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협주곡 1번 Op.23, Tonight We Love - Caterina Valente

박연서원 2012. 7. 18. 00:11

Piano Concerto No.1 in Bb minor, Op.23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협주곡 1번

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Op.23

 

이 작품은 민족주의적 낭만시대에 살았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가로서의 면모를 잘 들어내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처음부터 이 곡을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에게 헌정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1875년(35세) 2월에 이 곡을 완성하자 곧 그 초고를 들고 루빈시타인을 찾아갔다.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은 피아노의 거장으로 유명한 안톤 루빈시타인의 동생이며 형에 못지않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당시 차이코프스키가 몸담고 있던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이었는데,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은인이요 선배일 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이 곡을 시청하는 자리에는 동료교수인 후버트도 함께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당시 모스크바 악단의 중진인 이 두 사람에게서 좋은 평이 나오기를 기대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전기를 쓴 바 있는 카슈린은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악보 표지]에는 니콜라이에게 드리는 헌정사가 씌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의 성과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니콜라이에게서 큰 칭찬이 나올 것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니콜라이는 피아니스트도 아닌 차이코프스키가 이 곡을 씀에 있어서 자기에게 한 마디 의논도 하지 않은데 대해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으로 처음부터 적의와 편견으로 대했다.

 

그래서 루빈스타인은 이 곡이 피아노에는 부적당하다느니, 칙칙하다느니, 독창성이 없다느니 하면서 격렬하게 까내렸다. 차이코프스키는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루빈시타인의 충고에 애정과 진의가 깃들어 있었다면 차이코프스키도 그의 말을 경청하고 개작했을지도 모른다. 내성적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악보 하나라도 변경하지 않고 출판하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모처럼 썼던 헌정사를 찢어버리고, 얼마 전부터 알게된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그토록 친했던 두 사람 사이는 벌어지고 말았다. 이 곡은 뷜로에 의해 1875년 10월 25일 미국 보스턴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루빈시타인은 이 곡이 초연된 3년 후에 차이코프스키에게 사과하고 그 뒤로는 그 자신의 연주회에서 이 곡을 자주 연주함으로써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었다.

이 곡은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이 지적하여 말하였듯이, 피아노 독주부에 꽤 어려운 기교가 요구되고 있다. 물론 이 곡이 작곡된 그 때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피아니스트의 기교도 장족의 진보를 하고는 있으나 꽤 숙달된 피아니스트가 아니고서는 완전히 쳐내지 못한다. 특히 격렬한 춤곡 가락이 난무하는 제3악장에서 그렇다.

 

이 작품은 세련된 서구적 협주곡과 달리 러시아적인 어둡고 서정적인 선율과 슬라브적인 거칠고 중후한 화음, 색채적인 관현악,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솔로 피아노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엔 피아노 협주곡의 최고 인기작의 하나로 4년마다 열리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피아노 본선 지정곡으로 비르투오조적 피아니스트의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 되어왔다.

 

전곡 중 4개의 혼에 의해 유도되는 제1악장 도입부의 주제도 인상적이지만 독주 플루트에 의한 목가적인 제2악장 안단테 주제와 현에 의한 제3악장의 가요풍의 제2주제가 특히 아름답다.

 

악기편성 : 독주 피아노,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4, 트럼펫2, 트롬본 3, 팀파니,

                현악 5부


전곡 연속듣기 

 

Van Cliburn(1934- ), piano

Kirill Kondrashin, cond.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Recorded in 1962


Martha Argerich(1941- ), piano

Charles Dutoit(1934- ), cond.

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Recorded in 1975


Martha Argerich(1941- ), piano

Charles Dutoit(1934- ), cond.

(스위스)베르비에 페스티벌 ; 2014


1.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2. Andantino semplice - Prestissimo
3. Allegro con fuoco

Seong-Jin Cho(조성진), piano

Asher Fisch, cond.

Israel Philharmonic Orchestra

The Arthur Rubinstein Piano Master Competition (5/2014, Tel Aviv)


제1악장 b단조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3/4.

 


1.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1903~1989, 우크라이나출신 미국인)

 

4대의 호른이 제1주제의 동기를 느닷없이 도입하고 이윽고 독주 피아노의 요란한 화음을 뒤따르게 하면서 바이올린과 첼로가 호쾌하게 제1주제를 제시하여 간다. 곡은 고조되어 피아노의 카덴차로 옮겨가서 다시 제1주제가 피아노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재현, 전개된다. 그러나 제1주제의 악상은 이후에는 전개부에도 재현부에도 나타나지 않고 여기서 그만 모습을 감추고 만다. 극히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이다. 이어 피아노에 새로운 Allegro Con Spirito의 주제가 나타나고 기분을 새롭게 하면서 경과부로 들어간다. 이 주제는 전개부에서 활약하지만 재현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어 클라리넷이 약간 우수를 띤 Poco meno mosso의 제2주제를 제시하고 피아노가 반복한다. 이후 다시 부차 주제가 현으로 연주되고 관으로 전개되어 가는데 전개부나 코다에서 중요한 역할을 완수하는 듯한 악상이다. 전개부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추이한다. 또다시 피아노가 재현부를 도입하고 카덴차를 지나서 코다로 찬란하게 끝난다.


Sviatoslav Richter, piano

Herbert von Karajan, cond.

Wiener Symphoniker(Vienna Symphony Orchestra )

 

손열음, piano

정치용, cond.

크누아 심포니오케스트라

 

제2악장 Andantino Semplice D flat장조 6/8.

 


2. Andantino semplice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

 

세 도막 형식으로 제1부의 주제는 피치카토를 수반하는 플루트로 제시되고 피아노가 이 것을 받는다. 목가적인 아름다운 악상인 것으로 이후 다시 첼로, 오보에로 이어진다. 중간부는 프레스티시모로 바뀌어 수선스러운 랩소디 풍의 악상이 전개되는데, 다시 피아노가 제1부주제를 재현하여 제3부로 들어간다. 여기서 주제는 장식적으로 변주되고 있다.

 

Evgenij Kissin, piano

Herbert von Karajan, cond.

Berliner Philharmoniker

 

제3악장 Allegro con fuoco b flat단조 3/4.

 


3. Allegro con fuoco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

 

자유로운 론도 형식. 짧은 도입 뒤 피아노가 슬라브 풍의 선이 굵은 론도 주제 A를 연주한다. 이어지는 부주제 B는 바이올린 가요풍의 감미로운 악상으로 특징있는 리듬을 나타낸다. 이 론도는 이상 2개의 주제로 구성되고 부주제 C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 부주제 B는 코다의 앞에서 재현, 반복되는데 거기에서는 크게 솟아 오르면서 고조되어 이 호쾌하고 화려한 협주곡의 끝곡에 어울리는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Daniel Barenboim, piano

Zubin Mehta, cond.

Wiener Philharmoniker

 

Van Cliburn

 

1958년 미소의 냉전 시기에 소련으로 달려가 당당히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 곧 국민적인 영웅이 된 반 클라이번은 카네기홀에서 키릴 콘드라신과 연주회를 열면서 온 미국인의 가슴에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모든 음표를 새겼다. 23살의 정열과 패기 그리고 무한정 솟구치는 에너지와 현란한 테크닉은 가히 전율적이다.

 

1958년 구 소련에서 개최된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클 우승후 /

니키타 후르시초프(1894~1971)의 축하 영접을 받는 반 클라이번.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서 기초를 배우고 4세에 공개석상에서 연주했다는 그는 레벤트리트 콩쿠르 우승 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인정받지 못하다가 1958년 아직 국교가 없던 러시아에서 처음 개최된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젊은 거장으로서 일약 미국의 영웅적인 존재가 되었다.
스케일이 크고 서정과 낭만의 향기 높은 피아니즘을 보였지만 최근에는 연주활동에서 떠나 있다가 90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무렵부터 연주를 재개했다. 그 콩쿠르는 그를 기념하여 62년에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서 창설된 것이다.
출신교: 줄리어드 음악학교(로지나 레빈),

수상: 1954년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 제1위, 1958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제1위.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 (1903~1989)

 

러시아출신의 미국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1903-1989)라는 피아니스트가 20세기의 수 많은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고 그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 굉장히 극단적이고 편협한 비교가 되겠지만 음악가, 연주자로서의 호로비츠는 결코 리히터나 제르킨에 견줄만한 인물은 못 된다.

연주자로서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미국 청중들을 열광시켰던 호로비츠의 음악에는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게 또 어느 정도는 고의적으로, 당시 만연하고 있었던 미국식 상업주의의 영향이 깃들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이후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입김까지 호로비츠의 음악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전쟁 중, 혼란스러웠던 유럽대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호로비츠의 행운이었다면, 평생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펼쳤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호로비츠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호로비츠에 대한 찬사의 이면에는 항상 개운치 않은 그림자가 따라 다녔고 유명한 평론가인 마이클 션버그는 '악기에 대한 놀라운 재능이 음악적 이해와 항상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호로비츠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매스컴이나 대중의 관심도로 비추어 봐도 그를 능가할 인물은 찾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가 갖고 있는 독창적인 연주 스타일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투명하면서도 찬란한 음색, 그리고 다이내믹한 터치와 색채의 뉘앙스는 그만의 전매 특허였다.

특히 스크리아빈의 곡에서 보여 준 힘과 세기의 변화는 이 작곡가의 위대함을 온 세계에 알려 준 독보적인 것이었다.

호로비츠는 그 자체로서 극히 카리스마적인 존재였고 청중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으므로, 음악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그대로를 고스란히 보여주었을 뿐 자신의 음악이 상업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었다.

 

1930년대의 청중들에게는 거의 상상도 하기 힘든 정도임에 틀림없었던 놀라운 손가락 기교에 피아노 전체가 진동하는 듯 한 큰 음량, 여리고 서정적인 부분에서 흘러 나오는 티 없이 맑은 소리 등등 그에게는 청중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완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벨칸토야 말로 피아노 연주의 미학이다'라고 말하면서 레가토의 개념을 해석에 전용시키고 있어 힘이 넘치는 가운데서도 줄곧 노래를 부르는 듯한 유연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Tonight We Love

by Caterina Valente

 

 

 

Tonight we love while the moon beams down in dream light tonight.

오늘 밤 달빛이 꿈 속에 밝게 내리 비치는 동안 우리 사랑을 나누어요.

 

We touch the stars, love is ours. Night winds that sigh, embrace the sky.

우리가 별에 닿으니 사랑은 우리의 것이 되었죠. 산들거리는 저녁 바람이 하늘을 애워싸고 있네요.

 

Tonight we love in the glow that gleams so softly.

부드럽고 어슴프레 빛나는 타오는 불빛 속에서 오늘밤 우리 사랑을 나누어요.

 

I know This wasn't meant to borrow.

But tomorrow will it be gone or will it live on? Tonight we love.

난 알고 있어요. 그 사랑이 진실해야만 한다는걸 말에요..

하지만, 내일이면 사라지게 될지 계속 될런지는 모르지만, 오늘밤 우리 사랑을 나누어요.

 

Tonight we love in the glow that gleams so softly I know

부드럽고 어슴프레 빛나는 타오르는 불빛 속에서 오늘밤 우리 사랑을 나누어요. 난 알고 있어요.

 

This wasn't meant to borrow. But tomorrow will it be gone or will it live on? Tonight we love.

그 사랑이 진실해야만 한다는걸 말에요.

하지만, 내일이면 사라지게 될지 계속 될런지는 모르지만, 오늘밤 우리 사랑을 나누어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제1악장 편곡]

우리에게는 제비로 번안된 La Golondrina로 친숙하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라틴 음악이란 '라틴 아메리카 음악 Musica Latinoamericana'의 약어이다. 라틴 아메리카란 '라틴계의 민족에 의해 정복된 아메리카'라는 의미로, 앵글로 색슨 민족에 의해 개척된 '앵글로 아메리카' (미합중국)와 대응되는 말인 셈이다. 라틴인은 원래 로마인의 전신으로 이탈리아의 라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라틴인이라고 불리어졌다. 그 뒤 라틴인의 로마 정복에 의해 그들의 언어인 라틴어가 전 이탈리아에 퍼졌고 특히 로마제국의 건국과 더불어 유럽 각지에 미친 것이다. 중남미의 여러 나라는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라틴계 민족의 식민지였으므로 라틴 아메리카로 불리며, 그런 이유로 그 음악을 모두 라틴 아메리카 음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남미의 여러 나라 중엔 프랑스나 독일 또는 영국의 통치구역이 남아 있어서 스페인 ·포르투갈어 외에 불어나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라틴 음악을 분류할 때 나라의 명칭을 따서 부르는 예도 있다. 즉 아르헨티나 음악, 볼리비아 음악, 쿠바 음악 등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민속음악이나 특징있는 음악을 세분해서 말할 수 없으므로 각기 음악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라틴 음악은 각 나라에 따라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라틴 민족 특유의 기질을 살린 직선적이며 강렬한 자극을 주는 리듬 음악, 특히 무곡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라틴 음악의 주무기라 할 수 있는 리듬은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는 자연스런 충동의 움직임을 잘 이용하면서 음의 길이와 셈 여림에 의해 음악적 분위기를 만들어 나간다. 이 리듬이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동안에 사람의 심리는 리듬에 의해 음악으로 흡수되고 센 박과 여린 박에 의한 장단으로 자연스럽게 율동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리듬의 이런 원리를 생각한다면, 라틴 음악의 절정에 넘치는 리듬과 흥미에 찬 가무적인 분위기의 효과는 실로 육감적이고 직접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를 리듬 음악의 시대라고 하지만, 라틴 음악으로 상징되는 리듬 음악이 이미 오래 전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열광적인 유행의 물결을 탄 일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1954년에서부터 '60년대초에 이르는 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페레스 프라도 ·에드문도 로스의 맘보, 알프레드 하우제의 콘티넨탈 탱고, 해리 빌라폰테의 칼립소, 카테리나 발렌테 ·트리오 로스 판쵸스의 라틴 보컬 등 라틴 음악의 영감적인 리듬과 열정이 흥겹게 우리나라를 휩쓸던 시절은 라틴 음악이 무엇인지 어디의 음악인지 아랑곳없다는 듯, 우리는 춤을 추고 싶은 층동과 노래 부르고 싶은 자극에 의해 도취되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무렵, 라틴 보컬의 상징적인 존재는 누가 뭐래도 카테리나 발렌테였다. 그녀의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리카르도 산토스 오케스트라의 브래스 섹션과 타악기가 강렬한 인트로를 형성하고, 이어서 매끄러운 스트링의 흐름을 탄 카테리나 발렌테의 개성적인 목소리가 '라라라라'하고 활기차게 노래하는‥‥‥ 강렬한 정감에 넘치는 플라멩코 풍의 창법으로 스페인 말라가 지방의 매흑적인 아가씨들 '말라게니아 Malaguena'를 노래하는 카테리나 발렌테의 그 싱싱하고도 신선한 목소리, 고음부에서 저음부를 극히 자연스럽게 오가는 전이법의 기교라든가 특히 저음부에서의 번쩍이는 듯한 아름다움과 볼륨은 한 마디로 어떤 것과도 비길 수가 없는 천하일품이었다. 바로 그 솜씨에 의한 '산들바람과 나 The breez and I', '그라나다 Granada'의 격정에 넘쳐 흐르는 듯한 라틴 아메리칸 무드의 신선한 매혹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흘러간 시절의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다. 이처럼 카테리나 발렌테 하면 '라틴 음악의 여왕'이라고 가장 먼저 인상지어진다. '이스탄불 Istanble', '불의 키스 Kiss of fire'를 비롯한 수많은 라틴 음악 계열의 레퍼터리를 자랑하고 있는 그녀는 용모 자체도 매혹적이다. 등을 뒤덮은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가 마치 카르멘의 후예와 같은 강한 체취를 풍겨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국제적인 성가를 드높이는 가수로서 지극히 정통파의 길을 걸어왔다.

 

 

노래하는 통역'이라 일컬어지는 카테리나 발렌테는 1931년 1월 파리에서 이탈리아계 어머니와 스페인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자그만치 11남매 중 열번째 딸이었다. 카테리나 발렌테의 부모는 모두 연예인이었다. 아버지는 코미디언, 어머니 마리아 발렌테는 가수였기 때문에 카테리나 발렌테는 어렸을 때부터 별로 힘들이지 않고 운명의 손에 이끌려 노래의 세계로 간 듯하다. 카테리나 발렌떼가 연예 가족의 일원으로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은 5세 때, 그녀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무대에 올라 춤추고 노래하였다. 카테리나 발렌테의 귀염성스런 눈동자, 활기에 찬 춤, 비상한 노래 솜씨는 노래하는 귀여운 천사로서 순식간에 파리의 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소녀 카테리나 발렌테는 가족과 함께 독일·이탈리아·스페인·러시아 등지의 무대를 순회하면서 성장기를 보냈다. 가수들 중에서 어학의 천재라고 하면 곧 카테리나 발렌테가 연상되지만 영어·불어·독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 심지어 러시아어까지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국제적인 가수라는 의미에서 그녀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역 가수들 중에서는 비키나 나나 무스쿠리가 독어·불어·영어로 노래하지만, 라틴·샹송·재즈·팝송 등 각국의 히트곡을 그 나라 언어로 멋지게 불러 제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최초의 국제적 대중 가수로 카테리나 발렌테의 이름을 꼽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소녀 시절의 방랑의 예인 생활은 평생토록 그녀의 노래 생활 위에 비치는 화사한 태양의 축복이 되었다. 카테리나 발렌테의 육감적인 분위기에 넘치는 스페인풍의 창법, 델리커시한 향기 그윽한 샹송, 또 재즈 보컬의 멋진 필링 등 그녀의 풍부하고 빛나는 재능이야말로 노래하는 통역으로서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카테리나 발렌떼의 성공의 가도에는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어 그녀가 대스타가 되기까지에는 꽤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 그녀가 스톡홀름의 어느 작은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을 무렵, 이 이름 없는 나이트 클럽의 젊은 여가수를 당시 서독의 인기 밴드 리더였던 쿠르트 에델하겐이 발견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에델하겐 밴드의 전속가수가 되었고, 그무렵 서독 주둔 미군을 상대로 한 밴드의 위문공연에 참가하여 Gl들 앞에서 노래하며 춤추게 되었다. 그때 카테리나 발렌테는 23세, 바야흐로 꽃이 화려하게 만개된 나이로 Gl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마침내 레코드계의 프로포즈를 받기에 이르렀다. 1954년 그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 악단 리카르도 산토스와 콤비로 '말라게니아' '산들바람과 나' '그라나다' 등 일련의 라틴 음악을 노래한 레코드를 발표함으로써 마침내 독일 경음악단의 스타가 되었다. 원래 1950년대의 독일 경음악계는 아메리칸 재즈의 매력을 도입해서, 오래되고 독자적인 그들 자신의 음악 전통속에 새로운 감각을 채택하는 것을 특색으로 하고 있었다. 바로 이무렵에 등장한 카테리나 발렌테의 노래는 소위 클라식의 리트 Lied적인 스타일에서 샹송풍의 콘티넨탈한 무드, 전후 독일에서 널리 애호된 미국의 팝송적인 감각을 골고루 포함하는 폭넓은 영역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독일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카테리나 발렌테는 서독 대중 음악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남아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녀가 진정으로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라틴 아메리칸 무드로 '말라게니아'와 같은 스페인의 환상을 노래해서 그녀의 오른쪽에 설 만한 가수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데뷔곡 '말라게니아'가 미국에서 대히트한 것은 1955년, 그 뒤 영국의 데카 레코드로 이적, 여기서 또 하나의 대히트곡인 '정열의 꽃 Passion flower'을 1959년 여름에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인기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그녀는 28세, 인생의 원숙함이 감도는 한 사람의 여인을 노래하면서 전세계의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던 것이다. 강렬한 여인의 정염을 한평생을 통해 일관해 온 길고 긴 가수 생활, 카테리나 발렌테의 노래는 여전히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음을 느낀다.  '카테리나 발렌테, 나우 Caterina Valente, now'라는 타이틀 아래 수줍은 듯한 미소를 머금은 선한 초로의 여인의 모습, 그 것은 이미 예전의 미모를 잃어버린 여인 카테린나 발렌테였던 것이다. 라틴계 여성 특유의 육감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전성시대의 카테리나 발렌테의 미모가 강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만큼, 잔주름이 얼굴에 새겨져 어딘가 초췌하고 실제 나이보다 더욱 쇠잔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현실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황금의 시절 Goldne Tage'을 독일어로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역시 나이를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노래로써 일생을 관철해 온 여인의 보석과 같은 존귀함이 넘쳐흐르는 것이 아닌가. 카테리나 발렌테는 아직은 과거의 페이지 속에 갇혀버릴 여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