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기타연습실

I'll be there - Mariah Carey

박연서원 2019. 4. 24. 10:32

I'll be there

                                                      Mariah Carey


You and I must make a pact
We must bring salvation back
Where there is love
I'll be there


I'll reach out my hand to you
I'll have faith in all you do
Just call my name
And I'll be there


And oh, I'll be there to comfort you
Build my world of dreams around you
I'm so glad that I found you
I'll be there with a love that's strong
I'll be your strength, I'll keep holding on


Let me fill your heart with joy and laughter
Togetherness is all I'm after
Whenever you need me
I'll be there


I'll be there to protect you
With an unselfish love I'll respect you
Just call my name
And I'll be there


I'll be there to comfort you
Build my world of dreams around you
I'm so glad I found you baby
I'll be there with a love so strong
I'll be your strength, you know I'll keep holding on


If you should ever find someone new
I know she'd better be good to you
'Cos if she doesn't
Then I'll be there
I'll be there


I'll be there
Just call my name
And I'll be there
I'll be there
I'll be there
Just call my name
And I'll be there
Just look over your shoulder
Just call my name
And I'll be there








Mariah Carey

Mariah Carey


통산 18곡의 빌보드 차트 1위곡을 보유한 아티스트.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를 밀어내고 비틀스에 이은 2위. 이것이 바로 머라이어 캐리의 상업적 성공 가도를 표현할 때 빈번하게 활용되는 수치와 잣대들이다. 그러나 음악적인 면에서 진정 머라이어 캐리의 전성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마니아가 아닌 다음에야 본 데뷔작이나 2집, 그도 아니면 3집을 거론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타’이기 이전에 순수한 ‘가수’로서의 머라이어 캐리가 본 데뷔작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경이로운 가창력이었다. 휘트니 휴스턴만이 ‘완전체’인 줄로만 믿었던 사람들에게 머라이어 캐리의 등장은 가히 ‘인간 목소리의 엑스터시’를 체험하게 해주었다.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아 고음역을 능수능란하게 드나들었고, 강인하게 폭발하는 목소리 파워는 휘트니 못지않은 ‘사이다 보컬’임을 뽐내며 막힌 곳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첫 싱글 「Vision Of Love」를 시작으로 「Love Takes Time」, 「Someday」, 「I Don’t Wanna Cry」까지, 무려 네 곡이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자 사람들은 이제 휘트니가 아닌 머라이어 캐리의 세상이 왔다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 정도였으니, 앨범이 차트 정상을 정복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비판하는 세력도 물론 없지는 않았다. 특히 반대파에서는 훗날 그녀가 소속사 사장인 토미 모톨라(Tommy Mottola)와 결혼했다는 점을 끈질기게 걸고 넘어졌다. 빌보드 순위의 중요 기준인 ‘방송 횟수’에서 아무래도 이득을 봤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머라이어 캐리는 방송 횟수에 있어서 동시대의 다른 가수들을 압도하는 수치를 자랑했다.

그러나 머라이어 캐리는 1995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내가 모톨라와 결혼을 했다고 해서 특혜를 운운한다는 것은 근거 없는 오해이다. 레코드사에 가서도 남편과 나는 어떤 목표를 두고 논의하지 않는다. 평범한 부부 사이의 대화가 그렇듯, 아무런 목적 없이 일상적으로 대화할 뿐이다.”

더불어 엄청난 앨범 판매고가 ‘막강한 부군(夫君)’의 영향력 덕분이라는 루머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1991년 컴퓨터로 판매 상황을 점검하는 ‘닐슨 사운드스캔(Nielsen Soundscan)’이 설립된 이후로, 차트 순위는 곧바로 음반의 실판매 현황을 반영하게 돼 있다는 것이 그녀의 논리였다. 확실히 싱글과 앨범 판매도 방송 횟수에 못지않았다는 점, 게다가 앨범 발표 당시에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 사모님’이 아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러한 비판들이 타당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본 작이 전 세계적으로 2,10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는 객관적 지표가 그녀의 스타성을 웅변해주는 강력한 원군이었다. 이는 그녀의 디스코그래피 중 4집 『Daydream』과 3집 『Musicbox』에 이은 세 번째 순위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래미조차 가수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최우수 신인상을 수여하며 그녀의 재능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바로 휘트니 휴스턴의 뒤를 잇는 1990년대 대표 디바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