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바르톡 / 현악4중주 2번 A 장조

박연서원 2012. 7. 20. 13:05

String Quartet No.2 in A major, Op.17/Sz.67

바르톡 / 현악4중주 2번 A 장조

Béla Bartók, 1881~1945


1악장 (Moderato)
Emerson String Quartet

 


2악장 (Allegro Molto Capriccioso)
Emerson String Quartet

 


3악장(Lento)
Emerson String Quartet

 


Bartok Quartet No. 2, 1st movement, Part 1
Ryan Shannon, violin; Lauren Cauley, violin; Sarah Poe, viola; Zach Preucil, cello

The Olympic Quartet



Bartok Quartet No 2, 2nd movement
Ryan Shannon, violin; Lauren Cauley, violin; Sarah Poe, viola; Zach Preucil, cello

The Olympic Quartet

 

 

현악4중주 제2번, Op.17

 

제2번은 1915년과 1917년 사이의 부다페스트에서 조금 떨어진 라코시케레스툴이라는 마을에서 씌여졌다. 그 곳에서 바르톡은 첫 번째 부인, 마리아와 헤어져 살고 있었다. 초연은 1918년 3월3일 부다페스트에서 발트바우어-케르페이 4중주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때는 그의 발레음악 "허수아비 왕자"의 초연이 있은 지 1년이 못 된 해였고 그의 오페라 "푸른 수염의 영주의 성"의 초연이 있기 두 달전이었다.

이 작품도 일반적인 대개의 작품들과는 다른 3악장의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이루는 음악외적 동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보통 빠르기의 1악장은 작곡가가 자신의 새로운 음악 어휘에 자신감과 여유로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쉬테펜 왈쉬(BBC방송의 음악 프로에 바르톡의 실내악을 소개한 바 있다)는 "우아함과 능수능란한 기교 간의 모차르트적 균형"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2 악장은 9/8박자와 6/8박자를 자유롭게 오간다. 서주부의 바이올린 동기는 세 개의 주요 주제 그룹을 갖는 소나타 형식으로 윤곽을 끊임없이 위협한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악장에서, 바르톡은 파괴를 위해 그의 음악적 언어를 두 개의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험한다.  2악장은 1911년에 씌여진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로 바르바로"로부터 내려오는 작품의 경향과 같은 선에 있는 론도이다.

이것은 "원시주의"적 감5도에 기초한 순환하는 서주적 동기로 되어 있으며, 지속저음으로 반복되는 내림 라음위에 단3도와 장3도가 서로 대조하면서 주제가 나온다. 에프소드는 확대되어 피치카토 반주와 함께 패로디 같은 달콤한 선율이 나온다. 그 후 론도 주제가 2/4박자에서 3/4박자로 바뀌어 재현되고 뒤이어 6/4박자의 빠른 프레스티씨모의 코다가 나온다.

3악장은 쓸쓸하고 황량한 느린악장이다. 이 것은 부분적으로 첫 악장의 아이디어에 기초하고 있지만 - 처음에 나오는 동기의 모양은 바이올린 선율의 단편과 순환되는 화성 진행으로 이루어진 베이스 선으로 되어있다 - 짧은 순간, 다시 단편들로 흩어지기 전, 극적인 결합이 이루어진다.

 

Béla Bartók, 1881~1945

 

헝가리의 작곡가. 어머니한테서 피아노의 기초 교육을 받고, 1893년부터는 피아노와 작곡을 라슬로 에르켈 Laszlo Erkel에게 배웠다. 이어서 에르뇌 도흐나니의 권유로 부다페스트 왕립 음악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리스트의 제자였던 이슈트반 토만 Istvan Thoman에게 피아노를, 야노슈 쾨슬레르 Janos Koessler에게 작곡을 배웠다.  1902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초기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바르톡은 1848년에 헝가리의 독립혁명의 영웅을 찬미한 교향시 코슈트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걷고 있던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랩소디 Sz 20,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부를레스크 Sz 28, 이어서 피아노를 위한 랩소디 Sz 26을 작곡했다. 1905년에는 파리에서 루빈스타인 콩쿠르에 참가했으나, 빌헬름 박하우스에게 우승을 빼앗겼다. 굴욕을 맛본 바르톡은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헝가리의 민족전승을 열심히 채집, 연구했다. 그는 코다이와 함께 동양의 유산과 서양의 유산을 결합시키려고 시도했다. 여기서의 서양의 유산은 화성적 감각에 관해서는 드뷔시, 대위법의 투명함에 관해서는 바흐, 그리고 형식에 관해서는 베토벤으로부터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부다페스트 왕립 음악아카데미의 교수가 된(1907) 바르톡은 피아노 교육법의 개량을 시도하여 학생들에게 조성의 혼합이나 마디줄의 상대성에 익숙케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1908년 6월의 10개의 쉬운 소곡 Sz 39로 시작하여, 1937년에 완성한 미크로코스모스 Sz 107에 이르는 일련의 교육적인 작품들이 태어나게 된다. 1908년에는 현악4중주곡 제1번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에는 바그너와 드뷔시의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여류 바이올린 주자 슈테피 가이너 Stefi Geyer는 그에게 영감을 주어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Sx 36이 완성되게 하였으며, 그 최초의 부분은 두 개의 초상 Sz 37의 제1곡에 전용되었다. 3개의 부를레스크 Sz 47에서는 그 두 번째 곡(허풍쟁이 Kicsit azottan)에서 건반 위에서 짓눌려진 꾸밈음의 그룹을 주요음 앞에 붙이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1910년에 바르톡은 슈트라우스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무렵 그는 엘렉트라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1909년 그는 치글러 마르타 Ziegler Marta와 결혼했으며 이듬해에 아들이 태어났다.

 

민요가 갖고 있는 선법적 서법과의 연관은 작곡가 바르톡에게 4개의 만가(輓歌) Sz 45의 착상을 얻게 했다. 이 곡은 장조, 단조의 선법조직의 전제(專制)를 전혀 알지 못하던 시기의 매우 오래된 노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11년은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로 바르바로 Sz 49라는, 충격적인 동성(動性)과 헝가리어의 자연스러운 운율을 특별히 사용한 최초의 오페라인 푸른 수염 공작의 성(城) Sz 48에 의해서 주목할 만한 해가 되었다. 이 푸른 수염 공작의 성은 헝가리의 수필가이며 민중적인 발라드나 민화 속에 그 진보적인 정치사상을 담으려 한 벨라 발라주 Bela Balazs와 바르톡의 협력이 낳은 최초의 매우 결실이 큰 결과이다. 바르톡과 발라주에 의한 이 오페라는 전통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 모든 창조자의 고독, 즉 무익한 지식을 갈망함으로써 사랑이라는 모든 재산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1913년 코다이와 바르톡은 아랍과 카빌리아의 노래를 200편이나 채집했고 몽고나 헝가리, 핀란드 지방의 민요까지도 채집했다. 당시 바르톡의 교육상의 의향은 그가 찾아낸 민족음악을 재창조하고 싶다는 희망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피아노를 위하여 동양의 춤곡 Sz 54와 루마니아의 민속 춤곡 Sz 56, 20개의 루마니아의 코린다(크리스마스 노래) Sz 57을 작곡했다. 성악곡으로는 9개의 루마니아 민요 Sz 59, 5개의 가곡 Sz 61과 Sz 63, 8개의 헝가리 민요 Sz 64 등을 통해 재창조를 시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그의 탐구의 길은 중단되었다. 당시의 바르톡은 현악4중주곡 제2번 Sz 67을 작곡하고 있었다.

 

전쟁 직후 바르톡은 신정부의 원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신정부는 편협한 민족주의 속에 움츠러들어 국가라는 테두리를 초월하려 한 그의 작품을 비난했다. 그 이후 바르톡은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재창조가 가능한 음악적 소재를 사용했다. 당시 그가 작곡한 극히 자유로운 형식에 따른 피아노곡 헝가리 농민의 노래에 의한 즉흥곡 Sz 74, 그리고 특히 두 곡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Sz 75와 Sz 76은 현재까지도 그 격렬함과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 부다 시와 페스트 시의 합병 5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서 그에게 작품이 위촉되었다.

 

무도 모음곡(1923)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것은 두 개의 아랍 춤곡과 한 개의 헝가리 춤곡, 한 개의 루마니아 춤곡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바르톡은 최후의 알레그로 악장에서 그러한 리듬과 선법의 특이성을 절묘하게 하나로 묶고 있다. 또한 1923년에는 아내와 헤어지고 디타 파스토리 Ditta Pasztory와 재혼했다. 그리고 그는 스카를라티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쳄발로 주제 등에 관해서 연구했고, 그의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Sz 83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1927년 7월 작곡자 자신에 의한 피아노 연주와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현악4중주곡 제3번 Sz 85가 필라델피아 콩쿠르에 입상하자 처음으로 미국여행을 경험했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랩소디 Sz 86과 Sz 89를 썼으며, 전자를 거장 요제프 시케티에게, 후자를 졸탄 세케이 Zoltan Szekely에게 각각 헌정했다.

 

1930년의 칸타타 프로파나에서 바르톡은 코린다(루마니아의 크리스마스 노래) 중에서 어떤 전설적 주제를 차용했다. 즉, 어떤 농부의 9명의 아들이 사슴으로 모습이 바뀌지만 결국에는 자유를 찾아낸다는 이야기이다.
이 주제는 노예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의 결여와 전쟁의 절망적인 악순환을 가져오는 굴종보다도 항상 희구해온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써야 할 필요성과 다시 생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래해야 할 필요성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있다. 그리고 1933년 바르톡은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한스 로스바우트 지휘, 작곡자 자신의 연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했다. 또한 에리히 되플라인 Erich Do‥flein의 요청에 따라서 여러 곡의 피아노곡을 두 대의 바이올린용으로 편곡하였다.

 

이 44개의 2중주곡 Sz 98은 바르톡에 의하면, 학생들이 민중음악의 자연스런 단순성, 그리고 그 리듬과 선율의 독자성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1935년 4월에는 콜리슈4중주단이 워싱턴에서 그의 현악4중주곡 제5번을 초연했다. 그 형식의 완전함, 팽팽한 표현주의, 그리고 리듬의 복잡한 대위법은 이 작품을 그의 실내악 창조의 정점에 올려 놓고 있다. 그리고 1936년에는 나치즘 대두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 위하여, 바르톡은 그의 작품이 유태인 작곡가들의 작품과 똑같은 운명(발행 및 연주 금지)을 받게 되기를 원했다.

 

그는 종종 스위스에 있는 친구인 지휘자 파울 자허를 찾아가서 휴식을 취했다. 이 친구의 요청에 따라 작곡된 것은 그의 2대 걸작인 현악기와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Sz 106 및 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 Sz 113이다.

 

이들 작품은 1937년과 1940년에 자허가 지휘하는 바젤 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터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는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 곡은 헌정을 받은 거장 졸탄 세케이의 희망에 따라서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의 형식을 취했으며 세케이와 멘겔베르크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1939년 4월에 초연되었다. 현악기,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과 병행하여 바르톡은 두 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Sz 110을 작곡했는데, 이것은 작곡자 자신과 그의 아내에 의해서 1938년 1월 바젤에서 초연되었다.

 

1939년 미국 여행 때 시게티를 알게 된 바르톡은 망명을 결심하고, 1940년 10월 8일 부다페스트에서 야노슈 프렌치크의 지휘로 최후의 연주회를 열게 된다. 그 후 뉴욕으로 건너가 콜럼비아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몇 차례 강연도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웠다. 그는 시게티, 재즈 클라리넷 주자인 베니 굿맨과 공연하는 콘서트를 몇 차례 열었고(클라리넷과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콘트라스트 Sz 111), Sz 110을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그의 건강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1943년에는 지휘자 쿠세비츠키의 위촉으로 보스턴 교향악단을 위해 협주곡을 작곡하여 1944년 12월에 초연했다. 또한 예후디 메뉴인의 의뢰로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Sz 117을 작곡했다. 이러한 것들이 성공을 거두자 많은 작곡 의뢰를 받게 되었다. 그는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거의 완성시키고, 윌리엄 프림로즈의 의뢰로 작곡 중이던 비올라 협주곡의 독주 파트의 스케치를 완성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일이었다. 이제 바르톡의 희망은 부다페스트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도 헛되이 그는 뉴욕의 웨스트사이드 병원으로 옮겨져서 1945년 9월 26일 그 생애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