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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꽃 / 변재영

박연서원 2022. 12. 21. 08:10

호박꽃 

              변재영

     

신념의 꽃이 있다. 옥토와 박토를 고집하지 않는다. 논두렁 밭두렁이면 어떠랴. 햇빛 한 줄기 드는 곳이면 쇄석 자갈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뼘의 빈 땅만 허락하면 가나안의 복지인 양 바득바득 덩굴손을 뻗어 꽃을 피운다. 인심 넉넉한 외할머니를 닮은 꽃, 담장 위에 노란 별로 뜨는 꽃이 호박꽃이다.

 

​소낙비 한 줄금 긋고 간 아침, 텃밭을 뒤지던 뒤영벌 한 마리가 나를 시간 저편으로 끌고 간다. 유년 시절, 초가집 일색인 동네에 유일한 기와집이 우리 집이다. 땡감나무에 몸을 숨긴 쓰르라미가 목청을 돋우면 담장 위에는 분칠한 듯 노랗게 핀 호박꽃이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내겐 어머니가 둘이다. 살을 주신 어머니는 내가 일곱 살일 때 병마로 하늘의 별이 되셨고, 지금은 키워주신 새엄마와 다복하게 살고 있다. 내게 어머니란 존재는 포근함도 친숙함도 아니다.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다. 한 분은 영원한 그리움이고, 한 분은 갚을 수 없는 고마움이다.

 

​새엄마는 혼기를 놓친 노처녀였다. 겨우 밥걱정이나 면한 살림에 꼬질꼬질한 강아지 넷이 딸린 홀아비에게 생의 전부를 걸만 했을까. 사람들은 쯧쯧 혀를 찼다.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새엄마는 실한 엉덩이를 빼면 볼품이 없었다. 우묵주묵한 뱃살, 자유분방한 얼굴에 들창코까지 천하의 박색이었다. 근동에서 미인으로 이름난 어머니가 장미라면 새엄마는 어린 내 눈에도 분명 호박꽃이었다.

부드러운 천성까지 호박을 빼닮은 새엄마는 소처럼 일만 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여름은 호박꽃의 계절이다. 이른 봄, 씨앗을 심으면 숨기척을 내기 무섭게 넌출은 가뿐하게 울담을 타고 올라 푸짐한 꽃 잔치를 벌인다. 능글맞게 달달 볶는 한낮의 열기도 개숫물 한 바가지이면 족하다. 이기적인 인간에게 햇순을 무참히 꺾인다 해도 절망하거나 요절하지 않는다. 더 많은 줄기를 뻗어 마디마디 열매를 품는다. 잎을 내고 줄기를 뻗는 옹골찬 기상만은 칠월의 태양 볕보다 뜨겁다.

 

​호박꽃은 집념의 꽃이다. 허공이든 장벽이든 가리지 않는다. 표독스런 탱자나무울타리도 기필코 오르고야마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꽃이다. 황무지에 맨몸을 갈면서도 열매를 맺는 게 호박꽃의 운명이라면 각박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것 또한 사람의 몫이 아닐까. 어쩌면 <성실>이라는 단어는 사람보다는 식물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호박꽃은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시들지 않는 생명의 꽃이요 환상의 꽃이다.

 

​시골 처녀처럼 수수한 호박꽃은 요염한 장미처럼 별난 미색도 백합 같은 유혹의 향도 없다. 누렇게 익은 열매까지 촌부의 둔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이쯤 되니 <호박꽃도 꽃이냐>고 추녀의 대명사로 내몰려 애꿎은 여심만 박박 긁어 놓는다. 옴팡눈이 대세인 요즘, 짝퉁 장미가 소원인 여인들은 멀쩡한 코에 실리콘을 넣고 눈까풀을 찢고 턱을 깎는다. 하지만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되랴. 외모가 능력이라고 믿는 작금의 씁쓸한 세태를 호박꽃에서 읽는다.

 

​호박꽃을 닮은 새엄마는 넉넉한 잎 속에 몸을 숨긴 애호박처럼 속을 드러내려 애쓰지도 않았다. 단명인 아버지가 속도의 바퀴에 치여 비명횡사하자 할머니는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는 생트집으로 새엄마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마음의 생채기에도 피가 나고 진물이 나는 법. 끄덩이라도 잡히는 날이면 새엄마는 뒤란에 있는 우물가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럴 때면 장독대 옆 담장에 핀 호박꽃이 말없이 그녀의 서러운 한숨을 들어주고 있었다.

 

​호박꽃은 그리움의 꽃이다. 그 속에는 서둘러 떠난 내 어머니가 숨어 계신다. 유년시절, 어머니에게 호박꽃은 삶이고 세월이었다. 구수한 호박잎쌈은 단골메뉴다. 여름 별식으로 호박선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입이 호사를 했다.

배가 허출해지면 맵찬 손으로 뚝딱 만들어주던 얼큰한 애호박된장찌개며 고소한 부침개, 호박풀떼기의 별미까지 그 부드러운 맛이 지금도 호박꽃에 묻어있다. 꽃샘에 분탕치는 꿀벌 구금하여 흔들고, 밤이면 반딧불이 가두어 초롱 밝히던 꼬마도 어느새 은발이 성성하다. 별난 계모슬하에 콩쥐로 자란 새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도 아기를 갖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재혼도 어린 우리 사남매를 보고서야 결정했다는 그 따스한 마음도 지금은 안다. 곱게 늙어가는 새엄마를 통해 호박꽃의 의미를 되새긴다. 결코 외모는 삶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사람도 청둥호박처럼 당당하게 늙어간다면 쇠락하는 시간에도 행복이 스며있다고 늘그막이 진실 하나를 보탠다.

 

​천대받는 꽃과는 달리 호박의 삶은 고귀하다.

늙어 약이 되고 떡이 되는 게 호박이지 않는가.

황금빛 꽃에 황금빛 열매, 어쩌면 호박에 얽인 전설처럼 황금 종을 만들려는 스님의 넋인지도 모른다. 잘 익은 청둥호박을 열어보라. 담홍색 속살에 알알이 박힌 생명들, 그것은 마치 금붙이 패물을 겹겹이 쟁여놓은 듯 경이롭다. 좌르르 쏟아지는 호박씨를 연주에 꿰면 단발머리 순이, 옥이가 걸고 다니던 유백색 비취 목걸이가 아니겠는가. 어디 금은보화가 흥부의 박속에만 있으랴.

 

​조물주의 섭리 또한 얼마나 지혜로우신가.

꽃이 화려하거나 좋은 향을 가지면 작은 열매를 주고, 꽃이 보잘 것 없으면 크고 넉넉한 열매를 주셨다.

꽃도 열매도 훌륭하다면 금상첨화지만 하찮은 꽃에 열매마저 시원찮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래서일까. 탐스런 오곡도 꽃은 별로다. 벼꽃이 그렇고 꽃콩이 그렇다. 사람들은 장미를 꽃의 여왕으로 입줄에 올리지만 그 열매는 얼마나 초라한가.

 

​꽃을 엑스레이로 촬영하여 연구하는 어느 의학자의 말을 빌리면 엑스레이에 잡힌 호박꽃의 아름다움은 장미보다 훨씬 더 빼어나다고 한다. 내면의 미를 관조했음이리라.

들녘에 황금 알을 낳는 호박꽃에 주목해보라. 연인과의 해후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스르르 풀리고 따스한 훈김이 심장에 별로 박힐 것이다.

 

​몇 덩이의 호박이 대청마루에서 가부좌를 틀고 면벽 수행중이다. 마지막 한 점의 풋내까지 털어내는 숙성의 시간이리라. 나도 이처럼 곱게 익을 수 있을까……. 사람에게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설익은 패기만 믿고 대책 없이 세상에 부딪히다간 좌충우돌로 겉돌기 마련이다. 냉철한 담금질로 자숙의 시간을 거쳐야 어떤 사람과도 화합할 수 있다. 손톱만한 작은 씨앗이 모진 풍상을 이겨내고 바위만 한 결실을 보기까지의 지난한 시간이 곧 내가 달려온 인생역전이 아닐까.

 

​호박꽃의 멋은 누가 뭐래도 진솔함이다.

가식이 없는 꽃은 늘 훤칠한 목을 빼어 당당하게 하늘에 시선을 모은다. 슬픔과 기쁨, 미움과 고마움도 한 심장에서 일색으로 피우는 꽃이 아니던가.

<포용, 관대함>이라는 꽃말처럼 순박한 외모에서부터 믿음과 넉넉함이 묻어난다. 내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속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이름 없는 풀꽃도 사랑한 사람이라고, 세상의 비웃음이 주는 고통까지 가슴에 안은 사람이라고……."

 

​빗물에 세수한 호박꽃을 다시 바라본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나이가 들면 외모에도 자유로워지는 걸까.

나잇살이 붙어 두꺼비상이 된 내게 "호박덩이 같다"라고 툭툭 던지는 아내의 퉁마저 칭찬으로 들리니 나도 하릴없이 늙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