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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의 유래와 친구의 종류

박연서원 2015. 1. 1. 22:08

◆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의 유래와 친구의 종류

 

마치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특별한 친구를 수어지교(水魚之交)라 하고, 서로 거역하지 않는 친구를 막역지우(莫逆之友)라 한다.

금이나 난초와 같이 귀하고 향기로움을 풍기는 친구인 금란지교(金蘭之交)도 있고, 관중과 포숙의 사귐과 같은 허물없는 친구 사이를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한다.

어릴 때부터 대나무 말을 같이 타고 놀며, 같이 자란 친구인 죽마고우(竹馬故友)도 있고, 친구 대신 목을 내주어도 좋을 정도로 친한 친구의 사귐을 의미하는 문경지교(刎頸之交)도 있다.

향기로운 풀인 지초와 난초 같은 친구는 지란지교(芝蘭之交) 이다.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반드시 떠오르는 추사 김정희 선생.

잘 나가던 추사 선생이 멀고도 먼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시절, 유배되기 전에 그렇게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요즘도 그렇지만 잘 나갈 때는 그렇게 시끌벅적 모여들더니 막상 귀양살이를 하니 누구 한 사람 찾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추사에게 소식을 전한 이가 있었는데 예전에 중국에 사절로 함께 간 이상적이라는 선비다.
그가 중국에서 많은 책을 구입, 유배지인 제주도까지 부쳤다.
극도의 외로움과 어려움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던 추사에게 그의 우정은 엄청난 위로와 감동으로‥
추사는 둘 사이의 아름답고 절절한 우정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그것이 바로 너무도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이다.

세한도라는 이름은 논어의 구절에서 따왔다.
‘날씨가 차가워지고 난 후에야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다. (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也)’라고 했던가.

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모든 나무가 푸르지만, 날씨가 차가워지는 늦가을이 되면 상록수와 활엽수가 확연히 구분되듯 모름지기 친구 관계 또한 자연의 이치와 닮은 구석이 많다.

세한도(歲寒圖)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와 함께 김정희 그림의 쌍벽을 이루는 백미(白眉)이다. 갈필(渴筆)과 검묵(儉墨)의 묘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문인화로서, 제주도 유배 중에 그려졌다.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원악절도(遠惡絶島)라고 하는 제주도 유형지에서 힘겨운 유배 생활을 하던 1844년(헌종 10)에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에서 두 번이나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칭송하며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형태 및 구성]
종이에 먹으로 그려진 두루마리 형식이다. 그림이 그려진 화면 오른쪽에는 화제(畵題) ‘歲寒圖(세한도)’라고 가로로 쓰여 있고, 세로에 작은 글씨로 ‘藕船是阮堂(우선시 완당)’이라는 관지(款識)가 있으며, 正喜(정희), 阮堂(완당)이라는 圖印(도인)을 찍어놓았다.

그림 왼편으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제일 늦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드는 것을 안다”는 이치에 빗대어, “권세와 이익으로 합친 자들은 그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이 시들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상적의 인품을 칭송하여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에, 귀양 오기 전이라고 해서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귀양 온 뒤라고 해서 더 못한 것도 없네. 그러나 귀양 오기 전의 그대는 특별히 일컬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귀양 온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음을 받을 만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내용의 발문을 그림 끝에 붙여놓았다.

그 뒤를 이어서 이상적이 이듬해 북경에 가서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 등 그곳의 명사 16명의 찬시(讚詩)를 곁들어놓았다. 또한 훗날 이 그림을 본 추사의 문하인 김석준(金奭準)의 찬(讚)과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이 긴 두루마리에 적혀 있다.

 

소나무의 가지가 세월과 추위를 이기듯 강고하게 표현되었다.

갈필로 빠르게 그려진 집 한 채는 군더더기를 뺀 사의(寫意)가 집약된 표현인 듯하다. 여백의 배분 또한 세 개의 화면 분할로 이루어져 화면의 정적인 안정감이 높다. 절제되고 고아(高雅)한 서화 일치의 멋을 풍기는 세한도는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 일파의 서화 이념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도 청나라의 최신간 서적을 읽고 있었다.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이 중국에서 구해와 보내준 것이었다. 120권 79책에 달하는 거질의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받고는 크게 감격했다. 추사는 답례로 작은 집 옆에 벼락 맞아 허리 꺾인 낙락장송이 겨우 한 가지 비틀어 잔명을 보존한 형상을 그린 그림을 초묵(焦墨)의 갈필로 이상적에게 그려주었다. 이 그림이 이후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수많은 얘기를 만들어낸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나중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말은 '논어'에 나온다. 여름철 모든 나무가 초록일 때는 소나무 잣나무의 푸름은 특별나 보이지도 않았다. 낙목한천의 겨울이 되어 모든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자 그제야 송백의 상청(常靑)이 새삼 눈에 들어온 것이다.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추사에게 제자 이상적의 배려마저 없었다면 그는 아마 제주에서 맥을 놓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찬 서리 한번 맞은 적 없던 그가 혈혈단신으로 죽음의 구렁텅이에 내던져지자 가깝던 친구들마저 등을 돌려 외면했다. 단물을 다 빨고 나면 사귐도 멀어진다. 나야말로 단물 빠진 허깨비다. 그런데 너는 왜 내게 한결같이 대해주는가? 추사는 고맙다는 말 대신 세한도에 붙여 쓴 글에서 이렇게 물었다. 사마천의 말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네가 나를 이익의 잣대로 보지 않은 것인가?

작은 이끗을 앞에 두고도 염치없이 우르르 몰려갔다 몰려오는 염량의 세태 속에서 이 그림 한 장이 전하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 한 장의 그림 속에 당대 한·중·일 문화계를 하나로 묶는 19세기 조선문화의 한 정화(精華)가 집약되어 있음에랴.

1. 작품 내력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중임에도 변함없이 천만리 타국에서 귀한 서적을 구해다주며 정의를 다하는 제자 이상적에게 감격하여 松柏과 같은 사람이라며 논어의 한 구절(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날이 차가워진 연후에 솔과 잣이 나중에 시듬을 안다)과 이를 표현한 세한도를 선물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은 해 동지사 이정웅을 수행해 연경에 갔는데, 이듬 해 정월 중국인 친구 오찬이 베푼 재회 축하연에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16명으로부터 제문과 발문을 받았다. 이것을 현지에서 한 축의 두루마리로 표구하여 가져왔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두루마리는 제자 김병선에 넘어갔고 그의 아들 김준학이 물려받아 감상기를 적어 놓았다. 이후 민영휘 집안이 소유했다가 일본인 추사 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팔아넘긴 것을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1944년 거금을 싸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3개월 동안 병석에 누운 후지쓰카를 아침저녁으로 문안한 끝에 받아들 수 있었다.

손재형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과 초대부통령 이시영, 국학자 위당 정인보의 감상문을 받아 이어 붙였다. 하지만 소전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하는 바람에 저당 잡힌 세한도를 개성갑부 손세기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두루마리에 한국과 중국인사 20명이 직접 쓴 감회가 줄줄이 붙어있어 그림 자체 길이는 108.3cm에 불과한데도 제대로 전시하기 위해서는 10m가 훨씬 넘는 쇼케이스가 필요하다. 한편으로 소전은 두루마리 90cm 정도의 공백을 남겼으나 글을 남길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새한도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에겐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쌓여 더 아름다워진 것이 어찌 새한도 뿐일까. 추사의 不欺心蘭圖10억 원의 감정가가 나온 바 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 500년의 걸작인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감정가는

 

2. 발문 해석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畊文編寄來.

지난해에 晩學 大雲 두 책을 부쳐오고 금년에는 또 藕畊文編이라는 글을 부쳐오니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으로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여러해 걸려서 얻은 것이라 일시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또한 세상의 도도함이

惟權利之是趨爲之 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오직 권세와 이익을 추향해 일삼는데 마음을 쓰고 힘을 씀이 이 같이 하고 권리로 돌아가지 않고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이에 바다 밖의 한 초췌히 매마른 사람에게 돌아옴이 세상의 권리를 추향하는 자 같다.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踈.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리로 합한 자는 권리가 다하면 사귐이 성글어 진다했는데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도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의 하나로 그 초연히 도도한 권리밖에 스스로 뽑아나니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권리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인가

公子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공자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연후에 솔과 잣의 나중에 시듬을 안다 하였으니

松柏是毌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柏也.

송백은 사계절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 세한 이전에도 한결 같은 송백이요

歲寒以後一松柏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세한 이후에도 한결 같은 송백인데 성인은 특히 세한 이후를 일컫고

今君之於我由前而無可焉. 由後而無損焉.

지금 의 나에 대함이 전부터도 더한 것이 없었고 이후로 말미암아도 덜한 것이 없다

然由前之 君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그러니 이전부터 말미암던 을 일컬을 것이 없어도 이후로 말미암는 은 또한 성인이 말한 것에 가히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 貞操勁節而已.

성인이 특히 일컬은 것은 단지 나중에 시드는 貞操와 굳센 절개됨만 아니라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또한 歲寒의 때에 느껴 말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오호 서한의 순박한 두터운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의 어짐으로도 賓客이 더불어 하고 하고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悲夫.

하비 방문 같은 것은 박절한 것의 극이로다. 슬프도다.

阮堂老人書

완당 (추사 김정희) 노인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