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음악감상실

로시니 / 윌리암 텔 서곡

박연서원 2012. 3. 16. 21:04

Overture to 'Wilhelm Tell'

로시니 / 윌리엄텔 서곡

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

 

 

전곡 감상 (11:49)

 

Fritz Reiner, cond.

Chicago Symphony Orchestra

 

Herbert von Karajan, cond.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Overture to 'Wilhelm Tell' (GuillaumeTell Overture)

<윌리엄 텔 서곡> - 로시니 작곡 (1829)

 

 

게으름뱅이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 < 윌리엄 텔>

윌리엄 텔은 자기 어린 아들을 저 멀리 세워 놓고는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 그것을 과녁 삼아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는 스위스의 한 독립투사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이다.

 

작자는 베토벤의 <제9교향곡> 합창에 사용된 시 '환희에 부쳐'를 쓴 실러이다.
로시니는 <윌리엄 텔>을 쓰는데 그로서는 이례적으로 9개월이나 걸렸다.

집필은 프랑스 파리에서 했고 초연도 그 곳 오페라좌에서 했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때 그의 나이 38세. 그 것을 끝으로 그는 오페라 작곡의 붓을 꺾어버리고 말았다.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내가 오페라를 한참 쓸 때는 멜로디가 먼저 떠오르면 그 것을 따라가면서 그저 적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 멜로디를 찾아다녀야할 때가 되었지요. 아시다시피 나는 형편없는 게으름뱅이입니다. 내 쪽에서 찾아나선다는 것은 영 귀찮은 일이죠. 그래서 오페라 작곡을 집어치운겁니다. 알아들으시겠어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는 오페라 "이탈리아의 터키인", 유명한 "세빌리아의 이발사", "체네켄톨라(신데렐라)", "호상의 미인", "세미 라미데", "코린트의 포위"등을 작곡했다.

속설에 의하면 로시니는 매우 나태했기 때문에 일찍 악단으로부터 은퇴했다고도 전해진다.

어떤 영국 평론가는 일찌기 로시니에 대해서 "게으름뱅이 작곡가"라고 불렀다.

 

"그는 음악을 침대에서 작곡하고, 속세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고 식탁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어서 중년기에 들어서자 바로 악단을 은퇴했다"고 논평했다.

로시니의 이러한 비평과 같이 대단한 미식가였다는 것은 전기에도 남아있다. 젊을 때부터 무엇이든 배부르게 먹고 마셨다. 그리고 자기의 술창고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특히 그는 볼로냐의 산물을 즐겼다고 한다. 파리에서 살고 있을 때 그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고향의 친구들이 그에게 가끔 보내주는 여러가지 종류의 치즈나, 햄, 소시지였다. 로시니에게서는 세상의 어떤 훈장이나 지위보다도 훨씬 고마운 것이었다.

 

1829년 로시니가 38세때 최후의 오페라 "윌리엄 텔"을 완성하여 파리에서 초연, 대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훈장이 수여되고, 그 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되돌아가 오페라 작곡의 구상을 했으나 결국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 오페라의 작곡은 하지 않았으나 20여년 만에 칸타타나 소품의 작곡을 했다.

61세경 정신착란 상태가 되고, 치료를 위해서 각지의 온천으로 갔다.

잠시 소강 상태를 얻어 72세 만년의 최대의 걸작 "작은 장엄 미사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이듬해 완성을 보고 다시 소품의 작곡을 시작했다.

 

1868년 77세의 축하가 끝난 후 잠시 병상에 눕게 되고 11월 13일에 사망했다.

그의 사진을 보면 매우 뚱뚱하다. 이 것은 미식 때문이었다고 여겨지며 그는 77세까지 장수했다. 그의 아버지도 80세까지 장수했던 것으로 보아 유전적인 장수의 가계였던것 같다.

 

그가 만년 10년간에 쓴 작품의 수는 186곡에 이르고, 그 것들은 "노인의 죄" 라는 제목밑에 총괄되어 있다.

그 중에는 장난기가 가득하고 음식의 이름을 붙인 것도 많다. 식후에 나오는 과자나 과일 이름만을 붙인 소곡으로 된 피아노 소품집이나 오드블의 이름이 붙여진 소곡뿐인 소품집도 있다.

 

1. 윌리엄 텔 서곡

 

 

서곡이란..

서곡은 오페라 또는 발레의 막이 오르기 전에 연주하는 음악으로 줄거리나 분위기를 암시하기도 하며 독립된 악곡으로 표제 음악적인 요소를 지닌 것도 있다.
서곡은 17세기 초 오페라 초기의 단지 팡파르 정도의 짧은 기악곡에서부터 시작되어

1632년 로마악파의 스테파노 란디(Stefano Landi)의 서곡을 선구로 하여 칸초나풍 서곡이 성립.

1658년에 프랑스의 륄리가 쓴 <프랑스풍 서곡>에서 쓰인 '느리게-빠르게-느리게'로 된 형식은 오페라보다는 주로 모음곡의 서곡 형식으로 널리 쓰였고, 17세기 말경 이탈리아의 스카를라티가 자신의 작품에 사용한 '빠르게-느리게-빠르게'와 같은 이탈리아풍 서곡은 신포니아(Sinfonia)라고 하며 고전파시대에 이르러 교향곡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2. 윌리엄 텔 서곡의 형식

 

형식적으로는 새벽-폭풍우-고요함-스위스 군대의 행진의 4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부 새벽(Dawn) - Andante 마단조 3/4박자

 

첼로의 독주로 시작되며 첼로 5중주가 주된 악기이다. 스위스 산간의 온화하고 신비스러운 새벽이 묘사된다. 강압 정치 아래에 있는 스위스에 조용히 여명이 찾아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2부 폭풍우(Storm) - Allegro 2/2박자

 

현악기로 시작하여 모든 악기가 다 동원된다.

팀파니, 플루트의 소리가 강한 인상을 준다.

휘몰아치는 폭풍이 묘사되고, 이는 폭정에 항거하는 애국 지사들의 투쟁을 상징한다.

 

3부 고요함(Calm) - Andante 사장조 3/8박자

 

잉글리시 호른으로 시작된다. 목동의 아름다운 피리 소리를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하여 스위스에 찾아온 평화를 상징한다.

 

4부 스위스 군대의 행진(Finale) - Allegro vivace 마장조 2/4박자

 

트럼펫의 우렁찬 소리에 이어 금관 악기가 서주를 마치면 화려한 리듬의 행진곡이 시작된다. 평화를 가져온 스위스 군의 행진과 민중의 끝없는 환희의 모습을 묘사한다.

 

Part 1 (1-2부)

Mark Elder, cond

Hallé Orchestra

 

Part 2 (3-4부)

Mark Elder, cond

Hallé Orchestra

 

로시니 [ Gioacchino Antonio Rossini ] (1792~1868, 이탈리아)

파일:Rossini-portrait-0.jpg

 

주요작품 : 가극 「비단 사다리」 서곡

                가극 「알제리의 여인」

                가극 「세빌리아의 이발사」

                가극 「도둑 까치」 서곡

                가극 「세미라미데」

                가극 「윌리엄 텔」

                       「슬픔의 성모」

 

낭만파 가극의 큰 깃발을 재빨리 이탈리아에서 내건 로시니는, 밝고 기지에 찬 음악에다 아름다운 가락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오늘날에도 크나큰 감흥을 남기고 있다.
로시니는 1792년 2월 29일 이탈리아의 피사로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도시 도살장의 감독관이자 또 지방극장의 트럼펫 주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10세 때 양친을 도와서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프리넷티에게 하프시코드를, 안젤로 테세이에게 창법과 화성을 배웠다. 15세 때는 볼냐로에 있는 리세오 음악원의 마티 대위법 교실에 들어가 별도로 첼로를 배웠다. 그리고 조그만 가극이지만 「데메트리오」라는 곡을 작곡했으며, 그리고 이듬 해에는 칸타타로 상패를 받았다.
18세 때의 작품인 1막의 희가극 「라캄비알레 디 마트리모니오(약혼 어음)」는 베네치아에서 상연되어 로시니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어서 「탄크레디」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 상연됨에 따라 로시니의 이름은 이탈리아 전국에 퍼지고, 그 가극은 대단한 속도로 보급되어 갔다. 로시니의 최대 걸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1816년 2월20일에 로마에서 상연, 같은 해의 12월 4일에는 「오텔로」가 나폴리에서 상연되었는데, 이들 가극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져서 마침내는 빈에까지 전해졌다.
당시 베토벤은 46세로, 제9교향곡 작곡에 착수하려 하던 시대로서, 그 명성은 빈은 물론 전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빈 사람들이 열광하는 로시니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베토벤의 연주회가 로시니의 가극에 압도되었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으니, 얼마나 로시니의 음악이 당시의 빈 사교계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1823년 로시니는 파리를 거쳐서 런던에 갔으며, 이듬해까지 영국에 머물다가 파리로 돌아갔는데, 런던에서는 17만 5천 프랑의 큰 돈을 벌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탈리아 극장 총지배인으로 취임했다.
「윌리엄 텔」은 1829년 파리에서 상연했으며, 왕궁과 시민이 통틀어 열광했던 프랑스에서의 성공은 빈에서의 성공 이상의 것이었다고 한다.
「슬픔의 성모(스타바트 마테르)」는 1842년에 완성, 이듬해 1월 7일에 파리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로시니의 건강은 쇠약해졌고, 1855년 파리로 옮기고부터는 차츰 나빠지더니 1868년 11월 13일 파리에서 타계했다.
가극 38개, 칸타타 15개 등 성악곡이 대부분이고, 기악곡은 적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윌리엄 텔 서곡」은 교향곡으로서도 훌륭하다.

윌리엄은 스위스 독립을 위해 힘쓴 사람으로 이 사람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곡이 윌리엄 텔 서곡으로 로시니 '최후의 오페라'이다. 오페라의 개막 전에 연주되는 서곡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곡이기도 하고,  묘사적이며 극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