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joy]석탄 나르던 길, 이젠 들꽃만 자욱
화절령-만항재 운탄길 20km
화절령∼만항재 걷기
강원 정선 영월의 백운산(1426m), 함백산(1573m) 자락은 시커먼 구멍투성이다. 바람이 불면 그 구멍으로 진한 속울음을 운다. 석탄 캐던 갱도가 개미굴처럼 뚫려있다. 전쟁 때 무차별로 기관총 맞은 자국 같다. 산을 도마에 놓고 잘게 썰면, 구멍 숭숭 뚫린 연밥이 된다. 불을 때면 ‘빨갛게 달아오른 19공탄’이 된다.
‘오래 퇴적되어 석탄처럼 시커메진/연밥 한 덩이, 땅 밑이 얼마나 추웠으면/그렇게도 많은 구멍을 지니게 된 걸까’(김선우 ‘연밥 속의 불꽃’ 중에서)
산허리에는 아직도 여기저기 검버섯이 피어 있다. 검은 버력더미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한때 천장을 떠받쳤던 갱목들은 넉장거리로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그 사이에 푸른 나무들이 뿌리를 박고 서있다. 연초록 풀들이 검은 흙을 덮고 있다. 이젠 ‘검은 민들레’는 없다. 샛노란 민들레꽃들이 보란 듯이 생글거린다.
사람들은 모두 떠났지만, 나무와 풀들은 그 자리를 억세게 지키고 있다. 검은 땅에서 어떻게 그런 눈부신 잎사귀를 틔울까? 검은 즙을 마시며 어떻게 노랑 보라 꽃을 피울까? 나무들은 진폐증에 걸리지 않을까? 풀들은 허파꽈리가 무한대일까?
폐광에선 침출수가 진물처럼 흘러나온다. 그 진물은 일단 자연정화시설에 모여 걸러진다. 부들 같은 풀들이 독성을 중화시킨다. 직사각형의 시멘트 정화시설은 거무튀튀한 쇳물자국으로 얼룩졌다. 중금속 진액이 시멘트바닥에 누런 가래처럼 가라앉아 있다.
백운산 함백산 일대 ‘석탄 운반길(운탄길·運炭路)’은 80여 km(해발 평균 960m)나 된다. 시커먼 트럭들은 그 길로 석탄을 실어 날랐다. 도시인들은 구멍연탄으로 한겨울을 보냈다. 광원들은 그 연탄 위에 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검은 가래를 걸러냈다.
운탄길은 평탄하다. 하지만 강 하류처럼 구불구불하다. 구렁이가 햇볕을 늘어지게 쬔 뒤, 느릿느릿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도 ‘아라리∼ 아라리∼’ 뱅뱅 돌아 그 자리이다.
화절령∼만항재 운탄길(20km)은 하늘길이다. 해발 1200m가 넘는다. 백운산 함백산 어깻죽지를 지르밟고 가는 구름길이다. 느릿느릿 걸어도 6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이원 카지노, 하이원 콘도, 하이원 골프장을 끼고 빙 돌아간다. 새벽안개가 자욱할 때 걸어야 제맛이다. 안개가 발아래 골짜기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다. 문득 아침햇살이 비치면 발아래 첩첩 산들이 죽 늘어서 있다.
하이원 카지노 골프장도 원래 광산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몇몇 기념물로 남겨둔 옛 탄광시설들을 빼놓곤 거의 흔적이 없다. 감쪽같다. 서울 난지도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것과 같다. 도시인들은 이곳에 와서 ‘쥐 난 머리’를 식히고 간다.
화절령(花折嶺)은 ‘꽃을 꺾는 고개’이다. 이름이 꽃처럼 예쁘다. 옛날 봄이 되면, 지천으로 핀 진달래 철쭉꽃을 꺾으러 너도나도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달래 철쭉꽃이 그리 많지 않다. 그 대신 철따라 온갖 들꽃들이 피고 진다. 요즘엔 노란 양지꽃과 산괴불주머니꽃이 곳곳에 눈에 띈다.
화절령 삼거리 부근엔 도롱이와 아롱이 연못이 있다. 산 밑 석탄갱이 무너져 생긴 습지이다. 지름이 얼추 80∼100m쯤 될까. 산 아래 땅이 꺼지자, 위쪽 땅도 움푹 들어가 연못이 된 것이다. 당시 거기에 살던 키 큰 나무들도 뿌리가 들떠서 죽었다. 죽은 나무들은 병풍처럼 서 있거나, 늪 속에 그대로 누워 있다. 오래된 흑백사진이다.
도롱이 아롱이 연못엔 도롱뇽이 산다. 새벽이나 늦은 밤엔 노루 멧돼지 사슴이 목을 축이고 간다. 옛날엔 광원 부인들이 이곳에 와서 남편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도롱뇽이 많이 보이면 길조로 여겼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날엔 애간장을 태웠다.
운탄길은 호젓하다. 솔바람이 솔솔 분다. 길가엔 참나무가 터널을 이뤘다. 간혹 전나무가 껑충하게 서있다. 흙길 위엔 솔잎이 쌓여 푹신하다. 오르내리막이 거의 없어 편안하다. 뻐꾸기 소리가 아득하다. 이 산에서 “뻐꾹! 뻐뻐∼꾹!” 저 산에서 “뻐꾹! 뻐뻐∼꾹!” 먼 듯 가까운 듯, 귀에 잡힐 듯 말 듯, 이 골짜기인 듯 저 골짜기인 듯, 혼이 스르르 나간다. 아무래도 저승 어디에서 우는가 보다.
만항재(1330m)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이다. 지리산 정령치(1172m)나 강원 평창∼홍천의 운두령(1089m)보다 높다. 태백시-정선고한-영월상동이 만나는 삼거리고개이다. 한밤 만항재에 오르면 하늘의 별들이 우박처럼 이마에 박혀 온몸이 시리다.
만항재 산자락은 들꽃 천지다. 철따라 200여 종이나 되는 야생화가 피고 진다. 여름에 피는 것만 60여 종. 8월엔 야생화 축제가 열린다. 만항재 야생화쉼터(010-4708-7657)를 운영하는 심경숙 씨(49)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터줏대감. 옥수수막걸리와 감자전(사진) 도토리묵 등을 팔며 만항재를 지켜왔다.
“탄광이 잘나갈 때는 개도 1000원짜리 주면 안 물고 간다고 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비록 맑을 땐 검은 탄가루로 온 세상이 시커멓고, 비가 오면 땅이 ‘검은 죽탄’으로 발이 푹푹 빠져 장화를 신고 다녔지만, 그래도 돈이 많이 돌 때가 좋았다. 초등학교도 2부제 수업을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1980년대 말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초등학교도 점점 아이들이 줄더니 지금은 아예 흔적 없이 사라진 곳도 있다. 남아있는 곳도 아이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탄광마을 아이들은 검은 나라에서 살았다. 검은 운동장에서 검은 공을 차며 놀았다. 검은 얼굴에 하얀 이를 깔깔대며 술래잡기를 했다. 여자아이들은 검은 신발을 신고, 검은 고무줄놀이를 했다. 아버지는 늘 검은 페인트 옷을 입고 새벽같이 일하러 나갔다. 탄광 입구엔 ‘아빠, 오늘도 무사히’라고 써 있었다.
‘처음 사북으로 이사 오던 날/나는 검정나라에 온/기분이었어요./물도 시커멓고/지붕도/건물도/아니, 아저씨들의 얼굴도/처음 사북에 이사 오던 날/나는 그만/빙그레 웃어버렸죠.’(사북초등학교 6학년 이아영 동시 ‘이사 오던 날’)
‘나는 지옥이/어떤 곳인 줄/알아요./좁은 길에다/모두가 컴컴해요./오직/온갖 소리만/나는 곳이에요.’(사북초등학교 6학년 노영민 동시 ‘막장’)
그 후 20여 년. 이제 검은 먼지 풀풀 나던 운탄길은 보물 길이 됐다. 검은 흙길은 비와 바람에 씻기고, 풀들이 돋아 ‘푸른 하늘 길’이 됐다. 온갖 야생화가 피고 진다. 노란 송홧가루가 풀풀 날린다. 마음이 강같이 평안하다. 뭉게구름이 휙휙 머리 위로 비껴 지난다. 하얀 층층나무 꽃이 층층으로 피어 있다. 은방울꽃 금낭화가 주저리 피었다. 산자락 하얀 찔레꽃에 벌들이 잉잉거린다.
만항재∼하이원 골프장(10km) 운탄길은 요즘 산림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검은 흙을 황토로 덧씌운 뒤 그곳에 나무를 심는다. 땅속에서 골짜기로 토해낸 검은 흙더미는 축대 위로 말끔하게 걷어 올린다. 멀리서 보면 황토 흙과 검은 흙이 켜켜로 쌓인 시루떡 같다.
만항재(1330m)에서 하이원 골프장(1340m)에 이르는 운탄길은 표고차가 10m밖에 되지 않는다. 길 아래 수많은 봉우리들이 첩첩으로 눈에 겹친다. 길섶엔 야생화 천지다. 한마디로 꽃구름길이나 마찬가지다.
이 길은 6월 14일 열리는 하이원국제트라이애슬론대회 마라톤코스이기도 하다. 대한체육회 태백분촌에서 하이원골프장까지 마지막 20km의 숲 속 흙길을 달린다. 맑은 공기와 길 아래 아득히 먼 마을을 내려다보며 숨을 고른다. 천상의 크로스컨트리 코스라고 할 수 있다.
해발 0m인 삼척해수욕장에서 수영(3km)을 끝낸 선수들은 사이클을 타고 해발 1330m인 태백선수촌까지 80km 오르막을 달려야 한다. 아무리 철인들이지만 심장이 터지고 근육이 찢길 만한 죽음의 코스다.
하지만 선수들은 마지막 마라톤 숲길에서 평안을 얻는다. 새소리 바람소리와 풀 나무냄새에 피로를 잊는다.
석탄은 수십억 년 전 나무와 풀 그리고 동물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캐내 연료로 썼고, 바닥이 나자 하나 둘 떠났다. 그러나 나무와 풀은 그곳에 뿌리를 박고 다시 생명의 씨앗을 뿌렸다. 사람들도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운탄길은 이제 초록의 길, 생명의 길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트래킹 정보|
▽교통 △버스=서울동서울터미널 서울∼고한(1시간 간격, 3시간 소요) ▽승용차=서울∼영동고속도로∼진부나들목∼정선∼사북∼고한, 서울∼영동고속도로∼장평나들목∼평창∼정선∼사북∼고한, 서울∼영동고속도로∼새말나들목∼안흥∼평창∼정선∼사북∼고한
▽먹을거리=고한 생고기전문 낙원회관. 곁들이로 나오는 된장국수도 맛있다.(033-591-1700). 고한시장통의 한우전문 OK식당(033-591-8989).
▽가볼 만한 곳=정암사(淨巖寺). 광원들이 힘들 때마다 찾던 곳. 단아하고 정갈하다. 요란스럽지 않아 좋다. 아늑하고 소박하다. 부처님 정골 사리를 절 뒤편 수마노탑에 모신 곳이라 법당에 불상이 없다.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 법흥사와 함께 5대 적멸보궁의 하나. 천연기념물 열목어 서식지 남방한계지역이기도 하다. 자장율사의 지팡이가 싹을 틔웠다는 주목(1300년)도 있다.
산허리에는 아직도 여기저기 검버섯이 피어 있다. 검은 버력더미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한때 천장을 떠받쳤던 갱목들은 넉장거리로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그 사이에 푸른 나무들이 뿌리를 박고 서있다. 연초록 풀들이 검은 흙을 덮고 있다. 이젠 ‘검은 민들레’는 없다. 샛노란 민들레꽃들이 보란 듯이 생글거린다.
사람들은 모두 떠났지만, 나무와 풀들은 그 자리를 억세게 지키고 있다. 검은 땅에서 어떻게 그런 눈부신 잎사귀를 틔울까? 검은 즙을 마시며 어떻게 노랑 보라 꽃을 피울까? 나무들은 진폐증에 걸리지 않을까? 풀들은 허파꽈리가 무한대일까?
폐광에선 침출수가 진물처럼 흘러나온다. 그 진물은 일단 자연정화시설에 모여 걸러진다. 부들 같은 풀들이 독성을 중화시킨다. 직사각형의 시멘트 정화시설은 거무튀튀한 쇳물자국으로 얼룩졌다. 중금속 진액이 시멘트바닥에 누런 가래처럼 가라앉아 있다.
백운산 함백산 일대 ‘석탄 운반길(운탄길·運炭路)’은 80여 km(해발 평균 960m)나 된다. 시커먼 트럭들은 그 길로 석탄을 실어 날랐다. 도시인들은 구멍연탄으로 한겨울을 보냈다. 광원들은 그 연탄 위에 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검은 가래를 걸러냈다.
운탄길은 평탄하다. 하지만 강 하류처럼 구불구불하다. 구렁이가 햇볕을 늘어지게 쬔 뒤, 느릿느릿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도 ‘아라리∼ 아라리∼’ 뱅뱅 돌아 그 자리이다.
화절령∼만항재 운탄길(20km)은 하늘길이다. 해발 1200m가 넘는다. 백운산 함백산 어깻죽지를 지르밟고 가는 구름길이다. 느릿느릿 걸어도 6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이원 카지노, 하이원 콘도, 하이원 골프장을 끼고 빙 돌아간다. 새벽안개가 자욱할 때 걸어야 제맛이다. 안개가 발아래 골짜기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다. 문득 아침햇살이 비치면 발아래 첩첩 산들이 죽 늘어서 있다.
하이원 카지노 골프장도 원래 광산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몇몇 기념물로 남겨둔 옛 탄광시설들을 빼놓곤 거의 흔적이 없다. 감쪽같다. 서울 난지도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것과 같다. 도시인들은 이곳에 와서 ‘쥐 난 머리’를 식히고 간다.
화절령(花折嶺)은 ‘꽃을 꺾는 고개’이다. 이름이 꽃처럼 예쁘다. 옛날 봄이 되면, 지천으로 핀 진달래 철쭉꽃을 꺾으러 너도나도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진달래 철쭉꽃이 그리 많지 않다. 그 대신 철따라 온갖 들꽃들이 피고 진다. 요즘엔 노란 양지꽃과 산괴불주머니꽃이 곳곳에 눈에 띈다.
화절령 삼거리 부근엔 도롱이와 아롱이 연못이 있다. 산 밑 석탄갱이 무너져 생긴 습지이다. 지름이 얼추 80∼100m쯤 될까. 산 아래 땅이 꺼지자, 위쪽 땅도 움푹 들어가 연못이 된 것이다. 당시 거기에 살던 키 큰 나무들도 뿌리가 들떠서 죽었다. 죽은 나무들은 병풍처럼 서 있거나, 늪 속에 그대로 누워 있다. 오래된 흑백사진이다.
도롱이 아롱이 연못엔 도롱뇽이 산다. 새벽이나 늦은 밤엔 노루 멧돼지 사슴이 목을 축이고 간다. 옛날엔 광원 부인들이 이곳에 와서 남편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도롱뇽이 많이 보이면 길조로 여겼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날엔 애간장을 태웠다.
운탄길은 호젓하다. 솔바람이 솔솔 분다. 길가엔 참나무가 터널을 이뤘다. 간혹 전나무가 껑충하게 서있다. 흙길 위엔 솔잎이 쌓여 푹신하다. 오르내리막이 거의 없어 편안하다. 뻐꾸기 소리가 아득하다. 이 산에서 “뻐꾹! 뻐뻐∼꾹!” 저 산에서 “뻐꾹! 뻐뻐∼꾹!” 먼 듯 가까운 듯, 귀에 잡힐 듯 말 듯, 이 골짜기인 듯 저 골짜기인 듯, 혼이 스르르 나간다. 아무래도 저승 어디에서 우는가 보다.
만항재(1330m)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이다. 지리산 정령치(1172m)나 강원 평창∼홍천의 운두령(1089m)보다 높다. 태백시-정선고한-영월상동이 만나는 삼거리고개이다. 한밤 만항재에 오르면 하늘의 별들이 우박처럼 이마에 박혀 온몸이 시리다.
만항재 산자락은 들꽃 천지다. 철따라 200여 종이나 되는 야생화가 피고 진다. 여름에 피는 것만 60여 종. 8월엔 야생화 축제가 열린다. 만항재 야생화쉼터(010-4708-7657)를 운영하는 심경숙 씨(49)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터줏대감. 옥수수막걸리와 감자전(사진) 도토리묵 등을 팔며 만항재를 지켜왔다.
“탄광이 잘나갈 때는 개도 1000원짜리 주면 안 물고 간다고 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 비록 맑을 땐 검은 탄가루로 온 세상이 시커멓고, 비가 오면 땅이 ‘검은 죽탄’으로 발이 푹푹 빠져 장화를 신고 다녔지만, 그래도 돈이 많이 돌 때가 좋았다. 초등학교도 2부제 수업을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1980년대 말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초등학교도 점점 아이들이 줄더니 지금은 아예 흔적 없이 사라진 곳도 있다. 남아있는 곳도 아이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탄광마을 아이들은 검은 나라에서 살았다. 검은 운동장에서 검은 공을 차며 놀았다. 검은 얼굴에 하얀 이를 깔깔대며 술래잡기를 했다. 여자아이들은 검은 신발을 신고, 검은 고무줄놀이를 했다. 아버지는 늘 검은 페인트 옷을 입고 새벽같이 일하러 나갔다. 탄광 입구엔 ‘아빠, 오늘도 무사히’라고 써 있었다.
‘처음 사북으로 이사 오던 날/나는 검정나라에 온/기분이었어요./물도 시커멓고/지붕도/건물도/아니, 아저씨들의 얼굴도/처음 사북에 이사 오던 날/나는 그만/빙그레 웃어버렸죠.’(사북초등학교 6학년 이아영 동시 ‘이사 오던 날’)
‘나는 지옥이/어떤 곳인 줄/알아요./좁은 길에다/모두가 컴컴해요./오직/온갖 소리만/나는 곳이에요.’(사북초등학교 6학년 노영민 동시 ‘막장’)
그 후 20여 년. 이제 검은 먼지 풀풀 나던 운탄길은 보물 길이 됐다. 검은 흙길은 비와 바람에 씻기고, 풀들이 돋아 ‘푸른 하늘 길’이 됐다. 온갖 야생화가 피고 진다. 노란 송홧가루가 풀풀 날린다. 마음이 강같이 평안하다. 뭉게구름이 휙휙 머리 위로 비껴 지난다. 하얀 층층나무 꽃이 층층으로 피어 있다. 은방울꽃 금낭화가 주저리 피었다. 산자락 하얀 찔레꽃에 벌들이 잉잉거린다.
만항재∼하이원 골프장(10km) 운탄길은 요즘 산림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검은 흙을 황토로 덧씌운 뒤 그곳에 나무를 심는다. 땅속에서 골짜기로 토해낸 검은 흙더미는 축대 위로 말끔하게 걷어 올린다. 멀리서 보면 황토 흙과 검은 흙이 켜켜로 쌓인 시루떡 같다.
만항재(1330m)에서 하이원 골프장(1340m)에 이르는 운탄길은 표고차가 10m밖에 되지 않는다. 길 아래 수많은 봉우리들이 첩첩으로 눈에 겹친다. 길섶엔 야생화 천지다. 한마디로 꽃구름길이나 마찬가지다.
이 길은 6월 14일 열리는 하이원국제트라이애슬론대회 마라톤코스이기도 하다. 대한체육회 태백분촌에서 하이원골프장까지 마지막 20km의 숲 속 흙길을 달린다. 맑은 공기와 길 아래 아득히 먼 마을을 내려다보며 숨을 고른다. 천상의 크로스컨트리 코스라고 할 수 있다.
해발 0m인 삼척해수욕장에서 수영(3km)을 끝낸 선수들은 사이클을 타고 해발 1330m인 태백선수촌까지 80km 오르막을 달려야 한다. 아무리 철인들이지만 심장이 터지고 근육이 찢길 만한 죽음의 코스다.
하지만 선수들은 마지막 마라톤 숲길에서 평안을 얻는다. 새소리 바람소리와 풀 나무냄새에 피로를 잊는다.
석탄은 수십억 년 전 나무와 풀 그리고 동물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캐내 연료로 썼고, 바닥이 나자 하나 둘 떠났다. 그러나 나무와 풀은 그곳에 뿌리를 박고 다시 생명의 씨앗을 뿌렸다. 사람들도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운탄길은 이제 초록의 길, 생명의 길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트래킹 정보|
▽교통 △버스=서울동서울터미널 서울∼고한(1시간 간격, 3시간 소요) ▽승용차=서울∼영동고속도로∼진부나들목∼정선∼사북∼고한, 서울∼영동고속도로∼장평나들목∼평창∼정선∼사북∼고한, 서울∼영동고속도로∼새말나들목∼안흥∼평창∼정선∼사북∼고한
▽먹을거리=고한 생고기전문 낙원회관. 곁들이로 나오는 된장국수도 맛있다.(033-591-1700). 고한시장통의 한우전문 OK식당(033-591-8989).
▽가볼 만한 곳=정암사(淨巖寺). 광원들이 힘들 때마다 찾던 곳. 단아하고 정갈하다. 요란스럽지 않아 좋다. 아늑하고 소박하다. 부처님 정골 사리를 절 뒤편 수마노탑에 모신 곳이라 법당에 불상이 없다.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 법흥사와 함께 5대 적멸보궁의 하나. 천연기념물 열목어 서식지 남방한계지역이기도 하다. 자장율사의 지팡이가 싹을 틔웠다는 주목(1300년)도 있다.
'걷기(트레킹) > 걷기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해안 대진-강구 포구 걷기 (0) | 2010.12.26 |
---|---|
태안 해안길-서산 절길 걷기 (0) | 2010.12.26 |
지리산 둘레길 걷기… 산청 수철∼갈티재 (0) | 2010.12.26 |
초겨울 제주 '유네스코 지질공원 & 흑돼지 미식' 기행 (0) | 2010.12.13 |
서울성곽길 완전정복 <2> (0) | 2010.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