 데 가봐야 변방의 화가가 된다”며 떠나지 않으셨다고 술회했다. 한국적인 그림이 화제가 됐을 때는 “전통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나라 사람이 못 그리는 것을 그리면 그게 한국적인 것이다”고 말씀하셨다고 덧붙였다.

“육십까지 그림 공부 좀 하겠다”는 그는 하루 종일 그리기에 매달렸다. 오전에 그림, 점심식사, 오후 그림, 저녁식사의 스케줄을 묵묵히 반복했다. 물컵 하나를 가득 채운 술로 반주를 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과묵했다. 심지어 “저희에게 남기실 말씀은 없으신가요”라고 여쭙는 장남에게 병상의 유 화백이 한 말은 “없다” 한 마디뿐이었다.

전시장에서 실제로 본 그의 작품은 도록이나 잡지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가 t단순하게 그려낸 원색의 산과 자연에서는 기묘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의 화면을 두고 김 학예사는 “색이 아니라 빛”이라고 말했다.

‘구글 컬처럴 인스티튜트’가 국내에 처음 들여온 아트 카메라를 이용해 10억 픽셀 이상의 초고화질로 잡아낸 영상 이미지도 볼거리다.


Grieg's Peer Gynt Suite No.1, Op.46 / Mor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