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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의 사랑 이야기

박연서원 2014. 8. 2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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詠紫薇花(영자미화)
                           송강 정철

 

一園春色紫薇花(일원춘색자미화)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백일홍) 곱게 펴

纔看佳人勝玉釵(재간가인승옥채)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莫向長安樓上望(막향장안누상망)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아라

滿街爭是戀芳華(만가쟁시연방화)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라.

사랑열전

활짝 핀 백일홍보다 더 붉고 아름다운 송강 정철과 자미(진옥)의 사랑이야기

1.첫 만남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1백여 수 이상의 시조 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긴 조선 최고의 시성(詩聖) 송강, 그가 46세 무렵(1581년) 전라감사로 있을 때이다.
남원 관아에 자미(紫薇)라는 어여쁜 동기(童妓)가 있었는데 아무리 기록을 뒤져봐도 두 사람이 언제, 어떤 경위로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그냥 송강이 그녀의 머리를 얹어주었다고만 되어 있다.

타생지연(他生之緣), 즉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몸까지 섞는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 결국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전생의 인연' 내지 '하늘의 뜻'으로 봐야한다.
위낙 술을 즐겨 임금이 작은 잔을 주면서 하루에 딱 세 잔만 마시라고 어명을 내리자 술잔을 대장간에 가져가 크게 늘려 석잔을 마셨다는 두주불사의 풍류가 송강, 그가 기생 유지와 율곡의 아름다운 플라토닉 사랑과 달리 아직 채 피지도 않은 해어화(解語花, 기생)의 꽃을 꺾은 것은 결국 '대성리학자'와 '대풍류가'의 차이가 아닐지···이후 송강은 애지중지 그녀만을 아끼고 사랑했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송강의 이름을 따 ‘강아(江娥)’라 불렀다.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즉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 뒤에는 기필코 또다시 만남이 있는 것. 꿈같이 행복했던 아름다운 시절도 잠시, 도승지가 되어 서울로 떠나게 된 송강은 그녀에게 바로 첫 머리에 있는 시를 주며 석별의 정을 나눈다.
흔히 첫사랑이 아름다운 건 처음하는 사랑이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녀는 가슴뿐만 아니라 동정까지 바쳤으니 당연히 그를 잊을 수 없었고, 날이 갈수록 그녀의 송강에 대한 연모의 정은 깊어만 갔다.

2.재회

세월이 흘러 10년 후 1591년, 송강은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 파직되어 평안도 강계로 귀양을 가게 된다.
불원천리(不遠千里), 아무리 먼 길이라도 님께서 계신 곳이라면 기쁘게 달려갈 수 있는 것. 결국 강아는 송강을 찾아 수천리 길을 달려 가는데 여기서부터는 기록마다 조금씩 버젼이 달라진다. 수많은 버젼을 크게 요약하면 결국 '둘이 재회했다'와 '송강의 유배 해제로 못했다'로 나눠지는데 왕조실록 등 모든 기록을 검토하여 '했다'로 가정한다.

오랜 세월 사무치는 그리움 끝에 마침내 술상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
고려시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는 저리가라할 정도로 뜨겁고 농염한 연정시를 주고 받는데···
먼저 송강이 목청을 가다듬어 한 수 읊는다.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볼까 하노라

이에 그녀는 다소곳하지만 요염한 목소리로 화답한다.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憾鐵)로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임이 분명코나
내게도 골풀무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번옥은 돌가루를 구워 만든 옥, 섭철은 정제되지 않는 철을 말하는데, 살송곳과 골풀무로 뚫고 녹인다는 것은 성적으로 엄청 개방된 지금 들어도 낮뜨거운 것, 따라서 위 시에 대해서는 가녀리고 순수한 그녀의 작품이 아니라 닳고 닳은 다른 기생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 두 사람은 짧은 재회 후 다시 긴 이별에 들어가게 된다.

3.임진왜란

山雨夜鳴竹(산우야명죽)
산에 비 내려 밤새 대숲 울리고

草蟲秋近床(초충추근상)
가을 풀벌레 소리 밤엔 더욱 크게 들리네

流年那可駐(유년나가주)
흐르는 세월 어찌 멈추랴

白髮不禁長(백발부금장)
길어지는 흰머리 막을 수 없네

居世不知世(거세부지세)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겠고

戴天難見天(대천난견천)
하늘 아래 살면서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知心惟白髮(지심유백발)
내 마음 아는 것은 오직 백발 너 뿐인데

隨我又經年(수아우경년)
나를 따라 또 한 해 세월을 넘는구나

송강이 유배 당시 읊은 '秋日作(추일작)'이라는 시인데, 이후 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복직되어 충청, 전라, 경상도의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온다.
이를 모르는 강아는 그를 만나기 위해 홀홀단신으로 강계로 갔다가 결국 그를 만나지 못하고 남쪽으로 적진을 뚫고 내려오다 왜병에게 잡히게 된다.
이때 그녀는 송강의 제자인 의병장 이량의 권유로 자기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유혹하여 군사기밀을 빼내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운다.

이에 대해서도 이 이야기는 평양 기생 계월향이 왜장 고니시의 한 부하 장수가 평양 연광정에 주둔하고 있을 때, 오빠를 만나고 싶다며 김응서 장군을 끌어들여 적장의 머리를 베게 했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부정하는 사람이 있으나, 송강 문중에서 그녀를 송강과 같이 묻어주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때 신빙성이 있는 것같다.

4.송강의 죽음과 영원한 사랑

이후 강아는 한번 더럽혀진 몸으로 송강을 더 이상 섬길 수 없게 되자, 출가하여 '소심(素心)'이란 이름의 여승이 된다.
풍류를 아는 가사문학의 대가로서뿐 아니라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의 중심에서 활동하여 당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극명하게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송강, 그는 1593년 5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게 되는데, 이후에도 그녀는 정성껏 그의 묘를 지키면서 남은 생애를 그의 모함을 풀고 신원을 복위시키려 온 힘을 쏟는다. 

이후 세월이 흘러 그녀도 죽자, 현재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묘를 그의 묘 옆에 정성껏 모셨고, 송강의 문중에서는 지금도 그녀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고로 송강의 묘는 1655년 송시열의 건의로 충청도 진천으로 이전)

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 
먼 산의 나뭇잎은 비에 우수수 떨어지니

相國風流此寂寥(상국풍류차적료) 
정승의 풍류가 이토록 쓸쓸해졌을 줄이야

怊悵一杯難更進(초창일배난갱진) 
술 한 잔 다시 올리기 어려우니 정말 슬프도다

昔年歌曲卽今朝(석년가곡즉금조) 
옛날의 그 권주가는 바로 오늘 불러야할 노래일세.

송강의 제자 권필이 스승의 산소를 지나면서 지은 '過松江墓有感(과송강묘유감)'이라는 시인데,
일생을 누구보다 멋지게 보냈던 스승이 지금은 빈산의 무덤 속에 누워계시면서 술도 한 잔 못 받아 드시니 생전에 지으셨던 권주가는 대체 누구를 위하여 지은 것이냐는 제자의 한탄이 참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권력의 한가운데서 걸핏하면 시기와 음모에 휘말려 낙향과 유배를 밥먹듯 했던 송강,

그러면서도 한 여인의 사랑과 순결을 끝까지 지켜줄 정도로 다정다감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송강,

꽃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름다움(羞花)에도 불구하고 오직 사랑 하나에 목숨 걸고 평생을 지조와 절개로 일관한 자미, 부평초보다 경박한 하룻밤 풋사랑이 판치는 시대에 그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참으로 귀감이 되지 않을지···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 말아 이 시름 잊으려 해도
마음속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과 같은 명의가 열 명이 오더라도
이 병을 어떻게 하랴.
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께서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좇으려 하노라.

'연군지정(戀君之精)'의 감정을 격렬히 표현한 송강의 '사미인곡'인데 그의 임이 '왕'이라면, 그녀의 임은 '송강'이 아닐지···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의 변화무상함에도 백일이 아니라 만세의 붉은 한(恨)으로 남아있는 자미여!
사람은 누구나 다하지 못한 한(恨)을 남기고 가는 것,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 부디 하늘에서는 '새로' 활짝 핀 한 송이 백일홍처럼 붉고 뜨거운 사랑 나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