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들로드 <Insight on Asia>
(KBS 특집다큐 연속기획물 6편)
실크로드의 관문 중국 간쑤성. 이곳은 1500년 전 한 귀족의 지하입니다. 묘의 벽은 실크로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벽화들도 가득합니다. 당시 최고 상품이던 비단제조를 위해 뽕나무를 따는 장면도 보입니다. 무덤 안 쪽의 벽화에는 1500년 전 이 무덤의 주인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생생히 그려져 있습니다. 서역풍의 양 꼬치구이, 청동 솥의 탕 요리 이 음식들은 서역과 중국의 식문화에만 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동서문명의 교차로에서 탄생한 아주 특별한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요리사 켄 홈과 함께 문명의 장벽을 뛰어 넘어 인류의 주방에 등장하게 된 국수탄생의 비밀을 풀어볼까 합니다.
■ 진행자 켄 홈(Ken Hom)
한없이 작고 평범해 보이는 것을 속에 때론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실처럼 가늘고 긴 음식 국수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는 요리사 켄 홈(Ken Hom)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과 함께 저는 아주 신비로운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길을 따라 한 그릇에 국수에 숨겨진 놀라운 문명의 비밀을 찾아낼까 합니다. 자, 그럼 떠나볼까요.
누들로드
제1편 미라의 만찬
중국계 미국인 켄 홈은 20년 전 처음 유럽에 왔습니다. BBC 요리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꽤 얼굴이 알려졌죠. 그가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때만 해도 유럽인들의 동양의 음식은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국수로 그랬고요. 하지만 이제 아시아의 국수는 파리 식당가에 인기 메뉴입니다. 서양인들이 국수를 젓가락으로 먹는 모습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유럽인의 젓가락 끝에 걸린 국수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중국의 서쪽 끝 신장위구르 자치구. 불모의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 화염산은 한 여름 대지 온도가 50℃까지 치솟는 말 그대로 불타는 산입니다. 서유기에서 요괴들의 땅으로 묘사된 것이죠. 1991년 이곳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30여개의 이상한 구멍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2500년 전 고대인들의 무덤이었습니다. 남루한 가죽외투를 입은 체, 수천 년의 시간을 삼켜버린 40대 남자의 죽음. 당시 발굴된 14구의 미라 중 하나입니다.
발굴을 주도했던 연구소에는 미라와 함께 묻힌 부장품들이 보관돼 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아주 흥미로운 유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2500년 전 국숩니다. 건조한 기후 덕분에 모양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국수, 이것이 인류가 최초로 먹었던 국수입니다.
류엔궈 신장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무덤 속에는 검은색으로 변한 작은 난(빵)이 들어있었습니다. 또 다른 그릇에는 국수가 담겨 있어서 매우 놀랐습니다. 그 모양이 오늘날 신장의 국수와 너무 흡사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국수는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화염산 인근의 시장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 할머니가 만들고 있는 것은 라그만이라는 국수, 라그만은 별다른 도구 없이 밀가루 반죽을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거쳐 국수를 만듭니다. 숙성과정에서 점성과 탄성이 강해졌기 때문에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특유한 방식의 국수 전통은 신장지역에서 지난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 온 것입니다. 소금을 약간 넣은 물에 국수를 삶아낸 후 양고기와 부추, 고추 등에 야채를 볶아 만든 고명을 얹지면은 라그만이 완성됩니다. 라그만은 신장의 위구르족만의 것이 아닙니다. 타지크, 우즈벡, 키르기스 등 실크로드의 중앙아시아 민족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라그만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켄 홈
“우리는 동서양을 이었던 실크로드 지역의 국수에 주목할까 합니다. 그런데 중국과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누가 정확히 언제부터 국수를 먹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건,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황량한 건조지대에서 수천 년 전 국수를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신장의 사막 곳곳에는 수천 년 전 인류가 정착생활을 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무려 4백구가 넘는 미라가 발굴됐습니다.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신장샤오허 유적지에서 발굴된 미라의 배 위에는 괴이한 얼굴에 가죽 가면이 놓여 있었습니다. 4천년이 된 이 가면의 가장 큰 특징은 유난히 높은 코, 그것은 동양인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코가 큰 가면의 주인공들에게서는 또 한 가지 공통된 사실이 발견됩니다. 그들의 부장품에서는 모두 아주 중국에서 드물었던 밀알 밥, 밀가루 음식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켄 홈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밀이라고 하는 곡물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그들은 어떻게 밀 음식 만드는 법을 알았을까요. 그 답은 미라의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샤오허 무덤에서 발견된 밀대로 짠 바구니, 바구니 안에는 미라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들어있었습니다.
리원잉 신장 고고학연구소
“이것은 샤오허 사람들이 사용했던 식기입니다. 지금의 밥그릇이나 물 잔과 같습니다. 평소 먹는 음식이나 양, 소고기 등이 있었을 겁니다. 바구니에는 큰 밀가루 음식 덩어리가 있었고 좁쌀과 밀알도 나왔습니다.”
바구니 속 밀알은 세계적인 고고식물학자 사토 요이치로 박사에게 보내졌습니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이 밀알이 지구상의 어느 지역에서 이동해 온 것인지 추적해 봤습니다. 분석결과 그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신장의 미라가 가지고 있는 밀알은 이 지역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구니 안의 밀알은 어디서 온 것일까.
사토 요이치로 교수 일본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
“아마 이 밀은 카스피 해의 남쪽에서 왔을 것입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이 밀을 가지고 동쪽으로부터 유라시아대륙을 건너와 지금은 사막이 된 신장의 샤오허 근처에 도달한 것입니다.”
미라의 부족이 밀을 갖고 왔던 곳은 지금 이란 남부지역 9천 년 전 인류가 최초로 밀 경작을 시작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인접해 있습니다. 신장 미라의 부족은 4500㎞나 떨어진 이곳에서 밀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쌀과 함께 인류가 최초로 경작했던 밀. 이 밀은 오늘날 全세계 인구 60%가 매일 먹는 주식입니다. 그런데 밀은 알곡 전체 삶아 먹는 쌀과는 아주 다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여섯 겹이나 되는 단단한 껍질로 되어 있어 그것을 먹기 위해서는 쌀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가루를 내는 방법이었죠. 밀은 밀가루가 되어서야 인류의 중요한 주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밀의 부드러운 배젖 부분을 가루로 만들고 물을 섞어 치대면 신기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밀가루의 점성과 탄성이 극도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반죽의 발견은 인류 식문화사의 중대한 터닝 포인트(전환점)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습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3천년 전 양떼를 몰던 유목민들에겐 전혀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같이 한 번 보실까요.”
인류 고대문명의 발상지 북아프리카. 이곳 사하라 사막의 사람들은 피라미드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고대의 발명품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맷돌입니다. 회전식 맷돌의 발명으로 이전에 비해 밀을 가루로 내는 일이 3배 이상 쉬워졌습니다. 이러한 제본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음식문화를 뒤바꿔놓았습니다. 그것은 빵의 탄생이었습니다. 반죽을 둥글게 편 후 바로 잿더미 속에 넣습니다. 굽는 과정에서 빵이 약간 부풀어 오르지만 효모를 넣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플랙브레드.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는 납작 빵입니다.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 먹었던 빵의 원형입니다.
북아프리카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한 빵 문화는 또 다른 문명으로 전해집니다. 그것은 로마문명이었습니다. 밀로 죽을 만들어 먹던 로마인들에게 빵은 문명인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시대 폼페이 유적지에 남아 있는 서른 개가 넘는 제빵소. 마당 한가운데에는 가축과 노예가 돌리던 대형 맷돌이 당시 규모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로마문명은 빵의 진화의 결정적인 공헌을 합니다. 그것은 벽돌로 쌓은 화덕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한꺼번에 여든 개가 넘는 빵을 구울 수 있는 이러한 벽돌 화덕의 발명은 빵 문화의 일대 혁신을 가져옵니다.
박물관에는 화석이 된 당시의 빵이 보존돼 있습니다. 이스트를 넣어 벽돌 화덕에 구운 이 빵은 부드러운 식감 때문에 귀족의 식탁에 올랐습니다. 품질을 보증한다는 의미에서 제빵사의 이름을 새겨 넣기까지 했습니다. 빵의 완성은 화덕의 진화로 가능했습니다. 이스트를 넣어 발효시키는 방법을 처음 알았던 것은 이집트 문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진흙화덕에서 구워낸 빵은 껍질이 두텁고 씹는 맛이 거칠었습니다.
그 이유는 진흙화덕으로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반면 로마의 벽돌화덕은 굴뚝이 온도 조절이 용이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 같은 부드러운 식감의 빵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밀가루 반죽을 불에 굽는 빵의 문화. 그것은 6천년 동안 지구의 서반 북아프리카에서 중동까지 지구 절반의 음식문화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국수가 탄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밀의 재배는 기원전 7천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됩니다. 기원전 4천년 경 최초의 빵이 납작한 형태로 태어납니다. 기원전 3천년 경 이집트인들이 부풀어진 발효빵을 만듭니다. 이 시기에 밀 재배가 중국에서도 시작합니다. 기원전 2천년 경 중국인들은 처음으로 분식을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한나라 때에 와서야 국수에 대한 최초 기록이 나타납니다.”
서양에서 빵의 문화가 자리 잡았던 시기, 지구 반대편엔 전혀 다른 음식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한족이었습니다. 기원전 200년경 한나라 시대 중국의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음식문화가 꽃을 피웁니다. 우선 다양한 육류요리가 상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고기는 이전 시대에는 귀족의 제사 때에만 잡을 수 있었지만 한대부터 일상적으로 식탁에 오르게 됩니다. 소, 염소, 돼지, 개 등은 재료가 되는 육류의 종류도 다양했지만 부드러운 육질을 먹는 것이 유행하여 어린 가축을 식재료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자라, 잉어 등 다양한 어류뿐만 아니라 머리에서 내장까지 육재료를 부위별로 특색 있게 조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가능했던 이유가 그림 속에 숨어 있습니다.
여기 지휘봉을 든 사람이 총주방장인데 42명의 전문요리사들이 그의 지휘에 따릅니다. 한대의 주방은 이미 현대의 레스토랑과 같이 분업화?전문화 돼 있습니다. 연어의 상찬, 식재료를 다듬는 일, 화로에 고기를 굽는 일, 큰 가마에 탕을 끊이는 일 모든 조리 공정이 분업화 돼 있습니다. 주방의 전문화?분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조리법을 고안됩니다. 당시 중국은 굽고 튀기고 삶고 찌는 네 가지 조리법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는 유일한 문명이었습니다. 중화요리 조리법이라고 하면은 불에 굽는 것과 기름에 튀기는 방법이 먼저 떠오르지만 실은 중국에 가장 오래된 조리법은 삶고 찌는 것이었습니다.
음식에서 삶의 즐거움을 쫓는 식도락의 전통은 중국인들에게 뿌리 깊은 것입니다. 최대 2.5m까지 늘어나는 라오면은 보는 것도 즐겁지만 즉석에서 국물에 끊여먹는 맛이 일품입니다. 펄펄 끊는 뜨거운 국물에 재료를 담겨 먹는 중국의 탕문화는 그들의 식도락 전통만큼 오래된 것입니다. 탕문화는 볶기와 튀기기보다 훨씬 앞서 공자 이전 은나라 때 등장합니다. 이 청동기 유물들은 약 3천년 전 서주시대에 사용되던 조리도구들입니다. 디자인도 다양한 이것은 주로 제사 때 사용되었지만 귀족의 주방에서도 실제 사용됐습니다. 쌀이나 조를 주식으로 먹었던 한족에게 가장 중요한 조리법은 탕과 찜이었습니다.
이것은 얀이라는 찜기입니다. 우선 세 개의 발아래 불을 피웁니다. 그러면 얀 안에 물이 끊습니다. 그 위로 구멍이 난 판을 얹고 재료를 올려 증기로 그것을 찌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물을 끊이거나 찌는 습식문화가 발달해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물건은 리라고 하는 탕기입니다. 아마 국물요리나 죽을 만들 때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다리 부분이 비어 있어 음식을 빨리 조리할 수 있습니다. 아주 획기적인 아이디어입니다. 이 탕기는 만들어진지 3천년이 되었는데 중국인들이 뜨거운 국물 음식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보여줍니다.”
찜과 탕 요리에 오랜 전통을 가진 한족은 밀가루를 재료로 독특한 음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만두입니다. 얇게 민 반죽에 소를 넣는 음식 대부분은 여러 식?문화권에서 발견되지만 중국의 만두만이 갖는 독특함이 있습니다. 바로 찜통에 넣어 찌는 조리법입니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만두를 불에 굽지 않고 증기로 쪄먹을 수 있었던 것은 찜과 탕요리가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만두는 그 형태만 300가지. 소에 종류에 따라 갖가지 맛을 낸다고 합니다. 중국은 가히 분식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인이 만두나 국수 같은 분식을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신장 투르판 박물관에는 그런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될 만한 유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500년 전 만두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인들은 당나라 때가 돼서야 비로소 만두를 맛볼 수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 이유는 밀이 중국인 아닌 멀리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외래 작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보리와 밀을 뜻했던 麥를 보면 멀리서 오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얼굴面자가 붙어 밀가루 음식을 뜻하는 麵이란 글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밀은 어떻게 중국으로 전해졌을까. 그 단서는 실크로드 둔황석굴 속에 있습니다. 벽화에는 한무제가 출사를 한 한 신하를 배웅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습니다. 황제 앞에서 한 신하가 출사의 예를 올립니다. 그는 흉노족에 대항하기 위해 멀리 서역의 대월제국과 동맹을 맺으려 가는 사신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張騫입니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백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향합니다. 그가 개척한 길을 통해 서역의 다양한 문물들이 중원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실크로드의 시작이었습니다. 밀과 밀가루 음식문화가 전해진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장건이 실크로드를 열자 그 길을 따라 한족이 서쪽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들이 다다른 곳이 바로 국수유물이 발견된 신장이었습니다. 신장의 대초원, 한족이 이주해오기 오래전부터 이곳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땅이었습니다. 이들은 죽은 양을 가지고 겨루는 ‘부즈캇’이라는 게임을 즐깁니다. 일종의 폴로 경기라고 할 수 있는 이 놀이는 서쪽의 페르시아지방에서부터 왔습니다. 이 초원엔 아직 서역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서쪽에서 온 것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빵의 문화입니다.
초원의 유목민인 카자크 족 이들이 화덕에 굽는 것은 난이라고 하는 납작한 빵입니다. 탄둘이라 부르는 화덕에 굽는 이 난은 서남아시아와 인도에까지 널리 퍼져있습니다. 서반구의 빵문화가 신장까지 전해진 것이죠. 화덕에 구운 빵이 이들에겐 우리에게 밥과 같은 주식입니다. 그런데 카자크 족에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특별한 날에 먹는 밀가루 음식이 따로 있습니다. 먼저 둥근 모양의 반죽을 쌓아 주먹으로 얇게 핍니다. 여기까지는 난을 만드는 방법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밀대로 얇게 밀어 만드는 카자크 족의 별식은 바로 국수입니다. 그러니까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주방에는 빵의 문화와 국수의 문화가 공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고기를 푹 곤 그 육수에 국수를 삶아 먹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양고기 국수라는 뜻에 ‘나린’입니다. ‘나린’은 삶은 양고기를 쟁반에 놓고 먹는 카자크 족의 전통요리에 국수가 더해진 형태입니다. 카자크 족은 ‘나린’을 손으로 집어 먹습니다. 국물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국수보다 고기를 더 좋아하나 봅니다. 카자크 유목민이 이곳에 오기 전 이 초원의 주인은 미라의 부족이었습니다. 5천 년 전부터 신장지역에 살았던 이들은 밀을 주식으로 했고 인류 최초의 국수를 만들었습니다.
미라의 부족은 원시 유럽인종이었습니다. 원래 우크라이나와 유라시아 초원에 살았던 그들은 인구가 늘어나면서 신장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살았던 2500년 전 신장지역은 사막으로 변한 현재에 비해서 물이 비교적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양이나 염소를 키우면서 밀, 좁쌀 등의 작물도 재배할 수 있었습니다. 유목과 농사를 병행하는 반정착생활을 했던 것이죠. 화염산 계곡에는 그들이 정착생활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뤼엔궈 신장 고고학연구소
“1992년 발굴했던 이 집은 두 칸짜리 집입니다. 뒤는 구들이고 앞에는 부뚜막이 있었습니다. 서쪽 방은 말을 기르던 곳이었습니다.”
미라부족이 만든 인류 최초의 국수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들이 국수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곡물은 밀이었습니다. 출토된 유물들로 미루어 볼 때 상당량의 밀을 재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라의 부족은 국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수확한 밀을 가루로 곱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맷돌을 아직 갖지 못했던 이들은 갈돌을 사용했습니다. 갈돌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인 제본도구여서 이곳으로 빻은 밀가루의 입자는 아주 거칠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국수를 만드는 방법은 단순했습니다. 이렇게 양손바닥으로 비벼서 가늘고 긴 모양의 면발을 만들었습니다. 인류최초의 국수는 아무런 도구를 쓰지 않고 인간의 양손만으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미라부족 만찬에 올랐던 인류 최초의 국수, 이렇게 탄생한 국수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문명으로 전해집니다.
미라의 부족이 살았던 화염산 인근 실크로드의 고대도시. 신장 문화의 분식 문화는 바로 이곳에서 중국문명과 조우하게 됩니다. 신장으로 진출한 중국의 한족은 5C 전후 이 도시의 주인이 됩니다. 이 일대에 세워진 고창국은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전성기 때는 인구가 5만 명에 달했습니다. 실크로드의 교역이 융성하던 시기 이 도시는 중국 한족과 중앙아시아 민족이 뒤섞여 사는 다민족 도시였습니다. 동?서문명이 공존했던 이 도시에는 아직도 당시 일상의 흔적이 잘 남아 있습니다.
류쉐탕 신장문물연구소
“이곳은 옛날 민가의 작은 주방입니다. 이것은 창문으로 통풍구로 썼습니다. 아궁이에는 불을 땐 흔적이 있습니다. 벽에 연기 자국이 남아있습니다.”
이들의 주방은 매우 편리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주방 바로 뒤에 우물을 파서 손쉽게 식수를 퍼 올릴 수 있었죠. 동과서의 문명이 만났던 이 고대도시 주방에서는 과연 어떤 음식이 만들어 졌을까요. 이곳은 교하고성에 거주했던 중국한족의 집입니다. 중원의 한족들이 기장과 수수, 쌀을 주식으로 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신장지역에서 풍부했던 밀을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이것은 홍동이라는 음식인데 일종의 만두 같은 것입니다. 교하고성 인근의 귀족 무덤에서 발견된 음식유물은 전부 밀가루 음식입니다. 점심이라고 불리는 이 밀가루 음식들은 아름답고 정교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선진적인 분식문화는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중국으로 전해집니다. 그중의 하나가 빙. 서역풍 복장의 여인 토우가 만들고 있는 것은 샤오빙. 불에 구운 밀가루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지금의 시안. 실크로드의 기점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도시 한 가운데에 張騫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서역문물이 총집결하던 국제도시 흔적을 볼 수 곳이 회족거리입니다. 거리에는 밀가루로 만든 간식거리가 넘쳐나는데 고기소를 넣어 기름에 지지는 유빙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서역의 분식문화를 한족들은 호식, 즉 오랑캐 음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호떡도 그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당시 이 도시에는 이런 화려한 모양의 서역풍 음식이 대유행이었습니다.
‘꿔꾸이’라 불리는 시안의 전통적인 빵도 호식의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 때부터 먹기 시작한 이 중국식 빵은 서양식의 화덕 대신에 뜨겁게 달군 솥에 넣어 굽습니다. ‘꿔꾸이’는 말하자면 미완의 빵입니다. 제대로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고 솥에 구웠기 때문에 딱딱하고 납작합니다. 또 다른 시안의 대표적인 빵. 파오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시성의 명물인 이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우선 빵을 그릇에 뜯어야 합니다. 거칠고 단단한 빵을 먹기 위해 중국인은 기발한 착상을 했습니다. 그 위에 뜨거운 양고기 탕을 언은 것입니다. 서양의 빵을 중국화 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참 재밌는 음식입니다. 신선한 고수풀, 고추, 마늘절임 등을 넣었습니다. 이것이 양고기의 강한 맛을 중화시켜주네요. 중국인들은 이 국물에 빵을 넣어서 새로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탕면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요?”
탕과 찜을 즐겼던 중국인들은 서역에서 온 밀가루 반죽을 굽는 대신 삶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수입니다. 1400여년 전 <제민요술>이라는 농업서에 등장하는 水引??法. 문헌상 남아 있는 인류 최초의 국수조리법입니다. 우리는 중국 최초의 국수를 전문가의 도움으로 재현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밀가루를 곱게 쳐 고기 국물을 반죽을 하고 그것을 신장에서 라그만을 만들 때처럼 손으로 밀어 원형을 만듭니다. 그런 다음 손으로 당겨 나무젓가락 굵기가 될 때까지 늘입니다. 그것을 약30㎝ 길이로 잘라 물에 약 3~4분 정도 담가둡니다. 이 과정에서 점성과 탄성이 늘어납니다.
아야오 오쿠무라(고대음식 전문가)
“어떠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잡아 늘이는 국수입니다.”
물속에서 숙성된 면을 냄비 위에서 수증기를 맞으며 양손으로 부추처럼 얇게 폅니다. 물에서 잡아 늘인 밀가루 음식이라는 뜻으로 고대 중국인들은 이 음식을 수인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삶아낸 국수 위에 맑은 닭고기 국물을 붓습니다. 중국 최초의 국수는 뜨거운 국물에 담근 탕면이었습니다. 가루를 내어 구어 먹을 수밖에 없는 빵문화를 낳았던 밀, 인류는 그것을 더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으로 즐기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모양의 국수가 탄생했습니다.
국수가 가늘고 긴 모양이 되었던 것은 끊은 물에서 가장 빨리 뜨거운 탕과 함께 먹기에 가장 적합한 디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건식의 재료와 습식의 조리법이 만난 동?서문화의 최고 합작품인 바로 국수인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북방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의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국수는 이 장성 넘어 유목민의 주방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실크로드의 대초원. 아직도 이곳은 유목민의 땅입니다. 2500년 전 이들의 식탁에 올랐던 음식 하나가 인류의 식문화를 바꿔 놓았습니다. 그것은 누들로드의 탄생이었습니다. 처음 국수를 전했던 미라의 부족은 한나라 이후 신장지역에서 종적을 감춥니다. 급격한 기후 변화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결국 다른 민족에게 흡수됐다고 합니다. 신장의 이란계 타지크 족은 새해 첫날 집안 가득 하얀 밀가루를 뿌립니다. 장구한 세월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모두 씻어 가진 못한 모양입니다.
긴 여행 끝에 받아드는 국수 한 그릇이 유난히 특별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수천 년의 시간을 인류가 가진 위대한 창조성을 이 한 그릇으로 만끽할까 합니다. 미라의 만찬은 여기에서 끝을 맺겠습니다.
※ 저작권은 KBS <인사이트 아시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절대로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을 금합니다.
제1부 기묘한 음식
제2부 미라의 만찬
제3부 파스타 오디세이
제4부 아시아의 부엌을 잇다
제5부 인류최초의 패스트푸드
제6부 세상의 모든 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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