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4가지 유형
시인 임보
세상 사람들을 문제아(問題兒), 유명인(有名人), 현인(賢人) 그리고 보통인 이렇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시인들의 경우도 문제 시인, 유명 시인, 훌륭한 시인, 보통 시인 등으로 구분하여 따져볼 수 있으리라.
첫째, 문제 시인
문제를 일으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이다. 이도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와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시인이 백주에 종로 네거리에서 스트리킹을 했다면 이는 전자에 해당된다. 대개의 문제 시인들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물론 김관식이나 천상병 같은 낭만적인 문제 시인들도 없지는 않다. 반면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이상(李箱)이라든지 김수영 그리고 실험적인 작품을 쓴 8...0년대의 몇 시인들에게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둘째, 유명 시인
이는 세상에 많이 알려진 시인이다. 문제를 일으켜 유명해지기도 하고 처세를 잘 해서 유명해지기도 한다. 잡지사나 출판사를 열심히 찾아다니며 작품도 많이 발표하고 상도 많이 탄다. 신문에 글도 자주 쓰고 방송에 얼굴도 많이 내민다. 출판사와 궁합이 잘 맞으면 베스트셀러 대열에 끼어 광고판에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평론가들을 동원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언급하게도 만들고, 교과서에 작품을 실어 학생들에게 낯을 익히는데 진력한다. 무슨 단체의 위원으로 성명서도 자주 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불사한다. 때를 잘 만나면 국가기관의 장으로 발탁되기도 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위원이 되어 거들먹거리며 지낼 수도 있다.
물론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자연히 유명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런 시인들은 다음의 셋째 항목의 범주에 넣기로 한다.
셋째, 훌륭한 시인
‘훌륭한 시인’이란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인품 또한 훌륭히 갖춘 시인을 뜻한다. 훌륭한 시인 가운데는 세상에 이미 알려져 유명한 경우도 있고 아직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시인 본인이 생존해 있는 당대는 대체로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훌륭한 시인일수록 매명(買名)에 연연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은 사람과 작품이 공히 맑고 아름답다. 뜻은 높고 거동은 늘 겸허해서 난초와 같은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다. 군자적 풍모를 지닌 선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보통 시인
넷째는 첫째나 둘째의 경우가 아닌 무명 시인들이다. 그런데 이 부류는 다시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욕심은 있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해 무명으로 주저앉는 경우요, 다른 하나는 능력은 있지만 욕심을 줄여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경우다. 후자는 장차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을 받아 유명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장차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인데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경우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리라. 이들이야말로 공자의 저 ‘人不知而不慍(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음)’의 경지에 이른 군자들이라고 이를만하다. 그러니 보통의 무명 시인들을 놓고 흙 속의 돌멩이 보듯 깔볼 일이 아니다. 그 가운데는 세상 사람들을 온통 청맹과니로 만든 무서운 ‘보석’이 담겨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이다. 그들은 괴로운 이들에겐 위로를 주고, 어려운 이들에겐 꿈을 심어 준다. 교만한 이들에겐 겸손을 가르치고, 간악한 이들에겐 사랑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교란시키는 쪽에 가까운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남에 앞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들이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불량배들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을 마치 ‘훌륭한 시인’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 안목이 없는 매스컴들이 이들의 농간에 넘어가 연일 이들의 이름만 떠들어대고 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요사이 세상을 지배하는 큰 힘을 지닌 것은 언론 매체들이다. 이들은 어떤 정치 단체나 법전보다도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하루아침에
거대한 재벌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한 무명인을 대 스타로 세상에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니 이들의 힘을 잘 이용만 하면 ‘무명 시인’도 일조에 ‘유명 시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아니 어떤 시인이 바람직한 시인인가? 나는 시인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승화된 정신 세계의 소유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세속적인 욕망을 벗어난, 적어도 떨쳐버리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자들이어야 한다.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지조(志操)를 소중히 여긴다. 그런 기상을 우리의 전통적인 시인들은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곧 ‘조선정신’의 뼈대가 된 선비들이다. 그래서 나는 바람직한 시인 정신을 선비 정신에서 찾고자 한다. 오늘과 같은 혼탁한 시대에 시인이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이 그러하니 시인 역시 부화뇌동해서 아무런 잡설이나 지껄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러한 세상일수록 시인은 매서운 시정신을 지녀야 하리라.
세상에 아직 크게 드러나지 않는 ‘보통의 시인’들이여, 그대들은 흙 속에 묻혀 있는 잡석일 수도 혹은 보석일 수도 있다.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가의 판정은 독자의 몫이 아니라 그대들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다. 나의 시정신은 무엇인가? 내가 만들어낸 한 구절의 시가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맑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대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 글은 <작가 시선> 발행인 이윤정께서 금년 새해 벽두에 이메일로 보내온 임보 시인의 <엄살의 시학>이였습니다.)
임 보(林 步)
본명 : 강홍기(姜洪基)
1962년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1962년《현대문학》지를 통해 시단에 등단함.
1988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 취득함.
충북대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월간《우리詩》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음.
논문으로는「한국현대시 운율연구」「한국현대산문시 운율연구」「시인의 세 시각」
「한국현대시 압운 가능성에 관한연구」「단형시고短形詩考」「정지용 산문시 연구」
「서정주 시의 율격적 특성」「<접동새>考」「육당의 <太白山賦>와 <太白山의 四時>」
「님의 침묵』의 님의 한 양상에 대하여」「정호승(鄭昊昇) 시문학 연구」
「박목월 초기시의 선적(仙的) 요소」등 다수,
시집으로는『林步의 詩들 59-74』『山房動動』『木馬日記』『은수달 사냥』『황소의 뿔』
『날아가는 은빛 연못』『겨울, 하늘소의 춤』『구름 위의 다락마을』『운주천불』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자연학교』『장닭설법』『가시연꽃』
『눈부신 귀향』『아내의 전성시대』『자운영꽃밭』등이 있고,
저서로는『현대시 운율구조론』『엄살의 시학』『미지의 한 젊은 시인에게』 등이 있음.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cafe.daum.net/rimpoet)〉운영
e-mail : rimpoet@hanmail.net
아내의 계명
늘 하는 훈계지만
전기밥솥에서
밥을 뜰 때는
숟가락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저녁도 자
매실주를 한잔 마시다가
(아내는 부재중)
밥솥에서 몇 숟갈 밥을 뜬다
밥주걱 찾기가 귀찮아
아내의 계명을 어기고
그냥 숟가락으로 밥을 푼다
아차,
숟가락 끝이 밥통 바닥에 닿는다
(도금에 상처 나면 큰일이다)
그렇지만
혹 아내가 발견해도
나는 즈걱으로 펐다고
발뺌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내 속이
이리 언짢은 걸 보면
계명은 역시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인가 보다
마누라 음식 간 보기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 한다
그러면
"음, 마침맞구먼, 맛있네!"
이것이 요즘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만일
"좀 간간한 것 같은데" 하면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뭣이 간간허요? 밥에다 자시면 딱 쓰것구만!"
하신다
"좀 삼삼헌디" 하면
또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자면 건강에 해롭다요. 싱겁게 드시시오"
하시니 할 말이 없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고?
아내 음식 간 맞추는 데 평생이 걸렸으니
정답은
"참 맛있네!" 인데
그 쉬운 것도 모르고……
아내의 전성시대
왜 법대생들이 그렇게 좋아했는가 몰라요
고시 공부하는 놈들이 공부는 않고 쫓아다니기만 했으니
아내의 회고담이 또 시작된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고 은근히 으스대는 투다
'법대생'이라는 말도 내 비위에 거슬린다
지금쯤 잘된 놈은 변호사가 되어 떵떵거리며 지내지 않겠는가
(하기야 못된 놈은 복덕방에서 어정거리고 있겠지만)
키가 180도 넘는 멀대 같은 놈들이 늘 따라다녔단 말이요
키가180이라는 말에 또 야코가 죽는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아무 대꾸도 않고 숟가락질만 해 댄다
수십 번을 들은 얘기이므로 다 알고 있는데 무슨 미련이 있는지
오늘도 점심을 먹다 말고 어떤 친구 얘기 끝에
그녀는 자신의 황금 시절을 회고하고 있는 중이다
매일 대문 밖에까지 따라와서 어정거리니 어쩌겄오?
다음엔 삼촌이 나와서 쫓아 보냈다는 얘기가 나올 것이다
그다음엔 장인이 법대 학장에게 전화를 해서
그놈을 혼내 주었다는 스토리가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맨 끝에 있다
아니, 그 멀대 같은 놈이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충장로를 헤매고 있는 걸 본 사람이 있었다잖아요
말하자면 그 법대생이 상사병이 들어 실성했다는 얘기다
자신은 한 사내를 미치게 할 만큼 매력덩이였다는 메시지다
그 얘기를 한평생 반복해서 중얼거린 까닭은 무엇인가?
고희에 올라선 저 노파 맺힌 한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만약 세월을 다시 거슬러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마도 아내는 180의 법대를 선택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이나 좀 가져 와!
아내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수저를 놓는다
완전한 부부
남편은 장님이고
아내는 앉은뱅이
그들은 따로따로 살 수 없지만
부부가 되어 잘 살아간다
남편은 아내의 발이고
아내는 남편의 눈이다
남편의 등에 업힌 아내가 앞을 보고
아내를 업은 남편이 길을 간다
아내를 밭에 갖다 놓으면 김을 매고
아내를 시장에 데려가면 장을 본다
두 불구가 만나 하나로 완성된
동심일체 완전 부부
온전한 사람들의 내외는
다 결손 부부들이다
* 장님 남편과 앉은뱅이 아내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기사를 TV에서 보고 쓴
글임.
모리미진땡이
지난여름 무주에 가서 어죽을 먹는데
주막의 벽에 써 붙인 '모리미진땡이'
어느 밀교의 주술 같은 술 이름
그 술맛이 궁금해 청했더니
늙은 주모가 한 사발 놓고 가는데
누룩 내가 깊숙이 밴 걸쭉한 농주다
그 술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묻자
'몰래 빚은 진짜배기 술'이란다
농가에서 밀주를 담가 먹다가
세무서 나리가 떴다는 기별이 오면
방에 묻어 두었던 술독을 안아 들고
헐레벌떡 콩밭, 삼밭, 대밭으로 숨던
아낙네들의 모습이 선하다
몰래 담가 먹던 그 농주의 맛이
얼마나 기똥찼기에
그런 이름의 술을 오늘에 빚어
지나는 사람을 홀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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