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lo Concerto No.2 in D major 하이든 / 첼로협주곡 2번 Franz Joseph Haydn 1732∼1809 Janos Starker, cello |
Concerto for Cello & Orchestra No.2
in D major Hob.VIIb:2, Op.101
Complete (전 악장 이어듣기)
Janos Starker, cello
Gerard Schwarz, conductor
Scottish Chamber Orchestra 2005
구성과 특징
한때 하이든의 것이 아니라하여 ‘가짜 논쟁’을 거치기도 한 곡으로 기교적인 중음주법 등 당대 기준으로서 탁월한 독주 부분의 기교는 결국 후세의 손길을 거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번 협주곡의 넘치는 활력을 지나 상쾌한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곡으로, ‘알레그로’라는 표기가 무색한 첫악장의 한가로운 주제부터 전원의 내음이 물씬 풍긴다.
제 1악장 (Allegro Moderato)
Janos Starker, cello
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된 1악장은 우아한 멜로디와 저돌적이고 경쾌한 리듬을 대조시켜 고전적 균형미의 극치를 이룬다. 투티가 1주제를 제시하면, 이를 첼로가 이중 제시를 한다. 이어서 빠르고 기교적인 삽입절이 지나면 낮은 음역으로 너그러운 2주제가 등장한다. 발전부에서 하이든은 분산화음과 아르페지오를 응용하여 첼리스트의 응용하여 첼리스트의 기량을 펼치도록 하는데, 이때 짧은 집시풍의 연결악구가 극적인 효과를 구사한다. 이어지는 재현부는 제시부를 충실히 반복하고 있다.
제 2악장 (Adagio)
Janos Starker, cello
첼로 솔로로 시작되는 2악장의 주제는 3음으로 만들어졌다. 이 3음은 다름아닌 1악장 1주제의 앞부분을 단락짓는 3음들로 차이든의 재치를 엿보이게 한다. 전체 분위기는 조용하고 명상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첼로 솔로 중 가장 아름다운 선율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제 3악장 (Rondo Allegro)
Janos Starker, cello
가벼운 6/8박자의 민요풍이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3도와 옥타브에 의한 악절을 비롯해 넓은 음폭을 바르게 질주하는 기교적인 부분을 양념처럼 섞어 넣어 흥미를 돋우고 있는데, 크라프트의 조언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에는 카덴차 대신 확대된 코다를 투티와 함께 프레스토로 연주하는데, 이 부분은 원작에는 없는 것으로 후에 추가되었다.
야노스 슈타커는 192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고, 1948년에 지휘자 안탈 도라티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달라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주자가 되었다. 그는 이어서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 아래에서 메트로폴리탄과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을 지냈다. 영국 잡지 BBC MUSIC의 연재기사인 ‘나를 바꾼 음악’에서 그는 카잘스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 나이 여섯 살하고 육 개월 때, 나는 파블로 카잘스를 만났다.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내게 키스해 주었는데 나는 일주일 동안이나 세수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카잘스의 창조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가 비록 첼리스트들을 위하여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연주는 우리 세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첼로 연주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72년 뉴욕 필과 하이든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쇤베르크는 이런 평을 했다. “슈타커는 귀족적인 엄격함을 갖고 연주했고 고도의 논리로 음악적 소재를 구도화했다. 그의 완벽한 아티큘레이션은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으며 첼로 소리는 크고 아름답게 울렸다. 그의 하이든 협주곡은 분명함과 균형감에 있어 극치였다.” 이처럼 슈타커는 어떤 음악을 연주할 때에도 감정에 휩쓸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도 필요 이상의 몸짓이 없었다. 항상 냉정하게 작품의 양식을 정확히 파악해 고도의 테크닉과 함께 그것을 축으로 감정을 담아냈다. 그의 연주를 가리켜 불과 얼음이 환상적으로 매치되어 있다고 말한다. 야노스 슈타커는 오직 음악을 위한 종사자이고자 한 위대한 첼리스트이며 현역 독주자 중 가장 원로이다.
Pierre Fournier (1906~1986)
피에르 푸르니에는 카잘스 이후의 명첼리스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프랑스파 첼리스트 - 폴 바를레즈 (Paul Bazelaire)와 모리스 마레샬 (Maurice Marechal)에서 시작하여 푸르니에, 토르틀리에, 나바라, 장드롱에 이르는 - 의 한 명이자, 아마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1906년 6월 24일, 파리에서 육군 장성의 아들로 태어난 푸르니에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러나 9살이 됐을 때 불행하게도 소아마비에 걸려 피아노의 페달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첼로를 택했다.
다행하게도 첼로 레슨은 아주 빠른 진보를 보여서 12세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 바젤레르(Paul Bazelaire)와 안톤 헤킹 (Anton Hekking )에게 첼로를 배웠다. 1923년 17세의 나이로 수석 졸업한 뒤, 다음 해에 파리에서 데뷔했다. 이때 모리스 마레샬 (Maurice Marechal)이라는 평론가는 "내일을 이끌어갈 첼리스트"라고 평했다.
1933년 베를린 필하모니의 초청으로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그로 인해 푸르니에의 명성은 확고하게 되었으며 푸르트뱅글러의 협연으로 연주한 슈만 협주곡 3악장의 녹음이 남아 있다.
30년대부터 그는 실내악에도 주력했는데, 카잘스 3중주단에서 카잘스가 활동을 그만두자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43년부터는 코르토 및 티보와 연주하기도 했다. 그의 실내악에 대한 애정은 그가 연주 활동을 마칠 때까지 이어졌다.
1937-1939년에는 에콜노르말에서 첼로와 실내악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41-1949년까지 모교인 파리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그 이후 그는 연주 활동에 집중하여, 1948년에는 미국, 1961년 소련(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에 데뷔했고, 우리나라(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 음악회)와 일본까지 포함해서 전 세계를 연주여행했다.
협연한 지휘자는 푸르트뱅글러 외에 발터, 셀, 쿠벨릭, 카라얀, 클레멘스 크라우스, 첼리비다케, 마르티농, 뮌힝거 등 당대의 뛰어난 지휘자를 거의 모두 망라하며, 무대나 레코드에서 같이 공연한 파트너로는 박하우스, 켐프, 굴다, 루빈슈타인, 슈나벨, 리파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프란체스카티, 셰링, 시게티 등 거장들이 즐비하다.
고전음악뿐 아니라 현대음악도 좋아했던 그를 위하여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Bohuslav Martinu), 장 마르티농 (Jean Martinon), 프랑시스 풀랑크 (Francis Poulenc) 등 여러 현대 작곡가들이 작품을 썼다.
첼로 연주법에 있어서도 오른쪽 엘보를 높이 들어서 보잉하는 새로운 테크닉을 개발해서 소리를 부드럽게 내는 결과를 창출했다. 만년에는 그의 아들인 장 폰다 (Jean Fonda)의 반주로 레코딩을 자주 했다.
1956년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했으나 프랑스 국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피아노 연주자인 아들과 함께 가끔씩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소나타를 협연했다.
제네바에 정착한 후 피아니스트인 아들 장 폰다 푸르니에의 도움으로 마스터 클래스도 열었다. 아들은 훌륭한 실내악 파트너이기도 했으며 동생인 장 푸르니에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1963년 레지옹도뇌르 슈발리에, 이듬해 오피시에로 서훈되었다. 78세 때 런던의 퀸엘리자베스홀에서 독주회를 가질 정도로 노후에도 연주활동을 계속하다가 1986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8년 로열노던음악대학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국제첼로페스티벌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푸르니에는 '첼로의 황태자'로 불릴 정도로 귀족적이고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거기에 소탈함과 단정한 양식감, 균형감 등의 고전적 정신이 보태져 정갈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음색도 아름답고 따뜻함이 넘쳐났다.
그의 예술을 한 마디로 말하면 '곡의 우아함을 최대한으로 끌어낸다'.
그의 음과 음악의 흐름은 결코 딱딱하지 않으며, 정말 너무 잘 흘러가서 그가 연주하는 곡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에 대한 인식은 어느 새 의식에서 사라진다. 그렇다고 좋은 음색만을 추구해서 음악 전체에 대한 배려를 잃는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점에서 중용을 잘 지키는 그의 음악성이 돋보인다.
카잘스를 들으면서는 그의 인간성과 그가 생각한 곡의 본질에 집중하는 능력에 감동하고, 로스트로포비치에서는 그의 완벽한 기교와 웅장한 스케일에 감탄하는데, 푸르니에는 곡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인식을 늘 새롭게 해 준다.
카잘스 이후의 첼리스트 중 개성적인 점에서 손꼽는 두 사람을 비교하기는 다소 어폐가 있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푸르니에 쪽이 레코드로 듣는 한 고전파까지의 레파토리에서는 로스트로포비치보다 더 좋다고 생각한다. 후자는 실내악에서 가끔은 위화감을 줄 때가 있지만, 푸르니에에게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으며 본질적으로 실내악에 더 적합하다 싶을 정도로 동료들과 잘 화합하는 연주를 들려 준다.
그의 레코드는 양도 많으며, 소위 '6대 메이저 레이블'에서 모두 녹음했던 녹음 운 좋은 아티스트다. 데뷔 직후부터 50년대 중반까지는 EMI, 그 말기에는 잠시 Decca가 주축이었으며, 전성기인 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는 CBS에 조금 녹음을 한 외에는 주로 DG의 간판 첼리스트로 활약했고, 그 이후에는 RCA, EMI, Erato, Philips, Sony 등 여러 곳에 프리로 녹음을 했다.
Pierre Fournier with Vaclav
성향이나 기질 등이 그와 전혀 달랐던 프리드리히 굴다는 1960년 부근에 30회 정도나 그와 같이 연주하고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녹음까지 했는데, 푸르니에에 대해 다음처럼 회상한다.
"그는 나보다 훨씬 성숙했으며 나보다 위였다. 나는 그에게 빚이 매우 많다.
음악적으로 그에게 매우 많이 배웠으며, 그는 나를 친절하고 끈기있게 이끌어 주었다."
굴다는 푸르니에 외에는 이렇게 애정과 존경을 담아서 말한 음악가가 전혀 없다고 한다.
하인리히 쉬프 (Heinrich Schiff)가 굴다에게 새로 베토벤 첼로 소나타를 녹음하자고 제안했을 때, 굴다는 "내가 승낙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마십시오. 나는 푸르니에가 너무 버려 놓아서 내게는 불가능합니다"라 대답했다고 한다.
Daniel Barenboim, cond.
English Chamber Orchestra
1. Allegro moderato
2. Adagio
Jacqueline Du Pre (1945~1987)
재클린 매리 뒤 프레(Jacqueline Mary du Pré, OBE, 1945년 1월 26일~1987년 10월 19일)는 영국의 첼리스트이다. 5세 때 첼로를 배우기 시작해서 15살에 프로로 데뷔하여 20대 초반에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나,
25세 때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28세에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 연주가 그녀의 대표적인 명연주로 꼽힌다.
희귀병에 걸려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비운의 천재 첼리스트였다. Jacqueline du Pre의 죽음을 애도하여 '재클린의 눈물'이라는 이름을 붙여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Jacqueline du Pre가 희귀병에 걸려 14년 동안이나 투병하는 동안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 냉혈 남편은 아르헨티나 태생의 유대인인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유명 피아니스트이며, 예술가인 Daniel Barenboim이다. 천재 첼리스트 Jacqueline du Pre는 영국 출신으로 Daniel Barenboim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 국적까지 버렸다.
Cello Concerto No.1 in C major 하이든 / 첼로협주곡 1번 Franz Joseph Haydn 1732∼1809 Anto Noras, cello |
Concerto for Cello and Orchestra No.1
In C major Hob.VIIb:1
Arto Noras, Cello
Bohdan Warchal, Conductor
Slovak Chamber Orchestra
Cello Concerto No.1 C Major, 1 mov. - Mstislav Rostropovich
Cello Concerto No.1 C Major, 1 mo. - MINT Orchestra
가치와 매력
하이든은 이 곡을 만들 당시 매우 행복한 작업환경에 처해 있었다. 첫 만남 이후 그에게 많은 음악적 영향과 영감을 불러일으킨 모차르트와 교류하고 있었고, 현악 4중주 작품 33번이 완성된 시기로 그 스스로가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작곡에 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전곡을 통해 명쾌한 형식, 매끄러운 선율의 우아한 주제, 첼로의 개성을 살리는 기교, 솔로와 투티의 조화로 참다운 고전주의 협주곡의 모델을 제시했다. 카잘스에 의하면 하이든은 이 곡에서 첼로에게 마치 오페라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작품배경
하이든은 에스타르하지 후작에 봉사하던 약 30년간 6~8곡의 첼로 콘체르토를 작곡하였다고 여겨지나 현시점에 있어서 하이든이 직접 작곡했다고 확인된 것은 제1번 C장조와 제2번 D장조이다. 제1번 C장조는 200년 가까이 귀족의 문고나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던 것을 1961년 음악학자 플케르트가 프라하 국립 박물관에서 하이든 시대의 필사 악보에서 발견한 것이다. 제1번 C장조는 원숙기에 쓰여진 제2번과는 달리 바로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하이든의 초기작품이다. 제2번 D장조는 하이든의 콘체르토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슈만, 드보르작의 걸작들과 함께 3대 첼로 콘체르토라 불린다.
하이든은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전 부악장에 취임된 후 근 30년을 아이젠 슈타트에 있는 궁전에서 거주했다. 비록 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하이든 휘하에는 늘 일급 연주자들이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 안톤 크라프트였다. 하이든은 그의 조언을 받아 이 협주곡을 1783년에 작곡했는데,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교라든가, 또 첼로의 서정적 성격을 완전히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806년에 '작곡가의 원본에 의거하여'라는 주석을 달아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에 대한 논란이 오래 계속되었는데, 발설자는 다름아닌 크라프트의 아들 니콜라우스였다. 그러나 1953년 하이든의 친필 악보를 찾아냄으로써 의심이 풀렸고, 현재 원본은 빈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이든은 이 곡을 원래 작은 실내합주를 위해 썼는데, 이를 19세기 말에 지휘자이며 음악학자인 제베르가 관현악 편성으로 확대시키고 솔로 부분과 카덴차를 보완했다. 1960년대에는 장드롱이 원작에 좀 더 가깝게 수정하여 출판했는데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Arto Noras (1942~ , Finland)
로스트로포비치 이후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의 한 사람으로 평가 받는 아르토 노라스(핀란드, 1942~ )는 1966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를 발판으로 세계적인 연주자로 발돋움하였다. 베를린 필하모니, 빈 필하모니, 런던 심포니, BBC 관현악단, 모스크바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니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였고, 사실상 존재하는 첼로 연주곡 모두를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다. 핀란드 난타리 뮤직 페스티발을 창설하여 30년 동안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북유럽을 대표하는 실내악 연주단으로 만들었으며, 국제 파울로 첼로 콩쿠르를 출범시켜 세계적인 첼리스트들을 육성하고 있다. 현재 헬싱키 시벨리우스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주요 국제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단골로 출연하고 있다.
교향곡의 아버지 -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1809, Austria)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은 기악곡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는 화성적인 단선율 음악 구성에 크게 성공했고 2개의 대립되는 테마를 제시하여 그것을 발전시키고 다시 테마를 반복하는 소나타 형식을 완성시켰다. 8세 때 교회의 소년 합창 대원으로부터 그의 음악 생활은 시작되어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P. A. Esterhazy) 공작 가의 악장으로 30년간이나 있으면서 작곡에 전념하였다.
하이든은 자유의 몸이 된 후 58세 때에 독일 태생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영국에서 매니저를 하고 있는 잘로몬 (J. P. Salomon 1745-1815)의 초청을 받아 영국을 방문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6곡의 신작 교향곡을 발표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때 G장조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그 후 이것을 옥스퍼드 교향곡이라 부른다. 하이든은 다시 영국을 방문하여 6곡의 신작 교향곡을 연주했다. 모두 12곡의 교향곡을 일명 ‘잘로몬 교향곡’이라 하며 그 중에도 '놀람','군대','시계','큰북 연타' 등이 유명하다. 아무튼 영국에서의 그의 성공은 대단했으며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하이든 교향곡 제94번 G장조 '놀람' → <http://blog.daum.net/seonomusa/2648>
그는 오스트리아의 국가를 작곡하였으며 헨델의 메시아에 감명을 받아 오라토리오 '천지 창조', '사계' 등의 명작을 냈다.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 → <http://blog.daum.net/seonomusa/2857>
하이든은 모짜르트, 베토벤과 함께 빈 고전파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는 기악의 여러 분야를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교향곡만도 104개나 된다.
하이든이 평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에스테르하지 궁.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예술 후원자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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