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의 고백 >
詩 / 이채
1
내가 원하는 세상은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사는 것인데
내가 아는 세상은
네가 잘 살면
내가 잘 살 수 없으니
어릴 적 타던 시소가 생각나
네가 내려가야 내가 올라가지
2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이 진리인 듯싶어서
하느님을 담보로
세상을 믿고
사람을 믿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더라
찍힌 내가 잘못이냐
찍은 네가 잘못이냐
하느님!
믿음엔 왜 차용증이 없나요?
3
살다 보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한 두 가지겠는가 마는
그 중 제일이 자식 농사더라
직업의 귀천이 없다 해도 있고
돈이 별거 아니라 해도 별거더라
평범하게 살기에도 힘겨운 세상
천금 같은 자식아!
행복하게 잘 살아 주길 바라는 마음
네가 부모 되면 이 마음 알아줄까
하긴 나도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개구리가 아니던가
4
살다가 살다가
사랑하는 당신아!
어느 날 문득 다른 마음 먹는다면
행여라도 나 몰래 그런 생각 가진다면
나의 체온이 식어버린 탓인가요
나의 가슴이 건조해진 탓인가요
바람 앞에 눈 못 뜰 때
눈에 뵈는 게 있으리오만
먼 훗날 세월이 약이라고
약처럼 나를 가루로 만들지는 마세요
5
나이를 먹고 싶어 먹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이만큼
내가 비운 밥그릇 세어 보니
그 숫자에 감개가 무량하네
그래도 한 가닥 위안인 것은
그럭저럭 밥값은 지불한 듯싶어
저만큼 키워놓은 자식이 그렇고
방실방실 웃어주는 아내가 그렇고
두 다리 뻗고 자는 내가 그렇다
6
하루 해 저물면 집으로 돌아가듯
한 해 저물면 고향으로 돌아가듯
한 세상 저물면 흙으로 돌아가리
유명의 별은 못 되더라도
무명의 꽃은 되고 싶었다
별이든 꽃이든
노을 앞에선 누구나 허무한 인생
그러고 보니
욕심 낼 것도, 싸울 일도 없구나
7
빌린 것은 다 갚았는데
빌려준 것은 다 돌려받지 못했네
줄 때는 앉아서 줬어도
받을 때는 서서 받아야 한다는 걸
순진하게, 아니 바보같이
세상 양심이 그런 줄 미처 몰랐네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 배우는 인생 공부
어쨌거나
밑지는 삶이 마음은 편하더라
8
내 마음 움직이기도 어려운데
남의 마음 움직이기는 더욱 어렵지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신의 뜻에 맡길 수 밖에
그렇다 해도
하루하루 섭섭할 때가 있더라
꿈이여, 당신이 그러했다
사랑이여, 당신이 또 그러했다
사람이여, 당신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9
지나가는 아가씨를
힐긋힐긋 쳐다본다고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마라
그것이 남자다
몸이 늙었다고 마음마저 늙었으랴
태초에 조물주가
남자와 여자의 사고를 똑같이 만들었다면
신문 기사는 반으로 줄 것이고
세상 이야기는 재미없지 않을까
10
진짜가 가짜 같고
가짜가 진짜 같은
그렇고 그런 것이 세상이라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거짓을 골라내고 나면
진실은 몇 개나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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