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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채 / 중년의 고백

박연서원 2015. 2. 4. 18:42

< 중년의 고백 > 

 

                            詩 / 이채 

 

1 

내가 원하는 세상은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사는 것인데 

내가 아는 세상은 

네가 잘 살면 

내가 잘 살 수 없으니 

어릴 적 타던 시소가 생각나 

네가 내려가야 내가 올라가지

 

2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이 진리인 듯싶어서

하느님을 담보로 

세상을 믿고 

사람을 믿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더라 

찍힌 내가 잘못이냐 

찍은 네가 잘못이냐 

하느님! 

믿음엔 왜 차용증이 없나요? 

 

3 

살다 보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한 두 가지겠는가 마는

그 중 제일이 자식 농사더라 

직업의 귀천이 없다 해도 있고 

돈이 별거 아니라 해도 별거더라 

평범하게 살기에도 힘겨운 세상 

천금 같은 자식아!

 

행복하게 잘 살아 주길 바라는 마음 

네가 부모 되면 이 마음 알아줄까 

하긴 나도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개구리가 아니던가

 

4 

살다가 살다가 

사랑하는 당신아! 

어느 날 문득 다른 마음 먹는다면 

행여라도 나 몰래 그런 생각 가진다면 

나의 체온이 식어버린 탓인가요 

나의 가슴이 건조해진 탓인가요 

바람 앞에 눈 못 뜰 때 

눈에 뵈는 게 있으리오만 

먼 훗날 세월이 약이라고

약처럼 나를 가루로 만들지는 마세요

 

5 

나이를 먹고 싶어 먹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이만큼 

내가 비운 밥그릇 세어 보니 

그 숫자에 감개가 무량하네

그래도 한 가닥 위안인 것은 

그럭저럭 밥값은 지불한 듯싶어 

저만큼 키워놓은 자식이 그렇고 

방실방실 웃어주는 아내가 그렇고 

두 다리 뻗고 자는 내가 그렇다

 

6 

하루 해 저물면 집으로 돌아가듯 

한 해 저물면 고향으로 돌아가듯

한 세상 저물면 흙으로 돌아가리 

유명의 별은 못 되더라도 

무명의 꽃은 되고 싶었다 

별이든 꽃이든 

노을 앞에선 누구나 허무한 인생 

그러고 보니 

욕심 낼 것도, 싸울 일도 없구나 

 

7 

빌린 것은 다 갚았는데 

빌려준 것은 다 돌려받지 못했네 

줄 때는 앉아서 줬어도 

받을 때는 서서 받아야 한다는 걸 

순진하게, 아니 바보같이 

세상 양심이 그런 줄 미처 몰랐네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 배우는 인생 공부 

어쨌거나 

밑지는 삶이 마음은 편하더라

 

8 

내 마음 움직이기도 어려운데 

남의 마음 움직이기는 더욱 어렵지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신의 뜻에 맡길 수 밖에

그렇다 해도 

하루하루 섭섭할 때가 있더라 

꿈이여, 당신이 그러했다 

사랑이여, 당신이 또 그러했다 

사람이여, 당신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9

지나가는 아가씨를 

힐긋힐긋 쳐다본다고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마라 

그것이 남자다 

몸이 늙었다고 마음마저 늙었으랴 

태초에 조물주가 

남자와 여자의 사고를 똑같이 만들었다면 

신문 기사는 반으로 줄 것이고 

세상 이야기는 재미없지 않을까

 

10 

진짜가 가짜 같고 

가짜가 진짜 같은 

그렇고 그런 것이 세상이라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거짓을 골라내고 나면 

진실은 몇 개나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