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6‧25 한국전쟁 기록사진

박연서원 2019. 8. 10. 06:19

▲ 한국전쟁 발발 57주년을 맞은 25일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담은 사진 250여 점을 엮은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 3'(눈빛출판사 www.noonbit.co.kr가 출간됐다.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이 사진들은 이미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2',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등을 엮어 낸 바 있는 소설가 박도씨가 미 국립문서

기록보관청(NARA)이 보관하고 있는 한국 현대사 관련 파일들 중에서 발굴한 것이다.
사진은 1951년 1월 촬영한 인천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뉴시스 

 

1950년 9월17일 탱크를 가로막은 시신들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뉴시스

 

1950년 10월21일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하고 있는 미 해군 함정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뉴시스

 

1950년 10월26일 원산으로 돌진하는 상륙정들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뉴시스

 

1950년 9월16일 상륙작전 직후 불타고 있는 인천 시가지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뉴시스

 

1952년 10월2일 촬영한 남대문 전차역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뉴시스

 

1952년 10월 2일 인천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뉴시스

 

1951년 7월 30일 미 해군 전투기에서 내려다 본 파괴된 철교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뉴시스

 

1950년 12월19일 철수하는 유엔군을 따라가기 위해 부두로 몰려든 피란민들의 모습

 

1951년 5월24일 터널을 폭파하려는 영국군의 인솔하에 터널 밖으로 대피중인 피란민들.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1953년 8월5일 억류중 당한 부당한 처우를 혈서로써 항의하고 있는 귀환 국군 포로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1951년 2월 추위에 떨고 있는 중국군 포로들의 모습

 

1951년 9월20일 수풀에서 기어나와 투항하고 있는 인민군 병사의 모습

 

1950년 8월22일 면도중인 미군 병사와 거울을 들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

 

1952년 부산 국군병원에서 퇴원하는 상이군인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

 

1951년 2월16일 미군들이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어린이들에게 DDT 살충제를 살포하는 모습

 

사진은 포항의 고아원에서 어린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고 있는 미군 병사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사진은 1951년 2월8일 부산에서 동생을 업은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1951년 2월8일 부산에서 촬영한 한 가족의 모습. /사진=눈빛출판사 제공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시 투항하고 있는 인민군 병사들의 모습

 

사진은 종전 후인 1954년 2월26일 전선에 배치된 미군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내한한 인기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군복입은 모습. /연합뉴스

 

사진은 위,종전 후 전선에 배치된 미군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내한한 인기 여배우 마릴린 먼로. /연합뉴스

 

사진은 김포비행장을 시찰중인 맥아더 장군. /연합뉴스

 

사진은 움막에 살고있는 다섯 어린이. /연합뉴스

 

사진은 투항하고 있는 인민군 병사들. /연합뉴스

 

사진은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중인 유엔군 병사들이 강추위속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1950.12.6 /연합뉴스

  

사진은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들.1952.1.7 /연합뉴스 

 

사진은 임진강 부교를 정비하고 있는 국군병사.1951.8.3 /연합뉴스

 

사진은 원산으로 돌진하는 상륙정들. /연합뉴스

 

원산 상륙작전 -

1950년 10월 26일, 유엔 연합군의 상륙정들이 원산으로 돌진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원산항의 확보로 연합군과 국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섰다 


밥과 국뿐인 식사 -

한국 해병대원들이 야전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밥과 국뿐이며 반찬은 보이지 않는다

 

삽 들고 비행장 복구 -

폭격으로 파괴된 비행장 복구에 나선 노무자들이 삽을 들고 상급자로부터 작업지시를 받고 있다

(1950년 10월 24일). 멀리 뒤에 보이는 활주로에 미군기가 보인다.장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기습남침
동족 300만 명이 희생된 최악의 침략 전쟁사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3개월 만에 서울 탈환

 

 

소련의 졸개 김일성이 한반도 적화통일 야욕으로 300만 동족을 희생시킨 남침이 6.5전쟁이다. 김일성은 1950년 소련의 공산주의 독재자 스탈린의 승인을 받고 일요일인 6월 25일 새벽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휴가를 즐기던 우리 장병들은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다. 남침 3일 만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1개월 만에 이른바 낙동강전선을 제외한 대한민국 전역이 김일성 손아귀에 들어갔다. 세계의 전쟁사에서 유례가 없는 동족살상 전쟁이었다. 세습독재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느냐,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느냐의 운명은 실로 풍전등화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드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을 불러들이는데 성공했다. 맥아더 장군의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으로 빼앗긴 서울은 3개월 만에 수복됐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 본보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뿌리로 명명하고 그들의 업적을 연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2030세대의 젊은이들이 과연 얼마나 6.25전쟁의 참혹상을 알고 있을까? 산하가 붉은 피로 물들고 공포와 굶주림에 떨었던 그 때를 상상이라도 하고 있을까? 북한 김정은 3대 세습독재 왕조는 지금도 도처에 살인수용소를 운용하고 인민재판으로 무고한 인민을 총살시키고 있다. 국민소득은 세계 최빈국 수준인 854달러(2013년 추정치)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2만3838달러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아세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한한 자유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법에 의하지 않고는 인권불가침이다. 대통령도 비판하고 욕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제 겨우 60여년에 불과한 한국사를 젊은이들은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건국사와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 산업화의 공로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을까? 국부(國父)가 지폐는커녕 태평로 한복판에 동상조차 세우지 못하는 부끄러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세계로 수출되는 ‘새마을 운동’의 창시이자 국부(國富)의 상징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독재자라는 낙인찍기의 희생양일 뿐이다. 당시의 불가피성은 좌파선동꾼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상기컨대 이승만과 박정희의 뛰어난 예지와 돌파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마 3대 세습왕조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공산주의가 후진국의 근원인 베트남의 오늘도 비근한 교훈이 아니겠는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잘못된 속담을 하루속히 걷어낼 때 대한민국은 당당하고 올곧은 선진국이 될 것이다. 

 

6.25 전쟁 64주년을 맞은 25일 전국 곳곳에서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기념행사가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는 '희생으로 지킨 대한민국, 함께 여는 한반도 통일시대'라는 주제로 기념식이 진행됐다. 기념 행사에는 정홍원 국무총리 등 정부 주요 인사와 국내외 6.25 참전용사, 참전국 주한 외교사절, 시민, 학생, 장병 등 4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태극기와 유엔기 게양식, 영상물 상영, 기념사, 특별공연 등이 이어졌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국내·외 참전용사 예우와 관련 “오늘의 대한민국은 여러분의 고귀한 헌신 위에 이룩됐다”며 “여러분의 나라 사랑 정신을 받들고 그 숭고한 희생이 영광된 역사가 돼 자자손손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역사를 잃어버린 국가와 국민은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거울 없이 어찌 자기의 얼굴을 보며 다듬겠는가? 6.25노래가 가슴을 울리는 이유도 이래서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구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우리 목청 높여 불러보자. 보훈의 달 6월이 다가기 전에 순국선열을 가슴 깊이 안아보자. 다시는 6.25의 참극을 자초하지 말자. 민족과 통일이라는 북한 독재자의 감언이설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친북좌파의 선동을 경계하자. 튼튼한 안보와 불굴의 민주주의 대한민국 수호 의지만이 번영의 선진국을 기약할 수 있다. 행여 안보불감증에 결려있지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어보자.

다음은 6.25남침전쟁의 참혹한 민족적 비극을 전투 한복판에서 목숨 걸고 취재했던 미국 女기자 마게릿 히긴스의 종군기와 전쟁 당시의 참혹한 사진을 소개한다. 


한국전쟁에 뛰어든 유일한 女기자 마게릿 히긴스

글 | 조화유 재미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좌) 1950년 10월 2일자 LIFE지에 실린 히긴스 기사 모습.

(우) 지난 6월21일 히긴스의 작은 묘비석 뒤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은 필자.

미국의 묘는 봉분이 없고 평평한 잔디밭이다. 그 위에 비석이 서있다.

 

또 6월 25일이 돌아왔다. 
해마다 이맘때면 내가 꼭 만나러 가는 여자가 있다. 만나는 장소는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 내가 만나는 여자는 마게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66년 마흔 다섯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난 예쁘고 당찬 여자. 그녀는 한국전쟁을 취재한 300여명의 외국 종군기자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64주년 기념일을 앞둔 지난 토요일(6월21일) 나는 히긴스의 비석 앞에 서서 그녀의 명복을 또 빌었다. 내가 히긴스에게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67년 풋내기 조선일보 기자 시절 “대사건과 대기자”라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을 때였다. 이 책은 언론인들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받은 기자들과 그들의 대표적 기사들을 모은 것인데, 나는 이 책에서 히긴스의 간단한 약력과 그녀의 대표적 기사인 인천상륙작전 종군기를 번역해 실었다.


 히긴스는 북한 김일성이 남침을 시작하기 나흘 전인 1950년 6월21일 The New York Herald Tribune 신문의 토오쿄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당시 그녀는 30세였으나 LIFE 잡지의 유명한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사진을 보면, 여대생 정도의 귀여운 금발 아가씨로 보였다. 미군 전투복에 전투모를 눌러쓴 그녀는 과연 "이브닝 드레스보다 전투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좌) 1950년 10월 2일자 LIFE지에 실린 히긴스 기사 모습. (우) 지난 6월21일 히긴스의 작은 묘비석 뒤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은 필자. 미국의 묘는 봉분이 없고 평평한 잔디밭이다. 그 위에 비석이 서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이 프랑스를 해방하고 독일을 향해 진격할 때 히긴스는 종군기자로 처음 군인들을 따라나섰다. 그녀는 미군사령부에서 브립휭 해주는 전황을 받아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최전방을 병사들과 함께 뛰면서 발로 기사를 썼다. 1945년 봄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 그녀는 미군 신문 The Stars & Stripes의 기자인 미군상사(남자) 한 명과 Jeep를 몰고 독일 남부의 다카우 유태인 수용소에 미군보다 먼저 도달했다. 수용소장(독일군 준장)은 그 두 기자를 미군 선발대로 오인하고 백기를 들고 나와 항복하려고 했다. 이 일화는 미국 언론계의 한 전설이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히긴스는 뉴욕 여기자클럽으로부터 최우수 해외특파원상을 받았고 1948년에는 베를린 공수작전(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미군이 베를린 시민들에게 생필품을 비행기로 실어나른 사건)을 취재했다. 1949년 중국에 마오저둥(모택동)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신문사는 중국어에 능통한 그녀를 아시아에 파견키로 결정, 1950년 히긴스는 30세의 나이로 토오쿄 특파원 겸 지국장에 임명되었고, 그녀가 일본에 도착한 지 나흘 만인 6월25일 새벽 한국전쟁이 터졌다.
 
6월27일 히긴스는 일본 주재 미국 언론사 특파원 3명(뉴우욕 타임즈의 버튼 크레인,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키즈 비이취, 타임(주간지)의 후랭크 기브니 등 모두 남성)과 함께 미군 수송기를 얻어 타고 김포비행장으로 날아왔다. 이 비행기는 서울에 사는 미국 민간인들을 일본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온 특별기였다.
남자 기자들은 히긴스에게 한국전선은 위험하니 일본에 남아 있으라고 권고했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여자도 훌륭한 종군기자가 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히긴스 등 4명의 미국 기자들이 6월27일 오후 김포비행장에 내렸을 때 미군 수송기가 북한 야크기의 공습을 받고 불타고 있었고 미국 군사고문단 장병들은 후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서울은 아직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다. 기자들은 지이프 한 대를 얻어 비가 내리는 김포가도를 달려 서울로 진입했다. 도로는 피난민들의 물결로 가득찼다. 등에 어린애를 업고 머리에는 보따리를 인 한국 아낙네들을 히긴스는 처음 보았다. 서울 시내에 들어가 한국 육군본부와 미국 군사고문단이 함께 쓰고 있는 건물에 도착하니 스털링 라이트 대령이 초조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았다.
 그날 밤 기자들은 군사고문단 본부 건물 안에서 잠을 청했다. 남자 셋은 따로 한 방에서 자고 히긴스만 사무실 구석에 놓인 군용 침대 위에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이 때만 해도 그녀는 푸른색 스커트와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미군 장교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일어나시오! 후퇴 명령이오!”하고 소리쳤다. 히긴스는 군사고문단장 대리 라이트 대령 일행과 함께 한강인도교 쪽으로 지프를 몰았다. 다른 3명의 남자 기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름비는 추적추적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로 향하는 피난민과 군인들로 도로는 꽉 찼다.
 

한강다리 폭파 때 NYT와 TIME 기자도 부상
 
 28일 새벽 2시 반쯤 그들이 한강 인도교 바로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오렌지색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히긴스 일행은 적기의 폭격이거나 간첩에 의한 인도교 폭발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적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국군 공병대가 인도교를 예고도 없이 폭파해 버린 것이다.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군인들과 피난민이 죽거나 다친 것은 물론이다. 히긴스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 일행보다 앞서 가던 세 기자 중 두 명─ 뉴우욕 타임즈의 버튼 크레인 특파원과 타임의 후랭크 기브니 특파원─은 부상을 당했다. 기브니 기자는 “우리가 탄 지이프 바로 앞에는 한국군을 잔뜩 태운 트럭이 한 대 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 트럭 앞에서 다리가 폭파되면서 그 트럭이 우리를 막아주어 우리는 부상만 당하고 목숨은 건졌다”고 나중에 타임에 썼다.
 폭파 당시 인도교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히긴스 일행은 무사했으나 한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북한 침략군은 서울로 향해 진격해 들어오는데 퇴로가 차단당한 수많은 한국군과 미 군사고문단원들, 그리고 피난민들은 어떻게든 한강을 건너려고 백사장으로 몰려갔다. 날이 밝자 한강에 나룻배들이 보였다. 그들은 그 나룻배들을 타고 강을 건넜다. 히긴스는 라이트 대령 일행을 따라 수원 쪽으로 걸어갔다. 비가 와서 진창이 된 논길과 산길을 몇 시간 걸어 수원농대(미군사고문단 임시본부로 쓰고 있었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행방을 몰라 궁금해 했던 다른 세 기자들을 만났다. 두 명은 피묻은 붕대를 머리에 감고 있었다. 물론 한강 인도교 폭파 때 구사일생한 크레인 기자와 기브니 기자였다.  

 

 

매카앗서(맥아더) 장군과 단독회견
 
 태평양지역 미군 총사령관인 5성 장군 Douglas MacArthur(다글러스 매카앗서) 원수도 그의 전용기를 타고 토오쿄로부터 수원으로 날아왔다. 매카앗서 장군은 수원에서 지이프를 타고 흑석동 고갯마루까지 다가가 한강과 서울을 내려다보며 반격 구상을 했다. 수원으로 되돌아간 장군은 임시수도 대전에서 날아온 이승만 한국 대통령과 만나 회담했다. 李대통령은 수원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도중 북한 야크기의 추격을 받고 하마터면 비행기가 추락할 뻔했다. (MacArthur를 ‘맥아더’라 발음하면 미국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 ‘매카앗서’가 비교적 정확한 표기다.)
 29일 오후 늦게 매카앗서 장군이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수원비행장으로 나왔을 때 히긴스는 비행장 활주로 끝에서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장군의 전선 시찰 기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장군은 그녀에게 다가가 “토오쿄에 갈테면 내 비행기를 타도 좋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그렇잖아도 송고를 위해 일본으로 가야했던 그녀는 너무나 기뻤다. 비행기에 오르자 장군을 수행해온 AP, UP, INS, Reuters 등 주요 통신 토오쿄 지국장들이 히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매카앗서 장군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이들 네 지국장들 뿐이었는데, 젊은 기자, 그것도 여성인 히긴스가 장군 전용기에 오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들은 다시 한 번 놀라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가 비행기 안에서 장군과 단독 회견한 것이 뉴욕 헤랄드 트리뷴에 특종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6월30일 히긴스는 다시 수원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탄약 수송기에 편승했다. 수원비행장에 내리자 무뚝뚝하게 생긴 미군 대령 하나가 “아가씨, 일본으로 돌아가시오. 여기는 위험하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히긴스는 “I wouldn’t be here if there were no trouble. Trouble is news, and the gathering of news is my job!”(위험한 사태가 없으면 나는 여기 오지도 않을 것이오. 위험한 사태는 곧 뉴스며, 뉴스 수집은 나의 임무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중략- 그녀는 죽미령 전투 때부터 여성복장을 벗어 던지고 미군 사병과 똑같은 복장을 했다(신발만은 군화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그녀는 어깨까지 덮었던 긴 금발머리를 짧게 깎아 전투모 속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에 뒤에서 보면 그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화장도 거의 하지 않고 립스틱만 입술에 살짝 발랐다. 립스틱을 잃어버릴 때는 그나마 바르지 못했다. 전선의 먼지와 연기, 그리고 장마철 한국의 진흙이 튄 그녀의 얼굴은 그래도 매력적이었다. 한 미군 일선 지휘관은 “히긴스는 화장품보다 먼지와 진흙이 더 어울리는 매력적인 여자”라고 말했다.
 8월 초 대구 근방 낙동강 전선에서 미 27보병연대가 북한군과 4시간 동안 혈투를 벌인 일이 있었다. 이때 히긴스는 날아오는 총탄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생병 역할을 자청, 부상병들에게 수혈을 해주었다. 그녀는 이 전투를 보도하면서 “위생병들이 많은 부상병들을 들것에 실어 날랐다. 한 종군기자는 수혈하는 방법을 즉석에서 배워 위생병들을 도왔다”고 썼다. 그러자 27연대장 마이캘리스 대령(나중에 주한 미군사령관이 됨)은 뉴욕 헤랄드 트리뷴 신문에 보낸 독자투고에서 “우리 연대 전투를 보도한 히긴스 기자의 기사에는 중요한 게 하나 빠졌다. 그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병들에게 수혈을 해주었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으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히긴스 기자의 그날 행동은 가히 영웅적이었다”고 썼다. 
  

인천상륙, 장진호후퇴에도 종군…
퓰리처상 받아 
 

 

 ▲맥스 데스포는 한국에서 지내는 3년 동안 종군 기자 경력 중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당시 그가 찍은 사진들.

① 눈 무덤 밖으로 나온 손끝, 1951년 1월 27일 경기도 양지.

② 열차 사이 연결 공간에 자리 잡은 피난민 가족, 50년 12월 황해도 신막 인근.

③ 피난 소년, 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

④ 무장 해제된 포로들, 50년 9월 22일 인천 - 서울.

⑤ 비탄의 흥남 부두, 50년 12월 20일 함경남도 흥남.

[사진 AP 맥스 데스포 컬렉션]  


 히긴스는 9월15일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그녀는 해병들과 함께 상륙정을 타고 인천 해안에 상륙했다. 이때의 체험을 그대로 써서 보도한 것이 이듬해(1951년) 그녀가 국제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해병 30명과 기자 2명이 탄 우리의 상륙정이 방파제에 부딪쳤다. 적의 소총 탄환은 계속해서 날아와 우리 주위에 물을 튕겼다. 우리는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배를 방패삼아 한동안 엎드려 있다가 방파제에 뚫린 큰 구멍으로 들어갔다”라고 썼다. 이 와중에서 한 해병이 실수로 그녀를 군화발로 짓밟고 넘어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 해병이 내가 여자임을 알아보고 당혹해 하던 모습이란…”이라고 썼다.


 히긴스는 함경남도 장진호 지역으로부터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는 미 해병들도 종군 취재하는 등 항상 최전방 전선을 누볐다. 그리고 그녀가 써보낸 생생한 기사들은 당시 뉴욕 타임즈의 경쟁지였던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녀는 1951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같은 해 앞서 인용한 “War in Korea”란 책도 출판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히긴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10년 더 뉴욕 헤랄드 트리뷴 기자로 활약했다. 이혼남인 공군 장성과 결혼도 했다. 그녀는 1963년 뉴욕의 일간 신문 Newsday로 자리를 옮기고 베트남 전쟁이 시작될 무렵인 1965년 초 인도차이나 반도 취재를 떠난다. 월남에서 그녀는 고딘디엠 월남 대통령 암살 배후에 미국 CIA가 있다고 폭로하는 기사를 써서 미국 정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녀는 1965년말 라오스에서 취재 중 급성 풍토병(기생충에 의해 발병)에 걸려 귀국,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1966년 1월, 45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해는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군인이 아니었지만 종군기자로 활약한 업적을 고려해 국립묘지 안장이 허용된 것 같다. 훨씬 나중에 죽은 남편(윌리엄 호올 공군중장)도 먼저 간 아내와 함께 한 평도 될까 말까한 작은 땅에 합장되어있다. 작은 묘비 한쪽에는 남편의 계급, 생년월일과 사망년월일이 새겨져 있고, 다른 쪽에는 히긴스의 성명,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그리고 His Wife라는 글 외에 그녀의 화려한 언론인 경력은 한마디도 없다. 미국에서는 사회적 평판이 높은 사람일수록 비석은 더 검소한 것 같다.

정학길/시사인코리아 상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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