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야화 (22)여승
윤참판은 그럴듯한 허우대에 인물 준수하고 언변 또한 좋아 자유자재로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재주를 가졌다.
열두살에 초시에 붙고 열여섯에 급제를 한 빼어난 문필에 영특하기는 조선천지 둘째가라면 서럽다.
성품도 너그러워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데다, 선대로부터 재산도 넉넉하게 물려받아 나랏일을 하면서 일전 한닢 부정하는 일이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본다. 한겨울에 맨발로 다니는 거지에게 자기 신발을 벗어주고 땟거리가 없는 집엔 곡식자루를 보낸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있고 처자식에게 자상하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하나의 티가 있다.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것이다. 노소미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치마만 둘렀다하면 사족을 못 쓰는 것이다. 수많은 여자들을 섭렵했지만 말썽 일으켜 봉변당한 적이 한번도 없다. 남녀관계란 이불 속에서는 한몸이지만 헤어지면 원수가 되는 법,
그러나 윤참판을 거쳐 간 무수한 여자들은 어느 누구하나 그를 욕하는 법이 없다.
윤참판이 명월관 춘심에게 싫증이 날 즈음, 서당골 오과부댁과 눈이 맞아 날만 어두워지면 그 집으로 갔다가 닭이 울 즈음 남의 눈을 피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도 밤새도록 육덕이 푸짐한 오과부를 끼고 운우의 정을 만끽하다가 감나무가지에 걸린 그믐달을 보며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어라, 이게 무슨 변고인고? 안방에서 난데없이 목탁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헛기침을 하고 안방 문을 열었더니 여승이 촛불을 켜놓고 눈물을 흘리며 불경을 외고 목탁을 치는 것이다.
대감, 소저는 오늘 아침 입산하기로 했습니다. 좋은 여자 구해서 안방을 차지하도록 하고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부인이 삭발을 하고 여승이 된 것이다. “부인!” 윤참판이 침을 꿀꺽 삼키며 정적을 깼다.
“가만히 생각하니 부인 속을 많이도 태웠구려. 친구 부인, 하인 마누라, 술집 작부, 과부, 방물장수… 온갖 여인 다 접해봤지만 아직 여승은 내 품에 품어보지 못했소.”
하도 어이없어 입만 벌리고 있는 부인을 윤참판이 쓰러뜨렸다. 부인이 발버둥쳐보았지만 이내 발가락을 오므리고 윤참판의 등을 움켜잡았다.
땀범벅이 된 부인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못 말리는 대감” 눈을 흘기며 싸 놓았던 보따리를 풀었다.
조주청의 사랑방 야화 (87)정절부인
'십여년 전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 박주현의 고향이 밀양이었지. 그때 참 친하게 지냈는데….
밀양에서 뼈대 있는 집안이라 그 집을 찾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대궐같은 박주현의 집 솟을대문을 두드렸다.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사랑방에 좌정하자 소복을 입은 젊은 부인이 나와 인사를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박주현은 한달 전에 죽었고 소복 입은 부인은 바로 박주현의 미망인이었다. 안방 옆 곁방에 차려 놓은 빈소에서 조익이 절을 올릴 때 미망인은 섧게 곡을 했다.
조익은 박주현의 자취가 담긴 사랑방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촛불을 끄고 누웠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박주현과 함께 천렵과 수박 서리를 하던 때를 생각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보니 삼경이 가까웠다. 그때 ‘쿵’ 하고 담 넘는 소리에 이어 뒤뜰 대나무 밭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익은 잽싸게 문을 열고 나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대나무 밭을 응시했다. 도적이구나!
그런데 대나무 밭에서 나온 도적이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겨 안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안방에 촛불이 켜졌다. 조익은 뒤뜰로 가 열어 놓은 들창으로 안방을 들여다봤다. 이럴수가! “오늘밤은 소복을 입으니 더 예쁘네 잉.” 땡추가 미망인을 껴안고 있었다. 목소리를 낮추라며 손가락으로 땡추의 입을 막은 미망인은 부채로 화롯불을 살려 석쇠를 올리고 그 위에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미망인이 미리 차려 놓은 주안상을 당겨 약주를 따랐다. 한잔 마신 땡추가 입을 벌리자 미망인은 석쇠 위의 고기 한점을 입에 넣어 준다. 번들번들 개기름이 낀 땡추는 윗옷을 풀어헤치고 비스듬히 보료에 기대어 한손엔 술잔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미망인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고기 안주에 술이 얼큰해진 땡추가 미망인의 옷고름을 풀었다. 미망인이 코맹맹이 소리로 “잠깐만. 상 치우고 올게요.” 하며 부엌으로 나가자 조익은 끓어오르는 분을 참을 수 없어 옷 속에 품고 다니던 장도를 꺼내 들창 안으로 던졌다. 땡추가 목덜미에서 선혈을 쏟으며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조익은 잽싸게 사랑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안방에서 미망인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집안의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날이 새자 밀양 관가에서 형방과 나졸들이 나오고 친인척도 몰려와 집안이 어수선해졌다. 조익은 모른 척 행랑아범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간밤에 미친 땡추가 상중의 안방마님을 겁탈하려고 들어왔다가 안방마님의 장도에 찔려 죽었습니다. 안방마님은 자살하려는 걸 저희들이 막았습니다.”
이듬해 다시 밀양땅에서 하룻밤 묵게 된 조익이 박주현의 집을 찾았더니 집 앞에 정절부인에게 내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져 있었다. 조익이 친구 집안의 명예를 살린 것이다.
조주청의 사랑방 야화 (166)학질 고치기
이초시의 사위 설주달은 과거에 일곱번이나 낙방하고 나서 칠전팔기라 큰소리치더니, 또 미역국을 먹고 마침내 책더미를 아궁이 불더미 속에 처박고는 파락호 건달이 되었다.
키가 팔척에 허우대는 허여멀끔한데다 말주변도 좋아 사람 모이는 곳이면 안 끼는 곳이 없다. 비록 과거에는 낙방했지만 모르는 것이 없어 별명이 만물박사다. 깊은 지식은 없이 수박 겉핥기로 영양가 없는 잡학에 밝아, 역사는 본 듯이 얘기하고 천문지리는 지관을 뺨치고 농사엔 농군보다 더 많이 알고, 관상·손금·사주팔자는 점쟁이 저리 가라 하고, 병에는 의원보다 더 아는 척했다.
설주달은 술 한잔 걸치면 장인인 이초시한테 구박을 받으면서도 개울 건너 처갓집에 들른다. 자신은 관운이 없어 억지로 관직을 맡으면 액이 따라 화를 입는다며 현란한 입심으로 장모의 마음을 꽁꽁 묶어 놓아 아직도 백년손님이다.
요즘 부쩍 처갓집에 발길이 잦은 것은 장모한테 술 한잔 얻어 마시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장모가 데려다 놓은 몸종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서다. 장모의 친정 쪽 종질이 되는 몸종 길례는 꽃다운 열일곱에 이목구비가 또렷한데다 엉덩이는 탄탄하게 갈라졌다.
어느 장날, ‘장인·장모는 장에 갔겠지’ 생각하며 개울 건너 처갓집에 갔다. 장인은 장에 가고 없었지만 불행하게도 장모는 집에 있었다. 설주달은 땀을 뻘뻘 흘리며 우물물을 길어 오던 장모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아니, 길례는 어디 두고 장모님께서 손수 물을 길어 오십니까?”
물동이를 내려놓은 장모가 크게 반색을 했다.
“자네 잘 왔네. 우리 길례 좀 살려 주게. 자네 학질 고치는 법을 아는가?”
건달 사위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게 있었다. “잘 알지요.” 설주달은 한숨을 푹 쉬더니 “그게 몹시 까다로운 병입니다. 몸을 치료하면서 달라붙은 불귀신과 한설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잘못하면 나도 죽어요.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장모는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길례 방에 들어갔다 온 설주달은 지필묵을 가져오라 해서 부적을 그리더니 병풍을 가져오라 해서 길례 주위로 둘러치고 방문을 꼭 잠근 후 “백보 이내에 사람이 있으면 안된다”며 장모를 멀찌감치 몰아내고 미소를 흘리며 병풍 속으로 들어갔다.
길례의 저고리를 벗기고 치마를 내리고 장모가 길어 온 찬 우물물에 수건을 적셔 온몸을 닦아 내고 앵두 같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꽃봉오리가 오르듯이 봉긋한 유두를 빨다가 가뭇가뭇 돋아나는 숲을 헤쳤다.
비몽사몽간에 열이 펄펄 끓다가 추워서 오들오들 떨던 길례가 깜짝 놀랐다. 홍두깨가 꽉 막혔던 옥문을 찢으며 돌진한 것이다. 한참 후 설주달은 땀범벅이 되어 나왔다. 학질은 놀라면 낫는다더니 이튿날 길례가 일어났다.
한달쯤 지난 어느 날, 길례가 헐레벌떡 설주달을 찾아왔다. 길례를 따라 처가에 갔더니 안방에 병풍을 쳐 놓고 장모님이 끙끙 앓고 있고, 마루에서는 장인이 지필묵을 내놓고 먹을 갈고 있었다.
설주달은 도망쳤다. “장모님 병은 장인만이 고칠 수 있는데….”
남의 속도 모르는 설주달의 마누라는 제 어미 학질을 안 고쳐 준다고 뒤돌아 앉아 눈물을 짰다.
책소개
『사랑방야화』제1권. 농민신문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연재 중인 작가 조주청의‘사랑방야화’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옛날 사랑방에서 펼쳐진 농염하고 에로틱한 해학의 세계가 인기작가 조주청의 생생한 입담으로 펼쳐지고 있다.
칼럼니스트 조주청의 『사랑방야화』 제2권. 저자가 농민신문에서 연재한 칼럼 《조주청의 사랑방야화》를 엮었다. 농염한 익살과 풍자가 녹아진 이야기에다가, 매력적 그림이 곁들여져 있다. 여유없이 급박하게만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시 짬을 내, 멋을 알았던 우리 선조의 삶 속으로 들어가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외설적이지만 외설스럽지 않은 재미를 추구한 농밀한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다.
출간 즉시 화제를 낳고 있는 웃음과 해학이 넘치는 책이다.
책에 담긴 70편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사랑방에서 펼쳐지는 은밀하고 농염한 해학의 세계다.
‘청상과부 고명딸’ ‘바가지 해웃값’ ‘백과부’ ‘관찰사의 객고풀이’ ‘유부녀 사냥꾼’ 등 맨 앞쪽의 목차만 봐도 내용이 읽힐 정도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노골적으로 홀딱 벗기는 야동(야한 동영상)이나 성인물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반투명 모시 속옷을 입은 여인을 대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섹시하고, 그래서 더 격이 높다.
간결하고 맛깔스러운 문장과 저자의 후끈한 입담도 이 책만의 특징. 한편의 극화로도 손색없는 이야기를 원고지 7∼8매로 담아내는 저자의 글 실력은 수준급이다.
편편마다 옷고름을 풀고, 푸짐한 육덕을 드러내고, 하초가 불끈 솟고, 교성을 지르고,
쿵덕쿵덕 운우지정을 나누는 저자의 입담은 그야말로 착착 달라붙는다. ...
수월댁, 음풍댁, 음순댁, 오입쟁이 홍대근, 대물총각 허대풍 등 작명도 재미있다.
저자의 원래 직업이 만화가였던 만큼, 각 작품마다 한 점씩 그려 넣은 삽화도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내용이 야할 때에는 그림의 수위를 약간 낮추고, 다분히 교훈적인 이야기로 흐를 때에는 그림을 통해 가독성을 보완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사랑방 야화 1권
1부
꼬마신랑
동태가 된 여종
산삼 도둑
오가와 이가
아버지 같은 임초시
인간망종
금부처
찔리고 밟힌 소금장수
박복한 과부 심실이
치마 밑으로 들어간…
비단장수
금시발복
개밥그릇
청상과부 고명딸
전화위복
여관 여주인
풍년기원
인정 많은 수월댁
2부
낙방거사
포목점 오집사
칼 그림자
소금장수 한의원
양가의 화평
귀암계곡 호랑이
빗나간 화살
줄무지 상여
나쁜 짐승
명주 고름
점괘
바가지 해웃값
두고 온 조끼
문어
개짐
초립동
배신
사랑방 야화 2권
1부
숙맥선비
의기양양 달님이
쌀 도둑
소는 잘못이 없다
월천꾼
쇠뿔
부엉이골 총각 사냥꾼
엽전 주머니
어수룩한 촌사람
심봉사의 근심거리
요분질
세 번째 며느리
가난한 집 며느리
당나귀와 닭
효자 상, 불효 벌
임계댁 아침에 옷고름 풀다
산삼
지관이 되다
도둑
노가자 냄새
새경 깎기
죽어 마땅한 놈
웃는 집안, 한숨 집안
친정 조카
고추 한 배
학동과 머슴
호구 별성마마
약사발 정성
고로쇠와 은어
운명을 깨다
코 큰 남자, 입 작은 여자
여승
붓 장수
외눈박이를 죽여라
젓 장수
2부
이주국의 배짱
공부머리, 장사머리
잡혀가는 국사범
학질 고치기
소가 된 사람
육희(六喜)
찬모의 눈물
까막눈
움켜 쥔 단추
그때 그날 밤
금주발 뚜껑
대밭골
까막눈 뱃사공
젊은 도둑님
싸움의 기술
탁란(托卵)
홍어
황룡을 품다
큰 것이 탈
황대감의 유언
죽마고우
귀신들의 속삭임
손 씻은 물
복상사
두 가지 패
사또의 울화병
나루터 주막
산통
산삼이냐 장뇌냐
요분질
황소
음양구분환
여우 한마리
영악한 마누라
흑룡의 여의주
저자 : 조주청
저자 조주청은 딱, 해방되던 날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상학과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
짧은 기간 월급도 받아보고, 뛰쳐나와 가전제품 장사도 해봤다. 호텔도 지어서 운영해보고
연립주택 건축도 해보며 도대체 자신은 돈벌이 재주가 없음을 자각하고 심심풀이 삼아
만화 판에 뛰어든다. 만화로 밥벌이를 하다가 그것도 지겨워 지구촌 여행길에 올라
130여 개국을 쏘다니며 여행 작가 행세를 하고 있다.
여행기 단행본「함께 뒹굴며 108나라」『사랑방야화1』을 책방에 내 놓았고
중앙일보에「조주청의 일파만파」, 월간조선에「시사만평」, 골프다이제스트에「지구촌 여행기」,
농민신문에「사랑방 야화」그 밖의 몇몇 잡지에 여행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북한산 자락 집 마당에 곰취, 눈개승마, 산마늘, 고추냉이, 참산부추 등을 가꾸며
산채 텃밭 농사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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