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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렌토의 세 남자

박연서원 2018. 3. 9. 08:29

 

나폴리에서 소렌토(Sorrento)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나폴리 중앙역에서 사철 치르쿰베수비아나 기차를 타거나(소란스럽고 지저분하다), 아니면 그림처럼 늘어선 아말피 해안,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의 절경에 취해가며 구불거리는 절벽도로가 주는 죽음의 공포를 곡예 운전으로 돌파하는 방법이다(이것도 여러모로 아찔하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이 있다고, 아니 천국이 있다고 했던가. 코 끝을 간질이는 레몬 향기(소렌토의 레몬술, 리몬첼로는 이탈리아 최고다)와 저 멀리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베수비오 산의 정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여기에 어떤 고생을 하며 도착했는지, 또 어떻게 다시 나폴리로 돌아가야 할지 같은 막막한 고민은 한 순간에 사라진다. 지중해의 평화와 고요, 아련한 동경을 상징하는 천국의 땅 소렌토에 드디어 ‘기착’한 것이다.

 

 

언젠가 볼로냐 태생의 이탈리아 최고 싱어송라이터 루치오 달라가 소렌토를 찾았다. 그는 이 동네에서 가장 비싼 호텔인 비토리아(Grand Hotel Vittoria Excelsior)의 스위트룸에 묵었는데, 하필이면 그 방은 20세기의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 – 1921)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었다. 발코니와 개인정원이 딸린 최고급 룸이었지만 루치오 달라는 이 곳에서 뜻밖의 멜랑콜리와 마주한다. 세계 최고의 테너였지만 겨우 40대의 나이에 시한부 선고를 받아든 ‘나폴리 남자’ 카루소가 느꼈을 법한 깊은 고독과 쓸쓸함, 애달픈 그리움과 절절하게 공감한 것이다. 그때의 즉흥적인 심상을 산문체의 가사로 풀어낸 것이 바로 저 유명한 칸초네 ‘카루소 Caruso’이다(1986년 발표). 달라는 뮤직비디오에서 이 음악이 탄생하게 된 계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루치오 달라 ‘카루소’ 뮤직비디오)

 

엔리코 카루소는 20세기 초 이탈리아 최고의 테너이다. 나폴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길거리 가수로 캐리어를 시작했지만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며 곧 밀라노에서도, 신대륙 미국에서도 최고의 성악가가 된다. 역사상 최초의 골든 디스크(백만 장 이상 판매기록)를 가진 것도 그였다. 카루소의 목소리는 힘찬 드라마틱이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넘쳐흐르고, 그 뒤에 알 듯 모를 듯한 불안의 멜랑콜리가 관객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다. 조악한 음질이나마 그가 남긴 수많은 레코딩이 아직도 남아있어 우리에게 이 대가수가 지닌 깊디 깊은 예술성의 편린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도니제티 ‘남몰래 흘리는 눈물 Una furtiva lagrima’ 테너 엔리코 카루소, 1904년 레코딩)

 

달라의 노래는 소년 카루소의 사랑과 실연, 미국 진출, 거기서 느낀 노스탤지어 등을 담고 있다. 루치오 달라 특유의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는 노래 위에 쓰디 쓴 남부 이탈리아의 ‘찐득한’ 에스프레소처럼 쏟아지는 높은 음의 후렴구가 유달리 애절하다.

 

Te voglio bene assaje, ma tanto tanto bene sai
è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e vene sai...


(난 당신을 사랑해, 너무도 너무도 사랑해.

그 사랑 이제 내 혈관을 끊어지지 않는 사슬처럼 돌고 돌아

이 차가운 피를 모두 녹여버리는 걸.)

 

그러다 달라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만났다. 달라 특유의 허스키한 읊조림이 본 가사를 맡고, 후렴구의 애절한 고음은 파바로티가 불렀다. 거기엔 또 아련한 한숨(sospiro)이 들어가 있다. ‘소스피로’는 어쩌면 이탈리아 예술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애절한 노랫가락 위에 지중해의 미풍처럼 작은 한숨 소리를 섞어주면, 그건 곧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 사실 이탈리아어에서 sospiro는 한숨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가치와 사랑이라는 뜻도 지닌 명사다.

 

(칸초네 ‘카루소’, 노래 루치오 달라, 루치아노 파바로티)

 

파바로티와 루치오 달라는 모두 중부 이탈리아의 에밀리아-로마냐 주 태생이다. 그들이 나폴리를 찾아 남부 이탈리아가 낳은 역사상 최고 테너의 생을 소재로 한 칸초네를 불렀다. 그것도 황홀한 지중해의 소렌토 앞바다에서.  

카루소와 파바로티, 달라. 그들 모두는 지금 우리 곁에 없다. 그러나 이 세 남자들이 남긴 아름다운 노래만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과 끊어지지 않는 ‘사슬’(catena)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