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 천재 피아니스트의 수상한 수상소감 ]
졌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하던데 솔직히 부러웠다.
18세에 세계적인 음악 콩쿠르 밴 클라이번에서 최연소 1위를 기록한 피아니스트 얘기다.
흑백의 건반 사이를 물 흐르듯 가르는 화려한 연주 실력 때문이 아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전설의 연주를 마친 뒤의 소감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피아노 하고만 사는 게 꿈인데,
그렇게 되면 수입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고 있다.”
이 무슨 100세 철학자 같은 말인가.
‘세계 제패’니
‘금메달 수상’이니 하는 세상의 언어가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이어지는 말엔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한국 나이로 내년에 성인이 되는데,
그 전에
내 음악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콩쿠르에 나왔다.
음악 앞에 모두가 학생이고,
내가 어느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차원’의 연주 실력을 뛰어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속마음을 내놓은 임윤찬은 2004년생.
그의 말엔 미래 세대의 코드가 담긴다.
기성세대가
순위 매기기를 위해 만들어진 콩쿠르는 ‘나를 확인하기 위한 시간’으로,
목에 걸어준 금메달은
‘쇳덩어리’로 바뀐다.
어쩌면 임윤찬의 말에는
이전까지의 세대가
젊을 때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본질이 들어 있다.
행복의 조건을 먼저 깨달은
세대의 통찰이 녹아 있다.
돌아보면 놀라울 것도 없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잠시 떠올려보자.
양궁팀 동료에게
‘쫄지 말고 그냥 대충 쏴’(2001년생 안산)라는 의연함,
높이뛰기로 자신의 기록을 깬 뒤 메달은 못 땄지만
‘후회 없는 경기가 맞고,
진짜 저는 행복하다’(1996년생 우상혁)는 당당함,
자유형 100m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뒤
‘물속에서 행복했다’(2003년생 황선우)는 여유로움을 우리는 이미 봤다.
일상에서 별것 아닌 것에 조급해하고,
별것 아닌 말에 얼굴 붉히고,
별것 아닌 것에 우울해하던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세대의 말들에
흠칫 놀라곤 했다.
한국 경제가 우상향 그래프를 그릴 때도 우리의 행복지수는 늘 바닥에서 헤맸다.
‘엄친아’ ‘아친딸’ ‘금수저’ ‘흙수저’처럼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굳이 스스로를 열등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행복지수를 두고도
매년 상위권 국가를 ‘부러워하며’
그들은 왜 행복할까를 분석하느라 여념 없었다.
건강한 부러움은
삶을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모두가 같은 기준에서
행복의 기준을 찾는다는 건
애초에 환상에 가깝다.
Z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어떻게 비교의 지옥에서
‘깨달음의 세대’가 됐을까.
어떻게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 안에서
그토록 행복할 수 있는 세대가 됐을까.
Z세대는 디지털 원주민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전 세계의 문화, 정보와
다층적으로 연결됐다.
내가 몰랐던 세계가
어느 순간 드넓게 확장되고,
때론 내가 알던 세계가
그저 작은 먼지일 수 있음을
유년기부터 체화한 이들이다.
누가 정한 건지 모를 기준에 의한
‘주류의 세계’에서
아등바등 경쟁을 벌이는
어른들의 모습이
이들 눈에는
별 의미 없는 삶처럼 보였을 테다.
주류 근처에서 맴돌며
인정받길 기다리느니,
우리만의 리그를 만드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는 걸 눈치챘을 테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느니,
안 되면 되는 거 하는 게 현명하고, 일찌감치
내 안의 나와 싸우며
내가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근원적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터득했을 테다.
본래 인간은
부모로부터 형성된 유년기의 1차 자아와 청소년기의 2차 자아를 갖고 성장한다. 독립된 인간이 되기 위해
이 두 가지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아를 깨부수고 나와야 하는데,
사실 이전까지의 세대는
대부분 중년이 될 때까지 그러지 못했다.
부모가 만든 기준,
학교가 만든 경쟁,
사회가 만든 잣대에
적당히 맞춰가며
그게 바로 나의 모습인 것처럼 살았다.
Z세대는
사회화 과정을 디지털 세상에서 겪었다. 부모와 또래집단을 넘어서
더 광활한 세상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각자의 세계를 구축했다.
하버드대의 인생 성장 보고서
《행복의 조건》은
사랑하는 사람,
내일의 희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행복의 조건으로 꼽는다.
이타적인 삶,
예술적 창조로 갈등을 해소하는 승화,
밝은 면만 보려고 인내하는 억제,
지나치게 심각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유머 등
네 가지 심리적 방어기제가
행복의 조건을 구체화하는 전제라고도 말한다.
이 결론을 얻는 데까지
하버드대 연구진은 한 세기를 보냈다.
Z세대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불과 10년 만에
이것을 온몸으로 깨우쳤다.
아, 부럽다.
( 김 보 라 / 힌국경제 문화부차장 )
한계 없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친구들 하니깐 시작한 피아노
°천재적 재능에도 쉼 없이 연습
°국제콩쿠르 최연소 우승 영예
°더 큰 세계무대에서 건승 기원
3년 전 공연담당기자 시절 겨울, 세종문화회관 구내 카페에서 열다섯 살 소년 임윤찬을 인터뷰했다. 노트북을 닫으며 ‘언젠가 후일담을 쓸지도 모르겠구나’ 했는데 이처럼 그날이 빨리 올지 몰랐다. 주문대 앞에서 무심결에 “무슨 커피?” 하고 물었다가 딸기요거트를 시켜 주며 앳된 소년 아티스트 나이를 실감했다.
당시 임윤찬은 국내 클래식 무대에 갑자기 등장한 샛별이었다. 인생 첫 출전 무대인 윤이상국제콩쿠르에서 3관왕이 됐다. 1위는 물론, 관객이 뽑은 인기상까지 탔을 정도로 심사위원단과 객석 모두 인정한 연주를 선보였다. 음대생이 대부분인 성인 국제콩쿠르에서 중학생이 만든 이변이었다.
그래서 만난 임윤찬과 한 시간 남짓한 인터뷰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건 극적인 성장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우연과 인연 속에 제 길을 스스로 찾아갔다. 음악이 마치 그를 선택한 것 같았다.
일곱 살에 또래 친구들이 다 학원에 가니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피아노를 시작했다는 임윤찬은 ‘왜 피아노였느냐’ 는 물음에 “많은 생각 없이 상가 안에 피아노 학원이 있어서”라고 답했다. 동석한 그의 모친이 단답형인 아들을 대신해 기억을 보태 줬다. “저도 악기를 하나도 못하거든요. 그래서 (윤찬이가) 악기를 한 가지 다루면 정서적으로도 좋겠다 싶어 여섯 살 때 처음 학원에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원장 선생님이 ‘남자애들은 여섯 살이면 너무 빠르고 산만해서 집중 못하니 일곱 살 때 오라’고 했어요. 일곱 살 때 갔더니 다시 ‘초등학교 들어가면 오라’고, ‘남자애들은 좀 힘들다’ 했는데 찬이가 ‘그냥 다니고 싶다’고 해서 그때부터 시작하게 됐어요.”
그렇게 피아노를 시작한 임윤찬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비로소 우리나라 음악 영재가 결집하는 예술의전당 ‘음악영재아카데미’에서 본격적인 피아노 교육을 받게 된다. 누가 권한 게 아니라 임윤찬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거기가 어디죠?”라던 학원 선생님도, 엄마도 영재아카데미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 임윤찬은 영재아카데미를 다니는 또래 학생이 나온 TV 영상을 보고 ‘나도 들어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단다. 원래 임윤찬은 작곡을 배우고 싶어 했다. 임군 모친은 “윤찬이가 그곳에 가서 작곡을 공부하고 싶다는데 제 생각엔 작곡을 하려면 피아노를 쳐야 하지 않을까 해서 피아노로 접수했다”고 말했다.
당장 ‘난다 긴다’ 하는 영재들이 모인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다. 임윤찬은 피아노 연주의 기본 기교인 페달링은커녕 메트로놈을 본 적도 없을 정도로 기초가 약했다. 하지만 소년 내면의 음악성을 발견한 영재아카데미는 임윤찬을 선발했다. 이후 임윤찬은 영재아카데미를 거쳐 예원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운영하는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입학하면서 물 만난 솜처럼 클래식을 자신의 내면으로 흡수해 단단히 다졌다. 초등학생 땐 네 시간, 중학생 때부턴 예닐곱 시간 쉼 없이 매일 연습했다. 모두 경기 시흥과 서울을 오가는 머나먼 통학길이었다. 덕분에 인터뷰 당시 콘서트를 앞둔 하루 일과를 임윤찬은 “학교 갔다 와서 연습하면 새벽 2∼3시인데, 잠들었다가 새벽 6시 반 정도에 일어나서 학교 다녀온 후 다시 연습을 한다”고 설명했다.
어린 나이에도 이처럼 심지 굳었던 소년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꼭 들어 봐야겠다던 다짐은 인터뷰 1년 후였던 2020년 11월 열린 독주회에서 이루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로 예열한 후 50분에 걸쳐 듣기도 쉽지 않았던 리스트의 ‘순례의 해 2년, 이탈리아’ 전곡을 선보였다. 여러 음악관계자를 볼 수 있었던 이날은 공연장 분위기부터 여느 때와 달랐다. 막간에 만난 음악계 인사는 “잘 치는 아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디 한번 실력을 보자’는 이로 객석이 찬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눈에 불을 켜고’ 앉아 있는 객석에서 나온 관전평은 다음과 같았다. “마치 지옥을 본 사람처럼 피아노 건반으로 지옥 불을 일으켰다.”(최은규 음악평론가)
이제 임윤찬은 밴 클라이번 국제콩쿠르 우승으로 국내를 벗어나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게 됐다. 청년이 된 피아니스트는 “마음이 굉장히 무겁고 심란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크다”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3년 전 인터뷰에서 “만약 큰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이제 시즌마다 독주 프로그램을 바꿔야 하는데 새로운 레퍼토리가 없으면 하락세로 가게 된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던 천재 피아니스트의 건승을 기원한다.
( 박성준 / 세계일보 문화체육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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