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한 사랑 - 맹영숙

황순원 문학촌 / 소나기마을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 대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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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한 사랑》

  -맹영숙 / 대구 수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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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생신날이다. 

다섯 자녀가 동생 집에 오랜만에 다 모였다. 

어머니 방 창이 열려 있었다. 밤바람이 찰 것 같아 창문을 닫으려고 하니 어머니가 닫지 말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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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되면 남준씨가 저 전깃줄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온다." 아흔을 앞둔 어머니는 남준씨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알츠하이머 증세로 어머니의 모든 기억은 점점 엉켜버렸다. 그런데 남준씨의 이름은 물론이고 한국전력에 다녔다는 것도 또렷이 기억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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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준씨는 나 때문에 결혼도 못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신다.

 

창문 선반에 돈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서 치우려고 하자 손사래치며 말리신다. 

"그 사람 옷차림이 하도 허술해서 옷 한 벌 사 입으라고 놔두었으니 그대로 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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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준씨는 어머니의 첫사랑 남자의 이름이다.

 

장독대에 붉게 피었다가 입 앙다문 분꽃 같은 사랑, 제대로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가슴 아픈 이름이다.

 

이모에게서 들은 어머니 박옥희여사와 남준씨의 사랑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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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는 진주에서 포목점을 하는 집 둘째 딸로 백목련을 닮은 참한 처자였다.

 

길고 가녀린 손끝으로 십자수도 잘 놓았고, 음식 솜씨도 유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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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는 호주인 의료 선교사가 설립한 '베돈 병원'의 간호사였다. 

병원에서 기독교를 접하게되어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 의사들에게도 환자들에게도 인기 좋은 간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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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준"은 옥희 친구 "미자"의 작은 오빠였다. 

한전에 근무하였고 외모가 준수하고 겸허한 성품을 지닌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옥희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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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걸어다니는 것조차도 아까운 사람이라고 동생 미자에게 종종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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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돈 병원에 환자가 늘어나자 옥희도 바빴다. 새벽별을 보고 출근하고 밤별을 머리에 이고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희부연 안개가 낀 새벽녘에 집을 나서면 '따르릉, 따르릉' 자전거 방울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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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미터 간격을 두고 남준의 자전거는 옥희의 새벽길을 밝혀주었다. 병원 정문에 이르면 자전거에서 내려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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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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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퇴근길에도 남준은 병원 근처에서 기다렸다. 새벽처럼 옥희의 밤길을 자전거 불빛으로 안전하게 동행하며 밤 인사를 하고 돌아서곤 했다.

 

소문은 바람처럼 빠르게 퍼졌다.

딸이 연애질한다는 말이 어머니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집안 망신이라며 노발대발 불호령이 떨어졌다.

 

옥희네 부모님은 미자 집안이 탐탁지 않았다. 큰 아들이 좌익사상에 물들어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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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는 병원 출근도 못하고 사랑채에 갇히고 말았다. 남준은 몇 날 며칠을 옥희 집 주위를 비를 맞고 배회하다 독감에 걸리고 만다. 사랑을 잃은 절망은 폐렴으로 전이되었다. 고열로 사경을 헤매는 순간에도 옥희를 보고싶어 했다.

 

미자로부터 남준의 소식을 들은 옥희는 문고리를 잡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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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고 방문 문고리에 자물쇠가 잠겨 나갈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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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서 남준은 옥희를 부르며,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마지막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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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을 앞세운 상여가 하얀 종이꽃을 소복이 얹고 옥희집 앞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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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는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세상을 한탄하며 몸부림쳤다.

 

그날 상여를 구경나온 사람들은 남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몹쓸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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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사십구제를 지낸 뒤 미자가 옥희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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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숨지고 난 뒤 왼쪽 와이샤쓰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이 나왔다며 내놓았다. 옥희의 사진이었다.

 

알고 보니 막내 동생을 통해 얻은 사진을 마지막 가는 날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옥희는 사진을 잡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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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타까운 사람을 가슴에 묻었다. 지금은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는 남녀 간의 만남은 당사자보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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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박옥희여사 역시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가슴에 묻어둔 채 부모가 정해준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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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여년 가정에 충실했다. 남편 내조에 소홀함 없는 현명한 아내였다.

오남매 자식들 알뜰살뜰 키워내셨다.

 

자식들에게 정해진 사랑을 강요하지도 않고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그 덕분에 나 역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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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살며 말수가 적던 어머니였다.

 

알츠하이머 병이 발병하면서 한꺼번에 많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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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줄을 놓으실 때면 마치 일인다역을 하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 같았다.

 

그 드라마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남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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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엉켜버린 기억속에서도 그에 대한 기억만 아주 또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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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가슴에 꼭꼭 감춰둔 까만 분꽃 씨앗 같은 첫사랑이 어머니 흐린 정신 속에서 다시 환하게 빛을 발하며 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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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 꽃이 향기를 발하며 함박으로 피는 주일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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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정신이 여느 때보다 맑았다. 

예배 참석을 위해 단아하게 몸단장을 하고 며느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느리가 나와보니 어머니는 교회 가방을 안고 거실 소파에 잠든 듯 눈을 감고 앉아계셨다. 어깨를 살짝 흔들었더니 스르르 옆으로 쓰러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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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날에 잠자듯 가고싶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염원이 당신의 기도로써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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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어린 아이같은 눈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평안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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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가시는 그 길에 남준씨가 자전거의 방울소리를 울리며 길마중 나오지 않았을까? 자전거를 끌며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