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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교수 신임 덕성여대 총장

박연서원 2015. 2. 13. 15:54

'먼 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교수 신임 덕성여대 총장

 

덕성여대 신임총장에 이원복 교수

베스트셀러 『먼 나라 이웃나라』의 저자 이원복(69·사진) 교수가 덕성여자대학교 신임 총장으로 선출됐다.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이 교수는 독일 뮌스터대에서 시각디자인 디플롬 디자이너, 서양미술사 디플롬 디자이너 학위를 받았다. 1984년 9월 덕성여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패션·텍스타일비즈니스대학원장, 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2012년 3월부터 같은 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이 교수는 대외적으로도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나눔대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고 민간단체인 ‘1090 평화와 통일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임기는 다음달 1일부터 4년.

 

이원복 교수 “32년간 11개국 그리다보니…

먼 인생 이웃인생 다 보여”

김화성전문기자

입력 2015-01-24 03:00:00 수정 2015-01-24 03:38:18

 

[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인생] 만화가 이원복 교수

세상 밖으로 나가라. 길 위에 길이 있다. 이원복 교수는 평생 ‘만화’라는 놀이터에서 누가 뭐라 하든 혼자서도 재미있고 신나게 놀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만화가 이원복 교수(69)는 자유인이다. 눈빛이 맑고 선하다. 생글생글 천하태평이다. 자칭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다. 게으름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는 스트레스 받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냥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산다.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한다. 빈둥빈둥 혼자서도 잘 논다.

이원복의 놀이터는 만화다. 어릴 적부터 심심할 때마다 혼자서 그림낙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평생 가내수공업 만화에 종사했다. 그의 교양만화 ‘먼 나라 이웃나라’는 1998년 김영사로 출판사를 옮긴 이후에만 총 2000쇄 1500만 부를 넘게 찍었다(2014년 기준). 1987년 출간부터 치면 부수는 훨씬 많아진다.

“독일 유학 시절인 1981년 10월부터 1986년까지 소년한국일보에 5년 3개월 동안 총 1376회 연재했다. 이듬해 그걸 묶어 책을 냈고, 2012년 대대적으로 새로 그려 리모델링했다. 2013년엔 에스파냐를 마지막으로 15번째 권을 마쳤다. 유럽 7개국(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에스파냐)과 미국(3권), 일본(2권), 중국(2권), 한국 등 32년 동안 모두 11개국을 다뤘다. 시작할 때 우리 국민소득이 1000달러 수준이었는데 이젠 3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처음 10년 동안은 1만 권(각권 2000원 인세 5%)이 팔려야 비행기 삯 정도인 100만 원을 받았다. 그 후에 조건이 훨씬 나아져 취재여행에 많은 보탬이 됐다. 유럽은 내가 10년 동안 독일에 살면서 수시로 돌아다녔다. 라틴어가 기본인 데다 기독교 국가라 비슷한 점이 많다. 중국은 20여 번, 일본은 한 50번 정도 들락거렸던 것 같다. 미국은 1999년 방문교수로 가서 살았던 게 도움이 됐다.”

이원복은 세계 각국의 흥망성쇠에 밝다. 그가 보기에 현재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일본, 영국, 프랑스는 해가 지는 나라들이다. 이들 국가는 옛날 식민지 착취경제 구조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거나 개혁이 지지부진한 게 닮은꼴이다. 그리스는 복지정책으로 망가졌다.

일본도 아베노믹스로 바둥거리곤 있지만 성공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호수바닥이 말라붙어 배를 띄우려고 물을 엄청 퍼붓고 있는데, 문제는 근본적으로 배 자체가 고장 나 있다는 것이다. 배부터 고쳐야 하는데 일본은 정경유착이 심해 개혁이 안 되는 구조라고 본다.

프랑스는 나름대로 개혁에 몸부림을 치지만 4년마다 있는 선거가 발목을 잡는다. 표 때문에 인기정책 경쟁만 펼쳐진다. 2013년 프랑스의 무역적자가 869억 유로나 된다. 이웃 독일은 1869억 유로의 흑자를 냈다. 그 차이는 뭘까. 독일은 2003년 슈뢰더 총리가 ‘싫어도 할 건 해야 한다’며 대개혁을 했고 그 여파로 정권까지 내줬다. 그 열매를 지금 메르켈 총리가 따 먹고 있다.

“독일을 비롯해 한국, 중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뉴질랜드가 요즘 뜨고 있는 나라이다. 뉴질랜드는 1984년 데이비드 롱이 총리가 대개혁을 단행했다. 중국은 앞으로도 잘나갈 것이다. 서구 잣대로 ‘중국은 인권과 자유가 없다’고 자꾸 그러는데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인민민주주의라는 게 있다. 인민을 위해선 개인이 어느 정도 희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좋은 정책은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망한다. 한국도 올해 개혁을 하지 못하면 앞날이 어둡다. 개혁하려면 선거 없는 올해밖에 없다. 한국 대통령 임기는 실질적으로 3년 아닌가. 2년 지났으니 딱 1년 남았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는 기업가 정신이 살아 있다. 고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꿈틀거린다. 문제는 정치와 교육이다. 좌우 진영의 극심한 ‘과대올로기’와 그런 거에 무관심한 ‘무대올로기’가 빈부격차만큼이나 편차가 심하다.”

이원복의 눈엔 남북통일도 만만치 않다. 북한이 붕괴하더라도 중국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으로 본다. 중국은 통일 친미정권이 코앞에 들어서는 걸 결코 놔두지 않을 것이다. 미국도 한반도 통일을 은근히 반대한다고 생각한다. 통일한국이 ‘너 미국 이제 필요 없어’ 할까 봐 겁낸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꽃놀이패를 즐긴다. 그게 없어지니 싫어할 것이다. 일본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한반도에 강대국이 등장하는 것을 가장 겁낸다. 그는 위안부 문제도 일본은 절대 사과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한다.

“일본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바로 일본제국주의 시절이다. 요즘 일본 서점에 가보면 온통 일제강점기 책들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다들 뿌듯하게 생각한다. 그걸 한국과 중국이 자꾸 사죄하라고 하니 속으로 엄청 불편할 것이다. 일본은 사무라이 문화다. 사과는 곧 할복이요 죽음을 뜻한다. 그러니 기껏 사과라고 해봐야 ‘통석의 염’ 같은 애매모호한 것이다. 일본 역사를 보면 주군이 배 가른 경우는 거의 없다. 요즘도 일본 기업에서 책임지고 자살하는 사람은 과장이나 부장이지 총수가 아니다. 어떤 책임도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지는 않는다. 일본은 섬나라다. 어우러져 산다는 개념이 없다. 일본이 우주 그 자체다. 일본 역사상 전쟁은 딱 두 번 치렀다. 임진왜란과 제2차 세계대전이다. 미군은 일본 땅에 진주한 첫 외국군이다. 결국 미국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미국이 편들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은 9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결코 혼자선 살 수 없다. 사죄하고 고해성사하면 용서받는다는 기독교세계관도 있다. 독일은 전쟁의 룰을 잘 안다. 패전하면 무조건 꼬리부터 내린다. 사죄하고 보상해야 주변국으로부터 인정받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원복은 현재 ‘홀몸노인’이다. 대학생 아들과 아내는 캐나다에 있다. 이원복이 생각하는 캐나다는 ‘참 관대한 나라’ ‘적이 없는 나라’이다. 미국은 ‘인종의 용광로’라며 아메리카정신을 강요하지만, 캐나다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준다. ‘인종의 모자이크 나라’이다. 밴쿠버 같은 곳에서는 중국어가 공용어다. 1997년 이후 홍콩,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들이 몰려와 ‘홍쿠버’라고 한다.

“라틴족은 골반이 큰 데 비해 어깨가 작다. 게르만 민족은 그 반대이다. 유럽에서 가장 유럽적인 곳은 단연 오스트리아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와 유럽풍 경치가 잘 어우러졌다. 왜 우리도 양반 명문가는 망해도 어딘가 품위가 배어있지 않은가. 같은 게르만 민족이지만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독일을 ‘짝퉁’ 정도로 여긴다. 스위스는 ‘완고한 시골노인네’ 정도로나 볼까. 오스트리아인들은 융통성과 품위가 있다. 스페인은 유럽과 아랍이 섞인 익사이팅한 나라이다. 사람답게 사는 곳을 보려면 남프랑스가 으뜸이다. 날씨도 온화하다. 사람들은 오전 10시쯤 일어나 밥 먹고 낮잠 자고, 오후 4∼5시쯤 가게 문 닫는다. 오후 7∼8시쯤 광장에 나가 포도주 홀짝거리다가 10시쯤 잠자리에 든다.”

이원복은 운동 같은 것은 일절 안 한다. 사교모임이나 골프 바둑에도 무관심하다. 인간의 몸은 아껴 쓸수록 오래간다고 여긴다. 키 160cm(56kg)의 아담한 체구. 술을 즐긴다. 주종불문, 안주불문, 술값 유무불문, 생사불문이다. 그렇다고 들이붓는 스타일은 아니다. 주(酒)님을 깍듯이 모신다. 친구들과 그렇게 ‘심야기도’도 하고 가끔 왁자지껄 ‘부흥회’도 연다. 자주 만나는 친구는 5명인데 이들은 모두 중·고·재수·대학을 함께 거쳤다. 와인은 보통 1만∼3만 원짜리를 마신다. 와인은 결코 경배 대상이 아니다. 오버하고 호들갑 떠는 거 딱 질색이다. 담배는 2002년 10월에 끊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늘 힘들고 어렵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싸우니까 청춘’이다. 어느 시대나 찾아보면 블루오션은 있기 마련이다. 그걸 찾는 게 능력이다. 잡학에 능해야 한다. 뭐든 파고들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본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배우는 인문학이 최고다. 전 세계는 물론 우주까지 봐야 한다. 한국 언론의 가장 큰 문제는 국제뉴스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잘하고 재미있는 걸 해야 진짜다. 좋아하는 걸 평생 일로 삼아야 행복할 수 있다. 거기에 악기 하나쯤 다룰 줄 알면 더할 나위 없다. 아쉽게도 난 악기엔 깡통이다.”

 

독일 유학 시절, 이원복 교수는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몰고 유럽 곳곳을 기웃거렸다. 이원복 교수 제공

 

▼“유학 가는 사람은 바로 밑 동생의 편도항공티켓 책임진다”
공부밖에 살길 없다”… 7남매의 결의

 

이원복은 7남매(5남 2녀) 중 막내다.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어머니가 열 살 때, 아버지는 스무 살 때 돌아가셨다. 맨 위 큰누님하고는 무려 16년 차이. 그 누님이 막내 이원복을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보살폈다.
이원복은 초등학교를 3군데나 다녔다. 대전 선화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서울공덕초등학교를 거쳐 동대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으로 비교적 괜찮았던 집안이 폭삭 망해버렸다. 고향 대전에선 더이상 먹고살 게 없었다. 1955년 온 집안이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는 모두가 못 입고 못 먹고 가난했던 시절이라 크게 억울할 것도 없었다. 어느 날 우리 형제들은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돈 없고 백 없는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나 신분상승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공부밖에 없다’고. ‘가방끈으로 승부를 보자’고 다짐했다. 1966년 첫째 형님이 죽어라 일해서 편도 뱃삯을 모은 뒤 독일로 철학 공부를 하러 떠났다. 우리 형편에 비행기 티켓은 어림도 없었다. 독일까지는 뱃길로 한 달이 넘게 걸리는 여정이었다. 우린 부산항에서 큰형을 배웅했다. 그곳에서 셋째, 넷째 형과 나는 새끼손가락 걸고 ‘도원결의’ 비슷한 언약을 맺었다. 앞으로 유학 가는 사람은 그 다음 동생 편도항공티켓을 반드시 책임지기로. 그 얼마 후 셋째 창복 형(78·전 한국외국어대 부총장)이 독일 쾰른대로 독문학을 공부하러 갔다. 형은 독일에서 1년 동안 대학 입학을 미루고 중국식당에서 접시를 닦았다. 그렇게 돈을 모아 넷째 정춘 형(73·전 한국언론학회장)의 비행기 티켓을 마련했다. 넷째 형은 독일 뮌스터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1975년 나도 넷째 형 덕분에 독일로 날아가 뮌스터대 디자인학부에 둥지를 틀었다. 짐은 달랑 가방 2개뿐이었다.”

이원복의 만화인생은 1962년 경기고 1학년 때 시작됐다. 소년한국일보 조풍연 주간(1914∼1991)이 그에게 어린이신문 만화를 맡겼다. 친구 아버지였던 그분은 평소 이원복의 그림솜씨를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사실 만화랄 것도 없었다. 미군부대에서 돌아다니던 명작만화(아이반호, 엉클 톰스 캐빈, 마르코 폴로 등)를 그대로 베끼기만 하면 됐다. 원작그림 위에 환히 비치는 종이를 대고 모사하는 게 전부였다.

이원복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눈으로만 보고도 척척 따라 그릴 실력이 됐다. 그때부터 슬슬 번역만화가 아니라 창작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야망의 그라운드’ ‘미니바람 꽃구름’ ‘사랑의 학교’ ‘자마곰 삼형제’ 등을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했다. 편집국 한편에 그의 자리가 있을 정도였다.

“1965년 재수하느라 한 해 쉬었지만 이듬해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 입학 후에 다시 연재를 재개했다. 건축공학과는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떠올라 멋있게 보여 들어갔다. 헌데 첫날부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학 미적분을 푸는 데 죽을 맛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수업을 거의 빼먹었다. 다른 아이들이 아침에 강의 들으러 가면, 나는 기숙사 방에 홀로 배를 깔고 엎드려 만화를 그렸다. 그러다가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릴 즈음이면, 수업을 마친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을 퍼마셨다. 그렇게 만화 원고료를 맛있게 홀랑홀랑 까먹었다. 난 6년 동안(1966∼1972년)이나 대학을 다녔지만 졸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가 오늘날 서울대동창회 편집이사라니 알다가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이원복의 독일 대학 생활 10년도 한국에서와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디자인학부가 적성에 맞아 재미있다는 거였다. 소년한국일보 연재도 계속했다. 원고는 일주일 전에 일찌감치 항공우편으로 보냈다. 단 한 번도 마감일을 어기지 않았다. 독일에서 일러스트 관련 아르바이트감도 심심찮게 들어왔다. 수입이 쏠쏠했다.

“다른 유학생들이 50만 원 정도로 한 달 살았다면 난 100만 원 정도 벌어서 생활했다. 만화 덕분에 접시 한 번 닦지 않았다. 틈만 나면 유럽 곳곳을 돌아다녔다.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1000달러쯤 주고 사서 1만∼2만 km 정도 달리고 버렸다. 그게 모두 5대였다. 한번은 200달러짜리 똥차를 사서 2000km 떨어진 지브롤터 해협까지 다녀온 적도 있다. 지금 아니면 못 본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술집이나 시장 바닥에서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나라에 대한 느낌과 정서가 그대로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객관적 사실이나 역사는 책에서 얻는 걸로도 충분했다. 여행과 독서가 내 창의력의 밑천이자 큰 자산이 됐다.”

 

:: 이원복 교수는… ::

 

▼약력 △1946년 대전 출생 △경기중-경기고 졸업(1965년)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 입학(1966년) △독일 뮌스터대 디자인학부 유학(1975년) △독일 뮌스터대 총장상/Diplom Designer 학위 취득(1981년) △독일 뮌스터대 철학부 서양미술사 전공/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 활동(1981∼1986년) △한국애니메이션학회장(1998∼2000년) △덕성여대 예술대학장(2009∼2012년)

♣수상 △한국도서잡지윤리위원회 금상(시관이와 병호의 모험·1978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금상(학습만화세계사·1989년) △한국색동회 눈솔상(1993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간행물윤리상(현대문명진단·1994년)

 

♠현재 △덕성여대 시각디자인과 교수(1984년∼)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원회위원 △한국국제교류협회 문화나눔 대사 △경찰청 외사자문위원회위원

★저서 △먼 나라 이웃나라(1987년) △자본주의 공산주의(1990년)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1993년) △현대문명 진단(1994년) △뉴스 뒤집어 보기(1996년)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여행(1997년) △새 먼 나라 이웃나라(1998년) △신의 나라 인간의 나라 1, 2, 3(2002∼2003년) △가로세로 세계사(2006∼2014년)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1, 2(2008년) △유럽만사 세상만사(2010년) △먼 나라 이웃나라 15번째 권 에스파냐(2013년) △먼 나라 이웃나라전집(중국어, 대만어, 일본어, 태국어판·2014년)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이원복 교수가 동아일보기자와 인터뷰에서 말한 견해와 주장이 놀라울 정도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고 그 나라와 관련하여 만화를 그리다보니 <개혁하는 국가는 흥하고 유권자의 인기정책만 추구하는 나라는 망하더라> 피력했다.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개혁'하는 것 외에는 없다. 

 

글로벌 문화통역사 이원복
“만화는 꿈보다 더 가까운 내 소망 이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어린 시절, 우리는 어른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했다. 마치 물음병에 걸린 아이처럼. 특히, 세계의 문화와 역사에 관해 물을 때면 부모님은 어김없이 이 책을 내밀곤 했다. 바로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다. 생전 처음 지구 반대편의 나라와 그 안에 담긴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로 더 넓은 세계를 만났다. 우리는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아이에게 물려주고, 이는 그 아이가 아이를 낳아서도 이어진다. 마치 세상의 모든 지식이 든 백과사전처럼.

 

Q. 최근 ‘먼나라 이웃나라’ 에스파냐편을 마지막으로 시리즈물을 마감했습니다. 선생님의 30년 인생을 함께해온 책인데 소감한 마디 해 주세요.

참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1981년부터 6년간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해온 내용을 1987년 책으로 묶어 낸 것이 ‘먼나라 이웃나라’의 시작이에요. 한창 젊은 시절에 쓰기 시작해서 지금의 나이가 되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을 함께했네요. 이 책은 인생의 동반자, 내 인생 자체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한 편의 만화가 30년 이상이나 수명을 유지해 온 것도 경이로운 일이죠. 시원섭섭해요.

 

Q. 어릴 때부터 만화 그리기에 열중하고 고등학교 때는 신문사에서 만화그리기 아르바이트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만화가의 꿈을 꾼 계기는 무엇인가요?

우리 어렸을 때는 즐길 거리가 다양하지 않았어요. 나가서 놀지 않으면 책을 보거나 낙서하는 일이 전부였죠. 정말 단순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만화가를 꿈 꿔본 적은 없어요. 그냥 좋아서 하다보니까 그렇게 되어 버린 거죠. 어릴 때부터 낙서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러다 고1때부터 신문사에서 만화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게다가 아르바이트 비용이 괜찮았거든요. 학교 다니면서 돈도 벌수 있으니까 꾸준히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건축학과를 입학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그림 그리는 것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독일 뮌스터 대학 디자인학부에서 유학을 했죠. 집안이 넉넉한 하지 않아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생계형 유학을 한 거예요. 그림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그렇게 10년의 독일 생활에서 세계 각국의 만화를 보고 배웠어요.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서독 신문에 만화와 포스터를 게재했고 독일의 대표적인 조간신문 <알게마이네 차이퉁> 150주년 기념호 표지를 그리기도 했죠. 그러면서 만화가의 길로 접어들었어요.

 

Q. 다양한 만화의 장르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역사학습만화를 그리셨나요?

처음엔 분야를 가리지 않고 그렸어요. 명랑, 코믹 등... 그런데, 유학생활을 하다 보니 세계 역사가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때는 그냥 책에서 보고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이 전부였는데, 직접 현장에서 역사를 만지고 볼 수 있으니까 정말 흥미롭더라고요. 모르고 있다가 눈을 뜨니까 심장이 요동을 쳤죠. 그 시절에는 해외여행 한 번 가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요. 내가 본 재미있고 신기한 일 들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인 것 같아요. 역사학습만화를 그리려고 마음먹었던 것이.

 

Q. 많은 국민들이 보는 역사학습만화 ‘먼나라 이웃나라’는 확실한 내용을 다뤄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만화로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유럽의 여섯 나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학습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이 나라들은 언어와 문화가 다르지만 맥락상 공통점이 많아요. 문화교류도 활발했고 인구이동이 많다보니 생활양식이 비슷한 부분이 많죠. 침대생활이나 포크를 쓰는 부분이나. 그래서 어렵다기 보다 쉽고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었죠. 그런데 아시아는 좀 달라요. 예로부터 아시아의 나라들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서양에 비해 교류가 많지 않았잖아요. 한국, 중국, 일본이 생활양식이나 색깔도 많이 다르고. 그래서 오히려 가까운 나라인 아시아를 다룰 때가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Q. 교수님의 만화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대부분이 선생님의 유쾌하고 재치 있는 대사와 짜임새 있는 구성에 반하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이런 내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요?

50년 동안 만화를 그려왔는데, 이런 내공이 없을까요? 나폴레옹은 53세에 생을 마감했지만 유럽을 통일했죠. 그런 위대한 일도 해내는데, 만화만 50년 세월이면 그만큼 노하우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제책은 부모님이 사주니까 아이 때부터 읽잖아요. 어릴 때부터 접해봐서 친숙한 면도 있고, 오랜 세월 친구처럼 함께 해줘서인지 더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Q. 지금까지 소개해 온 해외의 여러 나라 중 가장 좋아하는 나라와 가장 흥미로웠던 그들의 문화는 어떤 것이 있나요?

나라마다 다 좋지만 알수록 흥미로운 나라가 스페인에요. 근 현대사가 거의 비슷해서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면이 있거든요. 외국의 침략을 받아서 독립투쟁을 한 부분에서 우리의 역사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한반도에 처음 온 유럽인이 스페인 출신의 신부 세스페데스거든요. 이와 함께 20세기 초에는 스페인 사람 블라스코 이바네스가 <조선 기행문>을 펴내기도 했죠.
흥미로웠던 것은 독일에 있을 때 참 많이 놀랐는데, 유대인 수용소를 보고 정말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어요.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독일은 가해자였잖아요. 우리가 만약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강탈했다면 무조건 숨기려고 했을 텐데, 독일은 과감하게 드러내놨더라고요. 유대인을 학살하던 가스실이나 시체를 태우던 곳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에 많이 놀랐어요. 초중생들이 와서 이런 현장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이 큰 잘못을 했구나.’라고 뼈아프게 느낄 수 있잖아요.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는 반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무조건 덮고, 숨기고 왜곡하려 하지만 말고.

 

Q. 강단에 서시면서도 꾸준히 책을 준비하시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대체 어디에서 그런 성실함이 나오는 것인가요?
저 시간 많아요. 한국 남자가 모임에 잘 안 나가고 골프를 취미로 갖지 않으면 시간이 남죠. 남자들은 인맥관리가 중요하니까 다른 취미를 갖고 싶어도 시간이 없는 거죠. 나는 만화라는 나만의 세계가 있어서 가만히 작업실에 들어앉아서 그림만 그리면 되니까. 그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이지 이것을 성실함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할 것 까지는 없는 것 같아요(웃음).

 

Q. 만화를 그리려면 상당한 지식이 필요할 텐데요. 그래서인지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온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인가요?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보는 거죠. 책을 많이 사서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읽어요. 다 읽지는 못하고 소설책 같은 것만 끝까지 정독하는 편이죠. 요즘은 다른 책을 읽느라 소설책을 많이 읽지 못했는데, 중고등학교 때 본 소설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우리 땐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없어서 세계전집을 거의 다 읽었어요.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가장 재미있게 봤어요. 달달 외울 정도로 5~6번은 읽었어요. 이 책을 보면서 만화의 스토리나 구조를 짜는 방법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 같아요.

 

Q. 만화를 그리며 지금까지 변함없이 꿈을 위한 삶을 살고계십니다. 이원복 교수님에게 ‘꿈’이란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의 해주세요.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꿈’이라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었어요. 꿈이 무엇이냐 물으면 대부분 아이들의 대답은 대통령이나 장군 정도였어요. 음악가가 되겠다고 하면 그게 무슨 꿈이냐고 비웃었죠. 만화도 마찬가지였어요. 만화는 제게 꿈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였어요. 만화를 그리는 것은 내게 꿈이 아니라 소망이었죠. 꿈과 소망은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차이가 있어요. 꿈이라는 것은 우리가 잡지 못할 만큼 원대한 마음속의 바람이나 이상이에요. 이를테면 이루어지기 힘든 덧없는 바람이나 희망 같은 것이죠. 그런데 소망은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만화를 그리는 것이 소망이었어요. 만화를 그리면서 가진 소망은 우리 아이들이 봤을 때 부끄럽지 않을 책, 좋은 만화를 그리는 것이에요. 내 만화로 장대한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죠.

 

Q. 교수님에게 평생을 업으로 삼고 있는 ‘만화’란 무엇인가요?
만화는 놀이터에요. 재미있는 놀이터.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서 놀지 않겠죠. 그런데 50년을 그리면서도 늘 즐거웠어요. 일을 즐기다 보니까 나를 좋아해주는 독자들도 생기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이렇게 오래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이유가 박수를 쳐주시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늘 감사한 마음이죠. 최근에는 외국 대사들이 나를 자꾸 초청해서 식사 자리도 몇 번 가졌어요. 한국에 오는 외교관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 <먼나라 이웃나라>라고 하네요. 많은 외교관들이 읽고 저자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요즘 각 나라의 대사관에 종종 다녀요. 

 

Q. 만화가 꿈꾸는 학생들에게 선배로서 한 마디 해주세요.
만화가는 상상력과 창조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예요. 창조적인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사람이란 결국 인풋이 많다는 것을 뜻해요. 그래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필요한데, 잡학에 능하고 다양한 친구를 사귀고 많은 여행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만화가로 자질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말에 ‘멋’이란 말이 있는데, 멋의 어원은 ‘무엇’이거든요. 그게 바로 ‘멋’이죠. 컵에 물이 꽉 차서 넘쳐요. 그 넘쳐나는 ‘무엇’이 바로 ‘멋’인거죠. 머릿속에 콘텐츠가 꽉 찼을 때 더 이상 담지 못하고 넘쳐서 흐르는 것이 ‘멋’이거든요. 이런 경험이나 지식이 꽉 차서 넘쳐흐를 때 좋은 만화가 나와요.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정식적인 만화가로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만화가는 정년이란 것이 없잖아요. 체력이 소진돼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할 때가 정년이죠. <먼나라 이웃나라>시리즈는 완결 됐지만 끝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또 다른 시작이죠. <가로세로 세계사>라고 이미 ‘발칸반도, 동남아, 중동’편을 출간했어요. 현재는 그 후속으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편을 준비하고 있어요. 

 

글  김효정 기자 blinkeyes@naver.com, 사진 IR 스튜디오
금호건설 웹진 어울림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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